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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스테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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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르 스테그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여러 차례 장관직을 역임했으며 하원 및 상원 의원을 지냈다. 그는 1868년 프랑스 리부른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고 철학 아그레가시옹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후 공교육 및 미술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알제리 총독과 모로코 총독을 차례로 지냈다. 알제리 총독 재임 중 관개 사업을 추진하여 "물의 총독"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모로코 총독으로 재임하며 리프 전쟁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프랑스 정착민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다. 1930년대에는 식민부 장관과 국무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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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스테그
기본 정보
테오도르 스테그
테오도르 스테그
직위
국무 장관1938년 3월 13일
1938년 4월 10일
총리레옹 블룸
프랑스 총리1930년 12월 13일
1931년 1월 27일
대통령가스통 두메르그
이전앙드레 타르디외
이후피에르 라발
식민지 장관1938년 1월 18일
1938년 3월 13일
총리테오도르 스테그 (자신)
이전프랑수아 피에트리
이후폴 레노
식민지 장관1930년 12월 13일
1931년 1월 27일
총리테오도르 스테그 (자신)
이전마리우스 무테
이후마리우스 무테
모로코 주재 총독1925년 10월 4일
1929년 1월 1일
이전앙리 구로
이후뤼시앙 생
법무부 장관1930년 2월 21일
1930년 3월 2일
총리카미유 쇼탕
이전뤼시앙 위베르
이후카미유 쇼탕
법무부 장관1925년 4월 17일
1925년 10월 4일
총리폴 팽르베
이전르네 르눌
이후아나톨 드 몽지
알제리 총독1921년 7월 28일
1925년 4월 17일
이전장바티스트 아벨
이후모리스 비올레트
내무부 장관1920년 1월 20일
1921년 1월 16일
총리알렉상드르 밀랑
조르주 레그
이전쥘 팜
이후피에르 마로
내무부 장관1917년 9월 1일
1917년 11월 16일
총리폴 팽르베
이전루이 말비
이후쥘 팜
내무부 장관1912년 1월 14일
1913년 1월 21일
총리레몽 푸앵카레
이전조제프 카이요
이후아리스티드 브리앙
공공 교육 및 미술 장관1917년 3월 20일
1917년 9월 12일
총리알렉상드르 리보
이전르네 비비아니
이후샤를 다니엘-뱅상
공공 교육 및 미술 장관1913년 1월 21일
1913년 3월 22일
총리아리스티드 브리앙
이전가브리엘 기스타우
이후루이 바르투
공공 교육 및 미술 장관1911년 3월 2일
1912년 1월 14일
총리조제프 카이요
이전모리스 포르 (정치인)
이후가브리엘 기스타우
개인 정보
출생일1868년 12월 19일
출생지리부른, 지롱드, 프랑스
사망일1950년 12월 19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정당급진당

2. 초기 생애 및 교육

테오도르 스테그는 리부른의 대학과 파리의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파리 대학교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1887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90년에는 법학 학사와 문학 학위를 취득하였고, 1895년에는 철학 아그레가시옹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1897년, 그는 페르디낭 뷔송, 모리스 부쇼르, 에밀 뒤클로, 폴린 케르고마르와 함께 교육 개혁을 위한 "국민 연합"을 공동 설립하고 2년 동안 서기를 맡았다.

페르디낭 뷔송, 스테그와 함께 교육 개혁을 위한 "국민 연합"을 공동 설립

2. 1. 출생 및 가계

쥘 조제프 테오도르 스테그는 1868년 12월 19일 프랑스 리부른 지롱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계였으며,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나중에 이 사실을 가지고 그를 공격했다. 그의 아버지 쥘 스테그(1836–1898)는 개신교 목사였으며, 나중에 언론인이자 국민 의회의 급진파 의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840년 오르테즈 바스피레네에서 태어난 안-마리 조에 투이에스였다.

1892년 10월 25일, 테오도르 스테그는 네덜란드 도르드레흐트에서 1872년 6월 14일에 태어난 에왈딘 보네-모리와 결혼했다. 그녀는 국립 연구소 통신 회원이자 레지옹 도뇌르 기사였던 가스통 보네-모리의 딸이었으며, 정부 건축가 르쾨르의 처제였다. 이들 부부는 세 딸을 두었는데, 장녀인 쥘리에트 이자벨은 1894년 4월 14일에 태어났으며, 의사가 되었고 역시 의사와 결혼했다.

