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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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1768년 프랑스 생말로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 미국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나트셰즈』, 『아탈라』, 『르네』 등을 집필하여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샤토브리앙은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가에 합류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옹호했으며, 1848년 혁명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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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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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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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
원어 이름 | François-René, vicomte de Chateaubriand |
출생일 | 1768년 9월 4일 |
출생지 | 생말로, 브르타뉴, 프랑스 |
사망일 | 1848년 7월 4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배우자 | 셀레스트 드 샤토브리앙 (1792년 결혼, 1847년 사별) |
형제자매 | 장바티스트 드 샤토브리앙 (형, 1759년 – 1794년) 뤼실 드 샤토브리앙 (여동생, 1764년 – 1804년)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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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 |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 임기: 1828년 1월 4일 - 1829년 8월 8일 군주: 샤를 10세 총리: 장바티스트 게이 드 마르티냑 자작 전임: 앙아드리앵피에르 드 몽모렝시라발 드 라발 공작 후임: 오귀스테 드 라 페로나이스 백작 |
외무장관 | 임기: 1822년 12월 28일 - 1824년 8월 4일 총리: 장바티스트 드 빌리에 백작 전임: 마티외 드 몽모랑시라발 공작 후임: 앙게 히아신드 막센스 드 다마 남작 |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 | 임기: 1822년 12월 22일 - 1822년 12월 28일 총리: 장바티스트 드 빌리에 백작 전임: 앙투안 8세 드 그라몽 공작 후임: 프랭스 쥘 드 폴리냑 공작 |
프로이센 주재 대사 | 임기: 1821년 12월 14일 - 1822년 12월 22일 총리: 장바티스트 드 빌리에 백작 전임: 샤를프랑수아 드 보네 후작 후임: 막시밀리엥 제라르 드 레이네발 |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 임기: 1814년 4월 3일 - 1815년 9월 26일 총리: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 전임: (정보 없음) 후임: (정보 없음) |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 임기: 1811년 - 1848년 좌석: 제19좌 전임: 마리조제프 체니에 후임: 폴 드 노아유 공작 |
군 복무 | |
소속 | 왕당군 |
복무 기간 | 1792년 |
계급 | 병졸 |
참전 전투 | 프랑스 혁명전쟁 티옹빌 공방전 (1792년) |
문학 활동 | |
문학 경향 | 낭만주의 |
활동 시기 | 1793년 – 1848년 |
장르 | 소설, 회고록, 수필 |
주제 | 종교, 이국주의, 실존주의 |
주요 작품 | 아탈라 (1801) 르네 (1802) 기독교의 정수 (1802) 묘지 너머의 회상 (1848) |
직업 | 번역가, 정치인, 외교관, 사학자, 시인, 소설가, 저널리스트, 수필가, 문학 비평가, 작가, 군인 |
수상 |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성묘 기사단 성 루이 훈장 성령 훈장 성 미카엘 훈장 |
2. 생애
샤토브리앙은 1768년 9월 4일 생말로에서 열 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브르타뉴 콩부르에 있는 가족의 성 (샤토 드 콩부르)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선장 출신의 선주이자 노예 무역상이었고,[24] 어머니의 본명은 아폴린 드 베데였다. 어린 시절 샤토브리앙은 우울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브르타뉴 시골의 산책과 여동생 루실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그는 심지어 사냥용 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아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아서 영은 1788년 콩부르를 방문하여 샤토 드 콩부르의 주변 환경을 "낭만적"이라고 묘사하면서도, 그곳의 낙후된 농업 기술과 열악한 생활 환경을 지적했다.[3]
샤토브리앙은 돌, 렌, 디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세에 군 경력을 선택하여 나바라에 주둔하는 프랑스 육군의 소위로 임관했다. 2년 후 대위로 승진한 그는 1788년 파리를 방문하여 장-프랑수아 드 라 아르프, 앙드레 셰니에 등 저명한 작가들과 교류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폭력적인 상황이 전개되자 1791년 북미로 여행을 떠났다.[4] 기욤-크레티앵 드 라무아농 드 말레셰르브는 그에게 식물학 연구를 권유하며 이 여행을 제안했다.[5]
