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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웅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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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웅 아이는 1924년 남아프리카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화석으로, 인류 진화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발견 당시 학계에서는 이 화석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이후 로버트 브룸, 윌프리드 르 그로스 클라크 등의 지지를 통해 인정받았다. 타웅 아이의 두개골은 직립 보행의 증거를 보였지만, 뇌의 구조 등에서 논쟁이 있었으며, 딘 폴크는 다트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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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웅 아이
기본 정보
타웅 아이
목록 번호타웅 1
명칭타웅 아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연대약 280만 년 전; 사망 당시 3.3세
발굴지남아프리카 타웅
발굴일1924년
발굴자레이먼드 다트

2. 발견

1924년, 타웅 근처 벅스턴 라임 공장의 노동자들은 화석화된 영장류 두개골을 북부 라임 회사의 감독이었던 에드윈 길버트 아이조드에게 보여주었다. 아이조드는 이것을 아들 팻 아이조드에게 주었고, 팻은 벽난로 위에 진열해 두었다. 아이조드 가족의 친구인 조세핀 살몬스가 팻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 두개골을 발견하고 레이먼드 다트에게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1]

살몬스는 비트바테르스랜드 대학교 해부학자였던 다트의 첫 여성 제자였다. 그녀는 두개골을 다트에게 전달했고, 다트는 이것이 중요한 발견임을 인지했다. 다트는 회사에 다른 화석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지질학자 로버트 영이 채석장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A. E. 스페어스 감독은 광부 드 브륀이 모은 화석들을 보여주었다. 영은 그중 책받침으로 사용되던 화석을 포함한 일부 두개골을 다트에게 보냈다.[1] 다트는 상자에서 뇌의 흔적을 보여주는 화석화된 내부 주형(endocast)을 발견하고, 어린 영장류의 두개골과 일치시켰다.[1]

다트는 최초로 화석을 본 지 40일 만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종을 명명하고 "살아있는 유인원과 인간의 중간 단계에 있는 멸종된 원숭이 종족"이라고 묘사한 논문을 완성했다.[3] 이 논문은 1925년 2월 7일 ''네이처'' 저널에 실렸으며,[4] 이 화석은 곧 타웅 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 1. 배경

20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채굴하던 석회암 응회암 지층에서 정기적으로 화석들을 발견했다. 석회암 응회암은 일정하게 형성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동이 생겨 동물들이 은신처로 삼기에 유리한 장소가 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지역에 많은 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채굴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광부들은 이 지역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약을 사용하고 모든 파편들을 버렸다.[1] 그러나 많은 화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광부들은 이 화석들을 보존했다. 많은 화석들은 개코원숭이와 다른 영장류를 포함한 멸종된 동물군의 것이었는데, 더 완벽하거나 흥미로운 화석들은 운영을 관리하는 유럽인들에 의해 진귀한 것으로 간직되었다.[2]

2. 2. 발견 과정

20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채굴하던 석회암 응회암 지층에서 정기적으로 화석들을 발견했다. 석회암 응회암은 일정하게 형성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동이 생겨 동물들이 은신처로 삼기에 유리한 장소가 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지역에 많은 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채굴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광부들은 이 지역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약을 사용하고 모든 파편들을 버렸다.[1] 그러나 많은 화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광부들은 이 화석들을 보존했다. 화석들은 대부분 멸종된 동물군의 것이었는데, 개코원숭이와 다른 영장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 완벽하거나 흥미로운 화석들은 운영을 관리하는 유럽인들이 진귀한 것으로 간직했다.[1]

1924년, 타웅 근처 벅스턴 라임 공장(Buxton Limeworks)의 노동자들이 화석화된 영장류 두개골을 북부 라임 회사(Northern Lime Company)의 방문 감독이었던 에드윈 길버트 아이조드(Edwin Gilbert Izod)에게 보여주었다. 감독은 이를 아들인 팻 아이조드(Pat Izod)에게 주었고, 팻 아이조드는 벽난로 위에 진열해 두었다. 아이조드 가족의 친구인 조세핀 살몬스(Josephine Salmons)가 팻의 집을 방문했을 때, 영장류 두개골을 발견하고 멸종된 원숭이의 두개골임을 알아챘으며, 자신의 스승인 레이먼드 다트에게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1]

