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야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풍야왕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박사에게 《시경》을 배워 통달했다. 18세에 장안 현령을 자원했으나 승상 위상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후 여러 현령과 태수를 거쳐 좌풍익, 대홍려 등을 역임했다. 원제 사후 성제가 즉위했으나, 외척이라는 이유로 상군태수로 전출되었고, 왕봉과의 갈등으로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결국 몇 년 후 사망했으며, 관내후는 아들 풍좌가 이었다.

풍야왕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전한의 관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 전한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정치인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2. 생애

박사(博士)에게서 《시경》을 익혀 통달하였다. 임자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었고, 18세 때 스스로 장안령(長安令)에 임명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선제는 풍야왕의 말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승상 위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당양장(當陽長)·약양령(櫟陽令)·하양령(夏陽令) 등으로 승진하였다.

원제 때에는 농서태수가 되었고, 근무 실적이 좋아 영광 2년(기원전 42년)에 좌풍익으로 승진하였다.

좌풍익의 관할에 있는 지양(池陽) 땅의 현령 병(並)은 탐욕스러운 자였는데, 그는 풍야왕이 나이 어린 외척임을 들어 업신여기고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풍야왕은 독우 조도(趙都)를 시켜 병의 비리를 조사하여 그가 돈을 횡령한 사실을 적발하였다. 조도의 체포에 저항하던 병은 조도에게 맞아 죽었고, 병의 유가족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사건은 정위에게 넘겨졌다. 조도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풍야왕의 결백을 주장하였고, 조정에서는 조도의 주장을 믿었다.

건소 2년(기원전 37년), 대홍려로 전임되었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어사대부 파연수가 죽었다. 많은 대신들은 후임으로 풍야왕을 추천하였고, 실적 또한 그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당시 세도를 부리던 중서령 석현은 풍야왕이 원제의 후궁의 오라비임을 들어 투명성을 논하며 반대하였고, 결국 풍야왕보다 지위가 낮은 태자소부 장담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에 풍야왕은 한탄하였다.

그 해에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풍야왕이 중산효왕의 외척임을 들어 봉록은 늘어나지 못하고 상군태수로 전출되었다.

한편 삭방자사 소육은 성제에게 풍야왕을 조정으로 돌려보낼 것을 상주하였고, 성제 또한 황태자 시절부터 풍야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풍야왕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자 성제는 황하의 제방을 시찰하는 사자로 삼았고, 낭야태수에 임명하였다.

훗날 경조윤 왕장이 성제에게 세도를 부리는 대장군 왕봉 대신 풍야왕을 기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성제 또한 그 계책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왕장이 죄를 지어 오히려 그가 주살되었다. 풍야왕은 불똥이 자신에 튈 것을 염려하여 병가를 냈고, 석 달 후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왕봉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하여금 풍야왕이 함부로 임지를 벗어났다고 상주하게 하였다. 이에 두흠이 율령이나 조서에도 맞지 않는 주장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봉은 듣지 않았고 결국 풍야왕은 파면되었다. 이후 태수가 병가를 내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몇 년 후, 집에서 죽었다. 풍봉세로부터 이어받은 관내후는 아들 풍좌가 이었고, 손자 대에 끊겼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박사(博士)에게서 《시경》을 익혀 통달하였다. 임자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었고, 18세 때 스스로 장안령(長安令)에 임명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선제는 풍야왕의 말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승상 위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당양장(當陽長)·약양령(櫟陽令)·하양령(夏陽令) 등으로 승진하였다.

원제 때에는 농서태수가 되었고, 근무 실적이 좋아 영광 2년(기원전 42년)에 좌풍익으로 승진하였다.

좌풍익의 관할에 있는 지양(池陽) 땅의 현령 병(並)은 탐욕스러운 자였는데, 그는 풍야왕이 나이 어린 외척임을 들어 업신여기고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풍야왕은 독우 조도(趙都)를 시켜 병의 비리를 조사하여 그가 돈을 횡령한 사실을 적발하였다. 조도의 체포에 저항하던 병은 조도에게 맞아 죽었고, 병의 유가족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사건은 정위에게 넘겨졌다. 조도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풍야왕의 결백을 주장하였고, 조정에서는 조도의 주장을 믿었다.

