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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커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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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커크 전투는 1298년 7월 22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중요한 사건으로, 잉글랜드의 롱보우 부대의 효과를 입증하고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월리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잉글랜드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윌리엄 월리스는 이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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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커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폴커크 전투
일부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날짜1298년 7월 22일
장소폴커크, 스코틀랜드
좌표55.9875, -3.7600
결과잉글랜드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스코틀랜드 왕국
교전국 2잉글랜드 왕국
참가 부대더럼 주
지휘관 및 지도자
스코틀랜드윌리엄 월리스 경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
병력 규모
스코틀랜드약 6,000명
잉글랜드약 15,000명
사상자 및 피해
스코틀랜드약 2,000명 사망
잉글랜드약 2,000명 사망
추가 정보
전장 지도
전장 지도

2. 배경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의 패배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전쟁 중이던 에드워드 1세는 이 소식을 듣고[3], 프랑스와 서둘러 휴전을 맺고[4] 1298년잉글랜드로 귀환했다.[5] 그는 스코틀랜드 정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대규모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스털링 다리 전투 승리 이후 스코틀랜드의 수호자가 된 윌리엄 월리스1297년 말부터 1298년 초까지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하여 에드워드 1세를 더욱 자극했다.[14]

에드워드 1세는 요크에 임시 본영을 설치하고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6][7] 1298년 여름 스코틀랜드 침공을 개시했다. 윌리엄 월리스는 초토화 전술로 맞섰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군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으며 스코틀랜드 중부까지 깊숙이 진군했다. 퇴각까지 고려하던 에드워드 1세는 월리스 군이 폴커크 인근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얻고, 7월 22일 그곳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7][8]

2. 1.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공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 북부 주둔군이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플랑드르에서 프랑스군과 대치 중이던 에드워드 1세에게 전달되었다.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와 휴전을 맺었다.[14][6]

1298년 3월 14일,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곧바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대규모 2차 침공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정부의 중심 기능을 북부의 요크로 옮겨 향후 6년간 임시 수도로 삼았으며, 이는 스코틀랜드 정복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4월, 요크에서 전쟁위원회가 열려 침공 계획의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귀족들에게 회의 참석을 명령했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자, 불참한 귀족 모두를 반역자로 선언하며 압박했다.

에드워드 1세는 6월 25일까지 록스버러에 군대를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군대는 웨일스에서 징집된 장궁병을 포함하여 기병 2,000명 이상과 보병 12,000명 이상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기사 214명, 중기병 900명, 귀족들이 제공한 기병 1,000명, 용병 석궁병 500명, 랭커셔와 체셔 지역의 봉건 징집병 및 빌맨을 포함한 궁수 2,000명 등 총 보병 수는 약 8,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7] 이는 단순히 급여를 받는 병사들 외에도 왕실에 대한 빚 감면, 범죄 사면, 또는 모험을 찾아 자원한 이들까지 포함된 숫자였다.[6]

7월 3일, 에드워드 1세는 록스버러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수호자가 된 윌리엄 월리스는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잉글랜드 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의도적으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군은 황폐하고 적대적인 스코틀랜드 영토 깊숙이 유인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악천후 때문에 보급선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서 잉글랜드 군은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7] 특히 웨일스 출신 보병들의 불만이 커져, 에든버러 근교의 커클리스턴(혹은 리스톤 사원)에 주둔하던 중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폭동은 잉글랜드 기병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80여 명의 웨일스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에드워드 1세는 불명예스러운 퇴각을 고려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7월 20일 진군을 재개하여 21일 린리스고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대가 퇴각하는 잉글랜드 군을 추격하기 위해 불과 약 20.92km 떨어진 폴커크 근교의 칼렌더 숲(혹은 토우드)에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7][8] 에드워드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신이 살아계시니... 그들이 나를 찾아올 필요는 없겠군. 오늘 그들과 싸울 수 있게 되었다!"라고 외치며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즉시 군대를 폴커크 남쪽으로 이동시켜 7월 22일 아침,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에드워드는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기병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려 했으나, 그의 기병 지휘관들은 즉각적인 공격을 주장했다.[7][8]

