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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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예프 공국은 1130년대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이다. 키이우주, 볼린, 페레야슬라우슈치나 등을 포함하며, 키예프가 수도였다. 몽골의 루스 침공으로 1240년 몽골-타타르에 점령되었고, 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국으로 편입되었다. 1471년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키이우현으로 대체되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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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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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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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키예프 공국 |
통용 명칭 | 키예프 |
상태 | 보호국 |
상태 설명 |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일부 (1243년–1271년)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의 일부 (1271년–1301년) 금장 한국의 속국 (1301년–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일부 (1362년–1471년) |
건국 | 1132년 |
멸망 | 1471년 |
수도 | 키예프 |
종교 | 동방 정교회 |
공용어 | 루스어 |
통화 | 흐리우냐 |
역사 | |
주요 사건 | 바투 칸에 의한 키예프 파괴 |
사건 발생일 | 1240년 |
주요 인물 | 야로폴크 2세 (초대 공) |
재위 기간 | 1132년–1139년 |
주요 인물 (말대 공) | 시메온 올레리코비치 |
재위 기간 (말대 공) | 1454년–1471년 |
소멸 원인 | 시메온 올레리코비치의 사망 |
후계 국가 | 키예프 현 |
상징 | |
문장 종류 | 왼쪽: 볼로디미르 올헤르도비치 키예프 공이 발행한 주화 (1388–1392) 오른쪽: 성 미카엘 모티프가 있는 미상의 공의 주화 (키예프 주화의 일반적인 도안) |
기타 상징 | 서양 문장학의 귀속 문장: 키예프 공국의 문장 (10세기~13세기, 변형) |
언어별 명칭 | |
우크라이나어 | Київське князівство (키이우스케 크냐지우스트보) |
러시아어 | Киевское княжество (키옙스코에 크냐제스트보) |
2. 역사
키예프 루스 시대에 공작 가문은 키예프의 대공위를 차지한 수장의 통치 아래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가문 간 경쟁으로 인해 국가는 분열되었다.[1]
12세기 초, 키예프 루스 지역은 여러 개의 반자치 계승 국가로 분열되었다. 키예프는 국가의 핵심이자 동방 정교회의 키예프 관구장이 있는 영적 생활의 중심지로 남았다.
1132년 므스티슬라프 1세가 사망하면서 반자치 국가들은 사실상 독립했고, 키예프 공국은 별도의 국가로 등장했다.[1] 1150년부터 1180년 사이 비슈호로드, 카니우, 벨고로드 등 여러 도시들이 독립을 추구하면서 키예프 공국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의 등장은 루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블라디미르 및 할리치와 같은 도시로 이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몽골의 루스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키예프는 몽골의 봉신이었던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의 형식적인 종주권 아래 놓였다.[1] 1321년 이르펜 강 전투 이후, 키예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게디미나스의 대상이 되었고, 1362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되었다. 키예프 공국은 1471년까지 존속하다가 키예프 보이보드십으로 전환되었다.[1]
2. 1. 키예프 루스의 분열 (1132년 ~ 1240년)
키예프 루스는 므스티슬라프 1세가 1132년에 사망한 후 여러 개의 반자치 국가들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각 공작 가문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키예프 공국은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로 등장했다.[1]1150년부터 1180년 사이에는 비슈호로드, 카니우, 벨고로드와 같은 많은 도시들이 키예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다. 블라디미르-수зда리 공국과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의 등장은 루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블라디미르 및 할리치와 같은 도시로 이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130년대에 키예프 루스 (대공국)의 봉건제 붕괴가 시작되면서 키예프를 중심으로 키예프 공국이 형성되었다. 키예프 공국의 영토에는 키이우주를 비롯하여 동볼린, 페레야슬라우슈치나가 포함되었으며, 수도는 키예프였다.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카니우, 체르카시, 오스테르, 오브루치, 지토미르, 초르노빌, 모지르와 같은 도시들은 지방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들은 시기에 따라 공국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132년 대공 므스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후, 유리 돌고루키는 수즈달 공국의 공위를 획득하고 페레야슬라우 공국을 노렸다. 체르니히우 공국의 세볼로트 2세는 키예프의 분할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노브고로드 공국도 키예프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강화했으며, 로스토프와 수즈달 영토는 이미 독립해 있었다. 스몰렌스크, 할리치, 폴로츠크, 투로프 지역에는 각각 독자적인 공이 즉위했다. 키예프와 체르니히우 사이에는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동로마 제국, 헝가리 왕국, 베렌데이, 포로베츠 등이 개입했다.
