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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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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은 1185년 아센과 페타르의 봉기로 시작되어 1396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중세 국가이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칼로얀, 이반 아센 2세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몽골의 침입, 잦은 내분,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쇠퇴했다. 행정,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농업, 수공업, 무역을 기반으로 경제를 운영했다. 특히 문화적으로는 터르노보 문학파를 중심으로 문학, 건축, 미술 등에서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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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제2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이반 아센 2세 시대의 불가리아 제2제국
이반 아센 2세 시대의 불가리아 제2제국
기본 정보
원어 명칭ц︢рьство блъгарское
기타 표기중세 불가리아어: Ц(а)рьство бл(ъ)гарское
현대 불가리아어: Второ българско царство (브토로 벌가르스코 차르스트보)
영어 명칭Second Bulgarian Empire
지위제국
존속 기간중세
건국1185년
멸망1396년
이전 국가제1차 불가리아 제국
이후 국가오스만 제국령 불가리아
수도벨리코 타르노보 (1185년–1393년)
니코폴 (1393년–1395년)
비딘 (1356년/1386년, 비딘 차르국의 수도)
공용어중세 불가리아어
공통 루마니아어
중세 그리스어
쿠만어
알바니아어
국교불가리아 정교회 (1204년–1235년 로마와 연합)
종교보고밀파 (금지됨)
통화알 수 없음
불가리아 제2제국의 국기 (1325년)
국기 (상단: 1325년경 안젤리노 둘세르트의 포르톨란 지도, 하단: 1380년경 귈렘 솔레르의 포르톨란 지도)
불가리아 제2제국의 국장
국장 (14세기 말 타르노보 차르의 감시대 방패)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국가 원수차르 (황제)
주요 지도자페터르 4세 (최초)
콘스탄틴 2세 (마지막)
최초 통치 기간1185년–1197년
최종 통치 기간1397년–1422년
역사
주요 사건재건 (1185년)
멸망오스만 제국의 지배 (1396년)
선행 국가불가리아 제1제국
후행 국가오스만 제국령 불가리아
면적
1230년293,000 제곱킬로미터
현재 국가

2. 국명

현재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불가리아'이다. 칼로얀 시대에는 때때로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국가로 불렸다.[358] 인노켄티우스 3세,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와 같은 외국인들은 공식적인 편지에서 '불가리아' 혹은 '불가리아 제국'으로 언급했다.[13][14] 근대 역사가들은 이 국가를 '제2차 불가리아 제국' 등으로 불렀고, 그 외에도 '불가리아-왈라키아 제국'[359], '루마니아-불가리아 제국'(주로 루마니아 역사가들에 의해)[360][361]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3. 역사

1018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 영토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불가리아에서는 테마 (군관구제)가 실시되었고, 동로마에 종속된 불가리아 귀족과 고위 성직자는 특권을 보장받았다.[231] 그러나,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킨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시대가 되자 불가리아에는 압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232] 불가리아 내의 정교도를 관할하는 오흐리드 총대주교좌는 대주교좌로 강등되어[233] 그 자리에 그리스인이 임명되었고, 불가리아인 중에서 총대주교를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불가리아 정교회#오흐리드 대주교구 참조)[234]

1040년 미카엘 4세 치하에서 실시된 재정 개혁으로 불가리아 농민들에게 금전 납세가 부과되었고, 불가리아 농민의 생활은 더욱 압박받았다.[232] 같은 시기에 불가리아에서는 테마제를 대신하여 유사 봉건적인 토지 제도인 프로노이아 제도가 도입되었고, 농민은 영주의 수탈에도 고통받았다.[234] 1040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불가리아 황제 사무일의 손자 Peter Delyan|페타르 델리안영어이 지도하는 민중 봉기가 발발했고 (페타르 델리안의 봉기), 지도자 델리안은 불가리아 제국의 재건을 내걸었다. 델리안의 반란은 용병의 도움을 받은 동로마 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 후에도 불가리아에서는 반 동로마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그 배경에는 사회 불안이 존재했다.[235]

아센과 페타르 시대의 제2차 불가리아 제국


1180년대에 시칠리아 왕국의 동로마 영토 공격이 시작되자 불가리아에서는 증세와 징병이 강화되었고,[235] 더불어 동로마 황제 이사이오스 2세의 결혼에 특별세가 부과되었다.[236] 1185년에 터르노보 근교의 블라흐인(혹은 쿠만인)[237][238] 지주 페타르와 아센 형제는 신세 완화와 프로노이아 부여를 동로마 황제 이사이오스 2세에게 요구했지만, 두 사람의 요구는 거절되었다.[235] 귀국한 페타르와 아센은 터르노보의 성 디미타르 교회의 성별식에서 불가리아 국가의 재건과 거병을 선언했고, 불가리아인 수도사 바실리는 연장자인 페타르를 황제(차르)로 옹립했다.[239][240]

동로마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던 불가리아 사람들은 봉기에 참여했고, 페타르와 아센은 국가의 계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시대의 수도였던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239] 1187년 여름에 이사이오스 2세가 북불가리아에 친정(親征)을 오자, 페타르 형제는 도나우강 북쪽의 유목민인 쿠만인에게 도망갔다. 이사이오스 2세의 군대는 불가리아를 파괴하고 수확한 곡물을 불태운 후, 해방 운동은 종식되었다고 판단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241] 같은 해 가을에 쿠만인을 동맹으로 삼은 페타르 형제는 불가리아로 귀국하여 도나우강 연안부를 탈환했고, 봉기는 트라키아, 로도피, 마케도니아로도 파급되었다.[241]

1188년 봄에 불가리아군은 터르노보로 진군하는 동로마군을 로베치에서 저지했고, 3개월에 걸친 포위를 견뎌냈다. 포위가 해제된 후에 불가리아와 비잔틴 사이에 평화가 체결되었고, 이 조약으로 불가리아의 독립이 사실상 승인되었다.[241][242] 평화 조약 시, 인질로 페타르와 아센의 동생 칼로얀 요아니차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

이반 아센 2세 사후, 그의 어린 아들 칼리만 1세가 즉위하면서 불가리아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몽골에 성공적으로 대응했으나, 섭정은 약탈을 피하고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72] 강력한 군주의 부재와 귀족 간 경쟁 심화는 불가리아의 급격한 쇠퇴를 야기했다. 주요 경쟁자였던 니케아 제국은 몽골의 약탈을 피하며 발칸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73]

1246년 칼리만 1세 사후, 여러 통치자들이 짧게 왕위를 계승했다. 니케아 군대는 남부 트라키아, 로도페 산맥, 마케도니아 지역을 저항 없이 정복했고, 헝가리 역시 벨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점령했다.[74][75] 1253년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를 침략, 이듬해 로도페 산맥을 되찾았지만, 미하일 아센 1세의 우유부단함으로 니케아는 대부분 영토를 회복했다. 1255년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빠르게 되찾았으나, 1256년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배신으로 모든 이득을 잃었다.[76][77] 이 사건은 황제의 목숨을 앗아갔고, 1257년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며, 결국 스코페의 보야르 콘스탄틴 티흐가 승리했다.[78]