2. 2. 학업

테오도르 스테그는 리부른의 대학과 파리의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파리 대학교 및 법학부에 입학하여 1887년에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1890년에는 법학 학사 및 문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철학 아그레가시옹 시험을 준비하여 1895년에 1등을 차지했다.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알자스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반 대학교와 니오르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알자스 학교와 샤를마뉴 고등학교에서 1904년까지 철학을 가르쳤다.

2. 3. 결혼

테오도르 스테그는 1892년 10월 25일 네덜란드 도르드레흐트에서 에왈딘 보네-모리(Ewaldine Bonet-Maury, 1872년 6월 14일 출생)와 결혼했다. 그녀는 국립 연구소 통신 회원이자 레지옹 도뇌르 기사였던 가스통 보네-모리의 딸이었으며, 정부 건축가 르쾨르의 처제였다. 스테그 부부는 세 딸을 두었다. 장녀인 쥘리에트 이자벨은 1894년 4월 14일에 태어났으며, 의사가 되었고, 역시 의사와 결혼했다.

3. 정치 경력

테오도르 스테그는 1904년 센 주의 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35세의 나이로 1904년 지방선거에서 급진 사회주의자로 출마, 에밀 뒤부아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파리 14구의 두 번째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부의원 시절, 스테그는 아동 보호와 교육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05년에는 변호사가 되었고, 1906년과 1910년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1906년에는 우편 및 전신 담당 예산 위원회에, 1907년에는 공교육 예산 보고관으로 임명되었다.

1911년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을 맡았다. 같은 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발생하자, 스테그는 행정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기본적인 공화주의 원칙을 지지하는 누벨 소르본 운동을 옹호했으며, 소르본 대학교 개혁 수정 청원을 거부했다.

1912년 레이몽 푸앵카레 내각에서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튀니스 정신과 신경과 학회에서 식민지 정신 질환 치료 시설 부족 문제를 제기하자, 알제리 총독 샤를 루토와 협력하여 개선 계획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1914년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블리다에 정신병원 건설을 권고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실행이 지연되었다.

1913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에서는 잠시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직을 다시 맡았다가, 의회로 돌아가 모리스 비올레트와 함께 사생아 관련 민법 개선에 힘썼다.

모리스 비올레트, 스테그와 함께 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스테그가 모로코 주재 총독이었을 때 알제리 총독이었다.


1914년, 스테그는 아타나스 바시네의 후임으로 센 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민주 좌파에 합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재무 위원회와 여러 특별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7년 알렉상드르 리보 내각에서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국가 보호자 법을 채택했다. 이후 폴 팽르베 내각에서 잠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20년, 스테그는 알렉상드르 밀레랑 내각의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우파가 선거에서 승리한 상황에서 급진 사회주의자인 스테그의 임명은 논란이 되었지만, 밀레랑은 스테그를 임명하고 입장을 굳혔다.

스테그는 노동 총동맹 (CGT)이 주도한 1920년 총파업에 대처해야 했다. 정부는 파업을 강제로 종료하기 위해 움직였고, 스테그는 국가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시도를 범죄 행위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결국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스테그는 조르주 레이그 내각에서도 내무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1921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이 구성되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나 새로운 일반 행정, 부서 및 공동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 1. 하원의원 (1904–1914)

테오도르 스테그는 1904년 센 주의 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5세였다. 1904년 5월 7일에 사망한 에밀 뒤부아를 대신하기 위한 보궐 선거에서 급진 사회주의자로 출마하여, 1904년 7월 24일 파리 14구의 두 번째 선거구에서 결선 투표를 통해 당선되었다. 부의원으로서 스테그는 아동 보호 및 교육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1905년 파리에서 변호사가 되었고, 1906년과 1910년에는 더 많은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1906년에는 우편 및 전신을 담당하는 예산 위원회에 선출되었으며, 1907년에는 공교육 예산에 대한 보고관으로 임명되었다.

1911년 3월 2일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스테그는 이 사건에 대한 행정 조사를 시작해야 했다. 스테그는 기본적인 공화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누벨 소르본 운동의 지지자였으며, 정부가 추진했던 1902년 소르본 대학교 개혁을 수정하라는 청원을 거부했다.

1912년 1월 14일 스테그는 레이몽 푸앵카레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 해 튀니스 정신과 신경과 학회에서 식민지의 정신 질환 치료 시설 부족 문제를 지적했고, 스테그는 알제리 총독인 샤를 루토와 협력하여 식민지의 정신과 치료 개선을 위한 계획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1914년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블리다에 정신병원을 건설할 것을 권고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실행이 지연되었다.

