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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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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1296년부터 1357년까지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지배 시도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가 벌인 독립 투쟁이다. 1286년 알렉산더 3세 사망 이후 왕위 계승 문제와 잉글랜드의 간섭으로 시작되었으며, 기근과 압제에 시달린 스코틀랜드 민중들은 윌리엄 월레스, 로버트 1세 등의 지도 아래 잉글랜드에 저항했다. 스털링 브리지 전투, 배넉번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쟁취했고, 아브로스 선언과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을 통해 독립을 공고히 했다. 이후 데이비드 2세 시기 제2차 독립 전쟁이 발발했지만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유지했으며, 스튜어트 왕조가 개창되었다.

2. 배경

13세기 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추위와 잦은 비로 인해 농작물 생산량이 급감하고, 이는 곧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잉글랜드 왕은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스코틀랜드인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1]

1214년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1236년 요크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간 국경을 확정 지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3세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헤브리디스 제도를 스코틀랜드 영토로 편입시키는 업적을 남겼다.[1]

그러나 알렉산더 3세가 1286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의 손녀이자 유일한 혈육인 마가렛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린 나이로 인해 귀족들 간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1]

1289년 마가렛이 스코틀랜드로 오던 중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존 발리올과 로버트 드 브루스를 비롯한 여러 명의 왕위 요구자들이 나타나 경쟁을 벌였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내전을 우려하여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이용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결국 1292년 존 발리올이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에드워드 1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1]

2. 1. 기후와 기근

1200년대 초반 스코틀랜드는 대체로 온화한 기후였다.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켈트족들은 삶이 풍족하지는 않아도 굶주리거나 힘든 생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1215년 동유럽의 혹한으로 대흉작이 발생했고, 특히 산악 지역이었던 스코틀랜드는 고지대의 빙하가 저지대로 내려오면서 농지가 파괴되었다. 1200년대 말부터 1300년대 초반까지 추위와 많은 비로 유럽에 대기근이 발생했고, 수많은 농민이 굶어 죽었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 강이 겨울 내내 얼어붙었고, 극심한 한파와 함께 발생하는 특성을 가진 폭풍과 돌풍이 영국 해협과 북해를 강타했다. 많은 농토가 날씨로 인해 소실됐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근은 체력을 약화시키면서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이러한 대기근 속에서도 잉글랜드의 왕은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이에 자극받게 되었다.

2. 2. 알렉산더 3세 사망과 왕위 계승 문제

1214년, 16세의 알렉산더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여동생인 조앤과 결혼하였고, 1236년에는 요크 조약을 맺어 잉글랜드와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그 후 1249년, 노르웨이로부터 헤브리디스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 중에 사망하였고, 8세의 알렉산더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255년, 알렉산더 3세는 친정을 시작하여 섭정인 존 드 발리올 등을 축출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내분에는 중립을 지키며 내정 안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과제였던 노르웨이군의 축출에 나서게 되었다. 1261년 헤브리디스 제도 탈환에 성공하였고, 1263년에는 서부 클라이드 만에서 노르웨이 왕 하콩 4세를 격파했다. 3년 후 노르웨이와의 평화 조약으로 헤브리디스 제도는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영토가 되었다.

알렉산더 3세는 헨리 3세의 딸 마가렛(조앤의 조카)과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알렉산더 3세보다 먼저 사망했다. 그리고 1285년에 재혼한 아내 욜란다 드 드루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286년, 알렉산더 3세는 사망하면서 장녀 마가렛이 노르웨이 왕 에이리크 2세(하콩 4세의 손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손녀 마르그레테를 왕위에 앉히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로들과 고위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3세의 노르웨이 공주 마르그레테는 스코틀랜드 최초의 여왕 마가렛으로 즉위했지만, 노르웨이 왕궁에 아버지의 허락 하에 머물렀다. 국정은 합의제로 운영되었지만, 곧 유력 귀족들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헨리 3세 치세 동안 거의 명목상에 불과했지만, 잉글랜드 왕은 헨리 2세 이후 스코틀랜드의 종주였고, 에드워드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간섭했다. 즉, 마가렛을 스코틀랜드로 불러들인 후 잉글랜드 왕세자 에드워드(후의 에드워드 2세)와 약혼시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왕조 연합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1289년 노르웨이를 떠난 마가렛의 배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났고, 9월 26일 오크니(당시 노르웨이령)에 도착했을 때 마가렛은 숨을 거두었다. 불과 7세였다. 그리고 이것은 밸리올 왕가의 종말을 의미했다.