콘스탄틴 티흐는 여러 외적 위협에 직면했다. 1257년 라틴인들이 네세바르를 점령했지만 유지하지 못했고, 헝가리인들은 비딘에서 로스티슬라프를 지원했다. 1260년 비딘을 회복했지만, 이듬해 헝가리의 반격으로 다시 잃었다.[79] 비딘은 곧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통제 하에 놓였고, 1266년 그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80]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치하 비잔틴 제국의 부활은 불가리아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1263년 비잔틴의 침공으로 해안 도시와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를 잃었다.[81] 콘스탄틴 티흐는 불가리아-몽골 연합 작전을 조직했지만, 몽골인들은 트라키아를 약탈한 후 다뉴브 강 북쪽으로 돌아갔다.[82] 1260년대 초 사냥 사고로 불구자가 된 황제는 아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녀의 음모는 귀족들 간 분열을 심화시켰다.[83]

1265년 불가리아 제국 (짙은 녹색) 및 남동유럽
1265년 불가리아 제국 (짙은 녹색) 및 남동유럽


끊임없는 몽골 침략, 경제난, 황제의 질병은 1277년 대규모 민중 봉기를 야기했다. 돼지치기 이바일로가 이끄는 반란군은 몽골군을 격파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바일로는 콘스탄틴 티흐가 지휘하는 정규군을 격파하고 황제를 직접 죽였다.[84][85]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8세는 이반 아센 3세를 내세워 군대를 보냈지만, 반란군은 먼저 터르노보에 도착했다. 콘스탄틴 티흐의 미망인 마리아는 이바일로와 결혼했고, 그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미하일 8세는 몽골인들을 동원해 도브루자를 침략, 이바일로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바일로는 실리스트라에서 3개월간 포위되었다.[86][87][88] 이바일로는 포위를 풀고 수도를 포위했지만, 비잔틴 군대에 패배했다.[89] 그러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몽골인들에게 피난처를 구했지만 살해당했다.[90] 귀족들은 체르벤의 통치자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를 황제로 선택했다. 그는 12년 동안 통치하며 몽골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트라키아 대부분을 비잔틴에게 잃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는 130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몇 달 동안 몽골의 차카가 터르노보를 통치했다.[91]

중세 요새
비딘의 바바 비다 요새


1371년 이반 알렉산데르가 사망한 후, 터르노보에서는 그의 넷째 아들 이반 시슈만이, 비딘에서는 이반 스라치미르가 차르를 칭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운명은 발칸 반도의 강대국인 오스만 제국세르비아의 동향에 달려 있었다.[392] 같은 해 세르비아의 부카신과 오스만 제국이 마리차강에서 충돌하였고, 세르비아군은 괴멸하고 부카신 왕은 전사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반 시슈만에게 강화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남부 불가리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1375년 이반 시슈만은 오스만에 대한 신종과 공납을 조건으로 협약을 갱신하였으며, 이반 시슈만의 여동생 케라 타마라가 무라트 1세에게 시집보내졌다. 또한 비딘의 이반 스라치미르와 도브루자 데스포트국 등 각지의 봉건 세력들도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다. 1378년 오스만 제국은 조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1382년 소피아가 함락당하였다. 세르비아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동맹 결성을 호소하였고, 이반 시슈만은 동맹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이반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에 신종을 맹세하고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였다.

1387년 라자르의 연합군은 플로크니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반 시슈만과 도브루자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 대상이 되었다. 1388년 오스만 제국의 찬다를리 알리 파샤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였고, 이반 시슈만은 무라트 1세를 직접 방문하여 신종 서약을 다시 보여 다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대패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에 대한 직할 통치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392] 결국 1393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발칸 반도에 공세를 실시했고, 3달 간의 포위 끝에 터르노보가 함락되었다. 이반 시슈만은 니코폴로 도망쳐 다시 조약을 맺고 영토의 인정을 보존받아야 하였다.[393] 1395년 로비네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니코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반 시슈만은 투옥당했다. 이반 스라치미르의 비딘 데스포트국은 불가리아에서 유일하게 독립 세력이 되었지만, 1396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키자 이반 스라치미르는 신종 맹세를 어기고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며,[394] 결국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후 비딘도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당하였다. 이반 스라치미르는 아나톨리아로 끌려갔고 중세 불가리아 제국은 소멸하고 말았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반 오스만 연합군이 패배한 것은 불가리아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진 마지막 일격이었다.

3. 1. 등장

1018년 바실레이오스 2세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에 테마 제도를 실시했지만,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은 보장했다.[362] 그러나 바실레이오스 2세 사후, 불가리아에는 압정이 시행되었다.[363] 불가리아 정교회의 오흐리드 수좌주교구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에 종속되었고,[364] 대주교 자리는 그리스인들이 차지하면서 불가리아인들은 대주교가 될 수 없었다.[365] 불가리아 귀족들과 차르의 친척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직위를 받고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했다.

1040년 미카일 4세의 재정 개혁으로 불가리아 농민들은 금전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고,[363] 테마 제도가 프로노이아 제도로 바뀌면서 영주의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12세기 후반 마누일 1세 콤니노스 사후 안드로니코스 1세를 비롯한 무능한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발칸 지배는 약화되었다. 1185년 토도르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페터르는 페터르 4세를 자칭하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이 봉기는 모에시아 지방(현재의 왈라키아 지방과 겹침)에서 시작되어 왈라키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도나우강 건너편의 쿠만족들도 일부 참여했다.[366]

3. 1. 1. 아센과 페터르의 난 (1185년~1197년)

1180년 시칠리아 왕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자 불가리아에는 증세와 징병 강화가 실시되었고, 이사키오스 2세의 결혼 즈음에 특별세가 부과되었다.[367] 1185년 터르노보의 귀족인 토도르 페터르와 아센 형제가 세금의 경감과 프로노이아를 요구하였으나[368] 이사키오스 2세는 거절하였다. 1185년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고,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하면서 거병하였다. 이는 불가리아 민중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아센과 페터르는 국가의 계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프레슬라프를 공격했고,[369] 1185년 가을과 1186년 봄 사이에 바르나를 제외한 불가리아 북부는 해방되었다.

그러자 1186년 여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직접 발칸산맥을 넘어 모에시아를 침공했다. 아센 형제는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고, 이사키오스 2세는 반란이 종식되었다고 판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370] 하지만 아센 형제는 쿠만족 용병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전쟁은 남부 트라키아, 로도피, 마케도니아까지 확산되었다.[370] 유능한 장군이었던 아센은 많은 수의 비잔틴 군대를 신속하게 쳐부수고 끊임없이 공격했다. 1187년 로베치에서의 3달간의 포위가 실패한 뒤, 비잔티움 제국은 휴전을 요청했다. 이로써 불가리아의 독립은 사실상 승인되었으며[370][371] 아센 형제의 막내 동생인 칼로얀이 인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졌다.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비잔티움과 적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40,000명의 군대를 지원하는 대신 불가리아가 차지한 영토 보전과 황제 칭호 부여를 요구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응답하지 않았고,[372] 프리드리히 1세가 비잔티움 령을 통과한 1190년 비잔틴 군은 터르노보 원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비잔틴 군은 천연의 요새인 터르노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쿠만족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철수하였다. 추격에 나선 불가리아군은 트랴브나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사키오스 2세는 황제의 관과 옷을 버려두고 간신히 탈출했다. 같은 해 페터르는 아센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프레슬라프를 중심으로 불가리아 북동부와 도브루자 지역을 통치했다.[372]

불가리아는 이후 발칸산맥 이남의 비잔티움 제국령까지 정복하였고, 1193년에는 스레데츠를 회복하였다. 또한 헝가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오랫동안 헝가리령이었던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하였다. 1194년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센의 중앙 집권적 정책에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었다.[372] 1196년 불가리아는 세레스에서 비잔티움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센이 비잔티움 제국의 사주를 받은 자신의 사촌 이반코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반코는 왕위를 찬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비잔티움 제국에서 파견한 군대는 도중에 반란을 일으켜 불가리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다.[373] 이반코는 페터르에게 포위당하였기 때문에 수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으로 도망쳐 플로브디프의 영주가 되었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귀족들의 반발로 페터르가 암살당하고, 왕위는 그의 막내 동생인 칼로얀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하여 계승하였다.

