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뷔송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르디낭 뷔송은 1841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교육자, 철학자, 정치가이자 192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그는 자유주의 개신교 신자로서 스위스 망명,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후 교육 개혁에 참여하여, 무상, 의무, 비종교성을 골자로 하는 쥘 페리 법 제정에 기여했다. 뷔송은 교육학 사전 편찬, 드레퓌스 사건 관련 인권 연맹 활동을 통해 정교 분리, 여성 참정권, 평화 운동을 지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독일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사상은 현대 프랑스의 라이시테 논쟁에 영향을 미쳤으며, 교육과 사회 개혁에 대한 그의 공헌은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개신교도 - 폴 리쾨르
폴 리쾨르는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해석학을 융합한 해석학적 현상학을 발전시켰으며, 철학, 윤리학, 언어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이 있는 사상을 제시하고 2005년에 사망했다. - 프랑스의 개신교도 -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평론가로,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실존주의 문학에 영향을 미쳤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을 작품에 투영했으며, 동성애 옹호, 식민주의 비판, 소련의 실상 폭로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로 194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1841년 출생 -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웨일스 공으로 오랜 기간 지내다가 1901년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외교에 힘쓰고 9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다 사망했다. - 1841년 출생 - 귀스타브 르 봉
귀스타브 르봉은 프랑스의 다방면 저술가로, 특히 『군중 심리』를 통해 사회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인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 안 륄리에
안 륄리에는 고차 고조파 발생 연구를 통해 아토초 펄스 생성 및 응용 분야를 개척하여 202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 르네 카생
르네 카생은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인권 운동가로서, 세계 대전 참전과 국제 연맹 활동, 자유 프랑스 합류,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 기여, 유럽인권재판소 재판장 역임, 유대인 인권 보호 등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페르디낭 뷔송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페르디낭 에두아르 뷔송 |
로마자 표기 | Ferdinand Édouard Buisson |
출생일 | 1841년 12월 20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
사망일 | 1932년 2월 16일 |
사망지 | 티우로와-생-앙투안,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
종교 |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 |
직업 | |
직업 | 철학자, 교육학자, 정치인 |
기타 이름 | 해당 사항 없음 |
알려진 업적 | 노벨 평화상 (1927),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크루아 (1924) |
소속 정당 | 급진 사회당 |
학력 | |
출신 학교 | 파리 문과대학(박사) |
경력 | |
경력 | 뇌샤텔 대학교 교수 공교육부 초등 교육 국장 (1879-1896) 교육 연맹 회장 (1902-1906) 인권 연맹 회장 (1913-1926) 소르본 대학교 교육학 강좌 교수 |
수상 | |
수상 | 노벨 평화상 (1927, 독불 융화에 기여) |
2. 생애
페르디낭 뷔송은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철학 아그레가시옹을 받았다. 자유주의 개신교 신자였던 그는 1866년부터 1870년까지 제2제정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망명했다.[2] 뇌샤텔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평화 자유 연맹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2]
제3공화국 수립 후 프랑스로 돌아온 뷔송은 파리 17구 시정부에서 활동하며, 17구 시립 고아원 원장을 맡았다.[2] 이후 쥘 시몽과의 인연으로 파리 학교 교장이 되었다.[2] 1879년부터 1896년까지는 쥘 페리에 의해 초등 교육부에서 일하며 세속주의 법 작성 및 설계를 감독했고, 1890년에는 소르본 대학교 교육학 교수가 되었다.[1]
1905년, 뷔송은 정교분리 법 초안을 작성한 의회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1] 알프레드 드레퓌스 지지자로서 프랑스 인권 연맹 창설에 참여했고, 1913년부터 192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22] 1902년부터 1914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직업 교육과 여성 참정권을 옹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성스러운 연합을 옹호했다.[2] 전후에는 프랑스-독일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며, 국제 연맹을 지지했다.[3] 루르 점령 이후에는 독일 평화주의자들을 파리로 초청하고 베를린을 방문하기도 했다.[3]
뷔송은 ''교육 및 초등 교육 사전''의 주 계약자로서 350명 이상의 협력자와 함께 작업했다.[4] 이 사전은 세속적이고 공화적인 학교 시스템의 "성경"으로 간주된다.[4]
뷔송은 교육 및 평화 운동에 대한 공로로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
수상 내역 |
---|
프랑스 아카데미 마르셀랭 게랭상 (1892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시에 (1924년) |
노벨 평화상 (1927년, 루드비히 키데와 공동 수상)[1] |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페르디낭 뷔송은 1841년 12월 20일 파리에서 피에르 뷔송과 아델 오렐리 드 리보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5]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피에르는 변호사였고 이후 생테티엔 (루아르 주) 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페르디낭이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정교사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며 학업을 계속했다.[5][6] 콩도르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7], 고등사범학교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건강 상태 (혹은 그의 신념) 때문에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다.[8] 1862년 문학 학사 학위를, 1868년 철학 아그레가시옹 (대학 교원 자격)을 취득했다.[7][9]1866년부터 1870년까지 제2제정 시대에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여 자발적으로 스위스로 망명한 자유주의 개신교의 역사적 인물이다.
