키르홀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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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르홀름 전투는 1605년 9월 2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과 스웨덴군이 현재 라트비아의 살라스필스 근처에서 벌인 전투이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의 지휘 아래, 스웨덴군을 기병대의 돌격과 유인 전술로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막대한 피해를 입힌 반면, 승리 후 자금 부족으로 인해 전세를 완전히 활용하지 못했다. 키르홀름 전투의 승리는 호드키에비치의 군사적 역량을 유럽에 알렸지만, 정치적, 경제적 문제로 인해 전략적 이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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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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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명칭 | 키르홀름 전투 |
날짜 | 1605년 9월 27일 (구력 9월 17일) |
장소 | 키르홀름, 현재의 라트비아 살라스필스 |
결과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승리 |
관련 전쟁 | 폴란드-스웨덴 전쟁 (1600–1611)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쿠를란트-젬갈레 공국 |
교전국 2 | 스웨덴 |
지휘관 및 병력 |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휘관 | 얀 카롤 호트키에비치 |
스웨덴 지휘관 | 칼 9세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병력 | 보병 1,000명 기병 2,600명 대포 5문 |
스웨덴 병력 | 기병 2,500명 보병 8,368명 대포 11문 |
피해 규모 |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피해 | 전사 100명 부상 200명 |
스웨덴 피해 | 전사 및 부상 5,500–8,000명 |
2. 배경
1605년 9월 2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과 스웨덴군은 키르홀름 (현재 라트비아의 살라스필스, 리가에서 남동쪽으로 18km) 근처에서 만났다. 스웨덴 국왕 칼 9세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었지만, 훈련도와 사기가 높았다.
스웨덴군은 10,868명의 병력[1]과 11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뤼네부르크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백작 요아힘 프리드리히[1] 등 서유럽 사령관들과 수천 명의 독일 및 네덜란드 용병, 심지어 수백 명의 스코틀랜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약 1,000명의 보병과 2,600명의 기병[1], 그리고 5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 왕국이 지원을 거부[2]하는 상황에서, 호드키에비치는 자신의 재산으로 군대의 봉급을 지불하겠다고 약속[2]하여 리투아니아에서 징집병을 모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휴식을 잘 취한 상태였고, 특히 날개 기병은 훌륭하게 훈련된 중기병이었다. 그러나 스웨덴 기병대는 훈련이 부족하고, 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했으며, 말의 질도 떨어졌고, 폭우 속에서 10km가 넘는 야간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소수의 리투아니아 타타르족과 코사크 용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주로 정찰에 사용되었다.
2. 1. 국제 정세
1605년 9월 2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과 스웨덴군은 키르홀름 (현재 라트비아의 살라스필스, 리가에서 남동쪽으로 18km) 근처에서 만났다. 스웨덴 국왕 칼 9세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10,868명[1]과 11문의 대포로 구성되었다. 스웨덴군은 뤼네부르크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백작 요아힘 프리드리히[1]를 포함했으며, 수천 명의 독일 및 네덜란드 용병, 심지어 수백 명의 스코틀랜드인도 포함되었다.폴란드 왕국은 방어 자금 모금과 병력 파견을 거부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만 했다.[2] 리투아니아 대(大) 헤트만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이끄는 군대는 지쳐 굶주리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존경했다.[2]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군대의 봉급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결과 리투아니아에서 징집병이 유입되었다. 호드키에비치의 지휘하에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약 1,000명의 보병과 2,600명의 기병[1]으로 구성되었지만, 대포는 5문뿐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휴식을 잘 취했으며, 기병대는 대부분 훌륭하게 훈련된 날개 기병 (창으로 무장한 중기병)으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스웨덴 기병대는 훈련이 덜 되어 있었고, 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했으며, 말의 질도 떨어졌고, 폭우 속에서 10km가 넘는 야간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소수의 리투아니아 타타르족과 코사크 용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주로 정찰에 사용되었다.