왕위 계승의 최유력 후보는 실력자인 존 발리올(알렉산더 3세의 섭정의 아들)과 로버트 드 브루스였지만, 서로 양보하지 않아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를 본 홀란트 백작플로리스 5세와 노르웨이 왕 에이리크 2세, 잉글랜드 귀족 등 외국인을 포함하여 왕가와 조금이라도 혈연이 있는 자들이 잇따라 등장하여 총 13명이 되면서 수습이 불가능해졌다.

내전 발발을 우려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중재를 요청했다. 이를 호기로 본 에드워드 1세는 1291년5월에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양국의 국경 근처 노럼에서 왕위 청구자들과 영주들을 모아 중재에 대한 복종과 공석 기간 동안의 스코틀랜드 통치권을 요구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많은 이들이 잉글랜드에도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관계로 잉글랜드 왕에게 거역하기 어려웠고, 강력한 잉글랜드 군의 묵시적인 압력도 있어 이를 승낙했다.

존 발리올과 로버트 드 브루스는 모두 말콤 4세 및 윌리엄 1세의 동생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여계 자손이었지만, 장자 상속을 우선시하면 존 발리올(데이비드의 장녀의 손자), 혈통의 가까움으로는 로버트 드 브루스(데이비드의 차녀의 손자)가 유리했다. 첫 심의에서 유력한 4명(전술한 2명과 플로리스 5세, 그리고 잉글랜드의 남작 존 헤이스팅스)으로 압축되었지만, 심의는 자주 연기되었다. 왕국의 분할 상속도 검토되었지만, 이듬해 1292년11월 17일, 베릭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지고 공식적으로 존 발리올이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지배자로 행세했고, 존 발리올은 왕위에 대해서도 꼭두각시에 가까웠으며, 잉글랜드에 대해 치욕적인 신하의 맹세를 강요당했다.

3.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1296년 ~ 1328년)

스코틀랜드 민중들은 잉글랜드의 압제에 시달려 윌리엄 월리스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로 대부대를 진군시켜 반란 진압을 시도했고, 양측 군대는 스털링에서 마주쳤다. 잉글랜드는 기병 전술을 사용했지만, 월레스는 장창 전술로 맞서 스털링에서 대승을 거두고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1298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이용해 월레스를 배신하게 한 뒤 폴커크 전투에서 승리했다. 월레스는 1305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월레스의 처형은 스코틀랜드인들의 독립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로버트 더 브루스가 독립전쟁을 이끌었고,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과 결전을 벌였다. 브루스는 지형과 날씨를 활용하고, 잉글랜드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등 비정형전쟁을 펼쳐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했다.

3. 1. 잉글랜드의 침략과 스코틀랜드의 저항

윌리엄 윌레스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한 사건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아이샤이어의 전설에 따르면, 루낙(Lanark) 시장에서 낚시를 하던 월레스에게 2명의 잉글랜드 병사가 시비를 걸었고, 싸움이 벌어져 월레스는 그들을 죽였다. 눈먼 해리는 얼바인(Irvine) 강가의 싸움에서 월레스가 5명의 잉글랜드 병사들을 죽였다고도 한다. 곧 월레스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던디(Dundee)에 위치한 성 바울 성당(St. Paul's Cathedral)의 장식판 내용에 따르면 월레스는 그와 그의 가족을 모욕한 던디의 잉글랜드인 지배자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그의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3]

기근과 압제에 시달려 온 스코틀랜드 민중들은 월레스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297년 대부대를 스코틀랜드로 진군시켰다. 양쪽 군대가 마주친 곳은 스털링이었다.

잉글랜드는 전통적인 기병 전술을 사용했다. 대규모 전투에서 먼저 화살을 이용해 일제 사격을 한 후 기병들의 돌격으로 보병들의 방어진을 무력화시킨 후 보병을 돌격시켜 승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적할 기병이 없던 월레스는 장창전법을 사용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장창병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나무 창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든 다음 공격해 들어오는 잉글랜드의 기병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스털링에서 대승을 거둔 월레스의 스코틀랜드 반군은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토착귀족들에게 당근을 줘 월레스를 배신하게 했다. 그런 다음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월레스의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폴커크에서 패한 뒤 프랑스로 탈출한 월레스는 세를 규합해 저항을 계속하다가 1305년 다시 패배해 체포된 뒤 사형당했다.

