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상나라)
1. 개요
탕(상나라)은 하나라 말기의 폭군 걸왕의 폭정에 대항하여 상나라를 건국한 왕이다. 탕은 주변 소국들을 규합하고 걸왕을 공격하여 명조 전투에서 승리하여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펼치고,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금전을 제공하는 등 애민 정책을 펼쳤다. 탕의 치세는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중국 신화와 전설에도 등장하며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 이름 | 탕 (湯) |
|---|---|
| 전체 이름 | 씨: 자(子) 이름: 려(履) 다른 이름: 태을(太乙) |
| 계승 순서 | 상 왕조의 왕 |
|---|---|
| 선대 왕 | 걸 (하나라) |
| 후대 왕 | 외병 대정 (논쟁 중) |
| 사후 시호 | 태조(太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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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체자 | 汤 |
|---|---|
| 병음 | Tāng |
| 웨이드-자일스 | T'ang1 |
| 객가어 발음 | Tong1 |
| 민난어 발음 | Thng/Thong |
| 고대 중국어 | * |
| 관련 정보 | 성탕(成湯) 자려(子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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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세기 통치자 -
아니타
아니타는 기원전 18세기경 아나톨리아의 쿠샤라 왕국 왕으로서 아버지 피트하나의 뒤를 이어 영토를 확장하고 '대왕' 칭호를 사용했으며, 하투샤를 정복하고 파괴한 그의 업적은 히타이트어 문서인 "아니타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
기원전 17세기 통치자 -
태정
태정은 상나라의 인물로, 사기와 갑골문 기록에서 탕왕의 아들이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설과 상나라의 두 번째 왕이라는 설로 나뉘며, 그의 아들인 태갑과 외병이 왕위를 계승했다. -
상나라의 왕 -
태경
태경은 문서 분석 및 통합을 위한 프로세스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분석된 문서 목록, 기존 목차 분석, 통합 목차, 주요 주제 및 세부 주제 등을 포함한다. -
상나라의 왕 -
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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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군주 -
송첸캄포
송첸캄포는 7세기 티베트 야르룽 왕조의 제33대 왕으로, 티베트를 통일하고 불교를 전파했으며, 라싸를 수도로 삼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
창업군주 -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는 살로테 투포우 3세의 아들로 태어나 통가의 총리를 지냈고, 1965년부터 2006년까지 통가의 국왕으로 재임하며 1970년 통가의 완전한 독립을 이끌어냈다.
2. 하나라 말기의 상황과 상나라의 부상
탕은 하나라의 종주권 아래 있던 여러 왕국 중 하나를 17년 동안 통치했다. 제의 통치 기간 동안 상나라는 처음에는 하의 다른 봉신들을 희생시키면서 세력이 커졌다. 탕은 40개나 되는 소규모 왕국으로부터 많은 지지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탕은 제가 백성들을 학대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다. 전설에 따르면 탕은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제의 공포를 감안할 때 천명을 따르고 하나라를 전복해야만 했다고 연설에서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제 자신의 군대 장군들조차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걸왕)의 통치 15년, 탕은 뤼를 수도 보로 옮겼다. 약 2년 후 상나라는 이윤을 제에게 사신으로 보냈고, 이윤은 약 3년 동안 하의 수도에 머물다가 상나라로 돌아왔다.
제의 통치 26년에 상나라는 원을 정복했다. 2년 후 상나라는 곤오의 공격을 받았고, 상나라와 곤오 사이에서 수년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상나라는 여러 전선에서 계속 확장하여 경박에서 봉신 군대를 모았다. 상나라 군대와 연합군은 미수(오늘날의 허난성 신미시), 위를 정복했고, 다음 해에 고를 공격했다. 이때 제의 수석 역사가인 중고가 하에서 상나라로 도망쳤다.
2.1. 걸왕의 폭정
걸왕은 폭정을 펼쳐 정치를 어지럽혔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인심은 하나라로부터 멀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사에서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탕은 이윤의 도움을 받아 걸왕을 공격하여 하나라를 멸망시켰다(명조 전투). 『서경』 상서에는 탕왕이 걸왕을 멸망시킬 때 제후들을 향해 연설했다는 『탕서』가 전해진다.