1826년 출판된 『미국 여행(Voyage en Amérique)』에서 샤토브리앙은 1791년 7월 10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뉴욕, 보스턴, 렉싱턴을 방문하고 허드슨 강을 따라 올버니로 이동했다고 기록했다.[6] 이후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이동하여 원주민 부족과 함께 생활하며 팔 부상을 회복했다. 그는 원주민의 풍습, 동물학, 정치, 경제에 대한 관찰을 기록했으며, 오하이오 강, 미시시피 강, 루이지애나, 플로리다를 거쳐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1791년 11월 프랑스로 귀국했다고 주장했다.[6]
이 경험은 그의 소설 『나트셰즈(Les Natchez)』, 『아탈라(Atala)』, 『르네(René)』의 배경이 되었으며, 특히 미국 남부의 자연에 대한 묘사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일부 학자들은 샤토브리앙의 여행 기록, 특히 조지 워싱턴과의 만남과 미시시피 강 유역 여행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7]
1792년 프랑스로 돌아온 샤토브리앙은 콩데 공작 루이 조제프가 이끄는 왕당파 망명 귀족(émigré) 군대에 합류했다. 가족의 강요로 생말로 출신의 젊은 귀족 여성 셀레스트 뷔송 드 라 비뉴와 결혼했으나, 티옹빌 공성전에서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샤토브리앙은 런던에서 빈곤한 생활을 하며 프랑스어 교습과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서퍽주 번게이[8]에 머물 당시, 그는 집주인의 딸 샬롯 아이브스와 사랑에 빠졌지만, 기혼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계가 끝났다. 영국 체류 기간 동안 존 밀턴의 ''실낙원''을 비롯한 영국 문학에 심취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망명 생활 중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고찰하며, 1797년 ''혁명에 관한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18세기적 관점에서 혁명을 분석했지만, 그의 후기 낭만주의 작품과는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삶의 전환점은 1798년경 가톨릭 신앙으로의 개종이었다.
1800년 5월, 샤토브리앙은 귀족 망명자 사면령을 통해 프랑스로 돌아와(프랑스 영사정부 시기) 《메르퀴르 드 프랑스》를 편집했다. 1802년, 그는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그리스도교의 천재(Génie du christianisme)》를 출간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이는 종교 부흥에 기여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호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 맥밀런은 샤토브리앙의 책이 유럽 전역의 가톨릭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0]
나폴레옹에 의해 교황청 주재 사절단의 서기관으로 임명된 샤토브리앙은 페슈 추기경과 함께 로마로 갔으나, 곧 불화를 겪고 1803년 발레 공화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1] 1804년 나폴레옹의 앙리 드 부르봉 공작 처형에 분노하여 사임한 후, 문학에 전념하며 러시아 황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806년, 샤토브리앙은 그리스, 소아시아, 오스만 제국, 이집트, 튀니지, 스페인을 여행했다. 이 여행 기록은 1811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Itinéraire de Paris à Jérusalem)》(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으로 출판되었고, 산문 서사시 《순교자들(Les Martyrs)》의 일부가 되었다. 스페인 여행은 소설 《마지막 아벤세라헤의 모험(Les aventures du dernier Abencérage)》에 영감을 주었다.
1806년 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나폴레옹을 네로에 비유하며 비판했고, 이로 인해 1807년 파리에서 추방되어 샤트네말라브리의 "늑대 계곡(Vallée-aux-Loups)"에서 은거하며 《순교자들》을 완성하고 《저승으로부터의 회상》 집필을 시작했다. 1811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혁명을 비판하는 연설 내용 때문에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 시기 스탈 부인, 조제프 주베르(Joseph Joubert), 피에르 시몽 발랑슈(Pierre-Simon Ballanche) 등과 교류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샤토브리앙은 부르봉 왕가에 합류하여 1814년 나폴레옹을 비판하는 팸플릿 ''De Buonaparte et des Bourbons''을 집필했다.[13] 루이 18세를 따라 백일천하 동안 겐트로 망명했으며, 스웨덴 대사로 임명되었다. 워털루 전투 이후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귀족이자 장관(1815년)이 되었고, 네이 원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헌장에 따른 군주제''에서 루이 18세를 비판하여 장관직을 잃고 야당에 합류, 극우파 그룹의 대변지 ''르 콩세르바퇴르''의 주요 필진이 되었다.[13]
베리 공작 암살(1820년) 후 다시 궁정에 합류하여 ''베리 공작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다. 프로이센(1821년)과 영국(1822년) 대사를 거쳐 외무부 장관(1822년 12월 28일~1824년 8월 4일)직에 올랐다. 베로나 회의(1822년)에서 스페인 개입을 지지했으나, 1824년 조제프 드 빌렐 총리에 의해 해임되고 제노아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14] 이후 샤토브리앙은 자유주의 야당으로 전향하여 ''데바 논평''에 기고하며 언론의 자유와 그리스 독립 운동을 옹호했다. 빌렐 실각 후, 1828년 샤를 10세에 의해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폴리냐크 공작이 총리가 되자 사임했다(1829년).
