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카 쇼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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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쇼스케는 17세기 초 일본인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인물이다. 그는 161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의 귀국을 돕기 위해 22명의 일본인과 함께 멕시코 아카풀코로 항해했다. 이후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은광 기술을 연구하고 뽕나무를 일본에 가져왔으며, 1611년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함께 일본으로 귀국했다. 1613년에는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함께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가는 사절단을 준비하고, 갤리온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다시 아메리카로 향했다. 다나카 쇼스케의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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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카 쇼스케 | |
---|---|
기본 정보 | |
이름 | 다나카 쇼스케 |
한자 표기 | 田中 勝介 |
로마자 표기 | Tanaka Shōsuke |
직업 | 무역가, 외교관 |
출생 | 알 수 없음 |
사망 | 1620년 (추정) |
생애 | |
초기 생애 |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음. |
활동 시기 |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
주요 활동 | 누에바에스파냐 (현재 멕시코)와의 무역 및 외교 활동 |
업적 | |
무역 활동 | 일본과 누에바에스파냐 간의 무역을 개척 |
외교 활동 | 에스파냐와의 외교 관계 수립 시도 일본인 마을 건설 추진 |
그 외 |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서양 문물 소개 일본의 가톨릭 선교에 기여 |
사건 및 논란 | |
귀국 실패 | 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사절단과 함께 귀국 시도했으나 실패 |
사망 원인 |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62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 |
기타 | |
관련 인물 | 도쿠가와 이에야스 하세쿠라 쓰네나가 루이스 소테로 |
2. 배경
17세기 초, 일본은 남만 무역 시대 초기에 포르투갈, 중국, 네덜란드, 영국과 제한적인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주인선을 통해 아시아 각지와 활발하게 교역했지만, 아메리카 대륙까지 항해한 적은 없었다.[9]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무역, 특히 스페인 제국과의 무역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1609년 9월 30일, 필리핀 전 임시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가 탄 산 프란시스코호가 태풍으로 인해 가즈사국 이와와다 촌(현 오노자쿠마치)에 난파되어 승무원 317명이 구조되었다.[9]
로드리고 데 비베로는 일본에 9개월간 머물면서, 일본과 누에바에스파냐 간의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이 조약에는 태평양 횡단 무역과 멕시코 은광 기술을 대가로 스페인 조선소와 일본 동부에 해군 기지를 제공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2. 1. 일본과 서양의 초기 접촉
17세기 초, 일본은 남만 무역 시대 초기에 포르투갈, 중국, 그리고 덜하지만 네덜란드와 영국과 제한적인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주인선을 통해 아시아 각지와 활발하게 교역했지만, 아메리카 대륙까지 항해한 적은 없었다.[9]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무역, 특히 스페인 제국과의 무역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1608년에 윌리엄 아담스에게 필리핀과의 무역 제안을 교환하도록 요청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609년, 일본 해안에서 난파된 필리핀의 전 임시 총독 로리고 데 비베로 이 아베루시아는 일본과 누에바에스파냐 간의 첫 교환 조약을 협상할 기회를 가졌다. 이 조약에는 태평양 횡단 무역과 멕시코 은광 기술을 대가로 스페인 조선소와 일본 동부에 해군 기지를 제공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1610년 8월 1일, 다나카 쇼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전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의 귀향에 다른 21명과 함께 산 부에나 벤투라에 동승하여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향하여 같은 해 11월 13일에 도착했다.[9] 이는 1609년 9월 30일에 산 프란시스코호가 태풍으로 인해 가즈사국 이와와다 촌(현 오노자쿠마치)에 난파되어 승무원 317명이 구조된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 측근 고토 쇼자부로의 중재로 노비스판으로의 도항을 허가받은 것이다.[7]
1611년 3월 22일, 쇼스케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루이스 데 베라스코가 파견한 답례사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함께 아카풀코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10일 사가미국 우라가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도착했다. 비스카이노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친서를 가지고 답례사와 금은섬 탐색의 사명을 띠고 일본에 왔으며, 현재의 전권대사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비스카이노에 따르면, 쇼스케는 세례를 받아 세례명을 '''프란시스코 데 베라스코'''라고 했으며, 태평양 도해 중 선량한 태도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7]
2. 2. 로드리고 데 비베로의 난파
1609년 9월 30일, 필리핀 전 임시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가 탄 산 프란시스코호가 태풍으로 인해 가즈사국 이와와다 촌(현 오노자쿠마치)에 난파되어 승무원 317명이 구조되었다.[9] 이를 계기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페인과의 무역을 발전시키고자 했다.로드리고 데 비베로는 일본에 9개월간 머물면서, 일본과 누에바에스파냐 간의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이 조약에는 태평양 횡단 무역과 멕시코 은광 기술을 대가로, 스페인 조선소와 일본 동부에 해군 기지를 제공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3. 1610년의 첫 번째 항해 (일본인 최초의 아메리카 도항)
1610년 다나카 쇼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산 부에나 벤투라 호를 타고 누에바 에스파냐로 건너가, 일본인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도항했다. 이 항해는 1609년 가즈사국 이와와다 촌(현 오노자쿠마치)에 표착한 산 프란시스코호의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를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겸했다.[9]
1611년 다나카 쇼스케는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비스카이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전 사절단에 대여한 4,000 두카토를 반환하고, 일본 동쪽의 "금과 은의 섬"을 탐색하는 임무를 받았다. 이들은 1611년 3월 22일 일본으로 출발하여 우라가 항구에 도착했다.[7]
3. 1. 산 부에나 벤투라 호
1610년 8월, 다나카 쇼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22명의 일본인과 함께 산 부에나 벤투라 호를 타고 누에바 에스파냐로 향했다.[9] 이 배는 윌리엄 애덤스의 감독 하에 일본에서 건조된 120톤 규모였다.[7] 프란체스코회 신부 무뇨스도 이 항해에 동행하여 일본과 누에바 에스파냐 간의 무역 관계 협상을 담당했다.