1913년 1월 21일, 스테그는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세 번째 및 네 번째 내각에서 잠시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직을 다시 맡아 1913년 3월 21일까지 재직했다. 이후 의회로 돌아가 모리스 비올레트와 함께 사생아에 관한 민법에 인도적인 개선을 도입했다.

3. 2. 상원의원 (1914–1921)

1914년 3월 12일, 테오도르 스테그는 1914년 2월 12일 사망한 아타나스 바시네의 후임을 뽑는 센(Seine) 선거에 출마하여 결선 투표에서 당선되었다. 스테그는 민주 좌파에 합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은 1914년 7월에 시작되었다.

1915년 스테그는 재무 위원회와 여러 특별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7년 3월 20일, 알렉상드르 리보의 다섯 번째 내각에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으로 합류하여 국가의 보호자 법을 채택했다. 1917년 9월 12일, 프랑스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폴 팽르베가 리보의 뒤를 이었다.

스테그는 팽르베 내각에서 잠시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다가 1917년 11월 16일에 사임했다.

1918년과 1919년 스테그는 다시 의원직으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11일 상원 재선에 출마하여 1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1920년 1월 20일, 스테그는 알렉상드르 밀레랑 내각의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우파가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 민감한 자리에 급진 사회주의자를 임명하는 것은 논란이 되었다. 레옹 도데는 스테그를 공격하며 밀레랑에게 스테그의 지명을 철회하도록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밀레랑은 부분적으로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정당 노선을 초월하는 "공화주의 연합"을 형성하려는 열망 때문에 그의 친구를 임명하고 입장을 굳혔다.

스테그는 1920년 5월 1일 노동 총동맹 (CGT)이 시작한 총파업에 대처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운송 노동자, 그 다음에는 광부, 선원, 부두 노동자, 금속 노동자 및 기타 직업인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정부는 파업을 강제로 종료하기 위해 움직였다. 1920년 5월 20일 스테그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국가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시도를 범죄 행위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파업은 실패로 끝났고, 마지막 노동자들이 1920년 5월 28일에 복귀했다.

스테그는 1920년 9월 24일 조르주 레이그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1921년 1월 16일 내각을 구성했을 때, 스테그는 장관직을 떠났다. 그는 새로운 일반 행정, 부서 및 공동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4. 식민 행정

테오도르 스테그는 식민 행정 분야에서 뛰어난 경력을 쌓았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알제리 총독을, 1925년부터 1929년 1월까지 모로코 총독을 역임했다.

알제리에서는 무슬림의 정치적 권리 요구와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의 반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는 관개 사업을 추진하여 '물의 총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서부 사하라 지역의 안정을 위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협력했다.

모로코에서는 리프 공화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고, 프랑스 정착민 증가와 관개 사업 추진 등 식민지 정책을 강화했다. 그의 정책은 토착 엘리트들의 권력 약화와 인종 갈등 심화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1. 알제리 총독 (1921–1925)

뤼시앵 생은 1921년부터 1929년 1월까지 튀니지의 프랑스 총독이었으며, 모로코에서 스테그의 뒤를 이었다.


스테그는 1921년 7월 28일 식민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무슬림 알제리인들은 참호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웠고, 이에 따라 정치적 권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2월 4일의 존나르 법은 무슬림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고,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과도한 양보로 여겨졌다.

1922년 4월, 알렉상드르 밀레랑 대통령은 무슬림 유권자 수 증가에 대한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의 우려를 해소하고, 프랑스가 그들의 이익을 계속 보호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기 위해 알제리를 방문했다. 스테그는 알제리 지사가 영향력 있는 아미르 칼리드 이븐 하심(1875–1936)의 입장 발표를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했다. 칼리드는 밀레랑에게 "인종이나 종교의 구별 없이 알제리의 주민들은 모두 프랑스의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의회에서 대표를 요청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스테그는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의 시기를 이끌 수 있었다. 급진주의자였던 스테그는 식민지에서 자비로운 민간 행정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토지 소유주가 지배하는 현지 정착민 의회가 세금 징수 및 지출을 통제하는 알제리의 시스템을 물려받았다. 이 의회는 사회 프로젝트보다는 경제 활성화 지출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테그가 블리다의 정신병원을 위한 1914년 계획을 재제출했을 때, 의회는 자금 승인을 지연시켰다.