3. 2. 전성기

13세기 중반 불가리아 제국의 지도
이반 아센 2세(1218–1241) 통치 기간 동안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최대 영토 확장을 보여주는 지도


칼로얀은 형들에 이어 차르가 되어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보두앵 1세를 포로로 잡아 죽이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54][55]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의 협상을 통해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는 외교적 성과도 달성했다.[49] 그러나 1207년, 칼로얀은 부하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조카 보릴이 왕위를 계승했다. 보릴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헝가리 등에게 영토를 잠식당하고, 국내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58][59]

1218년 이반 아센 2세가 즉위하면서 불가리아는 다시 안정을 찾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반 아센 2세는 헝가리 왕 앤드루 2세의 딸과 결혼하여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되찾고,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르 콤네노스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61]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테오도르 콤네노스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면서,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63][64][65] 그 결과 아드리아 해에서 두라초에 이르는 모든 도시와 마을이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66][67]

1235년에는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라틴 제국에 대항했으며, 불가리아 총대주교를 인정받아 불가리아 정교회를 부활시키는 등 종교적 독립성도 강화했다.[69] 이반 아센 2세는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한 파괴적인 공격 후 동쪽으로 돌아가는 몽골 군대의 일부를 격파하기도 했다.[71]

3. 2. 1. 칼로얀 (1197년~1207년)

칼로얀은 국내 귀족들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1201년, 그는 북부 불가리아의 마지막 비잔티움 제국령이었던 바르나를 점령했다.[46] 1202년에는 비잔티움 제국과 화약을 체결하여 불가리아가 점령한 지역의 획득을 정식으로 승인받았다.[47] 1203년, 불가리아 국내의 혼란을 틈타 헝가리가 점령했던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를 다시 탈환하고 헝가리인을 추방하였다.[47]

칼로얀은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시메온 1세, 페테르 1세, 사무엘 등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선임자들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48] 교황은 불가리아 교회가 로마에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칼로얀을 왕(Rex)으로 인정할 의향이 있었다. 양측의 외교적 협상 끝에 1204년 말, 로마의 사절인 추기경 레오가 칼로얀을 불가리아의 왕으로 선포하였고, 대주교 바실은 수장으로 선포되었다.[49]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건국한 뒤,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는 불가리아인을 예속민으로 선언했다. 이에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의 반란을 선동하고 필리포폴리스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1205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은 라틴 제국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고,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사로잡힌 뒤 죽었다.[54][55] 칼로얀은 스스로에게 '로마인의 학살자'라는 뜻인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이는 "불가르 학살자"라고 불린 바실 2세의 별명에 대한 복수였다.[45] 1207년까지 칼로얀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시대에 차지했던 마케도니아 지방의 대부분을 정복하였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57]

3. 2. 2. 이반 아센 2세 (1218년~1241년)

이반 아센 2세


이반 아센 2세는 1217년 용병을 이끌고 불가리아로 돌아와 보릴에게 도전했고, 1218년 제위를 되찾았다.[72] 그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빼앗긴 땅들을 되찾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와 알바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73]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이반 아센 2세는 에페이로스 공국에 대승을 거두었고, 에페이로스 공국을 불가리아의 봉신으로 전락시켰다.[74][75] 1235년 니케아 제국라틴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된 수좌주교구 설치를 인정받았고 불가리아 정교회가 부활하였다.

이반 아센 2세는 현명하고 자애로운 군주로 명성을 얻었으며, 서방 세계, 특히 베네치아제노바와 제국의 무역 확대를 위해 교류하였다. 불가리아 제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무역 관계가 확대되고 1235년에는 정비된 해군을 보유하였다.

1241년 이반 아센 2세가 죽은 뒤에야 불가리아 지배자들은 몽골의 위험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3. 3. 쇠퇴와 중흥

이반 아센 2세 사후, 어린 아들 칼리만 1세가 즉위했다. 초기에는 몽골에 성공적으로 대응했으나, 섭정은 약탈을 피하고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72] 강력한 군주 부재와 귀족 간 경쟁 심화는 불가리아의 급격한 쇠퇴를 야기했다. 주요 경쟁자 니케아는 몽골의 약탈을 피하며 발칸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73]

1246년 칼리만 1세 사후, 여러 통치자들이 짧게 왕위를 계승했다. 니케아 군대는 남부 트라키아, 로도페 산맥, 마케도니아 지역을 저항 없이 정복했고, 헝가리 역시 벨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점령했다.[74][75] 1253년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를 침략, 이듬해 로도페 산맥을 되찾았지만, 미하일 아센 1세의 우유부단함으로 니케아는 대부분 영토를 회복했다. 1255년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빠르게 되찾았으나, 1256년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배신으로 모든 이득을 잃었다.[76][77] 이 사건은 황제의 목숨을 앗아갔고, 1257년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며, 결국 스코페의 보야르 콘스탄틴 티흐가 승리했다.[78]

콘스탄틴 티흐는 여러 외적 위협에 직면했다. 1257년 라틴인들이 네세바르를 점령했지만 유지하지 못했고, 헝가리인들은 비딘에서 로스티슬라프를 지원했다. 1260년 비딘을 회복했지만, 이듬해 헝가리의 반격으로 다시 잃었다.[79] 비딘은 곧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통제 하에 놓였고, 1266년 그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80]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치하 비잔틴 제국의 부활은 불가리아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1263년 비잔틴의 침공으로 해안 도시와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를 잃었다.[81] 콘스탄틴 티흐는 불가리아-몽골 연합 작전을 조직했지만, 몽골인들은 트라키아를 약탈한 후 다뉴브 강 북쪽으로 돌아갔다.[82] 1260년대 초 사냥 사고로 불구자가 된 황제는 아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녀의 음모는 귀족들 간 분열을 심화시켰다.[83]

끊임없는 몽골 침략, 경제난, 황제의 질병은 1277년 대규모 민중 봉기를 야기했다. 돼지치기 이바일로가 이끄는 반란군은 몽골군을 격파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바일로는 콘스탄틴 티흐가 지휘하는 정규군을 격파하고 황제를 직접 죽였다.[84][85]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8세는 이반 아센 3세를 내세워 군대를 보냈지만, 반란군은 먼저 터르노보에 도착했다. 콘스탄틴 티흐의 미망인 마리아는 이바일로와 결혼했고, 그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미하일 8세는 몽골인들을 동원해 도브루자를 침략, 이바일로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바일로는 실리스트라에서 3개월간 포위되었다.[86][87][88] 이바일로는 포위를 풀고 수도를 포위했지만, 비잔틴 군대에 패배했다.[89] 그러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몽골인들에게 피난처를 구했지만 살해당했다.[90] 귀족들은 체르벤의 통치자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를 황제로 선택했다. 그는 12년 동안 통치하며 몽골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트라키아 대부분을 비잔틴에게 잃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는 130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몇 달 동안 몽골의 차카가 터르노보를 통치했다.[91]

1340년대 후반과 1350년대 초반, 이반 알렉산더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아들들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110] 1349년 아내와 이혼하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라-테오도라와 결혼한 후, 비딘의 통치자로 임명된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반 시슈만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자, 이반 스라치미르는 독립을 선언했다.[111]

1366년, 이반 알렉산더는 비잔틴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에게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고, 사보이 십자군이 불가리아 흑해 연안을 공격했다. 불가리아는 요안니스 5세에게 통과를 허용했지만, 빼앗긴 도시들은 비잔틴에게 넘어갔다.[112] 1365년 헝가리인들이 비딘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반 알렉산더는 4년 후, 왈라키아의 블라디슬라프 1세와 도브로티차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영토를 다시 탈환했다.[113][114] 1371년 이반 알렉산더의 죽음은 타르노보의 이반 시슈만, 비딘의 이반 스라치미르, 카르부나의 도브로티차 사이에서 나라를 분열시켰다.