1830년, 로마 산 로렌초 인 루치나 교회에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기념비를 기증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샤토브리앙은 오를레앙 왕가의 루이 필립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저승 너머의 회상》(Mémoires d'Outre-Tombe)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그의 비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으며, 당대의 혼란과 재앙을 예견했다. 그의 우울한 어조는 놀라움, 항복, 배신, 쓰라림을 시사했다.[15][16] ''역사 연구''는 계획된 ''프랑스 역사''의 서문이었으며, 그는 "부르주아 국왕" 루이 필립과 7월 왕정을 비판하고 마리 카롤린 드 부르봉 시칠리아 체포에 관한 책을 계획했다가 기소되기도 했다.
샤토브리앙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적 모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제시하며, "해방자의 종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제 막 세 번째 단계인 정치적 시대, 자유, 평등, 박애에 진입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17][18]
말년에 샤토브리앙은 파리 륄 뒤 바크 120번지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레카미에를 방문할 때만 외출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 ''랑세의 생애''는 트라피스트 수도회 창시자 아르망 장 르 부티예 드 랑세의 전기였으며, 샤토브리앙 자신의 삶과 유사성을 보인다. 그는 1845년에서 1847년까지 ''저승 너머의 회상''을 수정했다.
샤토브리앙은 1848년 7월 4일, 1848년 혁명의 와중에 파리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 그는 생말로 근처의 조수섬 그랑 베에 매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망명 (1768-1800)

샤토브리앙은 1768년 9월 4일 생말로에서 열 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브르타뉴 콩부르에 있는 가족의 성 (샤토 드 콩부르)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선장 출신의 선주이자 노예 무역상이었다.[24] 어머니의 본명은 아폴린 드 베데였다. 샤토브리앙의 아버지는 우울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젊은 샤토브리앙은 브르타뉴 시골의 긴 산책과 여동생 루실과의 깊은 우정으로만 위안을 얻으며 우울한 고독 속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에 사냥용 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다행히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아서 영은 1788년 콩부르를 방문하여 "낭만적인" 샤토 드 콩부르의 주변 환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9월 1일. 콩부르로 향했다. 이곳의 시골은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다. 농업은 울타리가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휴런족보다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만큼이나 야만적이며, 콩부르 마을은 볼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이고 더러운 곳 중 하나이다. 진흙집, 창문이 없고, 보행자들의 통행을 방해하지만 아무런 편의도 제공하지 않는 깨진 포장 도로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이 있으며, 거주하고 있다. 이 끔찍한 빈곤과 더러움 속에서 거주할 수 있는 신경을 가진 샤토브리앙 씨는 누구인가? 이 끔찍한 빈곤의 아래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영어[3]
샤토브리앙은 돌, 렌 및 디낭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한동안 해군 장교가 될지 아니면 사제가 될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17세에 군 경력을 선택하여 나바라에 주둔하는 프랑스 육군의 소위로 임관했다. 2년 만에 그는 대위로 승진했다. 그는 1788년 파리에 방문하여 당시의 저명한 작가인 장-프랑수아 드 라 아르프, 앙드레 셰니에, 루이-마르셀랭 드 퐁탄 등과 친분을 맺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샤토브리앙은 처음에는 동정적이었지만, 파리와 시골 전체에서 사건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하자 그는 1791년 북미로 여행하기로 결정했다.[4] 그는 기욤-크레티앵 드 라무아농 드 말레셰르브로부터 유럽을 떠날 생각을 얻었으며, 그에게 식물학 연구를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5]