스테그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주요 관개 사업을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모로코에서도 반복될 정책이었다. 그는 "물의 총독"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테그는 서부 사하라의 ''레조'' (투아레그 습격)와 싸우는 알제리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AOF) 군대 간의 협력을 지원했다. 이는 북-남 수송 경로 개발을 막는 지속적인 불안의 원인이었다. 1923년 2월, 그는 알제에서 모로코의 마르셸 위베르 리오테와 튀니지의 뤼시앵 생을 만나 공통의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서부 사하라를 임의의 경계를 무시하고 전체로 취급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국경을 넘는 유목민의 이동은 허용하되, 밀수는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알제리-모로코 합동 경찰 부대가 포르타사 라르비아 기지에서 운영될 예정이었다.

1925년 4월 17일, 스테그는 파넬베의 두 번째 내각에서 법무부 장관이 되기 위해 예상치 못하게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파넬베는 보수적인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스테그, 브리앙, 카이요, 몽지, 라발과 같은 좌파 정치인이 필요했다. 알제리에서 스테그의 뒤를 이어 비올레가 총독이 되었다.

4. 2. 모로코 총독 (1925–1928)

압드 엘-크림이 1926년 인도양의 레위니옹으로 망명하기 위해 페스-탕헤르 열차에 탑승하는 모습


1925년 4월, 압드 엘-크림은 스페인령 모로코의 리프 지역에서 독립적인 리프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프랑스령 모로코로 진입했고,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수도인 페스를 위협했다. 총독인 위베르 리오테는 1925년 9월 3일 필리프 페탱에게 군사 사령관직을 넘겨주었다. 1925년 10월 11일, 스테그는 리오테를 대신하여 평화를 회복하고 군사 정부에서 민간 정부로의 전환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아 총독직에 임명되었다. 리오테는 모로코를 식민지로 확보한 그의 업적에 대해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스테그는 리프 지역 사람들에게 자치를 부여하려 했지만 군대에 의해 거부당했다. 압드 엘-크림은 1926년 5월 26일 페탱에게 항복했고, 1947년까지 억류되었던 인도양의 레위니옹으로 추방되었다. 스테그는 압드 엘-크림이 "칭찬도 받지 않고 굴욕도 당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테그는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알제리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고, 더 많은 프랑스인들을 행정부에 데려왔다. 그가 도착했을 때 모로코에는 66,000명의 유럽인이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프랑스 시민이었다. 스테그는 더 많은 프랑스 정착민들을 이 나라로 데려오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재임 첫 3년 동안 그의 전임자가 13년 동안 데려온 정착민 수만큼 모로코에 데려왔다. 1927년 1월 4일 칙령을 발표하여 엘 칸세라 댐과 베스에 있는 댐, 그리고 그해에 시작된 N'피스 댐과 같은 대규모 관개 사업을 위한 기금을 조성했다. 그의 "그랑 바라주"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250000ha의 토지에 연중 관개를 제공할 계획이었다. 관개는 프랑스 정착민들을 위한 새로운 토지를 확보하고, 더 조밀한 정착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스테그는 세계 시온주의 기구의 ''하-올람'' 저널을 일시적으로 금지했지만, 일반적으로 친시온주의 신문의 발행을 허용하고 시온주의 활동을 허용했다. 1926년 프랑스 인권 연맹 회의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무슬림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받은 모로코 유대인들은 프랑스 시민이 되기 위해 지원할 수 있어야 했다.

만년의 스테그


일부 관찰자들은 리오테가 모로코인들에 대해 보여준 공감과 그들의 관습에 대한 존중에서 스테그의 토지 수용 및 프랑스 식민지화 정책으로의 변화에 놀랐는데, 이는 두 민족 간의 적대감을 고조시킬 것이 분명해 보였다. 스테그는 토착 간부들을 프랑스 행정에 동화시켜 두 집단 간의 경쟁을 피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는 이것이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느꼈다. 리오테와는 대조적으로, 스테그는 술탄과 다른 모로코 엘리트들과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1927년 그가 새로운 술탄으로 시디 무함마드 벤 유세프를 선택한 것은 그의 뜻에 따르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 통치자를 원했기 때문일 수 있다.

