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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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도는 후한 시대에 등장한 도교의 한 종파로, 간길이 얻었다고 주장하는 《태평청령서》를 기반으로 장각이 창시했다.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통해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교세를 확장했으며, 8개 주에서 10만 명의 추종자를 얻었다. 태평도는 교리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반성하게 하고, 부적 물을 마시게 하는 등의 의례를 행했으며,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태평도는 쇠퇴했지만, 그 사상은 도교에 영향을 미쳤다.
태평도는 동한 순제(126–144) 때 방사 간길(후대 역사에서는 '''우길'''로 언급되기도 함)이 거양현의 연못에서 《태평청령서(太平清領書)》라는 신서(神書)를 얻으면서 기원했다.[3] 간길은 정교한 사찰을 짓고 향을 피우며 도교 경전을 읽는 등의 의례를 시작하고, 타다 남은 부적을 물에 타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며 인기를 얻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순제 시대에 간길의 제자 공숭과 공숭의 제자 상개가 《태평청령서》를 황제에게 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이 책은 장각의 손에 들어가 태평도가 세워졌다.[3]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얻어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파하며 병을 치료했다. 그는 여덟 제자를 전국에 파견하여 "선도"(善道)로 백성들에게 설교, 10년 안에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연주, 예주 8개 주에서 10만 명의 추종자를 얻었다.[4] 장각은 추종자들을 36개 "방"(方)으로 나누었고(큰 방은 1만 명 이상, 작은 방은 7,000명), 장보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으로 칭하며 군사 조직처럼 행동했다.[5]
2. 기원 및 초기 발전
2. 1. 《태평청령서》의 등장
동한 순제(126–144) 때 방사 간길(후대 역사에서는 '''우길'''로 언급되기도 함)은 거양현의 연못에서 《태평청령서(太平清領書)》라는 신서(神書)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정교한 사찰을 짓고 향을 피우며 도교 경전을 읽는 등의 의례를 시작했다.[3] 그는 또한 타다 남은 부적을 물에 타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했고, 그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3]
《후한서》에 따르면, 순제 시대(125–144)에 간길의 제자 중 한 명인 공숭이 《태평청령서》를 황제에게 바쳤으나 주목받지 못했다.[3] 공숭의 제자 상개도 같은 시도를 했지만, 그의 노력 역시 실패했다.[3]
《태평청령서(太平清领书)》는 태평도가 경전으로 삼았던 서적으로, 우길이 곡양의 샘물가에서 얻은 신서라고 전해진다. 이미 소실된 서적이지만, 그 내용은 도교의 일체경인 《도장(道藏)》의 《태평경(Taiping jing)》으로 계승되었다고 여겨진다.
우길은 산동 출신의 방사로, 오행, 의학, 예언에 뛰어났다. 그는 이 《태평청령서》를 병자에게 읽어주고 부적을 마시게 하여 치유를 행했고, 민중은 물론 지배 계층으로부터 널리 존숭을 받았다(우길은 시해(尸解)하여 제사 지내졌다고 전해지는 점에서 태평도에 대한 신선 사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12]
순제 때, 우길의 제자인 궁숭은 《태평청령서》 170권을 조정에 헌상했지만 "요망하고 경박한 책"으로 여겨져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환제 때에는 손제자인 양개가 역시 같은 책을 헌상했지만, 이 또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5][13]
2. 2. 장각과 태평도의 성립
동한 순제 시대(126–144)에 방사 간길(후대 역사에서는 '''우길'''로 언급되기도 함)은 거양현의 연못에서 《태평청령서(太平清領書)》라는 신서(神書)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정교한 사찰을 짓고 향을 피우며 도교 경전을 읽는 등의 의례를 시작했다.[3] 그는 또한 타다 남은 부적을 물에 타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했고, 그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순제 시대( 125–144)에 간길의 제자 중 한 명인 공숭이 《태평청령서》를 황제에게 바쳤으나 주목받지 못했다.[3] 공숭의 제자 상개도 같은 시도를 했지만, 그의 노력 역시 실패했다. 이후, 이 책은 거록군 출신의 장각의 손에 들어가 '''태평도'''가 세워졌다.[3]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얻고 스스로를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파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 그는 여덟 명의 제자를 전국에 파견하여 "선도"(善道)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 10년 안에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연주, 예주의 8개 주에서 10만 명의 추종자를 얻었다.[4]