1826년에 출판된 『미국 여행(Voyage en Amérique)』에서 샤토브리앙은 1791년 7월 10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배를 타고 허드슨 강을 거쳐 올버니(Albany)에 도착하기 전에 뉴욕, 보스턴, 렉싱턴을 방문했다.[6] 그 후 그는 모호크 트레일(Mohawk Trail)을 따라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갔는데, 거기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한 달 동안 원주민 부족과 함께 지내며 회복했다. 샤토브리앙은 그 후 원주민 부족의 풍습과 더불어 동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고찰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어 오하이오 강, 미시시피 강, 루이지애나, 플로리다를 따라 이어진 습격이 그를 필라델피아로 다시 데려왔고, 11월에 몰리(Molly)호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말한다.[6]
이 경험은 그의 이국적인 소설 『나트셰즈(Les Natchez)』(1793년부터 1799년 사이에 쓰여졌지만 1826년에야 출판됨), 『아탈라(Atala)』(1801년), 『르네(René)』(1802년)의 배경을 제공했다.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 남부(Deep South)의 자연에 대한 그의 생생하고 매혹적인 묘사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스타일로 쓰여졌고,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을 선도했다. 1916년 초부터[7] 일부 학자들은 샤토브리앙이 조지 워싱턴과 면담을 가졌다는 주장과 그가 실제로 자신이 묘사한 원주민들과 함께 지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비평가들은 샤토브리앙이 주장한 여행의 전체 구간, 특히 미시시피 계곡, 루이지애나, 플로리다를 통과한 부분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샤토브리앙은 1792년 프랑스로 돌아와 이후 콩데 공작 루이 조제프의 지휘 아래 코블렌츠(Koblenz)에 있는 왕당파 망명 귀족(émigré) 군대에 합류했다. 가족의 강한 압력으로 그는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생말로 출신의 젊은 귀족 여성 셀레스트 뷔송 드 라 비뉴(Céleste Buisson de la Vigne)와 결혼했다. 왕당파 군대와 프랑스 혁명군 사이의 주요 충돌인 티옹빌 공성전(1792)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그의 군 생활은 끝이 났다. 중상을 입은 그는 제르지(Jersey)로 옮겨져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아내는 뒤에 남겨두었다.
샤토브리앙은 런던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 망명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프랑스어 레슨을 제공하고 번역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서퍽주 번게이[8]에서의 체류는 더욱 목가적이었다. 그는 브리지 스트릿 34번지에 있는 뮤직 하우스에 머물렀는데, 이 사실은 건물에 부착된 명판에 기록되어 있다.[9] 여기서 샤토브리앙은 그의 주인의 딸인 젊은 영국 여성 샬롯 아이브스와 사랑에 빠졌지만,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을 때 그 로맨스는 끝났다. 영국 체류 기간 동안 샤토브리앙은 영국 문학에도 친숙해졌다. 특히 존 밀턴의 ''실낙원''(그는 나중에 프랑스어 산문으로 번역했다)을 읽은 것이 그의 문학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망명 생활은 샤토브리앙으로 하여금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목숨을 앗아간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검토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찰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인 ''혁명에 관한 에세이''(1797)에 영감을 주었다. 18세기 스타일로 프랑스 혁명을 설명하려는 시도였지만, 그의 후속 로맨틱 스타일의 글쓰기보다 앞섰고 대부분 무시되었다. 샤토브리앙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798년경 그의 어린 시절 신앙이었던 가톨릭 신앙으로의 개종이었다.