한편, 윌리엄 월리스는 스털링 다리 전투 승리 이후 1297년 11월부터 1298년 1월까지 스코틀랜드 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의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 칼라일에 이르는 지역을 약탈하며 전리품을 획득하고 잉글랜드에 타격을 주었다.[14] 폴커크 전투 당시 스코틀랜드 군은 약 1,000명씩 네 개의 실트론(장창 방진)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파이프, 킨로스, 미들로시안, 해딩턴, 스털링, 린리스고, 라나크, 머스, 테비오트데일 등의 셰리프국에서 징집된 병력이었다. 월리스는 전투 전에 병사들에게 "내가 너희를 링으로 데려왔으니, 할 수 있다면 춤을 춰라!" (I have brought you to the ring, now hop if you can!) 라고 외치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전해진다.[7] 그러나 스털링 다리 전투의 공동 승리자였지만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앤드루 머레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실트론을 효과적으로 운용한 것은 머레이의 전략이었다는 평가도 있다.[9][10] 또한 코민 가문과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는 폴커크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7]

2. 2. 윌리엄 월레스의 전략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플랑드르 원정 중이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1298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즉시 스코틀랜드 2차 원정을 준비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Guardian of Scotland)였던 윌리엄 월리스는 잉글랜드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초토화 작전을 명령했다. 이는 잉글랜드 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스코틀랜드 군이 의도적으로 퇴각하며 잉글랜드 군을 척박하고 적대적인 영토 깊숙이 유인하려는 전략이었다.

월레스의 전략은 효과적이어서, 에드워드 1세의 보급 함대는 기상 악화로 지연되었고, 스코틀랜드 중부로 진입한 잉글랜드 군은 심각한 식량 부족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특히 웨일스 출신 보병대는 에딘버러 근교 리스톤 사원(Temple Liston)에서 식량 부족 등으로 인해 폭동을 일으켰으나, 잉글랜드 기병대에 의해 진압되어 80명의 웨일스 병사가 사망하는 등 군 내부의 동요도 심각했다.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불명예스러운 퇴각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퇴각을 결정하려던 순간, 에드워드 1세는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약 약 20.92km 떨어진 폴커크 근교의 칼렌더(Callendar) 숲에 집결하여 퇴각하는 잉글랜드 군을 추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월레스 군과 싸울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폴커크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3. 전투

폴커크 전투 묘사 (1)


폴커크 전투 묘사 (2)


스코틀랜드 군대는 스털링 다리 전투의 경험을 살려, 창으로 무장한 보병 중심의 슐트론(schiltron)이라는 밀집 방진 4개를 구성했다.[13] 이 진형은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슐트론 사이에는 궁수들이, 후방에는 소규모 기사 부대가 배치되었다.[7][13]

1298년 7월 22일, 잉글랜드 기병대는 4개 부대로 나뉘어[11] 스코틀랜드 군의 양익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스코틀랜드 기병대와 궁수 부대는 비교적 쉽게 제압되었으나,[7][11] 창병으로 이루어진 슐트론은 잉글랜드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잉글랜드 기병대는 슐트론의 빽빽한 창 앞에서 상당한 피해(말 111마리 손실[7])를 입고 잠시 물러났다.[7]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워드 1세는 전술을 바꾸어 장궁병을 포함한 원거리 공격 부대를 전면에 내세웠다.[7] 잉글랜드의 장궁병, 석궁병, 투석기[11] 방어 수단이 부족하고 밀집하여 움직이기 어려운 스코틀랜드 슐트론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11] 이 공격으로 슐트론은 큰 피해를 입고 진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11]

스코틀랜드 군의 대열이 약화되자[11] 에드워드 1세는 다시 기병대와 보병에게 총공격을 명령했고, 결국 슐트론은 붕괴되어 흩어졌다.[11] 윌리엄 월레스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으나, 스코틀랜드 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3. 1. 양측 군대 배치

스코틀랜드군은 윌리엄 월레스가 지휘했으며,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처럼 창병을 중심으로 한 쉴트론(schiltron) 진형을 구성했다.[13] 이는 긴 창을 여러 방향으로 내밀어 적의 접근을 막는, 마치 고슴도치와 같은 밀집 방진이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약 1,000명으로 이루어진 4개의 쉴트론을 배치했으며[7], 이 쉴트론 사이의 공간에는 장궁병들이 자리했다. 후방에는 코민스(Comyns) 가문 등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지원하는 500명 규모의 소규모 중무장 기병 부대가 배치되었다.[7] 스코틀랜드 군의 총 병력은 약 10,000명(기병 500명, 보병 9,500명)으로 추산된다.[7] 다만, 앤드루 머레이나 로버트 브루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의 군대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7][9][10]

