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전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플랑드르 전역은 1792년부터 1795년까지 프랑스 혁명 전쟁 중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 벨기에), 네덜란드 공화국 등 저지대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군사 작전을 의미한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주변국에 혁명 사상을 전파하려 했고, 이에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대항했다. 1792년 프랑스는 초반에 패배했지만, 자마프 전투 승리 이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대부분을 점령했다. 1793년에는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 침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연합군이 반격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1794년 플뢰뤼스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연합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1795년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점령하고 바타비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영국군은 철수했다. 이 전역으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상실하고, 영국은 네덜란드 공화국을 잃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저지대 국가의 역사 -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부르고뉴 공작이 저지대 국가들을 통치하며 시작되어 영토를 확장했으나, 용담공 샤를의 사망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였고, 예술 후원과 삼부회 구성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 저지대 국가의 역사 -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며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된 인물이다. - 플란데런의 역사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1482년부터 1795년까지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나 스페인의 가톨릭 박해와 전제정치로 80년 전쟁을 겪으며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남부 지역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 플란데런의 역사 - 선량공 필리프
필리프 3세는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잔 다르크를 넘겼지만, 아라스 조약으로 동맹이 깨졌으며, 영토 확장과 예술 후원에 힘썼고, 황금 양모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플랑드르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분쟁 명칭 | 제1차 대프랑스 동맹 플랑드르 전역 |
일부 |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일부 |
시기 | 1792년 4월 20일 – 1795년 6월 7일 |
장소 | 벨기에, 오드프랑스, 네덜란드, 라인란트 |
결과 | 프랑스 승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및 리에주 후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병합됨 바타비아 공화국이 프랑스 위성국으로 세워짐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루이 16세의 입헌 정부(1792년 9월까지) 프랑스 제1공화국(1792년부터) 애국당 |
교전국 2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하노버 선제후국 헤센-카셀 방백국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 프랑스 망명귀족 군대 |
지휘관 | |
프랑스 |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사형) 오귀스트 마리 앙리 피코 드 당피에르(전사) 샤를프랑수아 뒤무리에 (망명) 장 니콜라 우샤르 (사형) 샤를 킬메인 샤를 피슈그뤼 조제프 수암 장 모로 장바티스트 주르당 헤르만 빌럼 데안델스 |
동맹군 | 작센코부르크 공자 프랑수아 드 크레르파이트 요한 페터 보리외 프란츠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마크 폰 라이베리히 오라녜 공 빌럼 프리데리크 요크 공작 프레더릭 윌리엄 하코트 윌리엄 어스킨 (전사) 알렉산더 폰 크노벨스도르프 루드비히 폰 붐프 하인리히 폰 프라이타크 요한 폰 발모덴-김보른 |
규모 | |
프랑스군 | 알 수 없음 |
동맹군 | 알 수 없음 |
피해 규모 | |
프랑스군 | 알 수 없음 |
동맹군 | 알 수 없음 |
2. 배경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 지원에 따른 재정 적자와 1786년 에덴 조약의 불리한 조건으로 불만이 커져 프랑스 혁명의 배경이 되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미국 독립 전쟁을 계기로 오라녜공 빌럼 5세 지지 세력(오라녜파)과 미국 지지 세력(애국파)으로 나뉘어 갈등했다. 제4차 영란 전쟁 (1780–1784) 패배 후, 애국파의 불만은 바타비아 혁명으로 이어졌고, 1786~1787년 짧은 내전이 벌어졌다. 1787년 프러시아와 영국의 군사 개입으로 빌럼 5세가 애국파 반란을 진압하고 많은 애국파를 프랑스로 추방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은 사실상 영-프러시아 보호령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에서는 요제프 2세의 개혁에 반발한 브라반트 혁명이 일어났고, 프로이센의 제한적인 개입과 오스트리아의 재점령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필니츠 선언(1791년 8월 27일)을 통해 프랑스 왕정 복고를 위한 군사 개입을 시사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중립을 지켰다.