건소 2년(기원전 37년), 대홍려로 전임되었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어사대부 파연수가 죽었다. 많은 대신들은 후임으로 풍야왕을 추천하였고, 실적 또한 그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당시 세도를 부리던 중서령 석현은 풍야왕이 원제의 후궁의 오라비임을 들어 투명성을 논하며 반대하였고, 결국 풍야왕보다 지위가 낮은 태자소부 장담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에 풍야왕은 한탄하였다.

그 해에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풍야왕이 중산효왕의 외척임을 들어 봉록은 늘어나지 못하고 상군태수로 전출되었다.

한편 삭방자사 소육은 성제에게 풍야왕을 조정으로 돌려보낼 것을 상주하였고, 성제 또한 황태자 시절부터 풍야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풍야왕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자 성제는 황하의 제방을 시찰하는 사자로 삼았고, 낭야태수에 임명하였다.

훗날 경조윤 왕장이 성제에게 세도를 부리는 대장군 왕봉 대신 풍야왕을 기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성제 또한 그 계책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왕장이 죄를 지어 오히려 그가 주살되었다. 풍야왕은 불똥이 자신에 튈 것을 염려하여 병가를 냈고, 석 달 후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왕봉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하여금 풍야왕이 함부로 임지를 벗어났다고 상주하게 하였다. 이에 두흠이 율령이나 조서에도 맞지 않는 주장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봉은 듣지 않았고 결국 풍야왕은 파면되었다. 이후 태수가 병가를 내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몇 년 후, 집에서 죽었다. 풍봉세로부터 이어받은 관내후는 아들 풍좌가 이었고, 손자 대에 끊겼다.

2.2. 지방관 시절

풍야왕은 박사(博士)에게서 《시경》을 익혀 통달하였다. 임자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었고, 18세 때 스스로 장안령(長安令)에 임명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선제는 풍야왕의 말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승상 위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당양장(當陽長)·약양령(櫟陽令)·하양령(夏陽令) 등으로 승진하였다.

원제 때에는 농서태수가 되었고, 근무 실적이 좋아 영광 2년(기원전 42년)에 좌풍익으로 승진하였다.

좌풍익의 관할에 있는 지양(池陽) 땅의 현령 병(並)은 탐욕스러운 자였는데, 그는 풍야왕이 나이 어린 외척임을 들어 업신여기고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풍야왕은 독우 조도(趙都)를 시켜 병의 비리를 조사하여 그가 돈을 횡령한 사실을 적발하였다. 조도의 체포에 저항하던 병은 조도에게 맞아 죽었고, 병의 유가족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사건은 정위에게 넘겨졌다. 조도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풍야왕의 결백을 주장하였고, 조정에서는 조도의 주장을 믿었다.

건소 2년(기원전 37년), 대홍려로 전임되었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어사대부 파연수가 죽었다. 많은 대신들은 후임으로 풍야왕을 추천하였고, 실적 또한 그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당시 세도를 부리던 중서령 석현은 풍야왕이 원제의 후궁의 오라비임을 들어 투명성을 논하며 반대하였고, 결국 풍야왕보다 지위가 낮은 태자소부 장담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에 풍야왕은 한탄하였다.

그 해에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풍야왕이 중산효왕의 외척임을 들어 봉록은 늘어나지 못하고 상군태수로 전출되었다.

한편 삭방자사 소육은 성제에게 풍야왕을 조정으로 돌려보낼 것을 상주하였고, 성제 또한 황태자 시절부터 풍야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풍야왕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자 성제는 황하의 제방을 시찰하는 사자로 삼았고, 낭야태수에 임명하였다.

훗날 경조윤 왕장이 성제에게 세도를 부리는 대장군 왕봉 대신 풍야왕을 기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성제 또한 그 계책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왕장이 죄를 지어 오히려 그가 주살되었다. 풍야왕은 불똥이 자신에 튈 것을 염려하여 병가를 냈고, 석 달 후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왕봉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하여금 풍야왕이 함부로 임지를 벗어났다고 상주하게 하였다. 이에 두흠이 율령이나 조서에도 맞지 않는 주장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봉은 듣지 않았고 결국 풍야왕은 파면되었다. 이후 태수가 병가를 내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2.3. 어사대부 물망과 좌절

박사(博士)에게서 《시경》을 익혀 통달하였다. 임자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었고, 18세 때 스스로 장안령(長安令)에 임명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선제는 풍야왕의 말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승상 위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당양장(當陽長)·약양령(櫟陽令)·하양령(夏陽令) 등으로 승진하였다. 원제 때에는 농서태수가 되었고, 근무 실적이 좋아 영광 2년(기원전 42년)에 좌풍익으로 승진하였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어사대부 파연수가 죽었다. 많은 대신들은 후임으로 풍야왕을 추천하였고, 실적 또한 그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당시 세도를 부리던 중서령 석현은 풍야왕이 원제의 후궁의 오라비임을 들어 투명성을 논하며 반대하였고, 결국 풍야왕보다 지위가 낮은 태자소부 장담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에 풍야왕은 한탄하였다.