2. 2. 프랑스 귀환과 문학 활동 (1800-1814)
샤토브리앙은 1800년 5월, 귀족 망명자들에게 내려진 사면을 이용하여 프랑스로 돌아왔다(프랑스 영사정부 시절). 그는 당시 《메르퀴르 드 프랑스》를 편집했다. 1802년, 그는 《그리스도교의 천재(Génie du christianisme)》라는 저서로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변호(apologia)로, 프랑스 혁명 이후 종교 부흥에 기여했다. 또한 당시 가톨릭 교회를 포섭하려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제임스 맥밀런은 지적으로 지향하는 고전주의에서 감정에 기반한 낭만주의로의 문화적 분위기 변화로부터 유럽 전역의 가톨릭 부흥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샤토브리앙의 책이 기독교의 신뢰성과 위신을 회복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평가했다.[10]
나폴레옹에 의해 교황청에 파견된 사절의 서기관으로 임명된 그는 페슈 추기경과 함께 로마에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불화를 겪었고, 샤토브리앙은 1803년 11월 발레 공화국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1] 그는 1804년 나폴레옹이 앙리 드 부르봉 공작의 처형을 명령하자 분노하여 사직했다. 사임 후 샤토브리앙은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러시아 황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다. 그녀는 그를 기독교의 수호자로 여겨 왕실의 지원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샤토브리앙은 1806년 새롭게 얻은 부를 이용하여 그리스, 소아시아, 오스만 제국, 이집트, 튀니지, 스페인을 여행했다. 여행 기록은 나중에 로마의 초기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한 산문 서사시 《순교자들(Les Martyrs)》의 일부가 되었고, 1811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Itinéraire de Paris à Jérusalem)》(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으로 출판되었다. 스페인 여정은 세 번째 단편 소설인 《마지막 아벤세라헤의 모험(Les aventures du dernier Abencérage)》(마지막 아벤세라헤의 모험)에 영감을 주었는데, 이는 1826년에 출판되었다.
1806년 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나폴레옹을 네로에 비유하고 새로운 타키투스의 출현을 예측하는 등 강하게 비판했다. 나폴레옹은 샤토브리앙을 튈르리 궁전 계단에서 사브르로 베는 것을 위협했지만, 단순히 그를 도시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만족했다.[12] 샤토브리앙은 1807년 파리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11km 떨어진 샤트네말라브리에 있는 "늑대 계곡(Vallée-aux-Loups)"이라는 소박한 저택으로 은퇴하여 1817년까지 거주했다. 그는 여기서 1809년에 출판된 《순교자들》을 완성하고, 《저승으로부터의 회상》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1811년 프랑스 아카데미에 선출되었지만, 수락 연설에서 혁명을 비판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까지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문학적 친구들로는 스탈 부인, 조제프 주베르(Joseph Joubert), 피에르 시몽 발랑슈(Pierre-Simon Ballanche)가 있었다.
2. 3. 부르봉 왕정복고와 정치 활동 (1814-1830)
나폴레옹 몰락 이후, 샤토브리앙은 부르봉 왕가에 합류했다. 1814년 3월 30일,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팸플릿 ''De Buonaparte et des Bourbons''을 집필했고, 수천 부가 출판되었다.[13] 루이 18세를 따라 백일천하(1815년 3월~7월) 동안 겐트로 망명했으며, 스웨덴 대사로 임명되었다.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최종적으로 패배한 후,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귀족이자 장관(1815년)이 되었다. 1815년 12월 네이 원수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헌장에 따른 군주제''에서 루이 18세 국왕을 비판한 후, ''불가사의 의회''가 해산되면서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장관직을 잃고 야당에 합류하여 미래의 샤를 10세를 지지하는 극우파 그룹에 가담했으며, 그들의 대변지인 ''르 콩세르바퇴르''의 주요 필진 중 한 명이 되었다.[13]
베리 공작의 암살(1820년) 후 다시 궁정에 합류하여, 그를 기리는 ''베리 공작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다. 이후 프로이센(1821년)과 영국(1822년) 대사를 역임했고, 외무부 장관(1822년 12월 28일~1824년 8월 4일)직에 올랐다. 전권대사로 베로나 회의(1822년)에 참석하여, 웰링턴 공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개입에 찬성하는 오국 동맹의 결정을 지지했다. 샤토브리앙은 유권자 확대를 초래할 수 있는 법안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 인해 1824년 6월 5일 조제프 드 빌렐 총리에 의해 해임되었고, 이후 제노아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14]
결과적으로 귀족으로서, 그리고 ''데바 논평''의 기고가로서 자유주의 야당으로 이동했다(그의 기사는 신문의 유사한 전환 신호가 되었지만, 아돌프 티에르와 아르망 카렐이 이끄는 ''르 나시오날''보다 더 온건했다). 빌렐에 반대하여 언론의 자유와 그리스 독립 운동을 옹호하는 인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빌렐이 실각한 후, 샤를 10세는 1828년 샤토브리앙을 교황청 대사로 임명했지만, 폴리냐크 공작이 총리가 된 후(1829년 11월) 사임했다.