2. 2. 스위스 망명과 교육 활동 (1866-1870)
페르디낭 뷔송은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철학 아그레가시옹을 받았다. 자유주의 개신교의 역사적 인물인 그는 1866년부터 1870년까지 제2제정 시대에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여 자발적으로 스위스로 망명했다.제2 제정 하에서 교육직에 종사하려면 황제(나폴레옹 3세)에 대한 충성을 선서해야 했지만, 공화파였던 그는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교직의 길이 막혔다. 게다가 이미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로서의 방향성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파에도 개혁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는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추방되어 벨기에로 망명했고, 당시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던 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이자 역사학자·철학자인 Edgar Quinet|에드가르 퀴네프랑스어(1803-1875) 등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며[8], 스위스에서 Université de Neuchâtel|누샤텔 대학교|label=아카데미 드 누샤텔프랑스어 교수로 취임했다.[5][6] 누샤텔에서는 "의무적인 교리도, 기적도, 오류가 없는 책도, 사제의 권위도 없는 자유로운 교회"의 설립을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 기독교 연맹을 결성했다. 더욱이 전 해에 제네바에서 창설된 평화 운동 단체 "평화와 자유의 국제 연맹"에 참가하여, 1869년 로잔에서 개최된 동 연맹의 대회에서 자유주의 기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10][11]
2. 3. 제3공화정과 귀국 (1870)
뇌샤텔 대학교 교수였던 뷔송은 제3공화국이 선포되자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17구 시정부의 정치 및 사회적 활동에 참여했다. 1870년 12월, 그는 17구 시립 고아원(최초의 세속 고아원) 원장이 되었으며, 이 고아원은 나중에 센 고아원이 되었다.[2] 그는 가장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기에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거절했고, 공교육부 장관 Jules Simon|쥘 시몽프랑스어과의 친분 덕분에 파리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고아원 아이들의 미래를 염려하여 박애주의자 조셉 가브리엘 프레보와 연결, 아이들을 상피에 있는 프레보 고아원에 보냈다. 1880년, 그는 폴 로빈을 고아원장으로 임명했다.1871년, 아돌프 티에르 정권에서 공교육상을 맡았던 Jules Simon|쥘 시몽프랑스어에 의해 초등 교육 학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결정은 오를레앙 대주교 Félix Dupanloup|펠릭스 뒤팡루프랑스어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11] 1873년에는 빈 만국 박람회에, 1876년에는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 파견되어 학교 박람회를 시찰했고, 보고서에서 각국의 초등 교육 실태와 교육 방법을 소개했다.[5][12]
2. 4. 초등 교육 개혁 (1879-1896)
1879년부터 1896년까지, 뷔송은 쥘 시몽의 후임자 쥘 페리에 의해 초등 교육부로 불려갔다.[1] 1890년, 그는 소르본 대학교의 교육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세속주의 법의 작성 및 설계를 감독했다.1870년 프랑스에 제3공화국이 성립되자마자 귀국하여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파리 17구에 설립된 최초의 라이크(비종교적) 고아원의 운영에 관여했다. 1871년, 아돌프 티에르 정권 하에서 공교육상을 맡았던 쥘 시몽에 의해 초등 교육 학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결정은 오를레앙 대주교 펠릭스 뒤팡루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11] 초등 교육 학무관으로서 1873년에는 빈 만국 박람회에, 1876년에는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 파견되어 학교 박람회를 시찰했다. 시찰 보고서에서 만국 박람회 참가 각국의 초등 교육에 관한 실태와 교육 방법을 소개했다.[5][12]