2. 1.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면서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786년 에덴 조약으로 영국과의 경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프랑스에 불리한 조건은 불만을 야기했다.네덜란드 공화국은 미국 독립 전쟁을 두고 오라녜공 빌럼 5세 지지 세력(오라녜파)과 미국 지지 세력(애국파)으로 분열되었다. 제4차 영란 전쟁 (1780–1784)에서 영국에 패배한 후, 애국파의 불만은 바타비아 혁명으로 이어졌고, 1786~1787년에는 양측 간 짧은 내전이 발발했다.
오라녜공 빌럼 5세는 1787년 프러시아와 영국의 개입으로 애국파 반란을 진압하고, 많은 애국파를 프랑스로 추방했다. 1788년 삼국 동맹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은 사실상 영-프러시아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초기,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중립 정책을 취했다.
2. 2.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1780년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개혁에 반발한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는 브라반트 혁명으로 이어졌고, 프로이센의 제한적인 개입과 오스트리아의 재점령으로 이어졌다.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필니츠 선언(1791년 8월 27일)을 통해 프랑스 왕정 복고를 위한 군사 개입을 시사했다. 필니츠 선언은 "유럽의 모든 군주에게 공통의 이익"을 위해 프랑스 왕족에게 해가 가해져서는 안 되며, 필요하다면 군주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중립을 유지했다.
3. 1792년 전역
퀴브랭 전투와 마르캥 전투 (1792년 4월 28–30일)에서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쉽게 쫓겨났다. 혁명군은 수개월 동안 수세에 몰려 베르됭을 잃고 티옹빌을 간신히 지켜냈으나, 발미 전투 (1792년 9월 20일)에서 연합군이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하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북쪽 침공의 새로운 기회를 얻었고, 혁명가들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 제1 공화국을 선포했다.
1792년 11월 6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작센테셴 공작과 클레르파이트가 지휘하는 제국군을 상대로 자마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3. 1. 초기 프랑스의 패배
북부 전선의 첫 번째 작은 충돌은 퀴브랭 전투와 마르캥 전투 (1792년 4월 28–30일)에서 일어났으며, 준비가 부족했던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쉽게 쫓겨났다. 혁명군은 수개월 동안 수세에 몰려 베르됭을 잃고 티옹빌을 간신히 지켜냈으나, 연합군의 예상 밖의 발미 전투 (1792년 9월 20일) 패배로 전세가 뒤집히면서 북쪽 침공의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새로운 기세는 혁명가들이 군주제를 결정적으로 폐지하고 바로 다음 날 프랑스 제1 공화국을 선포하도록 용기를 북돋았다.3. 2. 제마프 전투와 오스트리아의 후퇴
1792년 11월 6일, 프랑스 사령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작센테셴 공작과 클레르파이트가 지휘하는 제국군을 상대로 자마프 전투에서 기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792년 말까지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대부분과 현재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리에주 주교령을 거의 저항 없이 진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뒤무리에는 애국 망명자들과 함께 북쪽으로 과감하게 진격하여 약한 네덜란드 공화국을 전복할 기회를 보았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지휘하는 두 번째 프랑스 사단은 동부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군 및 하노버군에 맞서 작전을 펼쳤다.
프랑스 정부는 11월 16일, 200년 만에 스헬데강의 폐쇄를 종료하고 강을 다시 항해할 수 있도록 선언했으며, 프랑스 군대가 중립 지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할 권리를 주장했다. 11월 19일에는 프랑스 공화국이 해외 혁명가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또 다른 칙령이 발표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성명과 네덜란드 영토에 대한 초기 침공을 네덜란드의 주권과 중립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빌럼 5세는 반프랑스 연합에 참여하여 프랑스 군대가 스타츠-브라반트 침공을 정당화하게 만들었다. 1792년 12월, 미란다는 로어몬트를 정복했다.