2. 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상황
폴란드 왕국은 방어 자금 모금과 병력 파견을 거부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만 했다.[1] 리투아니아 대(大) 헤트만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이끄는 군대는 지쳐 굶주리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존경했다.[1]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군대의 봉급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결과 리투아니아에서 징집병이 유입되었다. 호드키에비치의 지휘하에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약 1,000명의 보병과 2,6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지만, 대포는 5문뿐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휴식을 잘 취했으며, 기병대는 대부분 훌륭하게 훈련된 날개 기병(창으로 무장한 중기병)으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스웨덴 기병대는 훈련이 덜 되어 있었고, 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했으며, 말의 질도 떨어졌고, 폭우 속에서 10km가 넘는 야간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소수의 리투아니아 타타르족과 코사크 용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주로 정찰에 사용되었다.2. 3. 스웨덴의 상황
스웨덴 국왕 칼 9세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10,868명[1]과 11문의 대포로 구성되었다. 스웨덴군은 뤼네부르크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백작 요아힘 프리드리히[1]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독일 및 네덜란드 용병과 수백 명의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되었다.반면에 스웨덴 기병대는 훈련이 덜 되어 있었고, 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했으며, 말의 질도 떨어졌고, 폭우 속에서 10km가 넘는 야간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2]
3. 전투
코드키에비치는 코사크 기병대를 보내 스웨덴군을 유인하려 했다. 병력이 더 적었던 코드키에비치는 후퇴하는 척하며 스웨덴군을 높은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페인트 전술을 사용했다.[1] 칼 9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후퇴한다고 판단하고 경사면 아래로 진격했다. 이것이 바로 코드키에비치가 기다리던 기회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쿠를란트 총병으로 사격을 가하는 한편, 빈센티 보이나의 후사르가 스웨덴 군대로 돌격하여 보병대에 혼란을 야기했다.[1]
본격적인 전투는 약 1,000명의 후사르가 스웨덴군 우익에 돌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만스펠트의 라이터가 궤멸되고 스웨덴군 보병 제3열이 후퇴했다.[1] 동시에 스웨덴군 좌익에서는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휘하의 650명의 후사르가 돌격했다. 칼 9세가 예비대를 투입하자, 코드키에비츠도 자신의 예비대를 투입했다. 스웨덴 기병대는 패주했고, 도주 과정에서 많은 자국 보병대를 혼란에 빠뜨렸다.[1]
30분 이내에 스웨덴 기병대는 양 측면에서 완전히 후퇴했고, 중앙의 보병은 후사르와 코드키에비츠 보병의 화력에 노출되었다. 스웨덴의 패배는 처참했다.[1] 칼 9세의 군대는 최소 5,000명이 전사하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다.[1]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약 10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지만, 후사르는 훈련된 전투마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1]
스웨덴군의 손실 대부분은 리가로 돌아가는 길에 빽빽한 숲과 늪, 그리고 다우가바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3. 1. 양측 군대의 구성 및 배치
스웨덴 국왕 칼 9세의 군대는 10,868명[1]과 11문의 대포로 구성되어 수적으로 우세했다. 스웨덴군은 뤼네부르크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백작 요아힘 프리드리히[1] 등 두 명의 서유럽 사령관이 이끌었으며, 수천 명의 독일 및 네덜란드 용병과 수백 명의 스코틀랜드인도 포함되었다.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약 1,000명의 보병과 2,600명의 기병[1]으로 구성되었고, 대포는 5문뿐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휴식을 잘 취했으며, 기병대는 대부분 훌륭하게 훈련된 날개 기병(창으로 무장한 중기병)이었다.[2] 반면 스웨덴 기병대는 훈련이 덜 되어 있었고, 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했으며, 말의 질도 떨어졌고, 폭우 속에서 10km가 넘는 야간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소수의 리투아니아 타타르족과 코사크 용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주로 정찰에 사용되었다.
스웨덴군은 체커보드 대형으로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잘 간격을 둔 7~8개의 독립된 블록으로 구성된 보병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교차하는 사격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 측면 기동은 스웨덴과 독일 기병이 담당했고, 대포는 기병 앞에 배치되었다. 칼 9세의 부대는 능선의 꼭대기에 4개의 열로 편성되었다. 첫 번째 열은 4개 보병 대대, 두 번째 열은 기병, 세 번째 열은 6개 보병 대대, 네 번째 열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1] 보병 대대는 중앙에 창병, 가장자리에 사수, 그리고 기병이 통과할 수 있도록 사각형 형태로 30 x 30으로 편성되었다.[1]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는 군대를 전통적인 폴란드식 전투 대형, 즉 소위 "구 폴란드 전술"로 배치했다. 좌익은 토마시 동브로바가 지휘하여 상당히 강력했고, 우익은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휘하의 소수 후사르로 구성되었으며, 중앙에는 헤트만 호드키에비치의 부관 빈센티 보이나가 이끄는 300명의 후사르 부대와 쿠를란트 공작 프리드리히 케틀러가 보낸 강력한 라이터 부대가 포함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보병은 대부분 헝가리식 하이두크로 무장하여 중앙에 배치되었다. 약 280명의 후사르가 테오도르 라츠키 휘하의 예비대로 남겨졌다.