살몬스는 비트바테르스랜드 대학교(University of Witwatersrand)의 해부학자였던 다트의 첫 여성 제자였다. 살몬스는 화석화된 두개골을 다트에게 전달했으며, 다트 또한 이것이 중요한 발견임을 인지했다. 다트는 회사에 발굴된 다른 흥미로운 화석 두개골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컨설팅 지질학자인 로버트 영(Robert Young)이 채석장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A. E. 스페어스(A. E. Speirs) 감독은 광부인 드 브륀(Mr. De Bruyn)씨가 모은 화석 영장류 두개골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A. E. 스페어스는 특정 화석을 책받침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영은 그것도 요청했다. 영은 일부 두개골을 다트에게 보냈다.[1] 다트가 상자의 내용물을 조사했을 때, 복잡한 뇌의 흔적을 보여주는 두개골의 화석화된 내부 주형(endocast)을 발견했다. 그는 서둘러 상자 속의 나머지 화석들을 살펴보았고, 얼굴이 납작하고 이가 상당히 작은 어린 영장류의 화석 두개골과 일치시켰다.[1]

3. 특징

타웅 아이의 두개골은 뇌 용량이 400~500cc로, 현대 침팬지 성체의 뇌 용량과 비슷하다. 솟은 이마와 둥근 안와 등 유인원보다 인간에게서 더 흔히 발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코 아랫부분은 침팬지를 닮았지만, 전체적으로 짧은 모양은 인간과 유사하다. 얼굴 아랫부분이 돌출되어 있지만, 현대 유인원보다는 정도가 덜하며, 유인원의 안쪽 턱에 있는 뼈 선반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트는 더 최근에 발견된 직립원인의 유해와 비교하여 더 인간적인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유해를 "인간-유인원"으로 묘사했다.[3]

리 버거는 2006년 타웅 아이의 두개골과 안와의 손상이 독수리에 의해 죽은 현대 영장류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타웅 아이가 독수리나 다른 맹금류에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눈에는 발톱 자국이 있고, 두개골에는 독수리에게 잡아먹힌 생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함몰이 있다.[2]

3. 1. 해부학적 특징

타웅 아이는 원래 젖니가 있었기 때문에 사망 당시 약 6세였던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치아의 법랑질 침착 속도 연구를 바탕으로 약 3세 또는 4세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의 나이에 대해서는 인간의 속도로 자랐는지, 아니면 유인원의 속도로 자랐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논쟁이 있었다. 유인원과 비교하면 약 4세였을 것이고, 인간과 비교하면 약 5~7세였을 것이다.[1] 두개골의 뇌 용량은 400cc~500cc로, 현대 침팬지 성체의 뇌 용량과 비슷하다. 성숙한 뇌 크기는 생후 몇 년 이내에 달성되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크기는 표본이 어린 개체였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두개골은 솟은 이마와 둥근 안와 등 유인원보다 인간에게서 더 흔히 발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코 아랫부분은 침팬지를 닮았지만, 전체적으로 짧은 모양은 인간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얼굴 아랫부분이 돌출되어 있지만, 현대 유인원보다는 정도가 덜하다. 유인원의 안쪽 턱에 있는 뼈 선반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트는 더 최근에 발견된 직립원인의 유해와 비교하여 더 인간적인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유해를 "인간-유인원"으로 묘사하기로 선택했다.[3]

2006년, 리 버거는 타웅 아이의 두개골과 안와의 손상이 독수리에 의해 죽은 현대 영장류에서 관찰되는 손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타웅 아이가 독수리 또는 다른 큰 맹금류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눈에는 발톱 자국이 있고, 두개골에는 독수리에게 잡아먹힌 생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함몰이 있다.[2]