1139년 대공 야로폴크 2세가 사망하고 뱌체슬라프 1세가 즉위했으나, 그의 통치는 7일 만에 끝났다. 체르니히우 공 세볼로트 2세가 뱌체슬라프 1세를 축출하고 키예프 대공위에 올랐다. 키예프 연대기는 세볼로트와 그의 형제에 대해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다. 세볼로트의 치세 동안 키예프는 노브고로드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으며, 1144년부터 1146년까지 할리치 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1146년 세볼로트가 사망한 후, 키예프의 실권은 귀족들에게 넘어갔다. 이후 키예프 공국은 주변 공국 및 왕국과 전쟁을 반복하며, 많은 공들이 공위를 빼앗는 상황이 이어졌다.
몽골의 루스 침공 후기인 1240년, 키예프 공국은 몽골-타타르에 의해 점령되었다. 1243년에는 조치 울루스에 의해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야로슬라프 2세가 공으로 임명되었고, 야로슬라프는 키예프에 대리인을 파견했다. 그의 사후, 그의 대공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키예프 공으로 임명되었다. 1263년 알렉산드르가 사망한 이후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에 의한 키예프 공 세습이 시작되었다.
1362년경 키예프 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에 의해 조치 울루스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공국을 자국의 속국에 편입시켰다. 리투아니아는 루스 공조를 폐지하고 게디미나스 왕조의 공조를 성립시켰으며, 볼로디미르 올게르도비치가 첫 번째 공이 되었다. 볼로디미르는 키예프 공국의 자립성을 확립하려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리투아니아 정부에게 불쾌한 정책이었다.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 (야가일로 올게르도비치)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불만을 표면화했다.
1394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정부는 키예프 공위를 폐지하고, 키예프에 공을 대신하는 리투아니아 대리인을 배치했다. 1440년 현지 봉건 귀족들의 압력으로 키예프 공위가 부활했지만, 1470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1471년 키예프는 보예보다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키예프 공국은 해체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의한 키이우현으로 대체되었다.
2. 2. 몽골의 침입과 종속 (1240년 ~ 1362년)
므스티슬라프 1세가 1132년에 사망한 후, 사실상 독립한 키예프 공국은 별도의 국가로 등장했다.[1] 몽골의 루스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침략 이후, 키예프는 몽골의 봉신이었던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의 형식적인 종주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1]1240년, 키예프 공국은 몽골-타타르에 의해 점령되었다. 1243년에는 조치 울루스에 의해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야로슬라프 2세가 공으로 임명되었고, 야로슬라프는 키예프에 대리인을 파견했다. 그의 사후, 그의 대공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키예프 공으로 임명되었다. 1263년 알렉산드르가 사망한 이후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에 의한 키예프 공 세습이 시작되었다.
1321년 이르펜 강 전투 이후, 키예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게디미나스의 대상이 되었고, 1362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되었다.[1]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는 조치 울루스의 지배에서 키예프 공국을 해방시켰으나, 조치 울루스를 대신하여 키예프를 점령하고 공국을 자국의 속국에 편입시켰다. 이후 루스 공조를 폐지하고, 리투아니아의 게디미나스 왕조의 공조를 성립시켰다.