1879년, 공교육부 장관 쥘 페리에 의해 초등 교육 국장으로 임명되어, 이후 1896년까지 17년 동안 프랑스 교육 개혁에 기여했다. 특히 1880년대는 프랑스 초등 교육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무상, 의무, 비종교성(라이시테)의 3원칙이 확립된 시대였으며, 공화파·반교권파가 가톨릭 세력과의 대립·협상을 통해 끈기 있게 개혁을 추진하여, 1881년 6월 16일 법률에 의해 초등 교육의 무상제[13], 1882년 3월 18일 법률에 의해 초등 교육의 의무제 및 공교육의 비종교성[14]이 확립되었다. 또한 여성 교육에 관한 법률도 제정되었다. 이들은 함께 쥘 페리 법이라고 불리며, 이를 보완하는 형태로 1886년 10월 30일에는 공립학교 교사의 비종교성을 보장하는 고블레 법이 성립되었다.[15] 이 기간 동안 뷔송은 쥘 페리 법에 관한 "모든 법안, 모든 법규, 모든 통달"을 작성했으며[16][11], 1887년에는 동법의 집행의 일환으로, 이후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교육학·초등 교육 사전』[17]을 편찬했다. 아울러 교육, 학교 교육 법, 교육 행정에 관한 서적이나 고전 작품, 교재 등을 소장하는 『교육 박물관』을 설립하고, 이 박물관의 기관지 『교육지』를 창간[18]했다. 펠릭스 페코 목사와 함께 1880년, 여자 사범학교 교원 양성을 위해 퐁트네오로즈에 여자 고등 사범학교, 마찬가지로 1882년에 남자 사범학교 교원 양성을 위해 생클루에 남자 고등 사범학교를 창설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펠릭스 페코도 뷔송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였으며, 실제, 쥘 페리의 교육 개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뷔송, 페코, 쥘 스티그 등 프로테스탄트였다.[8]
2. 5. 소르본 대학교 교수 및 교육 동맹 활동 (1896-1906)
1890년, 뷔송은 소르본 대학교의 교육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세속주의 법의 작성 및 설계를 감독했으며, 1905년에는 정교분리 법의 초안을 작성한 의회 위원회의 의장이었다.1896년, 소르본 대학교 교육학 강좌의 초대 교수로 취임했으며, 후임은 에밀 뒤르켐이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교육 동맹의 회장을 역임했다.
2. 6. 정치 활동과 정교분리법 (1902-1924)
1898년, 알프레드 드레퓌스 지지자였던 뷔송은 프랑스 인권 연맹 창설에 참여했으며, 1913년부터 192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22] 1902년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센 주의 하원 의원을 지내며 직업 교육과 의무적인 여성 참정권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뷔송은 대부분의 급진파와 달리 여성 참정권에 동정적이었으며, 제한적인 여성 참정권을 위한 폴 뒤소세의 제안을 검토하는 위원회의 보고자였다. 뷔송의 보고서는 그 제안을 지지했다.1905년, 뷔송은 정교분리 법 초안을 작성한 의회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1905년 12월 9일 정교 분리법이 성립되면서 나폴레옹 1세와 로마 교황 사이에 맺어진 1801년의 콩코르다(정교 조약)는 파기되었고, 16세기 이래 계속된 갈리카니즘 체제도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2. 7. 평화 운동과 노벨 평화상 (1914-193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뷔송은 평화 운동가로서 국제 연맹의 발족을 지지했으며, 특히 1923년 루르 점령(프랑스 및 벨기에가 독일의 루르 지방에 진주하여 점령한 사건) 이후에는 베를린에서 독일인 평화 운동가들을 만나 파리로 초청하여 활동을 함께 하는 등 독불 화해에 진력했다.[16][11] 이러한 공적 및 그 동안의 평화 활동과 자선 사업의 공적으로 1927년 독일의 정치인이자 평화 운동가 루트비히 퀴데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24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토피시에를 받았다.[24]3. 사상과 업적
뷔송은 교육자이자 정치가로서 프랑스 사회에 다양한 방면으로 기여했다. 1898년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 당시 드레퓌스를 지지하며 프랑스 인권 연맹 창설에 참여했고, 1913년부터 192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22] 1902년부터 1914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센 주의 하원 의원을 지내며 직업 교육과 여성 참정권을 옹호했다. 특히 여성 참정권 문제에 대해서는 폴 뒤소세의 제한적 여성 참정권 제안을 지지하는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성스러운 연합을 옹호하는 애국적인 입장을 취했다.[2] 전후에는 국제 연맹을 지지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는데, 독일 평화주의자들을 파리로 초청하고 베를린을 방문하기도 했다.[3]