스테그의 정책 결과로 전통적인 엘리트들은 권력을 잃고, 목축업자와 자급자족 농부들이 토지를 떠나 도시에서 임금을 받고 일하게 되었다. 많은 새로운 ''식민지 개척자''들이 알제리에서 왔고, "원주민"을 비숙련 노동자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인종적 긴장이 증가했다. 모로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력 부족이 발생했다. 스테그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노동자들에게 프랑스와 동일한 보호를 제공하고 노동 보호를 위한 기구를 만들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런 조치로 혜택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토착민들 때문에 그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집트에 기반을 둔 마그레빈 연합과 엘 문타다 엘 아바디를 포함하여 공산주의 또는 범이슬람주의 목표, 또는 둘 다를 가진 다양한 "선동적" 조직이 등장했다. 1927년 12월 27일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스테그는 마그레빈 연합이 페스, 카사블랑카, 탕헤르 도시에 1,500명의 지지자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수르테는 이러한 그룹을 감시하며 지도자들을 정기적으로 체포하고 투옥하고 자료를 압수했다.

1927년 5월 알제에서 제4차 북아프리카 회담이 열렸다. 스테그는 모로코 대표로, 모리스 비올레는 알제리 대표로, 루시앙 생은 튀니지 대표로 참석했다. 프랑스 서아프리카의 쥘 카르데 장군은 식민부 정치 담당 이사인 알베르 뒤센이 대표했다. 스테그는 아틀라스 산맥 남쪽 지역의 반체제를 억제하기 위해 더 단호하게 행동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모로코군은 여전히 고 아틀라스 북부의 저항을 제거하기 위한 느린 캠페인에 묶여 있었다. 알제리와 모리타니의 군대가 모로코 영토에 진입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지만, 모로코가 서사하라를 평정하는 데 나중에 참여하는 것을 침해하지는 않았다.

1927년 스테그는 상원에 재선되었다. 1928년 푸졸, 지롱드, 칸톤 선거가 열렸을 때 스테그는 센 강원 상원의원직을 유지하면서 모로코에서 직책을 유지할 수 없었다. 스테그는 1929년 1월 모로코 레지던스를 떠났고 루시앙 생이 그를 대신했다.

5. 후기 정치 경력 (1929–1950)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스테그는 식민지 위원회 위원 및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외무 위원회, 알제리 위원회, 교육 위원회에도 소속되었다. 1930년 2월 21일부터 3월 1일까지는 카미유 쇼탕의 단명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여 뤼시앵 위베르의 뒤를 이었고, 라울 페레가 그의 후임이었다.

1930년 12월 초, 앙드레 타르디외 정부가 상원 투표에서 패배한 후, 스테그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정부는 이전 정부들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었다. 스테그는 1930년 12월 13일에 의회 의장직과 동시에 식민부 장관직을 수락했다. 우익 단체인 ''아크시옹 프랑세즈''는 새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국방부 장관인 루이 바르투를 "미치광이, 악랄하고 부패한 자"라고 묘사했고, 프로이센인의 아들과 손자인 스테그를 반역자로 몰았다. 스테그는 상원의 지지를 받았지만, 하원에서 안정적인 다수를 얻지 못해 1931년 1월 22일 농업 정책과 밀 투기에 대한 투표에서 패배하여 자리에서 물러났다.

루이 바르투, 스테그 내각의 국방부 장관.


1936년 1월 14일, 스테그는 다시 상원에 선출되어 식민지 위원회 의장, 외무 위원회, 알제리 위원회, 교육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레옹 블룸의 첫 번째 정부 (1936년 6월 4일 – 1937년 6월 22일)에서 스테그는 프랑스 식민 제국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연구하는 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북아프리카 소위원회에는 폴 레노, 앙리 베랑제, 샤를-앙드레 쥘리앙, 폴 리베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었으며, 1937년 7월 8일 회의에서 마그레브의 노동 조건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광범위하고 격렬한 노동 불안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고, 이는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1938년 1월 18일부터 3월 13일까지 스테그는 카미유 쇼탕의 다섯 번째 내각에서 잠시 식민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마다가스카르에 유대인 난민을 정착시키려는 마리우스 무테의 계획에 반대하며, 유대인 정착민들이 토지 경작 기술이 부족하고 "지역 경제와 원주민의 희생으로" 소규모 상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계획이 너무 비싸고 언론의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유대인들이 유대인 식민 협회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스테그는 레옹 블룸의 두 번째 내각에서 국무 장관을 역임했다 (1938년 3월 13일 – 1938년 4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7월 10일 비시 회의에서 스테그는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헌법적 권한을 이전하는 투표에 기권했다. 테오도르 스테그는 1950년 12월 19일, 82세 생일에 파리 14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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