2.2. 탕왕의 세력 확장
탕은 17년 동안 하나라의 종주권 아래에 있던 여러 왕국 중 하나를 다스렸다. 탕은 40여 개의 소규모 왕국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정도로 민심을 얻었다. 탕은 걸왕이 백성들을 학대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명분 삼아 하나라를 전복하고 천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걸왕의 군대 장군들조차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걸왕 통치 15년, 탕은 수도를 뤼로 옮겼다. 약 2년 후, 탕은 신하 이윤을 걸에게 사신으로 보냈고, 이윤은 약 3년 동안 하의 수도에 머물다가 상나라로 돌아왔다.
탕의 세력은 계속 커져, 걸왕 통치 26년에 원을 정복했다. 2년 후 상나라는 곤오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 수년간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나라는 여러 전선에서 확장을 계속하여 경박에서 봉신 군대를 모았다. 상나라 군대와 연합군은 미수(오늘날의 허난성 신미시), 위를 정복했고, 다음 해에는 고를 공격했다. 이때 걸왕의 수석 역사가인 중고가 하나라에서 상나라로 도망쳐 왔다.
『사기』 「은본기」 등에 따르면, 탕은 이윤의 보좌를 받아 폭정을 일삼던 걸왕을 몰아내고 하나라를 멸망시켰다(명조의 전투). 『서경』 상서에는 걸왕을 멸망시킬 때 제후들을 향해 연설했다는 『탕서』가 기록되어 있다.
탕은 하나라의 우, 주나라의 문왕, 무왕과 더불어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덕이 높아 새나 짐승에게까지 미쳤다고 전해진다.
3. 명조 전투와 상나라 건국
상나라군은 명조에서 하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여 승리했다. 걸왕은 남조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고, 탕왕은 상나라를 건국했다.
탕왕은 하의 우, 주의 문왕, 무왕과 더불어 성인으로 추앙받았으며, 『서경』에는 그가 걸왕을 멸망시킬 때 제후들에게 연설했다는 『탕서』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덕은 새나 짐승에게까지 미쳤다고 전해진다.
3.1. 명조 전투의 전개
상나라군은 명조에서 폭풍우 속에서 걸왕의 하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여 격파했다.
걸왕은 산종으로 도망쳤으나, 상나라 군대는 장군 무자(Wuzi)의 지휘 하에 걸왕을 추격하여 성에서 사로잡았다. 걸왕은 교문에서 체포되어 폐위되었고, 하나라는 멸망했다. 결국 걸왕은 남조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후 탕왕이 최고 통치자가 되어 상나라를 개창했다.
사기 「은본기」 등에 따르면 탕왕은 하의 마지막 왕 걸을 추방하고 하를 멸망시켰다.
걸왕은 폭정으로 정치를 펼쳐 인심이 하로부터 떠나갔다. 탕왕은 이윤의 보좌를 받아 걸왕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명조의 전투).
3.2. 상나라 건국
탕의 치세는 중국인들에게 좋은 시기로 여겨졌다. 그는 세금을 낮추고 징병률을 낮추었다. 그의 영향력은 황하까지 미쳤고, 디족과 강족과 같은 많은 외곽 부족들이 봉신국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안양을 중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탕은 하 왕조를 기념하기 위해 하사(夏社)라고 불리는 궁궐을 지었다. 그의 치세 처음 5년 동안 몇 차례의 가뭄이 있었다. 탕은 가뭄으로 인해 자녀를 팔아야 했던 가난한 가족들에게 금 동전을 만들어 나눠주라고 명령했다. 이 돈으로 그들이 자녀를 다시 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그의 치세 9년째에 그는 우왕이 만든 구정을 상나라 궁궐로 옮겼다.
『사기』 「은본기」 등에 따르면 천을은 하의 마지막 걸을 추방하고 하를 멸망시켰다. 걸은 폭정으로 정치를 펼쳐 인심이 하로부터 떠나갔다. 하의 신하였던 천을은 이윤의 보좌를 받아 걸을 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명조의 전투). 『서경』 상서에는 걸을 멸망시킬 때 제후들을 향해 연설했다는 『탕서』가 있다.
천을은 하의 우, 주의 문왕, 무왕과 더불어 성인으로서 후세에 숭앙받았다. 덕이 높아 새나 짐승에게까지 미쳤다고 전해진다.