2. 3.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 (1362년 ~ 1471년)
1362년경 키예프 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에 의해 조치 울루스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조치 울루스를 대신하여 키예프를 점령하고 공국을 자국의 속국에 편입시켰다. 리투아니아는 루스 공조를 폐지하고 게디미나스 왕조의 공조를 성립시켰는데, 그 첫 번째 공은 볼로디미르 올게르도비치였다. 그러나 볼로디미르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키예프 공국의 자립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했고, 이는 리투아니아 정부에게 매우 불쾌한 정책이었다. 특히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야가일로 올게르도비치)가 그 지위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 권세를 떨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그 불만을 표면화했다.[1]1394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정부는 키예프 공위를 폐지하고, 키예프에 공을 대신하는 리투아니아 대리인을 배치했다. 1440년, 현지 봉건 귀족들의 압력으로 키예프 공위가 부활했지만, 1470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키예프에는 보예보다(도지사) M. 호쇼토프가 파견되었으나, 키예프 주민들은 두 번에 걸쳐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471년, 보예보다의 군대에 의해 공격받은 키예프는 함락되었고, 키예프 공국은 완전히 해체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의한 키이우현으로 대체되었다.[1]
3. 지리
키예프 공국은 드네프르 강 양안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북서쪽으로는 폴로츠크 공국, 북동쪽으로는 체르니히우 공국, 서쪽으로는 폴란드, 남서쪽으로는 갈리치아 공국, 남동쪽으로는 쿠만족과 경계를 이루었다. 이후 키예프는 북쪽으로는 분리된 투라우-핀스크 공국, 서쪽으로는 통합된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과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키예프 공국은 할리치-볼히니아 대공국의 남동쪽에 위치했다.[1]
키예프 공국의 중심지는 드니프로 강 우안 지역으로, 과거 폴랴니족과 데레블랴네족의 공국 영토, 페체네그인을 비롯한 포로스야의 여러 영토, 볼로호우 주를 포함했다. 13세기에는 볼히니아의 남은 지역도 병합했다.[1] 반면 드니프로강 좌안 지역에서 키예프 공국의 영토는 적어, 불과 10~15km 정도의 지역을 소유했을 뿐이었다.[1] 남쪽으로는 포로스야 지역을 볼로다레우에서 로데니까지 소유했으며, 그 안에는 유리예우, 토르체시크, 보후슬라우, 코르순과 같은 도시가 포함되었다.[1] 북쪽 영토는 우시 강까지 뻗어 우셰시크, 이스코로스텐, 오우루치, 초르노빌과 같은 도시가 포함되었다.[1] 아마도 그 영토는 슬로베치나 강에서 프리피야트 강까지 뻗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는 키예프와 민스크 군관구 사이에 국경선이 그어진 것으로 보인다.[1] 서쪽 지역에서는 영토가 볼히니아에 달했고, 그 경계는 스루치 강으로 여겨진다.[1] 국경선은 보로호우 주에서 아마도 로스 강과 테테레프 강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련 항목: 로스 강 방어선).[1]
4. 역대 공작
키예프 공국의 역대 공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여러 대공들이 통치하였다. 몽골 침입 이후에는 자체적인 통치자가 없이 총독(보이보드)이 통치하기도 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올샨스키 가문과 올레우코비치 가문의 공작들이 통치하였다. 1471년 시메온 올레우코비치의 통치를 마지막으로 키예프 공국은 키예프 보예보드로 전환되었다.