제2 불가리아 제국, 1331–1371


1371년 9월 26일, 오스만 제국은 체르노멘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를 격파하고 불가리아로 진격하여 여러 지역을 정복, 발칸 산맥 북쪽과 소피아 계곡의 이반 시슈만의 권한을 제한했다.[115] 불가리아 군주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그 대가로 일부 도시를 되찾고 10년간의 불안한 평화를 얻었다.[115][116]

오스만 제국의 습격은 1380년대 초에 재개되어 소피아 포위전으로 절정에 달했다.[117] 이반 시슈만은 1384년부터 왈라키아와 전쟁을 벌였고, ''익명의 불가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1386년 왈라키아의 보이보드 왈라키아의 단 1세를 살해했다.[118] 그는 또한 이반 스라치미르와 불안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형제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협력하지 않았다. 역사가 콘스탄틴 요세프 이르체크에 따르면, 형제들은 소피아를 놓고 격렬한 갈등을 벌였다.[120] 이반 시슈만은 오스만 제국에 병력을 지원하라는 봉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세르비아인 및 헝가리인과 기독교 연합에 참여할 기회를 이용하여 1388년과 1393년에 대규모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유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1388년에 다수의 중요한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고, 5년 후에는 3개월간의 포위 끝에 타르노보를 점령했다.[121][122] 이반 시슈만은 1395년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 그의 마지막 요새인 니코폴을 점령했을 때 사망했다.[123] 1396년, 이반 스라치미르는 헝가리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드의 십자군에 합류했지만,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스만 제국은 즉시 비딘으로 진격하여 점령, 중세 불가리아 국가를 종식시켰다.[124][125] 저항은 불가리아의 콘스탄틴 2세와 프루진 아래 1422년까지 계속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지기스문드 왕에 의해 "''고귀한 콘스탄틴, 영광스러운 불가리아 황제''"로 불렸다.[126][127]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0세기에 유래한 불가리아어로 황제를 뜻하는 차르(황제)가 통치하는 세습 군주제였다. 불가리아 군주들은 "주 그리스도 안에서 충실한 황제이자 모든 불가리아인의 전제군주" 등으로 자처했다.[128] "모든 불가리아인"이라는 용어는 14세기에 추가되었으며, 트르노보 군주가 모든 불가리아인의 황제임을 의미했다.[128]

A medieval charter
이반 시쉬만(Ivan Shishman)의 1378년에 발행된 릴라 헌장과 같은 중세 불가리아 왕실 헌장은 중세 불가리아 사회와 행정직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다.


황제는 전제 정치에서 세속 및 종교 문제에 대한 최고의 권력을 가졌으며, 그의 개인적인 능력은 국가의 복지에 중요했다.[129] 군주가 유아일 경우, 정부는 섭정이 이끌었다.[130] 14세기에 봉건적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군주의 아들들이 아버지 생전에 황실 칭호를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31]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행정은 비잔틴 행정 시스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부분의 칭호는 비잔틴 그리스어에서 채택되거나 불가리아어로 번역되었다. 두 국가 간 계급 시스템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중세 불가리아 행정부의 정확한 의무 등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132] 보야르 평의회에는 더 큰 보야르와 총대주교가 포함되었으며, 대외 및 국내 정책 문제를 논의했다.[133] 최고위 행정 관리들은 '대 로고테테'와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였다.[133] '데스포트'와 '세바스토크라토르'와 같은 고위 궁정 칭호는 황제의 친척에게 수여되었지만 행정 기능과는 관련이 없었다.[134]

A medieval fortress
트르노보의 파노라마 뷰,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는 트르노보였으며, 황제의 직접적인 권한 아래 자체 행정 단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135] 불가리아는 주(province)로 나뉘었으며, 그 수는 국가의 영토 발전에 따라 달랐다. 현존하는 1차 자료에서 주는 '호라', '제미아'(земяbg), '스트라나'(странаbg), '오블라스트'(областbg) 등으로 명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주요 도시의 이름을 따랐다.[136][137] 주지사는 "공작" 또는 '케팔리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황제가 직접 임명했다. 주는 '카테판'이 통치하는 '카테파니카'로 세분되었으며, 공작에게 종속되었다.[138] 이반 아센 2세 치하에서 주에는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보루이, 아드리아노폴, 디모티카, 스코페, 프릴레프, 데볼, 알바니아가 포함되었다.[138]

제2제국 시대에 불가리아 사회는 성직자, 귀족, 농민의 세 사회 계급으로 나뉘었다. 귀족은 보야르, 판사, "온 군대"를 포함했다.[139] 보야르는 더 큰 보야르와 더 작은 보야르로 세분되었다. 더 큰 보야르는 대규모 토지를 소유했으며, 고위 행정 및 군사 직책을 맡았다.[140] 농민은 세 번째 계급의 대부분을 형성했으며 중앙 당국 또는 지역 봉건 영주에게 종속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자의 수는 증가했다.[141] 주요 농민 집단은 '파리치'와 '오트로치'였다. 둘 다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지만 '파리치'만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고, '오트로치'는 봉건 영주가 제공했기 때문에 상속할 수 없었다.[142]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 즉위 후 불가리아에는 반독립 상태의 봉건 영주들이 난립했다.

  • 브라니체보 - 다르만과 쿠델린 형제
  • 비딘 - 시슈만
  • 발칸 산맥 산록부와 스레드나 고라 산맥 - 스밀레츠, 라도슬라프, 보이실의 3형제
  • 크란 - 엘티미르


1285년 조치 울루스가 불가리아를 대규모로 파괴하자 게오르기 1세는 노가이에게 종속을 맹세하고, 아들 Теодор Светослав|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bg를 인질로 내어주고, 딸을 노가이의 아들 차카에게 시집보냈다.[285] 1292년 정쟁에서 패배한 게오르기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285][286] 노가이는 스레드나 고라의 스밀레츠를 불가리아 황제로 옹립하여 자신의 괴뢰로 삼았다. 스밀레츠의 치세에 불가리아 영토 일부가 세르비아에 병합되고 비딘이 공격받았지만, 적극적인 대응은 없었다.[285]

