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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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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신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하진의 부름을 받아 기(騎)도위가 되었으며, 동탁의 전횡을 예견하고 원소에게 동탁 습격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조조와 함께 활약했다. 청주 황건적 토벌전에서 조조를 구출하다가 전사했으며, 조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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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신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바오신
원어 이름鮑信
출생152년
사망192년 (40세)
출생지산둥성 신타이
사망지산둥성 둥핑 현
아버지바오 단
형제바오 타오
자녀바오 샤오
바오 쉰
관직
기병 도위?–189년
파로 장군 (대행)190–191년
제북상191–192년
군사 경력
소속후한
상관영제
소제 변
헌제

2. 생애

192년, 조조와 함께 청주 황건적 잔당 토벌에 나섰으나, 작전 중 적군의 기습을 받았다. 포신은 필사적으로 싸워 조조를 구출했으나, 결국 전사했다. 향년 41세.[1] 조조는 포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해를 찾게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포신은 장병들에게 은혜를 잘 베풀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재산이 남지 않았다. 212년, 조조는 헌제에게 포신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포신의 아들 포소에게 읍후 작위를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포훈을 채용하여 자신의 휘하에서 관료로 복무하게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포신은 어려서부터 절개가 있었고, 관대하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침착, 강인하며 지모가 있었다. 대대로 유학으로 명성을 떨친 가문 출신으로,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1] 전한에서 사예교위를 지낸 포선(鮑宣)의 8대손이며, 포단(鮑丹)의 아들이고, 포소, 포훈의 아버지이다.

영제 시대, 하진에게 초빙되어 기(騎)도위가 되었다. 십상시와 대결할 것을 결의한 하진의 명령으로, 동향인 왕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성고(成皋)에 도착했을 때, 하진이 암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신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자, 하진과 십상시가 함께 멸망하고, 동탁이 군세를 이끌고 도읍으로 들어와 있었다. 포신은 동탁의 전횡을 예견하고, 원소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원소는 실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2만 명의 보병, 700명의 기병, 5천여 명의 군수 물자를 모았다.

2. 2. 하진의 부름과 동탁과의 대립

영제 때, 하진의 부름을 받아 기도위가 되었다. 하진은 십상시와 대결할 것을 결의하고 포신을 고향으로 보내 병사를 모집하게 했다.[1] 그러나 포신이 성고(成皋)에 도착했을 때, 하진은 이미 암살당한 후였다.

포신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을 때는 하진과 십상시가 모두 멸망하고, 동탁이 군세를 이끌고 도읍으로 들어온 뒤였다. 포신은 동탁이 전횡을 할 것을 예견하고 원소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원소는 두려워하여 실행하지 않았다. 이에 포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보병 2만 명, 기병 700명, 군수 물자 5천여 수레를 모았다.[1]

2. 3. 반동탁 연합군 참여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포신은 동생 포도와 함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연합에 합류했으며, 파로장군(破虜將軍) 직을 대행했다.[1] 연합군은 원소를 지도자로 추대했지만, 포신은 조조에게서 큰 잠재력을 보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이후 포신과 조조는 변수 전투에서 동탁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지만, 포신의 동생 포도는 전사했고 포신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2. 4. 조조 지지와 연주에서의 활동

영제 시대, 하진의 부름을 받아 기도위가 되었다. 하진은 십상시와 대결할 것을 결의하고 포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집하게 했다.[1] 그러나 포신이 성고(成皋)에 도착했을 때, 하진은 암살당한 후였다.

포신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을 때는 하진과 십상시가 모두 멸망하고, 동탁이 군세를 이끌고 도읍으로 들어온 후였다. 포신은 동탁의 전횡을 예견하고 원소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원소는 실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보병 2만 명, 기병 700명, 군수 물자 5천여 명을 모았다. 동탁 토벌 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포신은 제북국의 상(相)이 되었지만,[1] 토벌군에 참가하여 원소를 맹주로 관동의 제후들과 맹약을 맺었다. 포신은 원소와 조조로부터 행파로장군으로 추대되었다.