장각은 추종자들을 36개의 "방"(方)으로 나누었고, 큰 방은 각각 1만 명 이상, 작은 방은 7,000명이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칭호를 부여했다. 장보는 "지공장군"(地公將軍)이었고,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었으며,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었다. 그 이후 태평도의 방식은 군사 조직과 같이 행동했다.[5]
영제 때,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교전으로 교단을 창시하고, 스스로를 대현량사라고 칭했다. 교단명은 그 교전명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13][17]
장각은 병자들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부적 물을 마시게 하며, 구절의 지팡이로 주술을 행하여 치유를 행했다. 치유의 좋고 나쁨은 당사자의 신앙심에 달려 있다고 했다. 장각과 그의 동생들(장보, 장량)이 각각 "대 의사"라고 칭했다는 점에서, 교단 활동에서 큰 비중이 치유 행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8]
후한 후기에 들어 국정의 혼란에 따라 인재와 천재가 빈번했고, 강족의 침입이 잇따라 민중의 피폐는 극도로 높아졌다. 호족에 의한 토지 겸병도 진행되어, 많은 농민이 소작인, 노예, 유민으로 전락하고, 촌락 공동체의 파괴가 진행되었다. 새로운 생활 기반이나 신앙의 의탁처를 찾는 그들의 수용처로서, 태평도는 신도를 늘려갔다.[14][19][20]
3. 교리 및 신앙
3. 1. 주요 교리
장각은 아홉 마디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들고 고통받는다고 설교했다. 사람들이 회복하려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해야 했고, 참회를 하면 장각은 그들에게 부적 물 혼합물을 마시게 했다. 그는 회복한 사람들을 믿음이 컸다고 칭찬했고,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했다.[6] 태평도 신봉자들은 노란색을 숭배했으며, 황제, 노자, 그리고 태일을 숭배했다.[7]
태평도가 경전으로 삼았던 『太平清領書(태평청령서)』는 우길이 곡양의 샘물가에서 얻은 신서라고 전해진다. 비록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은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의 『태평경(Taiping jing)』으로 계승되었다고 여겨진다. 『태평경』을 바탕으로 태평도의 교리를 추측하면 다음과 같다.[13]
후한서 양개전에서는 태평청령서에 대해 "그 말은 음양오행을 근본으로 삼고, 무격의 잡된 말을 많이 섞었다"라고 평가한다. "천지를 받들고 오행에 따른다"는 것이 태평도의 근본 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3]
영제 때,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바탕으로 교단을 창시하고 스스로를 대현량사라 칭했다. 교단명은 그 교전명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13][17] 장각은 병자들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부적 물을 마시게 하며, 구절의 지팡이로 주술을 행하여 치유를 했다. 치유의 결과는 당사자의 신앙심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장각과 그의 동생들(장보, 장량)이 각각 "대 의사"라고 칭했다는 점에서, 교단 활동에서 치유 행위가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18]
3. 2. 신앙 대상
장각은 아홉 마디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들고 고통받는다고 설교했다. 회복을 위해 환자들은 먼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해야 했고, 참회를 하면 부적 물 혼합물을 마시게 했다. 회복한 사람들은 믿음이 컸다고 칭찬했고,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했다.[6] 태평도의 신봉자들은 노란색을 숭배하여 노란 옷과 노란색 머리띠를 착용했으며, 황제, 노자, 그리고 태일(太一)을 숭배했다.[7] 태일은 의인화된 북극성이다.