3. 2. 연령 추정

타웅 아이는 원래 젖니가 있었기 때문에 사망 당시 약 6세였던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치아의 법랑질 침착 속도 연구를 바탕으로 약 3세 또는 4세였던 것으로 여겨진다.[1] 아이의 나이에 대해서는 인간의 속도로 자랐는지, 아니면 유인원의 속도로 자랐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논쟁이 있었다. 유인원과 비교하면 약 4세였을 것이고, 인간과 비교하면 약 5~7세였을 것이다.[1]

4. 초기 논쟁



과학자들은 처음에 타웅 아이와 새로운 속(genus)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레이먼드 다트의 논문이 발표된 직후, *네이처*(*Nature*) 지에는 아서 키스,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 등 영국 고인류학 권위자들의 비판이 실렸다.[3] 이들은 필트다운 인 조작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었다.

엘리엇 스미스는 타웅 화석이 "갓난 고릴라침팬지의 두개골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어린 유인원은 "이마의 모양과 완전히 발달되지 않은 눈썹뼈의 부재" 때문에 더 인간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3] 알레시 흐르들리치카는 타웅 아이를 인류 계통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이듬해 다트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매우 독창적으로, 그러나 명백하게 다소 인위적으로 인간화하려고 노력한다"고 비판했다.

셔우드 워시번은 당시 학계 분위기에 대해 "뼈가 객관적인 사실이어서 증거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확립된 믿음의 패턴이 있었다. 아시아에서 이루어진 발견에는 유리하지만 아프리카 출신의 소두류 이족보행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는 유리하지 않은 여론의 분위기가 있었다."라고 평했다.

레이먼드 다트가 발견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인류의 조상임을 학계에서 인정받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그 이유로는 필트다운 인 조작 사건의 영향, 인류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진화했다는 믿음, 호모 속과 유인원의 분기 시점에 대한 오해, 그리고 일부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 등이 있었다. 타웅 아이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많은 반진화론자들이 항의했고, 다트는 신성모독이라는 비난과 함께 여러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자바 원인, 네안데르탈인, 로데시아인 등 다른 화석들이 발견되면서 진화론을 반박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3]

4. 1. 학계의 비판

아서 키스를 비롯한 당시 저명한 학자들은 타웅 아이가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는 레이먼드 다트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타웅 아이가 인류의 조상보다는 침팬지고릴라에 가깝다고 생각했다.[3]

키스는 타웅 아이의 두개골이 어린 유인원의 두개골과 매우 유사하며, 고릴라침팬지와 같은 아프리카 유인원과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타웅 아이의 두개골 주형을 근거로 다트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는 타웅 화석의 중요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와 두개골의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는 타웅 아이가 인류의 직계 조상이 아시아에서 발견될지 아프리카에서 발견될지에 대한 문제와 거의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알레시 흐르들리치카는 타웅 아이를 인류 계통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서 타웅 아이가 인류의 조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필트다운 인 사건: 영국 과학계는 큰 뇌와 유인원과 같은 치아를 가진 필트다운 인 조작 사건에 속아, 타웅 아이의 작은 뇌와 인간과 같은 치아를 가진 타웅 아이를 인류의 조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인류 진화의 기원: 당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진화했다고 믿었다.
  • 호모 속의 분기 시점: 많은 인류학자들은 호모 속이 유인원과 갈라진 시기가 3천만 년 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2백만 년 전에 존재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를 인류의 조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종교적 신념: 일부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타웅 아이가 인류의 조상이라는 주장에 반대했다.[3]


솔리 주커먼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유인원과 거의 다르지 않으며, 두 발로 걷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중간 형태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평생 동안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류의 가계도에 속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4. 2. 논쟁의 이유

과학자들은 처음에 타웅 아이와 새로운 속(genus)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다트의 논문이 발표된 바로 다음 호의 *네이처*(Nature)에서 몇몇 영국 고인류학(paleoanthropology) 권위자들은 다트의 결론을 비판했다.[3]