잉글랜드 군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직접 이끌었다.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기병 2,000명과 보병 12,000명을 합쳐 약 14,000명에 달했으며[6], 이 외에도 급여 없이 참전한 병사들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 다른 추산으로는 기사 214명, 기병 1,900명, 용병 석궁병 500명, 장궁병 2,000명을 포함하여 총 8,000명 규모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 잉글랜드 군은 기사를 포함한 기병, 장궁병, 석궁병, 보병 등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었으며, 4개의 부대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좌익 선봉대는 노포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 링컨 백작이 지휘했고[7], 우익은 더럼 주교 안소니 베크가 맡았다. 에드워드 1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고 약간 뒤쪽에 위치하여 전군을 통솔했다.

3. 2. 전투 경과



스코틀랜드 군은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처럼 창병을 중심으로 스킬트론(schiltron)이라 불리는 4개의 밀집 방진을 구성했다.[13][11] 이 진형은 다양한 길이의 장창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강력하고 돌파하기 어려운 '고슴도치' 형태를[13] 띠었다. 스킬트론 사이의 공간에는 장궁을 사용하는 궁수들이 배치되었고,[11] 후방에는 코민스(Comyns) 등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이끄는 500명 가량의 기병대가 자리 잡았다.[7]

7월 22일 화요일, 4개 부대로 나뉜[11] 잉글랜드 기병대는 마침내 스코틀랜드 군을 발견했다. 좌익은 노퍽 백작, 헤리퍼드 백작, 링컨 백작이 지휘했고, 우익은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가 맡았으며,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중앙 후방에서 직접 지휘했다. 좌익의 링컨 백작이 이끄는 선봉대는[7] 즉시 공격을 시작했으나, 스코틀랜드 진형 앞의 소택지대를 피해 서쪽으로 우회하여 스코틀랜드 우익을 공격해야 했다. 우익의 앤서니 베크는 왕의 본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격을 늦추려 했으나, 휘하 기사들의 재촉에 밀려[7] 좌익과 함께 공격에 가담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는 양익에서 스코틀랜드 군에게 돌격했다.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잉글랜드 기병대의 위세에 눌려 거의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7] 스코틀랜드 대 스튜어드 경의 동생인 존 스튜어트 경이 지휘하던 스코틀랜드 궁수들은[11] 자리를 지키며 저항했으나, 수적 열세와 잉글랜드 기병대의 공격으로 인해 빠르게 격파되었다.[11]

그러나 창으로 무장한 스킬트론 보병대는 굳건히 버텼다. 잉글랜드 기사들은 빽빽한 창의 벽에 막혀 돌파하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기사들이 말과 함께 창에 찔려 쓰러졌다.[7]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111마리의 말이 죽었다고 한다.[7]

이때 전장에 도착한 에드워드 1세는 기병대가 고전하는 것을 보고 일단 후퇴시켰다.[7] 그는 1295년 마에스 마도그 전투에서 웨일스 장창병을 격파했던 전술을 적용하여, 장궁병을 앞으로 내세웠다. 잉글랜드의 장궁병, 석궁병, 투석기 사수들은[11] 스킬트론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스킬트론은 잉글랜드 궁수들에게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이들은 화살을 막을 방패나 엄폐물이 부족했고,[11] 밀집 대형 특성상 움직여서 피할 수도 없었다.[11] 쏟아지는 화살비 속에서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큰 피해를 입으며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첫 화살이 발사된 순간 스코틀랜드의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군의 대형이 충분히 약화되기를 기다렸다가,[11] 다시 기병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약화된 스킬트론 사이로 잉글랜드 기병대와 보병대가 밀고 들어가자[11] 스코틀랜드의 방진은 마침내 무너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11] 이 과정에서 파이프 백작의 아들 맥더프(Macduff)를 포함한 많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전사했다. 윌리엄 월리스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토우드 숲(Torwood) 방면으로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폴커크 전투는 장궁의 압도적인 위력이 입증된 전투로 평가받는다.