3. 2. 전투 경과
코드키에비치는 코사크 기병대를 이용하여 후퇴하는 척 위장했고, 이에 속은 스웨덴 군은 폴란드 군의 강력한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취했던 수비적인 배치를 풀고 진격을 시작했다.[1]초반에는 폴란드 군의 유인 전술에 스웨덴 군 주력 부대가 폴란드 군 진영 깊숙이 진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스웨덴 군 좌익의 폴란드 윙드 후사르가 스웨덴 군 우익을 돌파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스웨덴 군 우익은 순식간에 무너졌다.[1]
폴란드 군 우익은 초반에 스웨덴 군을 밀어붙였으나, 병력 부족과 습지라는 지형적 불리함 때문에 스웨덴 군 좌익에 밀렸다. 하지만 이후 투입된 폴란드 윙드 후사르 예비대가 스웨덴 좌익 기병대를 공격하여 중앙의 스웨덴 보병대로 밀어붙이면서 스웨덴 군의 대열은 붕괴되었다. 전투 시작 20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다.[1]
약 1,000명의 후사르가 스웨덴군 우익에 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의 돌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만스필드의 라이터가 궤멸되고 스웨덴군 보병 제3열이 후퇴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동시에 스웨덴군 좌익에서는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휘하의 650명의 후사르가 돌격했다. 칼 9세가 700명의 기병대로 예비대를 투입한 후, 코드키에비츠는 그의 예비대를 투입했다. 스웨덴 기병대 전체가 마침내 패주했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자국 보병대를 혼란에 빠뜨려 후사르의 돌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30분 이내에 스웨덴 기병대는 양 측면에서 완전히 후퇴하여 중앙의 보병을 후사르와 코드키에비츠의 보병의 화력에 노출시켰다. 스웨덴의 패배는 처참하고 완전했다.
결국 스웨덴 군 주력은 포위되었고, 폴란드 군은 이들을 거의 학살하다시피 '진압'했다. 이후 추격전에서 스웨덴 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일부 스웨덴 군은 에스토니아까지 도망쳤다. 스웨덴 군 총 11,000명 중 5,000~7,000명이 사망했고, 폴란드 군의 사망 및 부상자는 1,000명 미만이었다.[1]
칼 9세의 군대는 최소 5,000명이 전사하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최대 7,600~8,000명이 전사, 포로, 분산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손실은 약 100명이 사망했고 200명이 부상당했지만, 특히 후사르는 훈련된 전투마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이 시기의 모든 결정적인 승리와 마찬가지로, 스웨덴군의 손실 대부분은 리가로 돌아가는 길에 빽빽한 숲과 늪으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 후퇴 중에 발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우가바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거의 봐주지 않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사상자가 적었던 이유는 승리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후사르의 돌격 동안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말이었으며, 기수는 말의 몸과 머리에 의해 크게 보호받았다.
3. 3. 전투 결과
스웨덴 군은 폴란드 기병의 강력함을 우려하여 극단적인 수비형 배치를 취했다. 그러나 코드키에비츠는 코사크 기병대를 이용하여 후퇴하는 척 위장했고, 스웨덴 군은 이 미끼를 물어 진격했다.초반에는 폴란드 군의 유인 전술에 말려들었으나, 이후 폴란드 윙드 후사르가 스웨덴 군의 우익을 돌파하면서 스웨덴 군 우익은 순식간에 밀려났다. 폴란드 군 우익은 초반에 스웨덴 군을 밀어붙였지만, 숫적 열세와 습지라는 지형 때문에 스웨덴 군 좌익에 밀렸다. 그러나 투입된 폴란드 윙드 후사르 예비대가 스웨덴 좌익 기병대를 공격하여 스웨덴 군 대열을 붕괴시켰다. 전투 개시 20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다.