뷔송은 ''교육 및 초등 교육 사전''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50명 이상의 협력자와 함께 작업했으며, 제임스 기욤이 편집장을 맡았다. 1882년과 1887년 사이에 첫 번째 판이, 1911년에 새로운 판이 출판되었다. 뷔송은 편집뿐만 아니라 세속주의, 직관, 기도와 같은 항목을 직접 작성하여[4] 세속적 종교 대체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뷔송은 1927년 독일 교수 루드비히 키데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1]
3. 1. 라이시테(Laïcité)와 교육 개혁
뷔송은 뇌샤텔 대학교의 교수였다. 1867년부터 평화 자유 연맹의 국제 회의에 세 차례 참석했고, 1869년 로잔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에서 연설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를 세우려 노력하며 쥘 스테그와 펠릭스 페코를 목사로 초빙했다. 공화국 선포 후 프랑스로 돌아와 17구 시정부의 정치 및 사회적 이니셔티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70년 12월, 그는 최초의 세속 고아원인 17구 시립 고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센 고아원이 되었다. 그는 가장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기에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거절했고, 공공 교육부 장관 쥘 시몽과의 친분 덕분에 파리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880년, 그는 폴 로빈을 고아원장으로 임명했다.1879년부터 1896년까지, 뷔송은 쥘 시몽의 후임자 쥘 페리에 의해 초등 교육부로 불려갔다. 1890년, 그는 소르본 대학교의 교육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세속주의 법의 작성 및 설계를 감독했다. 1905년, 그는 정교분리 법의 초안을 작성한 의회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1870년 프랑스에 제3공화국이 성립되자마자 귀국하여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파리 17구에 설립된 최초의 라이크(비종교적) 고아원의 운영에 관여했다. 1871년, 아돌프 티에르 정권 하에서 공교육상을 맡았던 쥘 시몽에 의해 초등 교육 학무관으로 임명되었다.[11] 초등 교육 학무관으로서 1873년에는 빈 만국 박람회에, 1876년에는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 파견되어 학교 박람회를 시찰했다. 시찰 보고서에서 만국 박람회 참가 각국의 초등 교육에 관한 실태와 교육 방법을 소개했다.[5][12]
공화파는 공교육에서 종교의 영향을 배제함으로써 각자의 신앙 또는 양심의 자유가 확보된다고 생각했지만, 가톨릭 측은 "종교 없이는 도덕도 없다"라며 공화파의 "신 없는 학교"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뷔송은 종교적 도덕 교육이 아닌 라이크(laïque)한 도덕 교육, 즉 "라이크한 신앙"을 제창했다. "라이크한 신앙"은 모순된 표현이지만, 그는 "종교의 육체"와 "종교의 영혼"을 구별하여, 교회의 여러 제도나 계급 제도, 교리, 교단, 의식 등 외면적인 형식 부분인 "종교의 육체"는 비본질적이며, 이러한 비본질적인 부분을 깎아내고 "종교의 영혼"으로서의 본질적인 부분을 추출하려 했다.[19][20] 더욱이 이러한 관점에서 초등 교육에서 "종교사"를 배제하고, "인류사"(인간사, 휴머니티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16][11] 인간 지성의 가장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인 직감에 기초한 교육(직관 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활동적인 도덕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21]
3. 2. 쥘 페리 법(Lois Jules Ferry)
1879년, 공교육부 장관 쥘 페리는 뷔송을 초등 교육 국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1896년까지 17년 동안 뷔송은 프랑스 교육 개혁에 기여했다. 특히 1880년대는 프랑스 초등 교육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무상, 의무, 비종교성(라이시테)의 3원칙이 확립된 시대였다. 공화파와 반교권파는 가톨릭 세력과의 대립과 협상을 통해 끈기 있게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1881년 6월 16일 법률에 의해 초등 교육의 무상제[13], 1882년 3월 18일 법률에 의해 초등 교육의 의무제 및 공교육의 비종교성[14]이 확립되었다. 또한 여성 교육에 관한 법률도 제정되었다. 이들은 함께 Lois Jules Ferry|쥘 페리 법프랑스어이라고 불린다.1886년 10월 30일에는 공립학교 교사의 비종교성을 보장하는 Loi Goblet|고블레 법프랑스어이 성립되었다.[15] 이 기간 동안 뷔송은 쥘 페리 법에 관한 "모든 법안, 모든 법규, 모든 통달"을 작성했으며,[16][11] 1887년에는 동법의 집행의 일환으로, 이후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교육학·초등 교육 사전』[17]을 편찬했다.