2.4. 성제 즉위 후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풍야왕은 중산효왕의 외척임을 이유로 봉록은 늘어나지 못하고 상군태수로 전출되었다.

삭방자사 소육은 성제에게 풍야왕을 조정으로 돌려보낼 것을 상주하였고, 성제 또한 황태자 시절부터 풍야왕을 잘 알고 있었다. 풍야왕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자 성제는 황하의 제방을 시찰하는 사자로 삼았고, 낭야태수에 임명하였다.

훗날 경조윤 왕장이 성제에게 세도를 부리는 대장군 왕봉 대신 풍야왕을 기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성제 또한 그 계책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왕장이 죄를 지어 오히려 그가 주살되었다. 풍야왕은 불똥이 자신에게 튈 것을 염려하여 병가를 냈고, 석 달 후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봉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하여금 풍야왕이 함부로 임지를 벗어났다고 상주하게 하였다. 두흠이 율령이나 조서에도 맞지 않는 주장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봉은 듣지 않았고 결국 풍야왕은 파면되었다. 이후 태수가 병가를 내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몇 년 후, 풍야왕은 집에서 죽었다. 관내후는 아들 풍좌가 이었고, 손자 대에 끊겼다.

2.5. 왕봉과의 갈등과 말년

풍야왕은 원제 때 농서태수로 근무 실적이 좋아 영광 2년(기원전 42년)에 좌풍익으로 승진하였다. 좌풍익 관할 지양(池陽) 땅의 현령 병(並)은 탐욕스러웠으나 풍야왕이 나이 어린 외척임을 들어 업신여겼다. 풍야왕은 독우 조도(趙都)를 시켜 병의 비리를 조사, 돈을 횡령한 사실을 적발하였다. 조도의 체포에 저항하던 병은 조도에게 맞아 죽었고, 병의 유가족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사건은 정위에게 넘겨졌다. 조도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풍야왕의 결백을 주장하였고, 조정에서는 조도의 주장을 믿었다.

건소 2년(기원전 37년), 대홍려로 전임되었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어사대부 파연수가 죽자 많은 대신들은 후임으로 풍야왕을 추천하였고, 실적 또한 그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당시 세도를 부리던 중서령 석현은 풍야왕이 원제의 후궁의 오라비임을 들어 투명성을 논하며 반대하였고, 결국 풍야왕보다 지위가 낮은 태자소부 장담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에 풍야왕은 "사람들은 (가족 중에 임금이) 총애하는 후궁을 두면 존귀해진다고 하던데, 우리 형제만은 비천해지는구나!"라고 한탄하였다.

그 해에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였으나, 풍야왕이 중산효왕의 외척임을 들어 상군태수로 전출되었다. 삭방자사 소육은 성제에게 풍야왕을 조정으로 돌려보낼 것을 상주하였고, 성제는 황태자 시절부터 풍야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풍야왕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자 황하의 제방을 시찰하는 사자로 삼았고, 낭야태수에 임명하였다.

훗날 경조윤 왕장이 성제에게 세도를 부리는 대장군 왕봉 대신 풍야왕을 기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성제 또한 그 계책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왕장이 죄를 지어 오히려 그가 주살되었다. 풍야왕은 불똥이 자신에 튈 것을 염려하여 병가를 냈고, 석 달 후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봉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하여금 풍야왕이 함부로 임지를 벗어났다고 상주하게 하였다. 두흠이 율령이나 조서에도 맞지 않는 주장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봉은 듣지 않았고 결국 풍야왕은 파면되었다. 이후 태수가 병가를 내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몇 년 후, 집에서 죽었다. 풍봉세로부터 이어받은 관내후는 아들 풍좌가 이었고, 손자 대에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