4. 1. 키예프 루스 시대
Ки́евская Русь|키예프 루스ru 시대의 키예프 공국은 여러 대공들이 통치하였다. 다음은 키예프 루스 시대의 키예프 대공 목록이다.재위 기간 | 이름 |
---|---|
1132년~1139년 | 야로폴크 2세 블라디미로비치 |
1139년 | 뱌체슬라프 1세 블라디미로비치 |
1139년~1146년 | 세볼로트 2세 올고비치 |
1146년 | 이고르 2세 올고비치 |
1146년~1149년 | 이재슬라프 2세 므스티슬라비치 |
1149년~1151년 | 유리 돌고루키 |
1151년~1154년 | 뱌체슬라프 1세 블라디미로비치 & 이재슬라프 2세 므스티슬라비치 (공동 통치) |
1154년 | 로스티슬라프 1세 므스티슬라비치 |
1154년~1155년 | 이재슬라프 3세 다비도비치 |
1155년~1157년 | 유리 돌고루키 (2차 재임) |
1157년~1158년 | 이재슬라프 3세 다비도비치 (2차 재임) |
1159년~1162년 | 로스티슬라프 1세 므스티슬라비치 (2차 재임) |
1162년 | 이재슬라프 3세 다비도비치 (3차 재임) |
1162년~1167년 | 로스티슬라프 1세 므스티슬라비치 (3차 재임) |
1167년 | 블라디미르 3세 므스티슬라비치 |
1167년~1169년 | 므스티슬라프 2세 이재슬라비치 |
1169년 | 글레프 유리예비치 |
1169년~1170년 | 므스티슬라프 2세 이재슬라비치 (2차 재임) |
1170년~1171년 | 글레프 유리예비치 (2차 재임) |
1171년 | 블라디미르 3세 므스티슬라비치 |
1171년~1173년 | 로만 1세 로스티슬라비치 |
1173년 | 세볼로트 3세 유리예비치 |
1173년 |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 |
1174년 | 스뱌토슬라프 3세 브세볼로도비치 |
1174년~1175년 | 야로슬라프 2세 이재슬라비치 |
1175년~1177년 | 로만 1세 로스티슬라비치 (2차 재임) |
1177년~1180년 | 스뱌토슬라프 3세 브세볼로도비치 |
1180년~1181년 |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 (2차 재임) |
1181년~1194년 | 스뱌토슬라프 3세 브세볼로도비치 |
1194년~1201년 |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 (3차 재임) |
1201년~1203년 | 잉바르 야로슬라비치 |
1203년 |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 (4차 재임) |
1203년~1205년 | 로스티슬라프 2세 류리코비치 |
1206년 |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 (5차 재임) |
1206년~1207년 | 세볼로트 4세 스뱌토슬라비치 |
1207년~1210년 |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 (6차 재임) |
1210년~1214년 | 세볼로트 4세 스뱌토슬라비치 (2차 재임) |
1214년 | 잉바르 야로슬라비치 (2차 재임) |
1214년~1223년 | 므스티슬라프 로마노비치 |
1223년~1235년 | 블라디미르 4세 류리코비치 |
1235년~1236년 | 이재슬라프 4세 블라디미로비치 |
1236년~1238년 | 야로슬라프 2세 |
1238년~1239년 | 미하일 브세볼로도비치 |
1240년~1241년 | 로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 |
1241년~1243년 | 미하일 브세볼로도비치 (2차 재임) |
4. 2. 몽골 침입 이후
1243년부터 1246년까지 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프 2세가 통치했고, 이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1246년부터 1263년까지 통치했다. 야로슬라프 3세 야로슬라비치의 통치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올샨스키 가문과 올고비치 가문의 공작들이 공국을 통치했는데,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의 통치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스타니슬라프 테렌스는 1324년까지, 표도르는 1324년부터 1362년까지 통치했다. 공국은 자체적인 통치자가 없이 총독(보이보드)이 통치했다.4. 3.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대
키예프 공국은 올샨스키 가문과 올레우코비치 가문의 공작들에 의해 통치되었다.통치 기간 | 이름 |
---|---|
1362년–1395년 | 블라디미르 올게르도비치 *리투아니아 통치의 시작* |
1395년–1397년 | 스키르가일라 |
1397년–1399년 | 이반 보리소비치 |
???–??? | ??? |
1443년–1454년 | 올레우코 블라디미로비치 |
1454년–1471년 | 시메온 올레우코비치 *공국이 키예프 보예보드로 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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