이는 전년도(1609년) 9월 30일 태풍으로 산 프란시스코호가 난파되어 가즈사국 이와와다 촌(현 오노자쿠마치)에 표착, 승무원 317명이 구조된 사건을 계기로,[9] 이에야스의 측근이자 재정가인 고토 쇼자부로의 중재로 누에바 에스파냐 도항이 허가된 것이었다.[7]
3. 2. 누에바 에스파냐 도착 및 활동
1610년 11월, 다나카 쇼스케 일행은 누에바 에스파냐에 도착하여 루이스 데 벨라스코 부왕의 환대를 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과 누에바 에스파냐 간의 무역 관계 협상을 위해 프란체스코회 신부 무뇨스를 함께 보냈으나, 부왕은 일본인들이 대양 횡단 항해술을 익힐까 두려워 산 부에나 벤투라호를 압수했다.[1]스페인 자료에 따르면 다나카 쇼스케는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은광 기술을 연구했는데, 이는 일본이 수입 대금 지불에 은(및 구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본에 매우 유용한 지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뽕나무를 가져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바쳤고, 이에야스는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궁전에 욕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1]
아메카메카 출신의 아즈텍 귀족 치말파힌 콰우틀레와니친(스페인 이름은 도밍고 프란시스코 데 산 안톤 무뇬)의 기록에 따르면, 다나카 쇼스케는 일본과 누에바 에스파냐 간의 상업적 교환을 위한 대사로 간주되어 대우를 받았다. 그는 다나카 쇼스케 일행이 상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검(금속 카타나)을 차고 공식적인 일본 의상을 입고 있었다고 묘사하며, 그들이 온순하고 유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대담해 보였다고 기록했다.[2]
치말파힌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 중 몇 명(최소 3명)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세례를 받기로 결정했으며, 대표단의 수장은 돈 알론소라는 기독교 이름을 받았다.[3][4] 다나카 쇼스케도 세례를 받고 "돈 프란시스코 데 벨라스코 호스케"라는 기독교 이름을 받았다.[7]
1611년 3월, 다나카 쇼스케 일행 중 17명은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고, 3명은 누에바 에스파냐에 남았다.[5]
3. 3. 아즈텍 귀족 치말파힌의 기록
아즈텍 귀족 치말파힌은 자신의 일기에 타나카 쇼스케의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 1610년 12월 16일 목요일 오후 6시, 아마도 19명이나 되는 일본, 중국 사람들이 이곳 멕시코 시티에 도착하여 들어왔다. 그들의 군주인 일본 황제의 궁정에서 온 대사이자 귀족이 그들을 데려와 기독교인들과 평화를 맺어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고 항상 평화를 유지하며 서로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 왔으며, 그리하여 스페인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갈 수 있고 그곳의 누구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본 사람들도 이곳 누에바 에스파냐에 와서 사업을 하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팔기 위해 이곳에 올 수 있으며, 이곳의 누구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보러 온 살리나스 후작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 부왕이 그들에게 알린 내용이다.[1]
치말파힌은 또한 그들이 상인에게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검을 차고 다닐 수 있었고, 공식적인 일본 의상을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입는 것처럼 차려 입고 왔다. 그들은 허리에 묶는 장식된 재킷, 겹옷 또는 긴 블라우스와 같은 것을 입고 다녔다. 그곳에는 그들의 칼로 여겨지는 금속 카타나를 꽂아두었다. ... 그들은 온순하고 유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대담해 보였다.[2]
치말파힌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 중 몇 명(최소 3명)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세례를 받기로 결정했으며, 대표단의 수장은 돈 알론소라는 기독교 이름을 받았다.[3]
> 그들은 진정한 웅장함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멕시코에 거주하는 모든 다양한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사람은 돈 알론소가 된 일본의 귀족이자 군주였다. 경호대장이었던 돈 에르난도 알타미라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4]
타나카 쇼스케도 세례를 받고 "돈 프란시스코 데 벨라스코 호스케"라는 기독교 이름을 받았다.