다트의 전 스승이자 당대 가장 저명한 해부학자 중 한 명인 아서 키스(Sir Arthur Keith)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유인원과 인류 사이의 중간 단계라는 다트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는 새로운 화석의 중요성을 판단하기 전에 더 많은 증거와 두개골의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Sir Arthur Smith Woodward)는 타웅 아이를 "인류의 직계 조상이 아시아에서 찾아야 할지 아프리카에서 찾아야 할지"라는 문제와 "거의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몇 달 후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엘리엇 스미스는 타웅 화석이 "갓난 고릴라와 침팬지의 두개골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유아 유인원은 "이마의 모양과 완전히 발달되지 않은 눈썹뼈의 부재" 때문에 더 인간과 비슷하게 보인다.[3]

1926년, 알레시 흐르들리치카(Aleš Hrdlička)는 타웅 아이를 인류 계통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음 해, 흐르들리치카는 다트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매우 독창적으로, 그러나 명백하게 다소 인위적으로 인간화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Australopithecus africanus*)가 인류의 조상이라는 다트의 주장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데 수십 년이 걸린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국 과학계가 큰 뇌와 유인원(ape)과 같은 치아를 가진 필트다운인의 조작 사건에 속았다는 사실이었다. 인류 조상이 아주 초기 단계에서 큰 뇌를 진화시켰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들은, 타웅 아이의 작은 뇌와 인간과 같은 치아를 보고는 그것이 현생 인류의 조상이 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둘째, 1940년대까지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진화했다고 믿었다.

셋째, 현생 인류가 진화를 통해 출현했다는 것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류학자들은 호모( *Homo*) 속이 유인원과 갈라진 시기가 3천만 년 전이나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불과 2백만 년 전에 존재했던 작은 뇌와 유인원과 같은 특징을 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를 인류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렸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이 화석의 역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1925년 2월 타웅 아이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많은 반진화론자들이 이 화석에 항의하며 일어섰다. 다트는 자신의 생각을 신성모독이라고 선언한 여러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많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 자바 원인, 네안데르탈인, 로데시아인( *Homo rhodesiensis*) 등 다른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면서 진화론을 반박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3]

남아프리카에서 다트 밑에서 해부학을 공부한 솔리 주커먼(Solly Zuckerman)은 1928년 초기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유인원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측정 및 통계적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이 생물들이 두 발로 걷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중간 형태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주커먼은 평생 동안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인류의 가계도에 속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5. 인정

레이먼드 다트의 타웅 아이 분석은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지만,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와 지지를 통해 결국 인류의 조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고생물학자 윌리엄 킹 그레고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류 계통도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근무하던 그레고리는 찰스 다윈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견해, 즉 인간이 아프리카 유인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박물관 관장인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은 인류 기원에 대한 다윈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와 오스본은 공개적인 포럼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논쟁을 벌였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는 오스본의 견해가 우세했다. 1938년, 그레고리는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여 타웅 아이와 로버트 브룸이 최근에 발견한 화석들을 보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를 "더 이상 빠진 것이 없는 잃어버린 고리"라고 불렀다.[3]

5. 1. 로버트 브룸의 역할

1933년 67세에 전문 고생물학자가 된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로버트 브룸은 오랫동안 다트를 지지했다. 브룸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을 발견하여, 타웅 아이를 영장류와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 사이의 전이 형태로 해석한 다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다.


레이먼드 다트가 타웅 아이에게 부여한 종명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가 영장류와 인류 사이의 전이 형태라는 주장은 거의 전적으로 거부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로버트 브룸은 다트를 믿은 몇 안 되는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3] 다트가 ''네이처''(Nature)지에 타웅 아이 발견을 발표한 지 2주 후, 브룸은 화석을 보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다트를 방문했다. 1933년 고생물학자가 된 후, 브룸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의 성체 화석을 발견하고, 더욱 강건한 화석들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결국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Australopithecus robustus)(일명 ''파란트로푸스 로부스투스''(Paranthropus robustus))로 명명되었다. 다트가 인류학 연구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브룸은 더 많은 발굴을 수행했고, 서서히 타웅 아이 분석에서 다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더 많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표본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타웅 아이는 인간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1946년, 브룸과 그의 동료 게릿 셰퍼스는 ''남아프리카 화석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과''(The South African Fossil Men: The Australopithecinae)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들이 발견한 모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출판했다.[3]

1947년, 아서 키스는 ''네이처''(Nature)지에 발표하여 다트와 브룸의 연구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로버트 브룸 박사와 다트 교수가 제출한 증거는 옳았고 나는 틀렸다"라고 말했는데,[3] 타웅 화석과 함께 새로운 증거가 이 화석이 자세, 치아 요소, 그리고 두 발로 걷는 것에서 인간과 유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데 동의했다.