3. 3. 잉글랜드 장궁병의 역할



폴커크 전투 초반, 잉글랜드 기병대는 스코틀랜드 군의 슐트런(schiltrons) 진형 앞에서 고전했다. 슐트런은 창병들이 긴 창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만든 밀집 방어 진형으로, 돌격하는 기병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13] 잉글랜드 기사들은 슐트런의 빽빽한 창 앞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111마리의 말이 죽고 많은 기사들이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7] 에드워드 1세는 기병대가 궤멸되는 것을 보고 즉시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는 새로운 전술을 꺼내 들었다. 이는 1295년 마에스 마도그 전투(Battle of Maes Madog)에서 웨일스 장창병들을 상대로 효과를 보았던 전술로, 바로 장궁 부대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장궁병, 석궁병, 그리고 투석기 부대가 전면에 배치되어 슐트런을 향해 일제히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스코틀랜드의 슐트런은 밀집 대형의 특성상 움직임이 제한적이었고, 병사들은 대부분 갑옷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엄폐물도 없었다. 따라서 잉글랜드 궁수들에게는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투사체에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갔다. 슐트런은 방어 진형을 유지할 수도, 앞으로 나아가 공격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졌다.

결국 장궁의 집중 공격으로 스코틀랜드 군의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에드워드 1세는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에게 다시 돌격 명령을 내렸다. 약화된 슐트런은 잉글랜드 기병대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완전히 붕괴되었고, 많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폴커크 전투에서 잉글랜드 장궁병은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슐트런 진형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장궁이 중세 전투에서 얼마나 강력한 무기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장궁의 위력은 이후 백년전쟁에서도 잉글랜드군에게 중요한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게 된다.

4. 전투의 영향

폴커크 전투 이후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스털링을 점령하고 스코틀랜드퍼스, 세인트앤드루스, 에어셔 등지를 약탈했지만, 보급 문제와 자금 부족으로 인해 9월 9일까지 칼라일로 후퇴해야 했다.[7]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월레스의 부관인 존 드 그래엄 경과 존 스튜어트 경, 그리고 파이프의 매크더프를 포함한 주요 지도자들이 전사하는 등 인명 손실이 컸다.[7]

이 전투의 패배는 윌리엄 월레스의 군사적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는 결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 및 왕국군 지휘관' 직위를 사임하게 되었다.[7][14][15][16] 에드워드 1세는 월레스를 스코틀랜드 저항의 상징으로 보고 그를 체포하는 데 집중했다.[14][15][16]

한편, 폴커크 전투는 롱보우의 전술적 유효성을 명확히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잉글랜드 군은 롱보우를 주력 무기로 삼아 숙련도를 높였고, 이는 훗날 백년 전쟁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 기병대를 상대로 잉글랜드 군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에드워드 1세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과 자금 부족 문제로 인해 곧 칼라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재정복은 1304년까지 지연되었다.[7] 에드워드 1세는 1300년 여름에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7]

4. 1. 윌리엄 월레스의 몰락

폴커크 전투에서의 패배는 윌리엄 월레스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고, 그의 신뢰도는 크게 낮아졌다.[7] 이 전투를 기점으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민중 주도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귀족들이 주도권을 잡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패배의 결과로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직위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프랑스 국왕과 교황청의 지원을 얻고자 해외로 나섰으나[7]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스코틀랜드 지도부의 인명 손실도 컸는데, 월레스의 충실한 부관이었던 존 드 그래엄 경과 존 스튜어트 경, 그리고 파이프의 매크더프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7]

일부 역사가들은 월레스가 뛰어난 게릴라 지도자였음은 인정하면서도, 정규군을 조직하고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7] 에반 맥레오드 배런은 스털링 다리 전투의 성공적인 전략과 비교하며 폴커크 전투에서의 전술 운용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14][1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의 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14][15][16]

결국 월레스는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약 7년간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민중의 저항 정신을 꺾기 위해 월레스 체포에 매우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14][15][16] 월레스는 1305년 결국 잉글랜드 군에 붙잡혀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4. 2.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지속

폴커크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였지만, 스코틀랜드 왕국을 완전히 정복하는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다. 월리스가 펼친 초토화 전술로 인해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배고픔과 질병으로 인해 군대가 약화되어 더 이상 전역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결국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로 퇴각을 명령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더럼에서 파견된 분견대를 포함한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는 등 군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영토를 나눠주겠다는 제안으로 이탈을 막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7]