치말파힌은 타나카의 일행 중 일본인 3명이 누에바 에스파냐에 남기로 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그 그룹의 출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오늘, 1611년 3월 7일 월요일, 멕시코 시민인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가 중국 [필리핀]으로 가는 중국 배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멕시코를 출발했다. 그 당시 그는 일본인들을 데려갔다. 그는 이제 스페인 사람처럼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본 귀족 돈 알론소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는 이곳에 오면서 입었던 옷을 버렸다. 그는 멕시코에서 옷을 갈아입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멕시코에 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그들 중 17명이 집으로 돌아갔고, 3명은 멕시코에 남았다.[5]
4. 1611년 귀국
1611년 3월 22일, 다나카 쇼스케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루이스 데 베라스코가 파견한 답례사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함께 아카풀코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10일 사가미국우라가(가나가와현요코스카시)에 도착했다.[7] 비스카이노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친서를 가지고 답례사와 금은섬 탐색의 사명을 띠고 일본에 왔으며, 현재의 전권대사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이때, 사절단 중 알론소 무뇨스 신부는 이에야스의 사절로서 에스파냐 본국으로 향했고, 3명은 누에바 에스파냐에 남았으며, 쇼스케 외 17명이 귀국했다고 전해진다.
4. 1.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의 동행
1610년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루이스 데 베라스코는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를 일본으로 특사로 파견했다. 1611년 타나카 쇼스케는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5] 비스카이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본 동쪽의 "금과 은의 섬"을 탐색하는 임무를 받았다.[7] 이들은 1611년 3월 22일 일본으로 출발하여 우라가 항구에 도착했다.비스카이노에 따르면, 쇼스케는 세례를 받아 세례명 '''프란시스코 데 베라스코'''를 받았으며, 태평양 항해 중 선량한 태도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7]
5. 1613년의 두 번째 항해
타나카 쇼스케는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협력하여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가는 최초의 공식적인 일본 사절단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613년 하세쿠라가 건조한 500톤 규모의 갤리온 ''산 후안 바우티스타''에 사절단과 140명의 일본인과 함께 아메리카로 다시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근처에서 폭풍으로 인해 배가 손상된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 역시 ''산 후안 바우티스타''에 탑승하여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갔다. 1614년 10월, 4년 전 타나카에 의해 누에바에스파냐에 남겨졌던 일부 일본인 상인들이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귀국을 틈타 일본으로 돌아갔다.
5. 1. 하세쿠라 쓰네나가 사절단과의 관계

타나카 쇼스케는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가는 최초의 공식적인 일본 사절단을 준비하는 데 광범위하게 협력했다.[9][7]
1613년, 하세쿠라가 건조한 ''산 후안 바우티스타'' (갤리온)에 타나카 쇼스케가 사절단 및 140명의 일본인과 함께 아메리카로 다시 출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근처에서 폭풍으로 인해 배가 손상되자,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 역시 ''산 후안 바우티스타''에 탑승하여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갔다.
4년 전 타나카에 의해 누에바 에스파냐에 남겨졌던 일부 일본인 상인들은 1614년 10월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귀국을 틈타 일본으로 돌아갔다.
오늘, 1614년 10월 14일 화요일, 멕시코에서 일본으로 귀국하기 위해 일부 일본인들이 출발했다. 그들은 4년 동안 멕시코에서 살았다. 일부는 아직 여기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에서 가져온 상품을 여기서 거래하고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다.|오늘, 1614년 10월 14일 화요일, 멕시코에서 일본으로 귀국하기 위해 일부 일본인들이 출발했다. 그들은 4년 동안 멕시코에서 살았다. 일부는 아직 여기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에서 가져온 상품을 여기서 거래하고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다.es
타나카 쇼스케가 하세쿠라와 함께 유럽으로 갔는지, 하세쿠라의 귀국을 기다리며 누에바 에스파냐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1614년 10월에 일본으로 돌아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5. 2. 귀국 및 이후 행적
1614년 10월, 타나카 쇼스케가 누에바에스파냐에 남겼던 일부 일본인 상인들이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4년 동안 멕시코에서 살았으며, 일부는 일본에서 가져온 상품을 거래하고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했다.타나카 쇼스케가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함께 유럽으로 갔는지, 하세쿠라의 귀국을 기다리며 누에바 에스파냐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1614년 10월에 일본으로 돌아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참조
[1]
간행물
Annals of his time
1610-12-16
[2]
간행물
Annals of his time
1610-12-16
[3]
뉴스
Shinagawa Shinbun article
http://www.d5.dion.n[...]
[4]
간행물
Annals of his Time
1611-01-23
[5]
간행물
Annals of his time
1611-03-07
[6]
간행물
Annals of his Time
1614-10-14
[7]
서적
1994
[8]
문서
[9]
문서
[10]
서적
田中勝介
朝日新聞社
199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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