4. 1793년 전역
1793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환으로 플랑드르 전역에서 프랑스와 연합군 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뒤무리에 장군은 1793년 2월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공하여 브레다를 함락시켰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마스트리흐트를 포위하던 중, 작센코부르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증원군이 알덴호벤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아헨을 점령하여 미란다는 포위를 풀었다.
코부르크는 연이은 승리로 프랑스군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몰아냈으며, 이는 네르빈덴 전투와 루뱅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뒤무리에는 연합군으로 망명하고 피코 드 댕피에르 장군이 뒤를 이었다.
4월, 연합군은 앤트워프 회담에서 프랑스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코부르크는 콩데와 발랑시엔을 점령한 후 됭케르크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코부르크는 콩데-쉬르-레스코를 포위했고, 다피에르는 연합군을 공격했으나 레메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요크 공작의 증원군이 합류한 후, 코부르크는 발랑시엔을 공격했다. 파마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발랑시엔 포위가 시작되었다. 아담 퀴스틴이 지휘권을 이어받았으나, 7월에 콩데와 발랑시엔이 함락되었고 퀴스틴은 처형되었다.
연합군은 콩데와 발랑시엔 함락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했지만, 군대를 분산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요크는 덩케르크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장 니콜라 우샤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혼츠호테 전투에서 승리하여 요크는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우샤르는 메넹에서 네덜란드군을 격파했지만, 쿠르트레에서 패배했다.
9월 말, 코부르크는 모뵈주를 포위했지만, 장바티스트 조르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와티니 전투에서 승리하여 코부르크는 포위를 풀었다.
4. 1. 뒤무리에의 네덜란드 공화국 침공
뒤무리에 장군은 1793년 2월 16일, 공화파 북부군을 이끌고 안트베르펜에서 출발하여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를 침공했다. 네덜란드군은 브레다 요새를 짧은 포위전 끝에 내주고 뫼즈 강 유역으로 물러났으며, 스타트홀더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한편, 뒤무리에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휘하의 별동대가 2월 23일 마스트리흐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작센코부르크의 지휘를 받는 39,000명의 오스트리아 증원군이 3월 1일 뢰르 강을 건너 알덴호벤 인근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다음 날 오스트리아군은 아헨을 점령하고 뫼즈 강의 마스트리흐트에 도착하여 미란다는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코부르크는 연이은 승리로 뒤무리에의 야망을 꺾고 프랑스군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러한 공세는 3월 18일 네르빈덴 전투와 3월 21일 루뱅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결국 뒤무리에는 4월 6일 연합군으로 망명했고, 피코 드 댕피에르 장군이 북부군 사령관이 되었다.
4. 2. 연합군의 봄 공세
4월 초, 연합국은 앤트워프에서 회담을 열고 프랑스에 대한 전략을 논의했다. 코부르크는 마지못해 지도자가 되었지만, 듀무리에와의 외교를 통해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영국은 전쟁 배상으로 됭케르크를 원했고, 오스트리아가 됭케르크에 대한 영국의 의도를 지원한다면 코부르크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코부르크는 결국 콩데와 발랑시엔을 차례로 공격한 다음 됭케르크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했다.플랑드르에서 코부르크는 프랑스 요새인 콩데-쉬르-레스코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에 맞서, 다피에르는 부하들이 휴식과 재편성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견 임무 대표의 방해를 받았다. 4월 19일 그는 생 아망에서 연합군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5월 8일 프랑스는 콩데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시도했지만, 레메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다피에르가 치명상을 입고 실패했다.