『태평경』은 『태평청령서』를 잘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16] 『태평경』을 바탕으로 『태평청령서』의 내용과 태평도의 교의를 추측할 수 있다.[13]
후한서 양개전에서는 태평청령서에 대해 "그 말은 음양오행을 근본으로 삼고, 무격의 잡된 말을 많이 섞었다"라고 되어 있다. "천지를 받들고 오행에 따른다"는 것이 태평도의 근본 사상이었다.[13]
영제 때, 황제도를 받들던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교전으로 교단을 창시하고, 스스로를 대현량사라고 칭했다.[13][17] 장각은 병자들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부적 물을 마시게 하며, 구절의 지팡이로 주술을 행하여 치유를 행했다. 치유의 좋고 나쁨은 당사자의 신앙심에 달려 있다고 했다. 장각과 그의 동생들(장보, 장량)이 각각 "대 의사"라고 칭했다는 점에서, 교단 활동에서 큰 비중이 치유 행위에 놓여 있었다.[18]
4. 황건적의 난
거록군 출신의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얻고 스스로를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파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 그는 여덟 명의 제자를 전국에 파견하여 "선도"(善道)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 10년 안에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연주, 예주의 8개 주에서 10만 명의 추종자를 얻었다.[4] 장각은 추종자들을 36개의 "방"(方)으로 나누었고, 큰 방은 각각 1만 명 이상, 작은 방은 7,000명이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칭호를 부여했다. 장보는 "지공장군"(地公將軍)이었고,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었으며,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었다. 그 이후 태평도의 방식은 군사 조직과 같이 행동했다.[5]
장각은 "창천(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라. 해가 갑자년(184년)이 되면, 천하가 태평(이상향)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추연의 오행설에 따라 흙(황색)의 기운이 한나라의 불의 기운을 대체해야 한다고 이론화했다.[8]
마원의가 형주와 양주에서 봉기할 계획을 세웠으나, 중앙 정부가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마원이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한 영제는 장각과 그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장각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10]
기주에 있던 장각의 군단은 11월에 진압되었고, 12월에는 이를 기념하여[30] 광화 7년부터 중평 원년으로 개원되었다. 이것으로써 황건적의 난의 종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청주에 있던 주력 군단은 그 후에도 20년 이상 반란을 계속했고, 여남군이나 영천 등의 제 군단도 반란을 지속하였다. 난 후의 교단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교단은 난과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되지만,[31] 그 중에는 오두미도로 향한 신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4]
4. 1. 봉기 배경
영제 때, 장각은 『태평청령서』를 바탕으로 교단을 창시하고 스스로를 대현량사라 칭했다.[13][17] 장각은 병자들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부적 물을 마시게 하며, 주술을 행하여 치유했다. 이러한 치유의 효과는 당사자의 신앙심에 달려 있다고 했다.[18]후한 후기, 국정 혼란과 잦은 재난, 강족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호족의 토지 겸병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인, 노예, 유민으로 전락하면서 촌락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새로운 삶의 터전과 신앙을 찾는 사람들을 모아 신도를 늘려갔다.[14][19][20]
장각은 8명의 제자를 파견하여 10여 년 동안 화북 일대에서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었다. 신도들을 36개의 "방"으로 나누었는데, "대방"은 1만 명, "소방"은 6,000~7,000명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에는 지도자가 있었다. "방", "대방", "소방"이라는 말은 지도자의 칭호로도 사용되었다.[21]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비슷한 교의를 가지고 종교 기반 사회를 목표로 했으며, 성립 및 활동 시기가 겹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양측 간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22]
장각은 "창천(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라. 해가 갑자년(184년)이 되면, 천하가 태평(이상향)을 알게 될 것이다!"(蒼天已死,黃天當立,歲在甲子(184年),天下大吉)라는 구호를 내걸었다.[8] 추연의 오행설에 따라 흙(황색)의 기운이 한나라의 불의 기운을 대체해야 한다고 이론화했다.[8] 장각의 추종자들은 이 구호를 수도와 각 주의 야문 벽에 적었다.