뷔송은 펠릭스 페코 목사와 함께 1880년, 여자 사범학교 교원 양성을 위해 퐁트네오로즈에 여자 고등 사범학교를 창설했다. 마찬가지로 1882년에 남자 사범학교 교원 양성을 위해 생클루에 남자 고등 사범학교를 창설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쥘 페리의 교육 개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뷔송, 페코, 쥘 스티그 등 프로테스탄트였다.[8]
3. 3. 여성 교육과 직업 교육
뷔송은 직업 교육과 의무적인 여성 참정권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여성 참정권에 동정적이었으며, 제한적인 여성 참정권을 위한 폴 뒤소세의 제안을 검토하는 위원회의 보고자였다. 뒤소세가 사망한 지 몇 달 후인 1909년 7월 16일, 뷔송은 여성 참정권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를 제출하여 그 제안을 지지했다.3. 4. 교육학 사전 편찬
페르디낭 뷔송은 350명 이상의 협력자와 함께 ''교육 및 초등 교육 사전'' 편집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제임스 기욤이 편집장을 맡았으며, 첫 번째 판은 1882년과 1887년 사이에 아셰트에서 출판되었고, 1911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다.[4] 뷔송은 편집 책임자 역할뿐만 아니라 세속주의, 직관, 기도와 같은 항목을 직접 작성했다.[4] 이 사전은 세속적이고 공화적인 학교 시스템의 "성경"으로 불리며, 세속적 종교 대체의 개념을 도입했다.[4] 뱅상 페이용 교육부 장관은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뷔송은 1887년 쥘 페리 법 집행의 일환으로 『교육학·초등 교육 사전』[17]을 편찬했다.3. 5. 드레퓌스 사건과 인권 운동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지지한 뷔송은 1898년 프랑스 인권 연맹 창설에 참여했으며, 1913년부터 192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22]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교권파(가톨릭 세력)와 공화파의 대립과 결부된 큰 문제로 떠올랐다. 뷔송 등 드레퓌스 옹호파는 인권 연맹을 결성하여 정교 분리 지지, 반교권주의 입장을 표명했다.[22]1902년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센 주의 하원 의원을 지낸 그는 특히 직업 교육과 의무적인 여성 참정권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뷔송은 대부분의 급진파와 달리 여성 참정권에 동정적이었으며, 제한적인 여성 참정권을 위한 폴 뒤소세의 제안을 검토하는 위원회의 보고자였다. 뷔송은 뒤소세가 사망한 지 몇 달 후인 1909년 7월 16일에 여성 참정권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이 보고서는 그 제안을 지지했다.
4. 한국에의 시사점
페르디낭 뷔송의 사상과 활동은 한국 사회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뷔송은 종교 교육이 아닌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도덕 교육을 강조했는데, 이는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갈등을 예방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직관에 기초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도덕 교육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자율적 사고와 비판적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다.
뷔송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인권 연맹을 결성하여 정교 분리를 지지하고 반교권주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특정 종교가 정치, 교육 등 공적 영역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4. 1. 민주 시민 교육과 라이시테
뷔송은 공교육에서 종교의 영향을 배제하고 각자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측은 "종교 없이는 도덕도 없다"며 공화파의 "신 없는 학교"를 비판했지만, 뷔송은 종교적 도덕 교육이 아닌 라이크(laïque)한 도덕 교육, 즉 "라이크한 신앙"을 제창했다.[19][20] "라이크한 신앙"은 모순된 표현이지만, 그는 "종교의 육체"와 "종교의 영혼"을 구별하여, 교회의 제도, 계급 제도, 교리, 교단, 의식 등 외면적인 형식인 "종교의 육체"는 비본질적이며, 이를 제거하고 "종교의 영혼"으로서 본질적인 부분을 추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20]뷔송은 초등 교육에서 "종교사"를 배제하고 "인류사"(인간사, 휴머니티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16][11] 인간 지성의 가장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인 직감에 기초한 교육(직관 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활동적인 도덕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21]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교권파(가톨릭 세력)와 공화파의 대립과 결부된 큰 문제였다. 뷔송 등 드레퓌스 옹호파는 1898년에 인권 연맹을 결성하여 정교 분리 지지, 반교권주의 입장을 표명했다(뷔송은 1914년부터 1926년까지 인권 연맹 회장을 역임).[22]
1902년 뷔송은 급진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5] 같은 해, 에밀 콤브 내각은 약 3천 개의 무인가 수도회 계열 학교를 폐쇄하고, 약 2만 명의 수도회원과 54개의 수도회를 프랑스에서 추방했다. 뷔송은 수도회의 교육 자유를 부정하고, 수도회를 국가 감독하에 두는 것을 정당화하며, 수도사는 단체의 특권을 바탕으로 교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21]
1904년 프랑스와 로마 교황청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정교 분리법 (라이시테법) 제정을 위해 뷔송을 위원장,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보고자로 하는 뷔송-브리앙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05년 12월 9일 정교 분리법이 성립되면서 나폴레옹 1세와 로마 교황 사이에 맺어진 1801년의 콩코르다(정교 조약)는 파기되었고, 16세기 이래 계속된 갈리카니즘 체제도 해체되었다.