4. 탕왕의 치세
탕은 백성을 아끼는 정책을 펼쳐 중국인들에게 좋은 시기로 여겨졌다. 세금을 낮추고 징병률을 낮추었으며, 황하 유역의 여러 부족들이 봉신국이 되었다. 또한 안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탕은 하(夏) 왕조를 기념하기 위해 하사(夏社)라는 궁궐을 지었다. 치세 9년째에는 우왕이 만든 구정을 상나라 궁궐로 옮겼다.
4.1. 애민 정책
탕은 백성을 아끼는 정책을 펼쳤다. 그의 치세는 중국인들에게 좋은 시기로 여겨졌으며, 세금을 낮추고 징병률을 낮추는 등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의 영향력은 황하까지 미쳤고, 디족과 강족과 같은 많은 외곽 부족들이 봉신국이 되었다.
탕의 치세 초기 5년 동안 몇 차례의 가뭄이 있었다. 탕은 가뭄으로 인해 자녀를 팔아야 했던 가난한 가족들에게 금 동전을 만들어 나눠주었고, 이 돈으로 그들이 자녀를 다시 살 수 있도록 하였다.
하(夏)를 멸망시킨 후 7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계속되어 낙천(洛川)이 말라 버렸다. 이에 탕은 상림(桑林)까지 나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스스로를 희생물로 바치려는 마음으로 상제(上帝)에게 기원했다. 그러자 곧 큰 비가 내려 온 나라가 윤택해졌다고 한다.
4.2. 덕치와 안정
탕의 치세는 중국인들에게 좋은 시기로 여겨졌다. 그는 세금을 낮추고 징병률을 낮추었다. 그의 영향력은 황하까지 미쳤고, 디족과 강족과 같은 많은 외곽 부족들이 봉신국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안양을 중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탕은 하 왕조를 기념하기 위해 하사(夏社)라고 불리는 궁궐을 지었다. 그의 치세 처음 5년 동안 몇 차례의 가뭄이 있었다. 탕은 가뭄으로 인해 자녀를 팔아야 했던 가난한 가족들에게 금 동전을 만들어 나눠주라고 명령했다. 이 돈으로 그들이 자녀를 다시 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그의 치세 9년째에 그는 우왕이 만든 구정을 상나라 궁궐로 옮겼다.
탕왕이 하(夏)를 멸망시킨 후 7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계속되어 낙천(洛川)이 말라 버렸다. 이에 탕왕은 상림(桑林)까지 나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스스로를 희생물로 바치려는 마음으로 상제(上帝)에게 기원했다. 그러자 곧 큰 비가 내려 온 나라가 윤택해졌다고 한다.
5. 탕왕에 대한 평가와 전설
탕왕은 여러 중국 신화에서 다양하게 묘사되었으며, 이는 탕왕에 대한 대중적인 묘사와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
탕왕은 종종 "키가 약 2.74m이고, 하얀 얼굴에 수염이 있으며, 머리가 뾰족하고, 팔 관절이 여섯 개이며, 몸의 한쪽이 다른 쪽보다 현저하게 큰 사람"으로 묘사된다.
주역의 상당 부분은 상나라 탕왕이 썼다고 전해진다.
탕왕이 하를 멸망시킨 후 7년 동안 큰 가뭄이 계속되어 낙천(洛川)이 말라 버렸다. 이에 탕왕은 상림(桑林)까지 나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스스로를 희생물로 바치는 마음으로 상제에게 기원했다. 그러자 곧 큰 비가 내려 온 나라가 윤택해졌다고 한다.
5.1. 역사적 평가
탕은 낮은 세금과 징병률, 그리고 황하까지 미치는 영향력으로 중국인들에게 좋은 시기를 가져다주었다. 디족, 강족과 같은 외곽 부족들은 봉신국이 되었고, 안양은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탕은 하 왕조를 기념하는 하사(夏社) 궁궐을 지었고, 가뭄으로 자녀를 팔아야 했던 가난한 가족들에게는 금 동전을 만들어 자녀를 다시 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의 치세 9년째에는 우왕이 만든 구정을 상 궁궐로 옮겼다.
『사기』 「은본기」 등에 따르면, 탕(천을)은 하의 마지막 왕 걸의 폭정에 맞서 이윤의 보좌를 받아 명조의 전투에서 걸을 멸망시켰다. 『서경』 상서에는 걸을 멸망시킬 때 제후들에게 연설했다는 『탕서』가 있다.
탕은 하의 우, 주의 문왕, 무왕과 함께 성인으로 숭앙받았으며, 그의 덕은 새나 짐승에게까지 미쳤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