대방 지도자 마원의는 184년 3월 5일에 형주와 양주에서 수만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마원이는 수도와 인근 도시를 돌아다니며 반란을 준비했고, 궁궐 안의 관리들을 첩자로 삼았다.[9] 그러나 중앙 정부가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마원이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한 영제는 장각과 그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장각은 2월에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10]
4. 2. 봉기 준비
장각은 "창천(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라. 해가 갑자년(184년)이 되면, 천하가 태평(이상향)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8] 추연의 오행설에 따르면 흙(황색)의 기운이 한나라의 불의 기운을 대체해야 한다고 이론화했다.[8] 장각의 추종자들은 이 구호를 수도와 각 주의 야문 벽에 적었다.[9]태평도는 황건적의 난이라는 중국 최초의 대규모 종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봉기를 계획하고 면밀하게 준비했다.[23][24][25] 사람들에게 이변을 예감하게 하기 위해 앞서 말한 슬로건을 유포했다.[25] 보저우 시의 조조의 일족으로 보이는 묘에서 "창천이 죽었다"라고 읽을 수 있는 벽돌(연와)이 출토되어, 태평도의 영향이 조씨 일족에게도 미쳤다고 생각된다.[28] 또한 수도나 지방 관청의 문 등에 백토로 "갑자"라고 쓰게 하기도 했다.
대방 지도자 마원의는 184년 3월 5일에 형주와 양주에서 수만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9] 마원이는 반란을 준비하기 위해 수도와 인근 도시를 돌아다녔고, 궁궐 안의 관리들을 첩자로 삼았다.[9] 더욱이 간부 마원의를 빈번히 수도로 파견하여, 조정 내에서의 책략을 시도하여, 환관 장양 등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25]
그러나 중앙 정부가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마원이는 반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졌다.[9] 한 영제는 장각과 그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장각은 계획을 앞당겨 2월에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10] 내통자로부터 계획 노출 소식을 들은 장각은 즉시 격문을 날려 각 방면에 지시, 예정보다 앞당겨 병사를 일으킨 것은 연락망의 정비, 나아가 교단의 조직력의 높이를 보여준다.[30]
4. 3. 봉기 발발 및 진압
장각은 "창천(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라. 해가 갑자년(184년)이 되면, 천하가 태평(이상향)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며, 추연의 오행설에서 흙(황색)의 기운이 한나라의 불의 기운을 대체해야 한다고 이론화했다.[8] 장각의 추종자들은 이 구호를 수도와 각 주의 야문 벽에 적었으며, 대방 지도자 마원의가 184년 3월 5일에 수만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형주와 양주에서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마원이는 반란을 준비하기 위해 수도와 인근 도시를 돌아다녔고, 궁궐 안의 관리들을 첩자로 삼았다.[9]그러나 중앙 정부가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마원이는 반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한 영제는 장각과 그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장각은 2월에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며, 그 규모는 조정에 충격을 주었다. 새로운 추종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태평도의 길에 합류했다.[10]
황건적의 난은 중국 최초의 대규모 종교 반란이다.[23][24] 장각 등은 교단에 의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면밀하게 준비를 진행했다.[25] 먼저 사람들에게 이변을 예감하게 하기 위해[25]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서리라, 해는 갑자에 있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다"라는 슬로건을 유포했다.[27] 보저우 시의 조조의 일족으로 보이는 묘에서 "창천이 죽었다"라고 읽을 수 있는 벽돌(연와)이 출토되어, 태평도의 영향이 조씨 일족에게도 미쳤다고 생각된다.[28]
또한 수도나 지방 관청의 문 등에 백토로 "갑자"라고 쓰게 하기도 했다. 더욱이 간부 마원의를 빈번히 수도로 파견하여, 조정 내에서의 책략을 시도하여, 환관 장양 등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25] 봉기의 날은 184년 3월 5일로 정해졌지만, 밀고로 인해 계획은 사전에 드러났다.[29]
내통자로부터 계획 노출의 소식을 들은 장각은 즉시 격문을 날려 각 방면에 그 지시에 따라 예정보다 앞당겨 2월 중에 병사를 일으켰다. 이 일은 연락망의 정비, 나아가 교단의 조직력의 높이를 엿보게 한다.[30] 그 때, 신도들은 머리에 노란 두건을 썼기 때문에, 이를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렀다.