결국 스웨덴 군 주력은 포위되었고, 폴란드 군은 이들을 거의 학살하며 '진압'했다. 추격전으로 인해 스웨덴 군에서는 수천여 명의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일부 스웨덴 군은 에스토니아까지 도망갔다. 스웨덴 군 총 11,000명 중 5,000~7,000명이 사망했고, 폴란드 군의 사망 및 부상자는 1,000명 미만이었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코드키에비츠는 전 유럽의 가톨릭 국가와 오스만 제국, 이란의 사파비 왕조에게서까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은 지그문트 3세 바사 국왕과의 마찰 때문에 전비 지출을 거부하여, 이 전투는 폴란드 군의 '전술적 대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에도 코드키에비츠는 스웨덴의 침입을 여러 번 격퇴하였으며,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4. 전투의 영향 및 의의
키르홀름 전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그 결과를 완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 헤트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는 뛰어난 전술로 승리했으나, 폴란드 의회(Sejm)는 국왕과의 갈등으로 전비 지출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 군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군수 물자를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 추가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스웨덴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리가 포위를 풀고 철수해야 했으며, 북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상실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시 재정 문제와 병력 손실로 인해 승리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결국 1611년 휴전이 체결되었으나, 1617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1621년 구스타브 아돌프가 리가를 점령하면서 스웨덴은 키르홀름에서의 패배를 어느 정도 만회하게 되었다.[1]
4. 1. 전술적 의의
키르홀름 전투에서 스웨덴 군은 폴란드의 강력한 기병에 맞서 극단적인 수비형 배치를 선택했다. 그러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는 코사크 기병대를 이용하여 스웨덴 군을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스웨덴 군은 폴란드 군의 유인 전술에 속아 진격했고, 이로 인해 폴란드 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1]초반에는 폴란드 군의 윙드 후사르가 스웨덴 군의 우익을 돌파하며 우위를 점했다. 비록 폴란드 군 우익은 스웨덴 군 좌익에 밀렸지만, 예비대로 투입된 윙드 후사르가 스웨덴 군 좌익 기병대를 공격하여 스웨덴 군의 대열을 무너뜨렸다. 전투 시작 20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다.[1]
스웨덴 군 주력은 포위되어 섬멸되었고, 추격전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스웨덴 군은 11,000명 중 5,000~7,000명이 사망한 반면, 폴란드 군의 피해는 1,000명 미만이었다.[1]
이 승리로 코드키에비츠는 전 유럽의 가톨릭 국가와 오스만 제국, 이란의 사파비 왕조로부터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폴란드 의회(Sejm)는 지그문트 3세 바사와의 갈등으로 전비 지출을 거부하여, 이 전투는 폴란드의 '전술적 대승'에 그치고 말았다.[1]
이후에도 코드키에비츠는 스웨덴의 침입을 여러 차례 격퇴하고, 러시아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1]
4. 2. 전략적, 정치적 영향
헤트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 유럽의 가톨릭 국가와 오스만 제국, 이란의 사파비 왕조에게서 군사적 능력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은 지그문트 3세 바사 국왕과의 마찰로 전비 지출을 거부하여, 이 전투는 폴란드 군의 '전술적 대승'에 그치고 말았다.[1]패배 후, 스웨덴 국왕은 리가 포위를 포기하고 발트해를 건너 스웨덴으로 철수해야 했으며, 북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했다.[1]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군대에 급료를 줄 돈이 없어 승리를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다.[1] 봉급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식량, 말에게 먹일 여물, 군수품을 보충할 수 없었고, 결국 작전은 실패했다.[1] 또한 전투 중 손실된 훈련된 말을 대체하기 어려웠던 점도 작전 실패의 요인 중 하나였다.[1]
결국 1611년에 휴전이 체결되었지만, 1617년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1] 1621년, 구스타브 아돌프가 리가 근처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하면서 키르홀름 전투의 패배를 설욕했다.[1]
5. 기념
키르홀름 전투는 바르샤바 무명 용사의 묘에 "키르홀름 1605년 9월 27일"이라는 비문과 함께 기념되고 있다.
참조
[1]
문서
당시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은 폴란드의 속국이었다.
[2]
위키백과
Bitwa pod Kircholmem
https://pl.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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