요크와 알렉산더 폰 크노벨스도르프의 프로이센 군대가 증원되면서 코부르크의 지휘는 9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고, 코부르크는 발랑시엔을 공격했다. 5월 23일 요크의 앵글로-하노버군은 파마르 전투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프랑스군은 연합 작전에서 후퇴하여 발랑시엔 포위의 길이 열렸다. 아르메 뒤 노르의 지휘권은 아담 퀴스틴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퀴스틴은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이 필요했고, 보앵-앙-베르망두아 근처의 카이사르 야영지로 후퇴했다. 퀴스틴은 공세를 취할 수 없다고 느꼈고, 동맹국은 콩데와 발랑시엔 포위에 집중하면서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7월에 콩데는 7월 10일, 발랑시엔은 7월 28일에 함락되었다. 퀴스틴은 즉시 파리로 소환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4. 3. 가을 전역
프랑스는 연합국의 자비에 놓였고, 콩데와 발랑시엔의 함락은 국경 방어에 틈을 만들었다. 공화주의 야전군은 혼란에 빠졌지만, 연합군은 집중하는 대신 군대를 분산시키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남부에서는 크노벨스도르프의 프로이센 부대가 라인 전선에서 주력 프로이센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고, 북부에서는 요크가 국무장관 던다스의 명령에 따라 영국 정부가 군사 기지 및 향후 평화 협상에서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계획했던 프랑스 항구인 덩케르크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 인해 캉브레를 향한 공격을 동반하여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점령군이 필요했던 코부르크와 갈등이 발생했다.
장 니콜라 우샤르의 지휘를 받는 북부군은 혼츠호테 전투에서 하노버 출신 장군 프라이탁 휘하의 요크의 노출된 좌익을 격파하여 요크가 포위를 풀고 장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앵글로-하노버군은 질서 정연하게 피르네 (푸르네스)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프랑스의 추격이 없었기 때문에 회복할 수 있었다. 우샤르는 이후 메넹에서 상속 공을 격파하고 (1793년), 대포 40문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브뤼헤와 겐트로 몰아냈지만, 3일 후 그의 군대는 쿠르트레에서 보리외에 의해 패배했다.
9월 말 코부르크는 모뵈주를 포위하기 시작했지만, 연합군의 군대는 흩어졌다. 요크 공작은 그의 지휘가 캠페인의 긴장뿐만 아니라 런던의 던다스에 의해 크게 약화되어 서인도로 병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철수했기 때문에 많은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우샤르의 후임 장바티스트 조르당은 그의 군대를 집중시킬 수 있었고, 와티니 전투에서 코부르크를 간신히 격파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모뵈주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다.
5. 1794년 전역
1794년 초, 연합군은 재편성을 거쳐 전력을 강화했다. 영국 증원군이 합류했고, 오스트리아군에서는 카를 마크 폰 라이베리히가 새로운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연합 야전군은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했고, 대부분 투르네와 베티니 사이에 배치되었다. 양쪽 측면은 뫼즈 강과 해협 해안까지 확장된 방어선으로 보호되었다. 프랑스 북부군은 장-샤를 피슈그뤼가 지휘했으며, ''국민 총동원령'' 덕분에 병력이 크게 보강되어 20만 명에 달했다.
3월 25일, 연합군은 르 카토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격퇴했다. 이후 연합군은 랑드레시 요새 포위를 위한 진격을 시작했다. 요크 공작 프레더릭은 생-아망-레조에서 르 카토-캉브레지로, 코부르크는 발랑시엔과 르 케누아에서, 세습 친왕은 모르말 숲을 거쳐 랑드레시로 향했다. 4월 17일, 요크는 보-앙디니와 프레몽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오스트리아군은 와시니 방향으로 진격했다.
프랑스군은 랑드레시 구원과 함께 연합군의 양쪽 측면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4월 24일, 빌리에-앙-코셰 전투에서 영국군과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이틀 후 피슈그뤼의 삼각 공격은 보몽/코토/트루아빌에서 요크에게 큰 타격을 입었다.