포신은 유대, 장막, 장초, 원유, 교모와 함께 산조(酸棗)에 주둔했다. 조조는 술자리만 벌이고 싸움을 하려 하지 않는 제후들에게 싸울 것을 호소했고, 포신은 조조의 요청에 응하여 함께 싸웠다. 그러나 동탁이 파견한 서영에게 크게 패하여, 동생 포도가 전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얼마 안 되어 군량이 다 떨어져 산조의 군세가 해산되자, 포신도 임지로 귀환했다.

원소가 기주를 차지하여 강성해지자, 포신은 원소가 제2의 동탁이 될 것이라 경계하며, 조조에게 황하 남쪽을 평정하고 힘을 길러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조조가 동군태수가 되자, 포신을 제북국의 상으로 추대했다.

청주의 황건적이 연주에 침입하자, 유대는 즉시 토벌하려 했다. 포신은 유대에게 자중할 것을 권했지만, 유대는 이를 듣지 않고 황건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진궁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하기 위해 연주의 별가종사(別駕從事)와 치중종사(治中從事)를 설득했고, 포신 등은 그 의견에 찬동하여 조조를 연주목으로 맞이했다.

2. 5. 최후

192년, 황건적의 잔당 수천 명이 청주에서 연주로 쳐들어오자, 연주 자사 유대는 이들을 공격하려 했다. 포신은 반란군의 수가 더 많으므로 반대했지만, 유대는 듣지 않고 전투에 나섰다가 죽었다. 이후 포신은 조조를 연주 자사로 추천하여 반란군을 이끌게 했다. 포신과 조조는 수장현(현재 산둥성 동평현 남서쪽) 동쪽에서 반란군을 공격했으나,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아 압도당했다. 포신은 조조를 보호하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전사했다.[1] 조조는 포위망을 뚫고 나와 군대를 재정비한 후 포신의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포신의 모습을 본뜬 나무 조각상을 만들게 하고 추도식을 열어 슬피 울었다. 반란군은 결국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이들을 정예 청주병으로 편성했다.

포신은 동아시아 나이로 41세에 사망했다. 그는 검소하게 생활하며 자신의 재산을 부하들을 돕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 그의 가족은 많은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

3. 평가

포신은 어려서부터 절개가 있었고, 관대하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침착하고 강인하며 지모가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동탁(董卓)이 난을 일으킬 것을 예측하고 원소(袁紹)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원소는 두려워하며 실행하지 않았다.[1]

포신은 조조(曹操)에게 "불세출의 지략으로 영웅들을 통솔하여 난을 진압하고 바르게 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당신"이라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하늘이 이끌고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하며 조조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1]

변수 전투에서 동탁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지만, 동생 포도(鮑韜)는 전사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 등 희생을 겪었다.[1] 연합이 해체된 후, 포신은 조조에게 허난성 지역에 자체 기지를 건설할 것을 조언하며 그의 전략적 안목을 보여주었다.[1]

황건적의 난 진압 과정에서 조조를 보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조조는 포신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나무 조각상을 만들어 추도식을 열고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1]

포신은 검소한 생활을 했고, 자신의 재산을 부하들을 돕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 그의 가족은 많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다. 212년, 조조는 헌제에게 포신의 공을 기리고 그의 아들 포소(鮑邵)에게 작위를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8대조포선전한 사예교위
아버지포단소부, 시중
본인포신152년 ~ 192년
아들포소맏아들, 기도위, 사지절, 아버지의 풍모를 지님.
아들포훈조위에서 관료로 복무, ? ~ 226년
동생포도변수 전투에서 전사, ? ~ 190년
손자포융포소의 아들, 아버지 사후 뒤를 이음.


5. 포신을 섬긴 사람들

6.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자가 윤성(嘉靖本)으로 되어 있다. 반동탁 연합군의 관동 제후들 중에서도 특히 무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손견을 제치기 위해 아우 포충(가공 인물)과 함께 먼저 나섰으나, 화웅에게 대패하고 아우를 잃는다.[1] 최후는 정사와 마찬가지로 청주 황건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지만, 조조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을 탐내어 돌출했기 때문에 전사했다는 취급을 받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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