1299년 조치 울루스 내전으로 노가이가 전사한 후, 노가이의 아들 차카가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불가리아로 망명했다. 트르노보 귀족들에게 뇌물을 준 차카는 불가리아 황제가 되었지만, 1300년 테오도르는 차카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토크타 칸에게 보냈다. 그 대가로 조치 울루스에서 불가리아에 베사라비아 지방이 반환되었다.[287]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288]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적대적인 귀족과 고위 성직자를 견제하고자, 이전부터 타국과 내통했다는 의혹을 받은 트르노보 총대주교 요아킴 3세에게 극형을 내렸다.[289] 테오도르는 즉위 후 3년 만에 동로마 제국의 내정 간섭을 끊고, 귀족들의 반항을 억눌러 중앙 집권화에 성공했다. 테오도르는 오랫동안 불가리아에 간섭해 온 동로마를 상대로 공세를 전환하여,[287][290] 동로마에 점령되었던 북트라키아, 자고라, 흑해 연안 도시들을 불가리아로 되돌렸다. 1308년 동로마와의 강화 조약으로 불가리아가 탈환한 지역 지배가 인정되었다. 세르비아와의 관계는 반동로마 정책으로 개선되었고, 1321년 동로마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지하며 영토 확장을 꾀했다.[291]

1321년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가 사망하자, 아들 게오르기 2세 테르테르가 제위를 계승했다. 게오르기 2세는 내전으로 분열된 동로마에 진격하여 필리포폴리스 등을 탈환했다. 게오르기 2세의 군대는 아드리아노폴까지 남하했지만, 행군 도중 급사했다. 필리포폴리스는 동로마에 재점령되었고, 지도자를 잃은 불가리아는 위기에 빠졌다.[291][292]

3. 3. 1. 몽골의 침입과 이바일로의 난 (1241년~1280년)

13세기 후반의 불가리아


이반 아센 2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 불가리아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칼리만 아센 1세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황제권으로 지방 귀족들의 할거를 막을 수 없었다. 1242년 몽골의 침입은 불가리아를 황폐화시켰으며,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의 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381] 1246년 칼리만 1세가 죽은 후 더 어린 미하일 아센 1세가 즉위하였고, 이 시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니케아 제국, 헝가리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미하일 아센 1세의 시대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하면서 소피아에서는 왕의 사촌인 세바스토크라토르 칼로얀, 스코페의 콘스탄틴 티흐와 같은 대귀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1256년 미하일 아센 1세가 죽자 귀족들은 왕위쟁탈전으로 내분에 휩싸여 1256년과 1257년 사이에 3명의 차르가 바뀌는 등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권력을 장악한 새 황제 콘스탄틴 티흐는 1274년 킵차크 칸국의 침공을 받았고, 결국 불가리아는 안키알로(현재의 포모리에)와 메셈브리아(현재의 네세버르)를 양도하여야 했다.

황제 콘스탄틴 티흐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 보야나 교회 프레스코


콘스탄틴 티흐의 20년 치세 내내 불가리아는 불안정했다. 국가의 권위가 실추되고 중앙 권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불가리아의 무질서는 심화되었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민중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양이 늘어났다. 또한 봉건제의 발전으로 인한 영주들의 약탈과 외국의 침략은 농민들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277년 도브루자의 돼지치기 이바일로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바일로의 주도 하에 결성된 의용군은 몽골군을 격파하여 도나우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383] 이바일로는 터르노보를 포위하였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는 이반 아센 3세를 새로운 차르로 내세웠다. 이바일로는 터르노보 정부와 강화를 맺고 콘스탄틴 티흐의 미망인 마리아 칸타쿠제나와 결혼하여 유럽 최초의 농민 황제로 즉위하였다.[384][385] 이바일로는 노가이 칸의 정예병과 싸우면서 드러스터르의 요새에 3달 간 포위당하였고, 이바일로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바일로는 포위를 뚫고 다시 나타나 이반 아센 3세를 지원하는 비잔티움 군대를 두 차례나 격파하였고, 이반 아센 3세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달아났다. 귀족들은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새로운 차르로 추대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이바일로는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노가이 칸에게 암살당하였다.[386]

3. 3. 2. 중흥과 벨버즈드 전투 (1280년~1331년)

1277년 이바일로를 몰아내고 즉위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치세에 불가리아는 반독립 상태의 봉건 영주들이 난립하였고, 왈라키아에는 독자적 국가가 세워졌다.[91] 1285년 킵차크 칸국은 불가리아를 다시 공격하였고, 게오르기 테르테르는 킵차크 칸국의 속국이 되었다. 1292년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는 스밀레츠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여 비잔티움 제국으로 망명하였고, 스밀레츠의 치세에도 몽골의 간섭은 계속되었다.[91]

1299년 킵차크 칸국에서도 토흐타가 정변을 일으켜 노가이를 죽이자, 노가이의 아들 차카는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차카는 스밀레츠의 아들 이반을 몰아내고 차르가 되었으나, 1300년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에게 살해당하고 그 목은 토흐타에게 보내졌다.[92]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분열된 불가리아를 다시 통일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의 중흥기를 열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내정 간섭을 막고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반항을 억제하면서 중앙 집권화에 성공하였다.[93][94][95] 14세기 초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유럽에는 안정이 찾아왔고, 불가리아 및 발칸 국가들도 현재의 국경과 비슷한 영역을 형성하였다.

1330년 세르비아의 스테판 3세 데찬스키와의 벨버즈드 전투에서 대패하여 미하일 아센 3세는 전사하고 마케도니아는 분할당하였으며, 불가리아는 중앙 집권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105]

3. 3. 3. 이반 알렉산더르 (1331년~1371년)

1331년 궁정 혁명이 일어나 미하일 시슈만의 조카이자 이반 스테판의 사촌인 로베치의 데스포트 이반 알렉산더르가 즉위하면서 정세가 급변하였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40년 간 불가리아를 통치하였는데, 그의 치세는 불가리아 중세사의 전환기로 여겨진다. 그의 치세 초기 비잔티움 제국이 차지한 흑해 연안의 불가리아령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이반 알렉산더르는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389] 1332년 루소카스트로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군을 격파하였으며, 불가리아에 유리한 화약을 맺었다. 이후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미하일 시슈만의 동생이자 자신의 삼촌인 비딘의 데스포트 벨라우르를 공격하여 1336년에 진압하였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과 협력하여 자신의 여동생 엘레나를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에게 시집보냈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차르 즉위를 인정하면서 세르비아와 협력 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1339년에는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비잔티움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시집보내면서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1345년 이반 알렉산더르는 왈라키아 출신 황후 테오도라와 이혼하고, 1355년1356년 사이에는 테오도라와의 아들인 이반 스라치미르를 비딘의 데스포트로 임명하였다.[390] 이 시기 대외 관계는 안정되었으나, 벨버즈드 전투 이후 불가리아는 데스포트들의 할거 상태에 빠진 상태였고,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 동안 도브루자와 왈라키아에는 반독립적인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1365년 이반 스라치미르가 통치하는 비딘이 헝가리의 공격을 받아 1369년 이반 알렉산더르가 왈라키아 공국과 도브루자의 협력을 받아 탈환할 때까지 헝가리령이 되었다.[391] 1366년에서 1367년 사이에는 흑해 연안 지역이 사보이의 아마데오 4세의 침공을 받았고, 안키알로와 메셈브리아 등이 비잔티움 제국에 병합되었다.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에 발칸 반도에 출현한 가장 큰 문제는 동쪽에서 가장 큰 적인 오스만 제국의 진출이었다. 1351년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함대 건설을 호소하였지만 동맹은 실현되지 않았다.[390] 1369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여 오스만의 실질적인 수도로 삼았고, 남부 불가리아로 진군하여 보루이와 플로프디프를 차지하였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세르비아와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연합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1371년 2월 17일 이반 알렉산더르가 사망하였다.