기주에 있던 장각의 군단은 11월에 진압되었고, 12월에는 이를 기념하여[30] 광화 7년부터 중평 원년으로 개원되었다. 이것으로써 황건적의 난의 종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청주에 있던 주력 군단은 그 후에도 20년 이상 반란을 계속했고 (또한 그 일부는 조조에게 귀순하여 "청주병"으로서 조조 군의 중핵을 담당했다), 여남군이나 영천 등의 제 군단도 반란을 지속하여, 황건적의 난이 종결된 후에도 황건 잔당군에 의한 전투 행위는 계속되었고, 여러 호족들은 잔당의 토벌에 쫓겼다.
난 후의 교단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교단은 난과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되지만,[31] 그 중에는 오두미도로 향한 신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4]
5. 쇠퇴와 영향
같은 해, 장각은 병으로 사망하고, 장보는 살해당했으며, 장량은 전투에서 전사했다.[11] 황건적은 이후 10년 동안 여러 지역에서 저항했으며, 많은 이들이 나중에 조조의 군대에 합류했다.[11] 태평도는 진나라 이후에도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태평제군 숭배로 이어졌다.
5. 1. 쇠퇴
황건적은 이후 10년 동안 여러 지역에서 저항했으며, 많은 이들이 나중에 조조의 군대에 합류했다.[11] 태평도는 진나라 이후에도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태평제군 숭배로 이어졌다.5. 2. 영향
같은 해, 장각은 병으로 사망하고, 장보는 살해당했으며, 장량은 전투에서 전사했다. 황건적은 이후 10년 동안 여러 지역에서 저항했으며, 많은 이들이 나중에 조조의 군대에 합류했다.[11] 태평도는 진나라 이후에도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태평제군(太平帝君) 숭배로 이어졌다.황건적의 난은 중국 최초의 대규모 종교 반란이다.[23][24] 장각 등은 교단에 의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면밀하게 준비를 진행했다.[25] 먼저 사람들에게 이변을 예감하게 하기 위해[25] ""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서리라, 해는 갑자에 있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다[27], 『후한서』71권 황보숭주각열전 제61 황보숭전[26])라는 슬로건을 유포했다. 보저우 시의 조조의 일족으로 보이는 묘에서 "창천이 죽었다"라고 읽을 수 있는 벽돌(연와)이 출토되어, 태평도의 영향이 조씨 일족에게도 미쳤다고 생각된다.[28]
또한 수도나 지방 관청의 문 등에 백토로 "갑자"라고 쓰게 하기도 했다. 간부 마원의를 빈번히 수도로 파견하여, 조정 내에서의 책략을 시도하여, 환관 장양 등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25] 봉기의 날은 184년 3월 5일로 정해졌지만, 밀고로 인해 계획은 사전에 드러났다.[29]
내통자로부터 계획 노출 소식을 들은 장각은 즉시 격문을 날려 각 방면에 그 지시에 따라 예정보다 앞당겨 2월 중에 병사를 일으켰다. 그 때, 신도들은 머리에 노란 두건을 썼기 때문에, 이를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렀다.
기주에 있던 장각의 군단은 11월에 진압되었고, 12월에는 이를 기념하여[30] 광화 7년부터 중평 원년으로 개원되었다. 청주에 있던 주력 군단은 그 후에도 20년 이상 반란을 계속했고, 그 일부는 조조에게 귀순하여 "청주병"으로서 조조 군의 중핵을 담당했다. 여남군이나 영천 등의 제 군단도 반란을 지속하여, 황건적의 난이 종결된 후에도 황건 잔당군에 의한 전투 행위는 계속되었고, 여러 호족들은 잔당의 토벌에 쫓겼다.
난 후의 교단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교단은 난과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되지만[31], 그 중에는 오두미도로 향한 신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4] 『태평청령서』의 잔권인 『태평경』이 도교의 중요 경전으로 존중되어 온 것을 생각하면, 태평도의 사상은 그 후에도 도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31]
6.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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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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