5. 저서
- 《개혁파 교회에서의 정통주의와 복음주의(L’orthodoxie et l’Évangile dans l’Église reformée)》 (Dentu, 1864)
- 《자유주의 기독교(Le Christianisme libéral)》 (Cherbuliez, 1865)
- 《초등학교에서의 종교사 교육에 대하여(De l'enseignement de l'histoire sainte dans les écoles primaires)》 (1869)
- 《자유주의 기독교 선언(Manifeste du c''hristianisme libéral)》 (Cherbuliez, 1869)
- 《자유주의 기독교의 원칙(Principes du christianisme libéral. Résumé des conférences données à Neuchâtel)》 --- 뇌샤텔에서 열린 강연 요지 (Cherbuliez, 1869)
- 직관 교육에 관한 강연(Conférence sur l'enseignement intuitif) ---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대표 교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1878년 8월 31일)
- 《교육학·초등 교육 사전(Dictionnaire de pédagogie et d'instruction primaire)》 (Hachette, 1887)
-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온 ― 그의 생애와 작품(Sébastien Castellion, sa vie, son œuvre)》 (Hachette, 1892), 2권
- 《종교, 도덕 및 과학 ― 현대 교육에서의 그 대립 --- 1900년 4월 제네바 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4차례의 강연록(La Religion, la morale et la science : leur conflit dans l'éducation contemporaine - Quatre conférences faites à l'aula de l'université de Genève, (Avril 1900))》 (Fischbacher, 1900)
- 《자유 사상과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Libre-pensée et protestantisme libéral)》 --- 샤를 바그네르와 공저, (Fischbacher, 1903)
- 《급진 정책 ― 급진·급진 사회당의 정책에 관한 연구(La politique radicale : étude sur les doctrines du parti radical et radical-socialiste)》 (V. Giard & E. Brière, 1908)
- 《신 교육학·초등 교육 사전(Nouveau dictionnaire de pédagogie et d'instruction primaire)》 (Hachette, 1911)
- 《여성의 투표(Le Vote des femmes)》 (H. Dunod et E. Pinat, 1911)
- 《세속적인 신앙 ― 강연 및 저서 발췌(La foi laïque. Extraits de discours et d’écrits)》 (1878-1911) (레이몽 푸앵카레의 서문), (Hachette, 1912)
- 《프랑스의 학교와 국민 국가(L'École et la nation en France)》 , 《교육 연감(L'Année pédagogique)》 발췌, 1913
- 《종교 감정의 장래(L'avenir du sentiment religieux)》 (『도덕 교육을 위한 자유 사상가·자유 신자 연맹 회보』 1914), (Fischbacher, 1923)
- 《회상록(Souvenirs)》 (1866-1916) (Fischbacher, 1916)
- 《세속적 도덕의 종교적 기반(Le Fonds religieux de la morale laïque)》 (Fischbacher, 1917)
- 《초등 교육용 도덕적 교훈(Leçons de morale à l’usage de l’enseignement primaire)》 (Hachette, 1926)
- 《콩도르세(Condorcet)》 (콩도르세), (Félix Alcan, 1929)
- 《우리 모두 자유 신자인가 ― 자유 사상과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Sommes-nous tous des libres croyants ? Libre pensée et protestantisme libéral)》 --- 샤를 바그네르와 공저, (Le foyer de l'âme/Église réformée de la Bastille, 1992)
- 《교육과 공화국(Éducation et République)》 (Kimé, 2003)
참조
[1]
웹사이트
Ferdinand Buisson
https://www.nobelpri[...]
