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1세 (양시칠리아)
1. 개요
프란체스코 1세는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나폴리에서 성장했다. 그는 1778년 형 카를로가 사망하면서 칼라브리아 공작이 되었고, 1812년 섭정을 거쳐 182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시칠리아의 국왕이 되었다. 자유주의를 자처했으나, 재위 기간 동안 보수적인 반동주의 정치를 펼쳤으며, 측근과 경찰 관료에게 정부를 맡기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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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프란체스코 젠나로 주세페 사베리오 조반니 바티스타 |
|---|---|
| 로마자 표기 | Francesco Gennaro Giuseppe Saverio Giovanni Battista |
| 칭호 | 폐하 |
| 약칭 | 전하 |
| 왕국 | 양시칠리아 왕국 |
|---|---|
| 즉위 | 1825년 1월 4일 |
| 퇴위 | 1830년 11월 8일 |
| 선임자 | 페르디난도 1세 |
| 후임자 | 페르디난도 2세 |
| 출생 | 1777년 8월 19일 |
|---|---|
| 출생지 | 나폴리 왕국, 나폴리, 나폴리 왕궁 |
| 사망 | 1830년 11월 8일 |
| 사망지 |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
| 매장지 | 산타 키아라 성당, 나폴리 |
| 종교 | 가톨릭교회 |
| 배우자 | 마리아 클레멘티나 폰 외스터라이히 (1797년 6월 26일 결혼, 1801년 11월 15일 사망) 마리아 이사벨라 디 스파냐 (1802년 7월 6일 결혼) |
|---|---|
| 자녀 |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 베리 공작 부인 루이사 카를로타 마리아 크리스티나, 스페인 왕비 페르디난도 2세 카를로 페르디난도, 카푸아 공자 레오폴도, 시라쿠사 백작 마리아 안토니아 디 부르보네-두에 시칠리에 안토니오, 레체 백작 마리아 아말리아 디 부르보네-두에 시칠리에 마리아 카롤리나 디 부르보네-두에 시칠리에 테레사 크리스티나 데 부르봉에 브라간사 루이지, 아퀼라 백작 프란체스코, 트라파니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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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가 |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 |
|---|---|
| 아버지 | 페르디난도 1세 |
| 어머니 | 마리아 카롤리나 폰 외스터라이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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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칠리아의 군주 -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양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한 군주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 시칠리아로 망명 후 복위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으나 자유주의 혁명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
양시칠리아의 군주 -
프란체스코 2세 (양시칠리아)
프란체스코 2세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으로, 가리발디의 침공과 사르데냐 왕국의 남하로 왕국이 멸망하면서 폐위되었고, 망명 생활 중 사망 후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되었다. -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가 -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양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한 군주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 시칠리아로 망명 후 복위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으나 자유주의 혁명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가 -
마리아 카롤리나 폰 외스터라이히
마리아 카롤리나 폰 외스터라이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부부의 딸로 태어나 나폴리 왕비가 되었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남편을 대신하여 나폴리 왕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며 반혁명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망명 후 오스트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
로마 가톨릭교 군주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1405년에 태어나 1449년 황제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 속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며 동로마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
로마 가톨릭교 군주 -
루이 14세
2. 생애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외할아버지인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1세의 이름을 따왔다. 형 카를로의 죽음으로 나폴리 왕국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자 칭호인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받았다.
1797년 6월 26일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딸인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클레멘티나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두 아이를 남기고 죽자, 사촌인 카를로스 4세의 딸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라와 재혼했다.
1806년, 부르봉 왕가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피난한 후, 1812년에 섭정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나폴리로 돌아온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가 두 왕국을 합병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우자(1816년), 프란체스코는 다시 칼라브리아 공작이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며, 1820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에도 신헌법에 호의적이었고, 섭정 정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182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양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칼라브리아 공작 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 치세 내내 보수적인 반동주의 정치를 꾀하였다. 그는 소수의 마음에 드는 귀족·고관을 이용하여 정부를 움직였고, 자신은 암살을 두려워하여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애첩들과 함께 생활했다. 프란체스코 재위 중, 1828년 칠렌토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2.1. 초기 생애
프란체스코는 나폴리에서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인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조카이기도 하다.
1778년, 그의 형인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가 사망하면서 프란체스코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나폴리 왕위 계승자의 전통적인 칭호인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797년 6월 26일, 프란체스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클레멘티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리아 클레멘티나가 두 아이만을 남기고 사망하자, 또 다른 사촌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막내딸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라와 재혼했다.