이 패배는 월리스의 군사적 명성에 타격을 주었으며, 그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 및 왕국군 지휘관" 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주도권은 월리스로 대표되는 민중적 저항에서 전통적인 귀족 세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월리스는 프랑스교황청의 지원을 얻기 위해 해외로 나갔으나, 결국 지명수배자 신세가 되어 약 7년간 도망 다니다 1305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14][15][16] 에드워드 1세는 월리스를 스코틀랜드 민중 저항의 상징으로 보고 그를 체포하는 데 집중했다.[14][15][16]

폴커크 전투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스털링을 점령하고 스코틀랜드퍼스, 세인트앤드루스, 에어셔 등지를 약탈했지만, 군대의 유지 문제와 식량 및 자금 부족으로 인해 9월 9일까지 칼라일로 후퇴했다. 그는 1300년 여름에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며,[7]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재정복은 1304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스코틀랜드 지도층의 사상자로는 월리스의 부관인 존 드 그래엄 경, 존 스튜어트 경, 파이프의 매크더프 등이 포함되었다.[7]

한편, 폴커크 전투는 롱보우의 효과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군이 프랑스 기병대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5. 역사적 의의

폴커크 전투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으며, 군사적,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군사적으로는 잉글랜드장궁 부대의 효과를 실전에서 증명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윌리엄 월리스가 펼친 초토화 전술과 에드워드 1세 군대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전체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전투는 향후 백년 전쟁 등에서 잉글랜드군 전술의 핵심이 될 장궁의 군사적 가치를 명확히 보여준 중요한 사례로 남았다. 또한, 무모한 기사 돌격 전술의 한계를 드러내며 조직력과 훈련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이 전투에서의 패배가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리스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키고 결국 그가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 직위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성격이 소위 '민중적' 국면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월리스의 정치적 몰락 이후 스코틀랜드 저항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5. 1. 군사적 측면

폴커크 전투는 잉글랜드의 완벽한 승리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미래 전투 양상 변화의 씨앗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거만하고 훈련이 부족했던 스코틀랜드 기사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점차 전문적인 영역으로 변모하면서, 무작정 돌격하는 방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갔다. 개인의 용맹함보다는 조직력, 훈련, 그리고 효과적인 명령 수행 능력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로 부상했다. 에드워드 1세는 폴커크에서 이러한 변화를 성공적으로 활용했지만, 훗날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배넉번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특히 폴커크 전투는 장궁(롱보우) 부대의 군사적 유효성을 명확히 입증한 사례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 전투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장궁은 이후 잉글랜드군의 핵심 무기로 자리 잡았고, 숙련된 장궁병들은 백년 전쟁에서 수적으로 우세했던 프랑스 기병대를 상대로 잉글랜드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폴커크 전투가 던바 전투처럼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결정지은 전투는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윌리엄 월리스의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지만, 그가 펼친 초토화 전술로 인해 스코틀랜드 전체가 정복되지는 않았다.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전투 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며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더 이상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결국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로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은 병사들과 함께 다음 원정을 준비하려 했으나,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영토 분배를 약속하며 이탈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군대 대부분을 잃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봉신들이 불성실하여 폴커크 전투의 승리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여겼다. 이러한 식량과 자금 부족 문제로 인해 스코틀랜드 재정복은 1304년까지 지연되었다.

폴커크에서의 패배는 윌리엄 월리스 개인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결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 및 왕국군 지휘관' 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민중적' 국면이 끝나고, 전통적인 귀족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월리스는 이후 프랑스 왕과 교황청의 지원을 얻기 위해 해외로 떠났지만, 결국 지명수배자가 되어 약 7년간 도피하다 1305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패배 이후 스코틀랜드 저항군 내부에서는 파벌 싸움이 더욱 격화되었다.

5. 2. 정치적 측면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겪은 패배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의 소위 "민중적" 국면이 종료되었으며, 독립 전쟁의 주도권은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독립을 이끌 힘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위대한 영웅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그는 해외를 여행하며 프랑스 왕과 교황청의 지원을 얻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월레스는 지명수배자가 되었고, 1305년 체포되어 처형당할 때까지 약 7년 동안 역사의 전면에서 벗어나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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