하지만 월레스를 처형하는 잔혹한 조치는 오히려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크게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월레스의 영웅적인 싸움과 죽음에 고무됐고, 잉글랜드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준히 투쟁을 계속했다. 이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로버트 더 브루스다. 그는 월레스의 죽음 이후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왕위에 올랐다.

1314년 월레스가 대승을 거뒀던 장소인 스털링으로부터 3.2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배넉번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결전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의 왕 브루스는 정형적인 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형과 날씨를 활용하는 비정형전쟁을 계획했다. 잉글랜드군이 사용할 수 있는 집과 작물은 철저히 불에 태웠다. 험악한 스코틀랜드의 산지를 이용해 전투를 했고, 밤에는 계속적인 기습을 가했다.

야영을 할 때도 잉글랜드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백파이프와 뿔피리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치고 끊임없이 시달렸다. 브루스는 소수의 병력밖에 없는 잉글랜드의 북부 성들을 공격해 집과 작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는 등 잉글랜드 북부지방을 황폐화시켰다.

계속적인 기습과 병사들의 사기 저하, 식량 부족, 그리고 이질로 수많은 병사가 쓰러져 가자 잉글랜드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온 잉글랜드군 앞에는 스코틀랜드 군에게 황폐화된 불모지밖에 없었다.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스코틀랜드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성들이 하나씩 하나씩 스코틀랜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비정형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브루스는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 승리하면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3. 2. 로버트 더 브루스의 등장과 배넉번 전투

윌리엄 월리스를 처형한 잔혹한 조치는 오히려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크게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월레스의 영웅적인 싸움과 죽음에 고무되었고, 잉글랜드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준히 투쟁을 계속했다. 이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로버트 더 브루스다. 그는 월레스의 죽음 이후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왕위에 올랐다.[4]

1314년 월레스가 대승을 거뒀던 장소인 스털링으로부터 3.2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배녹번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결전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의 왕 브루스는 정형적인 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형과 날씨를 활용하는 비정형전쟁을 계획했다. 잉글랜드군이 사용할 수 있는 집과 작물은 철저히 불에 태웠다. 험악한 스코틀랜드의 산지를 이용해 전투를 했고, 밤에는 계속적인 기습을 가했다.

야영을 할 때도 잉글랜드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백파이프와 뿔피리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치고 끊임없이 시달렸다.

브루스는 소수의 병력밖에 없는 잉글랜드의 북부 성들을 공격해 집과 작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는 등 잉글랜드 북부지방을 황폐화시켰다.

계속적인 기습,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식량 부족, 그리고 이질로 수많은 병사가 쓰러져 가자 잉글랜드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온 잉글랜드군 앞에는 스코틀랜드 군에게 황폐화된 불모지밖에 없었다.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스코틀랜드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성들이 하나씩 하나씩 스코틀랜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비정형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브루스는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 승리하면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배넉번 기념비 명판

3. 3. 아브로스 선언과 독립 승인

1320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교황에게 아브로스 선언을 보내 영국의 지배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확인했다. 귀족, 성직자, 로버트 1세에 의해 두 개의 유사한 선언이 더 발송되었다. 1324년, 토마스 랜돌프 모레이 백작은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으로 교황을 직접 만나러 갔다. 랜돌프는 교황 요한 22세를 성공적으로 설득하여 로버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게 했는데, 이는 뛰어난 외교적 성공이었다. 1327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어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로버트 1세나 그의 전쟁 지휘관들이 잉글랜드 북부를 반복적으로 침략했고, 그 결과 영국 국왕이 거의 붙잡힐 뻔했던 스탠호프 파크 전투가 일어났으며, 결국 에드워드 3세는 1328년 5월 1일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로버트 브루스의 국왕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평화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로버트 1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데이비드 2세는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4.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1332년 ~ 1357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후, 데이비드 2세는 어렸기 때문에 모레이 백작 토마스 랜돌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당한 굴욕을 갚고자 했고, 존 발리올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에드워드 발리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과 헨리 보몬트가 이끄는 '몰수당한 자들'(Disinherited)이라 알려진 스코틀랜드 귀족 집단의 지원도 받았다. 이들은 1차 전쟁에서 영국을 지원했고, 배넉번 전투 이후 로버트 1세는 그들에게 평화에 복귀할 1년의 시간을 주었으나 거절당했다. 평화가 체결되었을 때, 그들은 전쟁 배상금을 받지 못했고, 그들의 옛 영지를 갈망하여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모레이 백작이 1332년 7월 20일에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퍼스에 모여 마 백작 도널드 2세를 새로운 섭정으로 선출했다. 한편, 발리올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험버에서 출항했다. 에드워드 3세는 여전히 데이비드 2세와 평화 상태였고, 발리올과의 거래는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발리올이 트위드 강을 건너 스코틀랜드를 침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해상 침공은 눈감아주었다.