1830년, 로마의 산 로렌초 인 루치나 교회에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기념비를 기증했다.
2. 4. 7월 왕정과 말년 (1830-1848)
1830년 7월 혁명 이후, 샤토브리앙은 새로운 오를레앙 왕가 국왕 루이 필립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그는 사후 1849년에서 1850년에 걸쳐 출판된 ''저승 너머의 회상''(Mémoires d'Outre-Tombe)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그의 비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 당대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를 과거의 연장으로 보았지만, 샤토브리앙은 이러한 낙관적인 견해를 공유하지 않고 혼돈, 단절, 재앙을 예견했다. 그의 일기와 편지들은 권력 남용, 일상생활의 과잉, 그리고 앞으로 닥칠 재앙 등 그가 매일 목격하는 격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우울한 어조는 놀라움, 항복, 배신, 그리고 쓰라림을 시사했다.[15][16]그의 ''역사 연구''는 계획된 ''프랑스 역사''의 서문이었다. 그는 "부르주아 국왕" 루이 필립과 7월 왕정을 가혹하게 비판했으며, 마리 카롤린 드 부르봉 시칠리아 체포에 관한 책을 계획했다가 기소되기도 했다.
샤토브리앙은 발랑슈와 같은 가톨릭 전통주의자, 그리고 사회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인 피에르 르루와 함께 ''자유'', ''평등'', ''박애'''의 세 가지 조건을 조정하려 한 인물이었다. 그는 1841년 ''저승 너머의 회상'' 결론에서 혁명적 모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제시하며, "해방자의 종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제 막 세 번째 단계인 정치적 시대, 자유, 평등, 박애에 진입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17][18]
말년에 그는 파리 륄 뒤 바크 120번지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레카미에를 아베이 오 부아에서 방문할 때만 집을 나섰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랑세의 생애''는 1844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는 세속적인 17세기 프랑스 귀족에서 트라피스트 수도회 창시자가 된 아르망 장 르 부티예 드 랑세의 전기였다. 샤토브리앙 자신의 삶과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1845년에서 1847년까지 ''저승 너머의 회상''을 계속 수정했다.
샤토브리앙은 1848년 7월 4일, 1848년 혁명의 와중에 파리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 그는 생말로 근처의 조수섬 그랑 베에 매장되었는데, 간조 때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3. 사상과 영향
샤토브리앙은 자연 묘사와 감정 분석에 뛰어나 프랑스뿐만 아니라 해외 낭만주의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정치 사상은 합법주의 왕가와 공화주의자 양쪽 모두와 교류하며, 위기에 처한 쪽을 번갈아 옹호하는 모순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명예 때문에 부르봉 왕가주의자이고, 이성 때문에 군주제 지지자이며, 취향과 기질 때문에 공화주의자이다"라고 칭했다.[20]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폴 클로델(Paul Claudel) 등과 같이 정치와 문학을 결합하려 한 프랑스 문학가 중 첫 번째 인물이었던 샤토브리앙은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 요소를 강하게 투영했다. 그는 "위대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라고 말했다.[20]
조르주 브란데스(George Brandes)는 샤토브리앙의 작품을 루소 등의 작품과 비교하기도 했다.[20]
샤토브리앙은 미식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샤토브리앙 스테이크(Chateaubriand steak)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21]
3. 1. 낭만주의 문학
바이런 경(Lord Byron)은 샤토브리앙의 『르네』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젊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샤토브리앙이 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겠다"라고 적었다.[20] 스탕달(Stendhal)은 정치적인 이유로 샤토브리앙을 경멸했지만, 『사랑론(De l'amour)』에서 그의 심리 분석을 활용했다.[20]샤토브리앙은 훗날 낭만주의의 상투적인 표현이 된 "정열의 암시(vague des passions)"를 처음으로 정의했다. 그는 "가슴 벅찬 마음으로 텅 빈 세상에 살고 있다"(『그리스도교의 천재(Génie du christianisme)』)라고 표현했다.[20]
조르주 브란데스(George Brandes)는 1901년 샤토브리앙의 작품을 루소 등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1800년은 새로운 시대의 특징을 지닌 책, 즉 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크고 인상은 강력한 작품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해였습니다. 『아탈라(Atala)』는 『폴과 버지니아』 이후 어떤 책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프랑스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북아메리카의 평원과 신비로운 숲을 배경으로 한 낭만적인 이야기로, 그 기원이 된 경작되지 않은 토양의 강하고 이상한 향기가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풍부한 이국적인 색채와, 타오르는 열정의 더욱 강렬한 빛으로 빛났습니다.프랑스어[20]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낭만주의의 양대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대표작으로는 『아탈라』, 『르네』 등이 있다. 1791년, 프랑스 혁명이 격렬해질 무렵 북아메리카를 여행했고, 이 경험은 후에 『나체즈족』(Les Natchez|레 나체즈프랑스어 [http://ja.forvo.com/word/les_natchez#fr 발음 예시]), 『아탈라』, 『르네』와 같은 작품의 계기가 되었다.