5. 2. 윌프리드 르 그로스 클라크의 역할

윌프리드 르 그로스 클라크는 1947년 타웅 아이를 인류의 조상으로 인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저명한 영국 인류학자였다. 1953년 필트다운인 사기 사건을 폭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클라크는 1946년 말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여 레이먼드 다트의 타웅 두개골과 로버트 브룸의 성체 화석들을 연구했다.[3] 그의 초기 목적은 타웅 아이가 단순한 유인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지만, 2주간의 연구와 브룸이 화석을 발견한 동굴들을 방문한 후, 클라크는 이 화석들이 사람과(Hominidae)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47년 1월, 제1회 전아프리카 고고학 회의에서 클라크는 타웅 아이를 "호미니드", 즉 초기 인류라고 공개적으로 지칭한 최초의 인류학자가 되었다. 이 발표는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1947년 2월 15일 ''네이처''(Nature)지에 클라크의 결론을 알리는 익명의 기사가 게재되었다.[3] 같은 날, 다트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 한 명이었던 아서 키스는 ''네이처''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클라크의 분석을 지지하며, "다트 교수가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밝혔다.[3] 로저 루윈은 그의 저서 ''논쟁의 뼈''(Bones of Contention)에서 "더 신속하고 철저한 항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평가했다.

클라크의 연구와 키스의 지지 선언은 타웅 아이가 인류 진화 계통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학계에 확신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 3. 아서 키스의 입장 변화

레이먼드 다트가 타웅 아이를 발견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라고 명명했을 때, 많은 과학자들은 이 화석이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특히 아서 키스는 다트의 전 스승이자 당대 가장 저명한 해부학자 중 한 명으로, 타웅 아이가 유인원과 인류 사이의 중간 단계라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했다.[3] 그는 타웅 아이의 두개골이 어린 유인원의 두개골과 매우 유사하며, 고릴라침팬지와 같은 아프리카 유인원과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고 주장했다.[3]

그러나 1947년, 키스는 ''네이처''(Nature)지에 로버트 브룸과 다트의 연구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바꿨다.[3] 그는 "로버트 브룸 박사와 다트 교수가 제출한 증거는 옳았고 나는 틀렸다"라고 인정하며,[3] 타웅 아이 화석과 새로운 증거들이 이 화석이 자세, 치아, 그리고 두 발로 걷는 특징에서 인간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키스의 입장 변화는 윌프리드 르 그로스 클라크의 연구 결과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르 그로스 클라크는 1946년 말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여 타웅 아이 두개골과 브룸이 발견한 성체 화석들을 직접 연구했다. 그는 2주간의 연구 끝에 이 화석들이 유인원이 아니라 초기 인류, 즉 사람과(Hominidae)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다.[3]

키스는 1947년 1월 제1회 전아프리카 고고학 회의에서 르 그로스 클라크가 타웅 아이를 "호미니드"라고 칭한 것에 대해, ''네이처''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성체 형태가 발견되면 고릴라와 침팬지와 가까운 친척임이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다트 교수가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썼다.[3] 로저 루윈은 이를 두고 "더 신속하고 철저한 항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평가했다.[3]

6. 분류학적 논쟁

두개골의 누락된 부분 복원 - Arc-Team, Antrocon NPO, Cicero Moraes, 파두아 대학교


얼굴 법의학적 재구성 - Arc-Team, Antrocon NPO, Cicero Moraes, 파두아 대학교


레이먼드 다트가 타웅 아이를 새로운 속(Genus)으로 분류한 것은 당시 화석 증거 부족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타웅 아이 두개골은 성체 침팬지보다 컸지만, 이마가 뒤로 물러나고 눈썹뼈가 없는 특징을 보였다. 척수가 뇌와 연결되는 두개골의 구멍인 대후두공(foramen magnum)이 두개골 아래쪽에 위치하여 직립 보행을 했음을 시사했다.[3]

타웅 아이의 월상구 위치는 레이먼드 다트와 딘 폴크(Dean Falk)를 비롯한 학자들 사이의 주요 논쟁거리였다.