'몰수당한 자들'은 8월 6일 파이프의 킹혼에 상륙했다. 그들이 퍼스로 진군했을 때, 새로운 섭정의 지휘 아래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스코틀랜드 군대에 의해 길이 막혔다.

두플린 무어 전투에서 헨리 보몬트가 지휘하는 발리올의 군대는 더 큰 스코틀랜드군을 패배시켰다. 보몬트는 중앙에 낙마한 기사와 양쪽 측면에 궁수를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스코틀랜드군 대부분은 적의 전열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 백작, 로버트 더 브루스 경(로버트 더 브루스의 사생아), 많은 귀족들과 약 2,000명의 스코틀랜드인들이 살해당했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먼저 퍼스에서, 그 후 9월 스콘 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발리올의 성공에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10월, 아치볼드 더글라스 경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어 발리올과 휴전을 맺고,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하여 진정한 왕을 결정하기로 했다. 발리올은 영국군 대부분을 해산하고 앤넌으로 이동했다. 그는 영국의 도움으로 왕국을 되찾았고, 스코틀랜드는 항상 영국의 봉토였음을 인정했다. 그는 벌윅온트위드를 포함한 국경 지역에 에드워드 3세에게 토지를 약속하고, 생애의 나머지 기간 동안 에드워드를 섬길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12월, 더글라스는 새벽에 앤넌에서 발리올을 공격했다. 발리올의 부하들 대부분이 사망했지만, 발리올 자신은 벽에 난 구멍을 통해 탈출하여 알몸으로 말을 타고 칼라일로 도망쳤다.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다. 프로이사르 연대기 판본에서 발췌


1333년 4월, 에드워드 3세와 발리올은 대규모 영국 군대와 함께 벌윅을 포위 공격했다. 아치볼드 더글라스는 7월에 도시를 구원하려고 시도했지만, 할리던 힐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데이비드 2세와 그의 왕비는 덤바턴 성으로 피신했다. 벌윅은 항복했고 에드워드에 의해 합병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의 많은 지역이 영국의 점령하에 있었고, 8개의 스코틀랜드 저지대 카운티가 에드워드 발리올에 의해 영국에 할양되었다.

1334년 초, 필립 6세는 데이비드 2세와 그의 궁정을 프랑스로 망명시키겠다고 제안했고, 5월에 그들은 프랑스에 도착하여 노르망디의 샤토 가이야르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필립은 영국-프랑스 평화 협상을 방해하기로 결정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와 영국 간의 모든 조약에는 망명 중인 스코틀랜드 국왕을 포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데이비드가 부재한 동안, 일련의 섭정들이 투쟁을 계속했다. 11월, 에드워드 3세는 다시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335년 2월에 후퇴했다. 그와 에드워드 발리올은 7월에 1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스코틀랜드를 거쳐 글래스고퍼스로 진격했고, 에드워드 3세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군대는 주변 시골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인들은 전투를 피하고 대신 기병의 소규모 행동에 의존하는 전략을 따랐다. 1332년과 1333년에 에드워드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아토일 백작을 포함한 일부 스코틀랜드 지도자들은 브루스 당으로 전향했다.