3. 2. 정치 및 종교 사상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대표작으로는 《아탈라》, 《르네》 등이 있으며, 프랑스 낭만주의의 양대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3. 3. 한국에의 영향 및 평가
샤토브리앙의 작품은 한국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제목 | 번역자 | 출판사 | 출판 연도 |
---|---|---|---|
아탈라·르네 | 임문웅 | 春陽堂 | 1935년 |
아탈라 르네 | 하타나카 토시로 | 이와나미 문고 | 1938년 |
영원한 처녀 | 사이토 카즈히로 | 진행사 | 1946년 |
아탈라·르네 | 오자와 칸조 | 창수사 | 1947년 |
기독교 정수 | 타나베 사다노스케 | 소겐샤 | 1949-50년 |
그라나다의 비가 | 하타나카 토시로 | 양덕사 | 1949년 |
숲의 처녀 아탈라 | 사이토 카즈히로 | 고미네쇼텐 | 1951년 |
아탈라·르네 | 타나베 사다노스케 | 신초문고 | 1952년 |
아탈라·르네 | 츠지 아키라 | 치쿠마쇼보 | 1961년 |
애조 | 코지마 붕파치 | 신수사 | 1965년 |
나의 청춘 | 마시타 히로아키 | 경초출판서비스센터 | 1979년 |
무덤 저 너머의 회상 | 마시타 히로아키 | 경초출판서비스센터 | 1983년 |
『아탈라』·『르네』 | 타카하시 마사히사 | 교록사 | 2021년 |
4. 주요 저서
- Essai sur les révolutions프랑스어, 1797년
- Atala, ou Les Amours de Deux Sauvages dans le Desert프랑스어 (아탈라), 1801년
- René프랑스어 (르네), 1802년
- Génie du christianisme프랑스어 (그리스도교의 정수), 1802년
- Les Martyrs프랑스어 (순교자들), 1809년
- Itinéraire de Paris à Jérusalem프랑스어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 1811년
- Mémoires sur la vie et la mort du duc de Berry프랑스어 (베리 공작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회상록), 1820년
- Les Natchez프랑스어 (나체즈 족), 1826년
- Les Aventures du dernier Abencérage프랑스어 (마지막 아벤세라주의 모험), 1826년
- Voyage en Amérique프랑스어 (미국 여행), 1827년
- Études historiques프랑스어 (역사적 연구), 1831년
- Mémoires sur la captivité de Madame la duchesse de Berry프랑스어 (베리 공작 부인의 감금에 관한 회상록), 1833년
- La Vie de Rancé프랑스어 (랑세의 생애), 1844년
- Mémoires d'Outre-Tombe프랑스어 (묘지 저쪽의 회상), 1848년–1850년
5. 기타
1806년, 샤토브리앙은 성지 순례 중 예루살렘 성묘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22]
1816년, 샤토브리앙은 미국 고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3]
이탈리아 로마의 한 프랑스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샤토브리앙이라는 이름의 고급 소고기 요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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