[2]
웹사이트
Le père de l’école laïque
https://www.evangile[...]
[3]
웹사이트
Pertinence et actualité de l'œuvre de Ferdinand Buisson
https://www.institut[...]
2021-05-17
[4]
웹사이트
Syndicats d’instituteurs
http://www.inrp.fr/e[...]
[5]
논문
BUISSON Ferdinand Édouard
https://www.persee.f[...]
[6]
웹사이트
BUISSON Ferdinand, Édouard
https://maitron.fr/s[...]
Maitron
2019-01-08
[7]
논문
17. Buisson (Ferdinand, Edouard)
https://www.persee.f[...]
[8]
논문
フェルディナン・ビュイッソンにおける「道徳」と「宗教」、あるいは「人類」の逆説
https://doi.org/10.2[...]
日本宗教学会
2004-06-30
[9]
웹사이트
Les agrégés de l'enseignement secondaire. Répertoire 1809-1960
http://rhe.ish-lyon.[...]
Laboratoire de recherche historique Rhône-Alpes (LARHRA) - Ressources numériques en histoire de l'éducation
2020-08-17
[10]
논문
Patrick Cabanel, Ferdinand Buisson. Père de l’école laïque. Genève, Labor et Fides, 2016, 547 p.
http://journals.open[...]
2017-12-01
[11]
웹사이트
Ferdinand Buisson (1841-1932)
https://www.museepro[...]
2020-08-17
[12]
서적
フェルディナン・ビュイッソンの教育思想 - 第三共和政初期教育改革史研究の一環として
東信堂
[13]
웹사이트
Les lois scolaires de Jules Ferry : Loi du 16 juin 1881 établissant la gratuité absolue de l'enseignement primaire dans les écoles publiques
https://www.senat.fr[...]
Sénat
2020-08-17
[14]
웹사이트
Les lois scolaires de Jules Ferry : Loi du 28 mars 1882 sur l'enseignement primaire obligatoire
https://www.senat.fr[...]
Sénat
2020-08-17
[15]
웹사이트
Les lois scolaires de Jules Ferry : Loi du 30 octobre 1886 sur l'organisation de l'enseignement primaire
https://www.senat.fr[...]
Sénat
2018-09-24
[16]
뉴스
Ferdinand Buisson (1841-1932) - Musée virtuel du Protestantisme
https://www.museepro[...]
2018-09-24
[17]
웹사이트
Dictionnaire de pédagogie et d'instruction primaire
https://gallica.bnf.[...]
フランス国立図書館 電子図書館ガリカ所蔵の電子版
2018-09-24
[18]
웹사이트
Musées pédagogiques
http://www.inrp.fr/e[...]
2018-09-24
[19]
뉴스
«La foi laïque»
https://blogs.mediap[...]
2018-09-24
[20]
논문
教育闘争と知のヘゲモニー - フランス第三共和政期を中心に
https://doi.org/10.1[...]
九州大学法政学会
1995-03-20
[21]
논문
フランスにおけるフェリー退陣以降の道徳・市民教育(1885-1914)
https://doi.org/10.1[...]
武庫川女子大学
2018-03-21
[22]
웹사이트
De 1898 à nos jours
https://www.ldh-fran[...]
Sénat
2020-08-17
[23]
웹사이트
エミール・コンブ
https://kotobank.jp/[...]
小学館『日本大百科全書』
2018-09-24
[24]
웹사이트
Le Petit Parisien : journal quotidien du soir
https://gallica.bnf.[...]
1924-10-27
[25]
웹사이트
ジャン・ボベロ来日講演録「続発するテロに対峙するフランスのライシテの現状と課題」
https://keisobiblio.[...]
2016年11月28日. 勁草書房編集部
2018-09-24
[26]
웹사이트
ペイヨン教育相、「非宗教性憲章」を発表 {{!}} OVNI{{!}} オヴニー・パリの新聞
https://ovninavi.com[...]
2018-09-24
[27]
뉴스
"Une religion pour la République. La foi laïque de Ferdinand Buisson", de Vincent Peillon : pour une République spirituelle
https://www.lemonde.[...]
2020-08-17
[28]
서적
Une religion pour la République. La foi laïque de Ferdinand Buisson
Éditions du Seuil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