에드워드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 스코틀랜드 저항의 남은 지도자들은 앤드류 머레이 경을 섭정으로 선택했다. 그는 1336년 4월까지 에드워드와 휴전 협상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여러 프랑스와 교황 사절들이 두 나라 사이의 평화를 협상하려고 시도했다. 1월, 스코틀랜드는 에드워드 발리올을 왕으로 인정하는 조약 초안을 작성했는데, 데이비드 2세가 그의 상속자가 되고 영국에 거주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2세는 평화 제안과 더 이상의 휴전을 거절했다. 5월, 헨리 랭커스터가 이끄는 영국군이 침공했고, 7월에는 에드워드 왕이 이끄는 또 다른 군대가 침공했다. 그들은 함께 북동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엘긴과 애버딘을 약탈했고, 세 번째 군대는 남서부와 클라이드 강 계곡을 황폐화했다. 필립 6세는 스코틀랜드를 돕고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침공할 대규모 함대와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에드워드는 곧 영국으로 돌아왔고, 스코틀랜드인들은 머레이의 지휘 아래 영국의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하고 시골을 황폐화하여 영국인이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3세는 다시 침공했지만, 프랑스의 침공 가능성에 대해 더욱 불안해졌고, 1336년 말까지 스코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 전역을 거의 장악했고, 1338년에는 전세가 역전되었다. “흑색 애그니스”, 더바와 마치 백작 부인은 덤바 성을 포위 공격하는 영국군에 계속 저항하며 성벽에서 도전과 욕설을 퍼부었다. 스코틀랜드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고 그의 군대를 플랑드르로 이끌고 프랑스와 백년 전쟁을 시작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335년 가을 후반, 몰수당한 아토일 백작 스트라스보기와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자유민을 몰수하고 죽임으로써 스코틀랜드 저항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 후 스트라스보기는 킬드러미 성을 포위 공격했고, 앤드류 드 모레이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스트라스보기의 군대는 붕괴되었고 스트라스보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사망했다. 컬블레인 전투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종결된 것이었다.

단 9년 만에 로버트 더 브루스가 어렵게 얻은 왕국은 파괴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 많은 경험 많은 귀족들이 죽었고, 경제는 다시 한번 엉망이 되었다. 데이비드 2세는 마침내 1341년 6월 평화와 좋은 정부가 필요한 빈곤한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데이비드 2세 (왼쪽 아래). 프로이사르 연대기 판본에서 발췌


데이비드가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훌륭한 아버지의 기억에 걸맞게 살고자 했다. 그는 영국과의 휴전을 무시했고 백년 전쟁 초기에는 그의 동맹국 필립 6세를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1341년 그는 영국을 습격하여 에드워드 3세가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북쪽으로 이끌도록 강요했다. 1346년, 스코틀랜드의 추가적인 습격 이후, 필립 6세는 칼레에 대한 영국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에 대한 반격을 요청했다. 데이비드는 기꺼이 수락하고 더럼을 점령할 의도로 스코틀랜드 군대를 남쪽으로 직접 이끌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영국 군대는 요크셔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스코틀랜드인들과 맞섰다. 10월 14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패배했다. 그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데이비드는 두 개의 화살에 얼굴을 맞고 포로로 잡히기 전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회복 기간을 거친 후 런던 타워에 갇혀 11년 동안 수감되었고, 그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는 그의 조카 스튜어트 가문의 로버트 경이 통치했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스코틀랜드를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얼마 후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갤러웨이 일부를 장악하는 데만 성공했고, 그의 권력은 1355년까지 약해졌다. 그는 마침내 1356년 1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1364년 자녀 없이 사망했다.

데이비드 2세가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 맹세를 하다.


마침내 1357년 10월 3일, 데이비드는 벌윅 조약에 따라 석방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그를 위해 10만 마크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기로 합의했고, 10년에 걸쳐 지불해야 했다.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세금이 필요했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목적으로 그 돈을 사용하여 신민들의 반감을 샀다. 그 당시 나라는 비참한 상태였는데, 전쟁과 흑사병으로 황폐해졌다. 몸값의 첫 번째 할부금은 제때 지불되었다. 두 번째는 늦었고, 그 이후로 더 이상 지불할 수 없었다.

1363년, 데이비드는 런던으로 가서 자녀가 없이 사망할 경우 왕관이 에드워드(그의 매부) 또는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넘어가고, 운명의 돌이 스코틀랜드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위해 반환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데이비드가 의회가 그러한 합의를 거부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값을 재협상하려는 다소 부정직한 시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스코틀랜드는 이 합의를 거부하고 몸값(현재 10만 파운드로 증가)을 계속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25년 휴전이 합의되었고, 1369년 프랑스와의 전쟁의 영향으로 1365년 조약이 취소되고 스코틀랜드에 유리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새로운 조건에 따라 이미 지불된 4만 4천 마크가 원래 10만 마크에서 공제되었고, 잔액은 향후 14년 동안 4천 마크씩 할부로 지불되었다.