3. 4. 멸망

1371년 이반 알렉산데르가 사망한 후, 터르노보에서는 그의 넷째 아들 이반 시슈만이, 비딘에서는 이반 스라치미르가 차르를 칭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운명은 발칸 반도의 강대국인 오스만 제국세르비아의 동향에 달려 있었다.[392] 같은 해 세르비아의 부카신과 오스만 제국이 마리차강에서 충돌하였고, 세르비아군은 괴멸하고 부카신 왕은 전사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반 시슈만에게 강화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남부 불가리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1375년 이반 시슈만은 오스만에 대한 신종과 공납을 조건으로 협약을 갱신하였으며, 이반 시슈만의 여동생 케라 타마라가 무라트 1세에게 시집 보내졌다. 또한 비딘의 이반 스라치미르와 도브루자 데스포트국 등 각지의 봉건 세력들도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다. 1378년 오스만 제국은 조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1382년 소피아가 함락당하였다. 세르비아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동맹 결성을 호소하였고, 이반 시슈만은 동맹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이반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에 신종을 맹세하고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였다.

1387년 라자르의 연합군은 플로크니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반 시슈만과 도브루자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 대상이 되었다. 1388년 오스만 제국의 찬다를리 알리 파샤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였고, 이반 시슈만은 무라트 1세를 직접 방문하여 신종 서약을 다시 보여 다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대패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에 대한 직할 통치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392] 결국 1393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발칸 반도에 공세를 실시했고, 3달 간의 포위 끝에 터르노보가 함락되었다. 이반 시슈만은 니코폴로 도망쳐 다시 조약을 맺고 영토의 인정을 보존받아야 하였다.[393] 1395년 로비네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니코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반 시슈만은 투옥당했다. 이반 스라치미르의 비딘 데스포트국은 불가리아에서 유일하게 독립 세력이 되었지만, 1396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키자 이반 스라치미르는 신종 맹세를 어기고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며,[394] 결국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후 비딘도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당하였다. 이반 스라치미르는 아나톨리아로 끌려갔고 중세 불가리아 제국은 소멸하고 말았다.

4. 행정

불가리아의 행정과 사법 제도는 대부분 비잔티움 제국의 제도와 거의 같았고,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와도 유사하였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실한 불가리아인의 전제군주'라는 칭호의 차르(황제)에게 속하였다. 황제는 모든 입법과 행정의 권력을 가졌다. 황통이 단절될 경우 대귀족 중에서 황제가 선출되었다.[395]

불가리아의 귀족들은 볼야르(보야린)라고 불렸고, 대귀족인 벨리키와 중소귀족인 말리로 구분되었다. 데스포트와 세바스토크라토르와 같은 대귀족들은 황제와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고, 대귀족들은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396] 귀족들의 의회에는 대귀족과 총대주교를 포함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전쟁 선포, 동맹 체결, 평화 조약과 같은 내외적인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었다.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다.[397]

불가리아 제국의 주요한 행정 단위는 호라였으며, 호라는 더 작은 행정 단위인 카테파니카(카테파니콘)로 나뉘었다. 호라의 수는 국가의 영토 발전에 따라 달랐다. 주는 비잔틴 두크스와 케팔레에서 유래한 "공작" 또는 '케팔리아'라는 칭호를 받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주지사가 다스렸다. 주는 '카테판'이 통치하는 '카테파니카'(단수형 '카테파니콘', 비잔틴 '카테파니키온'에서 유래)로 세분되었으며, 카테판은 공작에게 종속되었다.[138]

이반 아센 2세 시대의 호라는 다음과 같은 12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396]

호라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터르노보
카르버나
크런
보루이
오드린
스코페
데볼
세르디카
프릴레프
아르바나시


5. 사회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봉건 제도 위에 구축된 제국이었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부터 시행된 프로노이아 제도는 중앙 권력의 약화와 함께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대 봉건 영주 계급은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여 큰 세력을 누렸고, 쿠만족 출신의 귀족 시슈만은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에게 비딘의 데스포트 직위를 받아 북서부 불가리아 지역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할 정도였다.[398] 그 외에도 많은 대귀족들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재산을 기부받은 교회와 수도원까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중세 불가리아 사회는 봉건 세력과 농민을 비롯한 종속민으로 분화하였다. 중간 계급으로는 도시의 상인과 장인, 하위 성직자와 수도사, 관료와 병사들이 자리하였으며, 약간의 노예도 존재하였다.[398] 봉건 세력은 황제와 귀족 같은 세속 권력자와 고위 성직자와 같은 교회 귀족으로 나뉘었고, 하위 계급 중에서 봉건 세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399] 불가리아의 토지 소유 형태는 황제령, 봉건영주령, 교회령, 수도원령으로 4분되었다. 황제령과 봉건제후령은 일정한 범위에 영지가 모여 있었으나 교회령과 수도원령은 하나의 사원이 소유한 토지는 국가 내에 분산되어 있었고, 지배 지역에는 주택, 경작지, 수차 등의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다.[400] 당시 광범위한 토지를 소유한 사원은 힐란다르 수도원, 릴라 수도원, 바흐코보 수도원 등이 있었다.[400] 봉건 영주는 도시에도 개입하여 도시의 상인이나 장인도 봉건 영주의 압박을 받았다.[401]

봉건 세력의 대토지 소유와 함께 농민들의 농노화도 진행되었다. 농노들은 봉건 영지 내에서 경작 토지의 상속, 매매, 증여는 가능하였지만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았다. 봉건 세력이 농민에 부과한 세금은 부역과 공납 이외에도 시대가 진행되면서 화폐의 납부가 추가되었다.[402] 농민은 곡물세, 가축세, 교회세, 가옥세 등의 정규세를 비롯하여 삼림, 연못, 제분소 비용에 따른 많은 비정규적인 과중한 세금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403] 14세기에 이르러 민중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발칸 산맥 이북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사회적 불안의 증가로 인해 이단이 횡행하였고, 수도사가 되는 사람도 증가하였다.[404] 또한 토지와 재산을 잃은 민중들은 비적이 되기도 하였고, 이들은 봉건 세력의 영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401]

6. 경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경제


이반 알렉산드르 치세에 주조된 은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경제는 농업, 광업, 전통 공예 및 무역에 기반을 두었다. 농업과 축산업은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불가리아 경제의 주요 버팀목이었다.

이반 아센 2세는 어린 아들 칼리만 1세가 계승했고, 불가리아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주요 경쟁자였던 니케아는 몽골의 약탈을 피했고 발칸 지역에서 권력을 얻었다.[73] 1246년 칼리만 1세가 사망한 후, 여러 짧은 치세의 통치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불가리아인들은 1253년에야 반응하여 세르비아를 침략하고 다음 해에 로도페 산맥을 되찾았다. 그러나 미하일 아센 1세의 우유부단함으로 니케아인들은 체피나를 제외한 모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1255년, 불가리아인들은 마케도니아를 빠르게 되찾았는데, 그곳의 불가리아인들은 니케아인들의 통치보다 터르노보의 통치를 선호했다.[76]

새로운 황제 콘스탄틴 티흐는 여러 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끊임없는 몽골의 침략,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황제의 질병은 1277년 북동부에서 대규모 민중 봉기를 초래했다.

통화 유통과 주조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시대 동안 꾸준히 증가하여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더 통치 기간(1331–1371년)에 절정에 달했다. 교황의 인정을 받은 황제 칼로얀(1197–1207년)은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얻었다. 잘 조직된 조폐소와 조각 작업장이 13세기 중반에 세워져 구리, 빌론, 은화를 생산했다.[161][162] 불가리아 주화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 라틴 제국, 베네치아, 세르비아, 골든 호드, 작은 발칸 공국에서 나온 동전도 널리 사용되었다.