6. 1. 월상구 논쟁

딘 폴크(Dean Falk)는 다트가 타웅 아이의 특정 유인원과 같은 속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다트는 1925년 논문에서 타웅 아이의 뇌가 인간과 유사하다고 주장했지만, 폴크는 월상구의 위치가 유인원과 더 유사하다고 보았다.[3] 반면, 랄프 홀로웨이(Ralph Holloway)는 월상구가 람다봉합 구조 영역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월상구는 내피(endocast)에서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논쟁이 계속되었다.[4]

고생물신경학자들은 뇌의 함몰 부위를 통해 월상구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폴크처럼 유인원과 유사한 위치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에 직면했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은 타웅 아이와 다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표본에서 월상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만, Stw 505라는 새로운 내피 표본은 다트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4]

이후 폴크는 다트가 1929년에 작성했지만 발표되지 않은 원고를 발굴했는데, 이 원고에는 타웅 아이 내피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이 담겨 있었다. 다트는 이 원고에서 14개의 추가 뇌구를 확인하고, 뇌의 세 영역이 전반적으로 확장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뇌의 후방 영역이 먼저 진화했다는 홀로웨이의 주장과 달리, 뇌가 조정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폴크의 믿음과 일치한다.[3]

6. 2. 딘 폴크의 연구

딘 폴크(Dean Falk)는 신경해부학 전문가로서, 다트가 타웅 아이의 유인원과 유사한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다트는 타웅 아이의 뇌가 인간과 유사하다고 주장했지만, 폴크는 월상구의 위치를 분석한 결과 유인원의 뇌 패턴과 더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3]

폴크는 월상구가 두개골의 더 높은 곳, 즉 유인원과 같은 방식으로 위치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뇌의 특정 위치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고생물신경학자들은 뇌의 다양한 함몰 부위를 조사하여 이를 확인하려 했지만, 종종 회의적인 반응에 직면했다.[4]

이후 폴크는 다트가 1929년에 작성한 미발표 원고를 발견했는데, 이 원고에는 타웅 아이의 뇌 주형(endocast)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과 분석이 담겨 있었다. 이 원고에서 다트는 14개의 추가적인 뇌구를 확인하고 설명했으며, 뇌가 세 가지 다른 영역에서 확장된 방식을 상세히 기술했다. 폴크는 이 원고를 통해 자신과 다트가 타웅 아이의 뇌 진화 과정에 대해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음을 확인했다.[3]

7. 포식자

리 버거는 2006년에 타웅 아이가 독수리와 같은 큰 맹금류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이 가설은 타웅 아이의 두개골과 안와 손상이 독수리에게 죽은 현대 영장류의 손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타웅 아이의 눈에는 발톱 자국이 있고, 두개골에는 독수리에게 잡아먹힌 생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함몰이 있었다.[2]

7. 1. 독수리 공격 가설

리 버거는 2006년에 타웅 아이가 독수리나 다른 큰 맹금류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그는 타웅 아이의 두개골과 안와 손상이 독수리에게 죽은 현대 영장류의 손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타웅 아이의 눈에는 발톱 자국이 있고, 두개골에는 독수리에게 잡아먹힌 생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함몰이 있었다.[2]

참조

[1] 논문 Was Taung human or an ape? http://www.nature.co[...]
[2] 논문 Brief communication: Predatory bird damage to the Taung type-skull of Australopithecus africanus Dart 1925 2006-10-01
[3] 서적 The fossil chronicles : how two controversial discoveries changed our view of human evolu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
[4] 논문 Interpreting sulci on hominin endocasts: old hypotheses and new findings 2014
[5] 논문
[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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