에드워드가 1377년에 사망했을 때, 여전히 2만 4천 마크가 미지불되었는데, 이는 결코 지불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그의 영국인 아내가 사망한 후 하급 영주의 미망인과 결혼하면서 그의 인기와 귀족들의 존경을 잃었다. 그는 1371년 2월에 사망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유지했으며, 연합 조약인 1707년 영국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합으로 단일 대영 제국이 형성될 때까지 그러했다.

5. 전쟁 이후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자신이 초래한 막대한 몸값 지불로 인해 왕권이 실추되는 것을 느꼈다. 또한, 의회의 권력이 강한 스코틀랜드에서의 삶을 괴로워했다. 황폐하고 혼란스러운 스코틀랜드보다 잉글랜드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한 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또는 그의 상속자에게 스코틀랜드 왕위를 넘기는 비밀 협약을 몰래 맺고 1367년 런던으로 돌아갔다.

이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아브로스 선언에 따라 에드워드 3세의 아들 라이오넬 오브 안트워프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몸값을 계속 지불하며 대항했다. 몸값 지불은 국가 재정을 압박했고, 국민들은 더욱 무거운 세금에 시달렸다. 1349년부터 시작된 페스트의 만연과 오랫동안 이어진 침략과 내란으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쇠약해졌고, 나라는 황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371년 데이비드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에드워드 발리올 또한 독신으로 사망하여 두 왕가 모두 단절되었다.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이자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던 로버트 스튜어트가 로버트 2세로 왕위에 올라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6. 주요 인물


  • 알렉산더 3세
  • 존 발리올
  • 로버트 1세
  • 데이비드 2세
  • 로버트 스튜어트 – 7대 고위 관리, 부관 (1346–57)
  • 로버트 위셔트 – 글래스고 주교 (1272–1317)
  • 존 2세 커민 및 존 3세 커민 – 섭정 (1298–1301, 1304)
  • 앤드류 드 모레이
  • 윌리엄 월리스
  • 존 드 그레이엄
  • 존 드 술리스 – 섭정 (1301–04)
  • 도널드 1세, 마 백작 (1276–1301)
  • 가르트네이트, 마 백작 (1301–05)
  • 에드워드 브루스
  • 토마스 랜돌프, 1대 머레이 백작 – 섭정 (1329–32)
  • 제임스 더글러스 경 ("흑색" 또는 "선량한")
  • 말콜름 2세, 레녹스 백작 (1303–33)
  • 도널드 2세, 마 백작 (1305–32) 섭정 (1332)
  • 윌리엄 2세, 로스 백작 (1274–1323)
  • 던컨 4세, 파이프 백작 (1288–1353)
  • 윌리엄 램버턴 –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1298–1328)
  • 아브로스의 버나드 – 재무장관 (1308–28)
  • 앤드류 머레이 경 – 섭정 (1332, 1335–38)
  • 아치볼드 더글러스 경 – 섭정, 할리던 힐 전투에서 1333년 사망.
  • 애그니스 던바, 던바/마치 백작 부인
  • 에오드, 로스 백작 (1323–33)
  • 월터 스튜어트, 6대 고위 관리
  • 말이사 3세, 스트래선 백작 (1271–1317)
  • 말이사 4세, 스트래선 백작 (1317–29)
  • 말이사 5세, 스트래선 백작, 1330–34, 케이즈니스 & 오크니 백작, 1331–50
  • 에드워드 1세
  • 에드워드 2세
  • 에드워드 3세
  • 에드워드 발리올
  • 헨리 보몽, 버컨 4세 백작
  • 험프리 드 보흔, 헤리퍼드 4세 백작
  • 존 드 브르타뉴, 리치먼드 1세 백작
  • 헨리 그로스몽, 랭커스터 1세 공작
  • 데이비드 1세 스트래스보기, 애솔 백작
  • 데이비드 2세 스트래스보기, 애솔 백작
  • 길버트 드 엄프러빌, 앵거스 백작
  • 에이머 드 발렌스, 펨브로크 2세 백작
  • 존 드 와렌, 서리 6세 백작
  • 필리프 4세
  • 필리프 6세
  • 요한 22세

참조

[1] 서적 Robert the Bruce, King of Scots 1989
[2] 논문 Feudal Relations Between the Kings of England and Scotland Under the Early Plantagenet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1897
[3] 서적 Robert the Bruce, King of the Scots
[4] 서적 King Robert the Bruce https://books.google[...] Kessinger Publishing 1899
[5] 서적 The Chronicle of Lanercost Macmillan and Co.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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