6. 1. 농업

중세 불가리아의 경제는 농업, 광업, 전통적 수공업, 무역에 의존하는 형태로 다른 유럽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산업은 농업과 축산업 중심이었고, 농경지는 이포제가 실시되었다.[405] 제국의 가장 주요한 농업 지대는 도나우 평원 지대와 트라키아 지역이었고, 주로 재배되는 작물은 , 보리, 수수였다. 13세기부터 야채, 과수, 포도의 중요성이 증가하였다.[406]

가장 중요한 와인 생산 지대는 흑해 연안과 스트루마 강 일대의 남마케도니아 지역이었다. 목축업 역시 발달하여 많은 , 돼지, 가 키워졌다.[407] 목초지는 계곡 일대를 겨울 목초지, 산간 지역을 여름 목초지로 구분하였다. 14세기에는 양봉과 양잠업이 발달하였다.[408] 숲은 벌목이 허용된 지역과 금지된 구역이 구분되었다.[409]

당시 불가리아의 특산품으로는 곡물, 양봉 산물(꿀, 밀랍), 실크 제품, 가죽 제품 등을 들 수 있다.[405] 그 중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제노바, 베네치아 등에 수출된 밀의 품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410]

6. 2. 수공업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불가리아에서는 금속 제련과 광업이 발달하였다. 불가리아의 대장장이들은 망치, 도끼, 톱, 베틀 등과 무기, 갑옷 등을 생산하였다.[411][412] 13세기에는 광석 추출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새로운 채굴 방법을 개발한 작센의 광부들이 서부 불가리아에 나타났다. 그들은 로도피 산맥 동부의 금광에 거주하였다. 중세 불가리아에는 대략 50여 개의 수공업 직종이 알려져 있었으며, 가죽공, 신발공, 목수, 방직공 등과 식량 가공업자(빵, 버터, 치즈, 와인)들이 있었다. 또한 터르노보, 플레벤, 소피아 등을 중심으로 공성 병기의 개발도 이루어졌고, 군대에는 숙련된 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다.[412]

도시의 증가는 수공예, 야금, 광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작물 가공은 전통적이었으며, 생산품에는 빵, 치즈, 버터, 와인이 포함되었다. 소금은 포모리에호수 근처의 석호에서 추출되었다.[156] 가죽 세공, 제화, 목공, 직조가 주된 공예였다. 바르나는 고급 의류 생산에 사용된 여우 모피 가공으로 유명했다.[157] 투석기, 충차, 기타 공성 장비를 개발한 대장장이, 철물상, 기술자가 있었는데, 이는 13세기 초에 널리 사용되었다.[159] 금속 가공은 불가리아 서부 (치프로브치, 벨바즈드, 소피아)와 동쪽의 터르노보와 메셈브리아에서 발달했다.[160]

제조업 분야에서도 뚜렷한 발전이 있었다. 도시 증가와 도시민의 수요 확대, 농업과 상업 및 군사 기술의 발달은 제조업 발전을 촉진했고, 제련주조의 발달은 다른 분야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327] 특히 도자기, 석재 제작, 금속 가공, 재단이 크게 발전하였다.[327][323]

도시나 대규모 촌락에 거주하는 장인은 "테흐니타리"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계층을 형성했다. 또한, 13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북서 불가리아로 이주한 독일계 이민은 광업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사시"라고 불렸다.[327]

6. 3. 상업과 무역

불가리아 제국의 영토 확장에 따라 경제력도 성장하였고, 국가적으로 수출을 장려하였다. 또한 국내외 무역의 활성화는 화폐 유통을 촉진하였다. 이반 아센 2세의 시대에 불가리아는 외국과의 통상을 확대하였으며 터르노보는 남동부 유럽의 무역 중심지로 번영하였다.[413] 무역의 확대와 함께 불가리아 화폐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세르비아, 몽골 등 외국 화폐도 유통되었다.[405] 중세 불가리아의 상거래 중심은 축제와 함께 열리는 특별 시장과 정기 시장이었다. 또한 도시에는 상설 시장이 있었고 일부 마을과 수도원에도 매주 시장이 열렸다. 봉건 세력은 상업에 대해 세금과 공납을 부과했지만 일부 수도원은 면세 특권을 받았다.[405]

외국과의 무역 체결은 황제의 칙서에 의해 통제되었다.[414] 대외 무역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위는 1차 제국과 대비하여 낮아졌고, 베네치아, 제노바, 두브로브니크가 대두하였다.[415]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시대에는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 대외 관계에 변화가 생겼는데, 제노바와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베네치아와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13세기에는 외국 상인에게 관세가 부과되지 않았지만, 14세기부터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7. 문화

13세기와 14세기에 불가리아는 번영하는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에 들어 불가리아는 문화적 르네상스를 맞아 시메온 대제 시대의 황금기에 이어 두 번째 황금기라 불릴 정도로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다.[190][191] 수도 터르노보는 왕궁과 교회 건물, 귀족 저택이 즐비하여 불가리아의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서 중세 시대의 대표적 예술 도시로 꼽혔다. 터르노보는 "제2의 콘스탄티노플" 또는 "제3의 로마"로 성장했으며,[173] 불가리아 동시대인들은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불가리아어 이름인 차리그라드를 따서 "차레브그라드 터르노프", 즉 '터르노보의 황제의 도시'라고 불렀다.[194]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문화.


불가리아 제2제국의 문화


불가리아의 건축, 예술, 문학은 불가리아 국경을 넘어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러시아 공국으로 확산되어 슬라브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192][193] 불가리아는 동시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193] 주요 문화 및 정신적 중심지는 터르노보 외에도 비딘, 소피아, 메셈브리아, 그리고 전국에 걸쳐 많은 수의 수도원이 있었다.

타르노보 미술 학교 회화는 13세기와 14세기의 불가리아 미술의 주류였다. 비잔틴 제국의 팔레오고교 르네상스의 몇몇 경향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회화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앙드레 그라바르에 의해 최초로 별개의 예술 학교로 분류되었다.[206][207] 이 학교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의 사실주의, 개별화된 초상화, 그리고 심리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206][208]

제2 불가리아 제국의 많은 책에는 아름답게 제작된 세밀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예로는 마나세스 연대기, 이반 알렉산더르의 사복음서, 그리고 토미치 시편이 있으며, 이들은 총 554개의 세밀화를 가지고 있다.[214] 다양한 신학적, 세속적 사건을 묘사하고 상당한 미적 가치를 지닌 세밀화의 스타일은 동시대의 비잔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215]

중세 필사본의 페이지
14세기 불가리아 번역본 ''마나세스 연대기''의 페이지


중세 필사본의 페이지
14세기 ''이반 알렉산더 사복음서''의 페이지


14세기 동안, 제2제국의 문학 활동은 궁정, 특히 황제 이반 알렉산더(재위 1331–71)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많은 저명한 학자들과 성직자들과 결합하여 터르노보 문학파로 알려진 놀라운 문학 부흥을 이끌었다.[192][193] 문학은 또한 일부 귀족과 부유한 시민들의 후원을 받았다.[220] 문학에는 그리스 텍스트 번역과 종교적 및 세속적 원작 창작이 포함되었다. 종교 서적에는 찬양 서한, 수난사, 성인전, 찬송가가 포함되었다. 세속 문학에는 연대기, 시, 소설과 단편 소설, 외경 이야기, ''트로이 이야기''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대중적인 이야기, 법률 서적, 의학 및 자연 과학에 관한 작품이 포함되었다.[192]

7. 1. 건축

13세기부터 교회 건축에 서구의 영향으로 종탑이 도입되었다.[416][417] 동방 정교회 순교자와 성인들의 유물은 수도 터르노보의 여러 성당에 보존되었고, 이로 인해 터르노보는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로는 성 40 순교자 성당, 보야나 교회, 이바노보 바위 성당 등이 있다. 불가리아인들은 신에 대한 겸손과 존경의 의미로 주로 작은 문을 가진 작은 성당을 건축하였다. 14세기 중반 이후, 릴라 수도원의 흐렐류 탑처럼 많은 수도원이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대비해 요새화되었다.