2.2. 섭정과 즉위
1806년, 부르봉 왕가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피난하자, 영국의 외교관 윌리엄 벤팅크 경은 페르디난도 1세로부터 전권을 받아 영국과 프랑스식 헌법을 마련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이에 동의하며 1812년 프란체스코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로 돌아와 시칠리아의 자치 요구를 억압하고 헌법을 폐지했으며, 두 왕국을 합병하여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프란체스코는 이때 다시 칼라브리아 공작 칭호를 받았다. 그는 왕위 계승자로서 자유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듯 보였고, 1820년 혁명이 일어나자 새로운 헌법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섭정을 수락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버지처럼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182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프란체스코 1세는 이전의 태도와 달리 보수적인 반동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국정 운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소수의 측근과 경찰 관료들에게 정부를 맡겼다. 그는 암살을 두려워하여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애첩들과 함께 지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주요한 혁명 움직임은 1828년 칠렌토에서 발생한 봉기였으나, 과거 자유주의자였던 델카레토 후작에 의해 진압되었다.
하지만 그는 1827년 오스트리아 점령군을 철수시켜 왕국의 재정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시민적 공로를 기리기 위해 프란체스코 1세 왕립 훈장이 제정되었다.
2.3. 통치와 사망
1812년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피신했을 때 영국의 윌리엄 벤팅크 경에 의해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페르디난도 1세가 복귀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선포하자 다시 칼라브리아 공작이 되었다. 왕위 계승자 시절에는 자유주의 사상을 표방했으며, 1820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새로운 헌법 제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다시 섭정직을 수락하기도 했다.
182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인물이었으며, 즉위 후에는 이러한 보수적 반동주의 노선을 명확히 따랐다. 그는 정부 운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소수의 측근과 경찰 관료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자신은 암살을 두려워하여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애첩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치세 동안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1827년 오스트리아 점령군을 철수시켜 왕국의 재정 부담을 덜어준 일이 있다. 또한, 1828년 칠렌토에서 발생한 폭동은 그의 재위 기간 중 유일한 혁명 운동이었으나, 과거 자유주의자였던 델카레토 후작에 의해 진압되었다. 시민적 공로를 보상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1세 왕립 훈장을 제정하기도 했다.
3. 가족 관계
프란체스코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1796년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딸이자 부계와 모계 모두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와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부인 사후, 1802년 7월 6일에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의 딸이자 역시 사촌 관계인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라와 재혼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3.1. 첫 번째 부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프란체스코 1세는 1796년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딸이자,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사촌 관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
3.2.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이사벨라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라는 카를로스 4세의 딸로 프란체스코 1세와는 사촌 관계였으며, 1802년 7월 6일 프란체스코 1세와 재혼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 사진 | 이름 | 생몰년 | 기타 |
|---|---|---|---|
| 루이사 카를로타 | 1804년 10월 24일 ~ 1844년 1월 29일 | 외숙부이자 7촌 아저씨인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와 결혼(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의 어머니) | |
| 마리아 크리스티나 | 1806년 4월 27일 ~ 1878년 8월 22일 | 스페인 페르난도 7세 왕비, 이사벨 2세의 어머니 1833년 왕실 경호관 아구스틴 페르난도 무뇨스와 재혼, 4남 3녀 | |
| 페르디난도 2세 | 1810년 1월 12일 ~ 1859년 5월 22일 |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 9남 4녀 | |
| 카를로 페르디난도 | 1811년 11월 10일 ~ 1862년 4월 22일 | 페넬로프 스미스와 귀천상혼 결혼, 1남 1녀 | |
| 레오폴도, 시라쿠사 백작 | 1813년 5월 22일 ~ 1860년 12월 4일 | 사보이의 마리아와 결혼, 1녀 | |
| 마리아 안토니아 | 1814년 12월 19일 ~ 1898년 11월 7일 |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와 결혼, 4남 5녀 | |
| 안토니오, 레체 백작 | 1816년 9월 23일 ~ 1843년 1월 12일 | 미혼 | |
| 마리아 아말리아 | 1818년 2월 25일 ~ 1857년 11월 6일 |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안과 결혼, 자녀 없음 | |
| 마리아 카롤리나 | 1820년 11월 29일 ~ 1861년 1월 14일 | 몬테몰린 백작 카를로스와 결혼, 자녀 없음 | |
| 테레사 크리스티나 | 1822년 3월 14일 ~ 1889년 12월 28일 | 브라질 페드루 2세 황후 | |
| 루이지, 아퀼라 백작 | 1824년 7월 19일 ~ 1897년 3월 5일 | 브라질의 자누아리아 (페드루 2세의 누나이자 마리아 2세의 여동생)와 결혼, 3남 1녀 | |
| 프란체스코, 트라파니 백작 | 1827년 8월 13일 ~ 1892년 9월 24일 | 마리아 이사벨라 여대공과 결혼, 2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