7. 2. 도시

중세 터르노보


중세 불가리아의 도시는 언덕에 지어진 요새와 산기슭에 펼쳐진 주거 지역 및 상점들로 구성되었다. 터르노보, 소피아, 비딘, 바르나, 플로프디프, 스코페, 소조폴, 포모리에(안키알로), 네세버르(메젬브리아), 실리스트라(드러스터르) 같은 도시들이 성장하여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403] 요새는 험한 지형에 건설되었고, 요새 안에는 영주의 저택, 교회, 병영 등이 있었다.[418]

터르노보는 마을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언덕에는 차레베츠, 트라페지차 등의 요새와 요새화된 수도원이 세워졌다. 가장 높은 곳에 차레베츠 요새가 구축되었고 내부에는 궁전, 수좌주교구 교회, 귀족들과 그들의 하인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도시 거주민은 봉건 귀족, 도시 상인, 수공업자, 노동자 등으로 다양했으며, 하층민들은 성 밖 얀트라강둑에 거주하였다.[403] 민중들은 움집, 돌벽과 초가 지붕으로 이루어진 주택, 돌로 지어진 이층 주택, 목조 주택 등 다양한 유형의 집에서 생활했다.[416][417]

7. 3. 종교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에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 때부터 나타난 보고밀파와 같은 이단도 널리 퍼져 세력을 확장했다. 보릴 황제 통치 시기에는 차르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 사이에서 보고밀주의가 유행하여 1211년 2월 터르노보 의회는 보고밀주의를 이단으로 선고하고 박해하였다.[419] 그러나 불가리아 사회에 뿌리내린 보고밀주의는 근절하기 어려웠고,[379] 정치적으로 안정된 이반 아센 2세 시대에는 탄압이 완화되었다.[420] 14세기에는 보고밀주의가 민중을 중심으로 확산하면서 다양한 종파가 생겨났다.[421] 이반 알렉산더르 시대의 두 차례 종교 회의에서는 보고밀주의 외에 유대교 등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귀족층에서는 14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에서 제창된 신비주의적 경향의 헤시카주의가 유행하였다. 헤시카주의는 동방 정교회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정교 교리에 편입되어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422] 헤시카주의는 이단, 부패한 성직자,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통합에 대한 비판 수단으로 기능하고,[421] 문학과 예술의 발전에도 공헌했다.[422] 불가리아에서는 터르노보의 테오도시와 그의 제자 에브티미가 대표적인 헤시카주의자였다.

14세기의 새로운 수도원들은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후원 하에 발칸 산맥 북쪽 경사 지역, 특히 터르노보 근처의 '신성한 숲'으로 알려진 곳에 세워졌다. 제국 내의 많은 수도원들은 불가리아 사회의 문화적, 교육적, 정신적 중심지였다. 수도원 부속 학교와 대도시에 있는 교회 부속 학교는 성직자와 서기관의 육성을 목적으로 청년층에 대한 읽기 및 쓰기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아토스 산 수도원, 콘스탄티노폴리스 등에서 교육 받는 사람도 있어 당시의 불가리아에서 실시 된 교육은 높은 수준에 있었다.[423] 현존하는 불가리아 제국의 사본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서법과 정서법은 당시 행해지고 있던 교육의 산물이었다.[424]

중세 필사본의 페이지
헤시카즘의 후원자인 황제 이반 알렉산더의 묘사

7. 4. 문학

중세 불가리아에서는 과거에 그려진 전례서와 잡록의 번역 및 필사본 생성이 활발했다.[424] 이러한 필사본에서는 서체, 편집, 도안, 제본 등에 있어 묘사적인 기교가 발달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 불가리아 문학은 전성기를 맞아 전례서가 증가하고 전통 문학이 발달하였다.[423]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나세스 연대기 번역본, 이반 알렉산더르의 네 복음서, 토미치 시편, 소피아 시편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문예 활동은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터르노보와 아토스산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터르노보의 불가리아 총대주교였던 에브티미는 중세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문예가로 꼽히며 그는 전기, 찬사, 편지, 교회 규칙서 등 넓은 분야에서 집필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웅변적인 문체를 탄생시켰다.[425]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에는 에브티미의 제자들이 활약하여 불가리아의 멸망 후 그의 저작들이 러시아, 세르비아, 왈라키아 등에 전파되었다.

에브티미의 조각상(벨리코 터르노보)


독립 국가 수립과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은 불가리아 문학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수도 터르노보를 중심으로 문학 활동이 전개되었다.[338][340]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불가리아에서는 과거에 그려진 전례서·잡록의 번역과 사본 제작이 활발해졌다.[338][340] 14세기에 중세 불가리아의 문학 활동은 융성해져, 전례서의 증가, 전통 문학의 발달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338] 성자전, 성가 등 새로운 장르도 이 시기에 발생했다.[340]

문예 활동에 참여하는 성직자 중 다수가 아토스 산 파와 터르노보 파 중 하나에 속했으며, 이 두 파가 불가리아의 문예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터르노보 파에 속한 불가리아 총대주교 에브티미는 중세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문예가로 꼽힌다.[342][343] 에브티미는 전기, 찬사, 서간, 교회의 규칙서 등 폭넓은 분야에서 집필 활동을 했으며, 독자적인 웅변적인 문체를 만들어냈다.[343]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활약한 불가리아의 문예가에는 에브티미의 제자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에브티미의 작풍을 러시아,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에 전파했다.[343]

이 시대의 불가리아에서는 규범화된 동방 정교회 성가에 더해 민속적인 교회 선율인 불가리아 창법이 확립되었다.[338][353]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가수로 존 쿠쿠젤리스 (1280년 - 1360년)를 들 수 있다.[338] 쿠쿠젤리스는 교회 음악에 민족 음악의 요소를 도입하여 불가리아와 비잔틴 교회 음악에 변혁을 가져왔다.[353][354]

7. 5. 미술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의 미술은 중세 초기부터 이어져 온 불가리아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비잔티움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서유럽 미술의 요소도 받아들였다.[426] 릴라 수도원을 비롯한 중세 불가리아 교회들에는 당시 회화 작품들이 남아 있으며, 그중에서도 1259년 보야나 교회 벽화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427]

세밀화 또한 발달하여 서적 채색과 삽화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반 알렉산더르의 네 복음서에는 366점의 세밀화가 포함되어 있어 중세 유럽 작품 중에서도 특히 화려한 것으로 꼽힌다.[427] 이반 아센 2세 치세에 수도 터르노보가 발전하면서[346] 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344] 13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는 서적 장정 기술이, 14세기에는 삽화 기술이 발달하였다.[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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