5. 1. 랑드르시 공방전
1794년 4월 초, 오스트리아군은 프란츠 2세 황제가 코부르크와 연합군 본부에 합류하면서 큰 격려를 받았다. 연합군의 첫 번째 작전은 3월 25일 르 카토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이었는데, 클레르페가 격렬한 전투 끝에 격퇴시켰다. 2주 후, 연합군은 랑드레시 요새 포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련의 은밀한 행군과 소규모 작전을 시작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요크는 생-아망-레조에서 르 카토-캉브레지로 진격했고, 코부르크는 발랑시엔과 르 케누아에서 중앙 열을 이끌었으며, 그의 왼편에서 세습 친왕은 바베에서 모르말 숲을 거쳐 랑드레시로 향하는 포위 부대를 이끌었다. 4월 17일, 요크는 고게를 보-앙디니와 프레몽에서 몰아냈고, 오스트리아군은 발랑에 맞서 와시니 방향으로 진격했다. 세습 친왕은 랑드레시 공방전을 시작했고, 연합군은 반원 형태로 작전을 지원했다.프랑스군의 계획은 랑드레시로 구원 부대를 보내는 동시에 연합군의 양쪽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4월 24일, 소규모의 영국군과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샤퓌 휘하의 병력을 빌리에-앙-코셰에서 몰아냈다. 이틀 후 피슈그뤼는 랑드레시를 구원하기 위한 삼각 공격을 감행했다. 동쪽의 두 열은 킨스키, 알빈치와 젊은 카를 대공의 부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캉브레에서 진격하는 샤퓌의 세 번째 열은 4월 26일 보몽/코토/트루아빌에서 요크에 의해 거의 전멸되었다.
5. 2. 프랑스의 5월 반격
프랑스군은 투르쿠앵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조제프 수암이 지휘를 맡아 투르네 전투에서 연합군을 저지했다. 한편, 삼브르 강 전선에서는 장-샤를 피슈그뤼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그랑-렝 전투와 에르켈린 전투에서 초기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이후 샤를루아를 포위하고 고셀리에 전투에서 오렌지 공에게 반격당했으나, 결국 샤를루아를 점령했다.5. 3. 플뢰뤼스 전투
1794년 6월 26일, 코부르크는 플뢰뤼스 전투에서 조르당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밀렸지만 조르당은 전선을 유지했고 심지어 하루가 끝날 무렵 반격을 가했다. 전투의 결과는 전술적으로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코부르크는 샤를루아가 점령되었고 그의 군대가 구원할 포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철수를 선택했다.
플뢰뤼스 전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였다. 역사가 디그비 스미스는 '전쟁의 이 단계에서 빈의 궁정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지키려는 노력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확신했고, 코부르크가 여기에서 승리할 기회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언급했다.
5. 4. 플뢰뤼스에서 멜레인까지 연합군의 후퇴

- 빨간색영어 - 요크 공작이 지불한 영국군
- 갈색영어 - 코부르크의 오스트리아군
- 주황색영어 - 오렌지 공의 네덜란드군이 주요 오스트리아군에서 분리됨
- 남색영어 - 피슈그뤼와 조르당의 프랑스군
플랑드르의 연합군은 요크 공작의 군단과 코부르크 휘하의 주요 오스트리아-네덜란드 군,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모든 군대는 명목상 코부르크의 지휘를 받았지만, 각자의 정치적 목표 때문에 서로를 고려하지 않고 별도로 기능했다. 코부르크는 프랑스로부터 라인강과 독일을 보호하기 위해 동쪽으로 후퇴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요크는 네덜란드를 보호하기 위해 북쪽으로 후퇴하는 것이 목표였다.
한편, 북부군 피슈그뤼는 오드나르데에서 스헬데강의 요크 공작 군대를 위협했지만, 6월 말 해안으로 이동하여 오스텐데, 뉘포르트(뉘포르트, 벨기에) 및 슬로이스의 플랑드르 항구를 점령한 다음 네덜란드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요크는 프랑스가 7월 1일과 2일에 각각 몽스와 소니를 점령하여 코부르크를 동쪽으로 밀어내고 요크의 좌익과 후방을 노출시키면서, 그라몽(게라르츠베르겐)을 거쳐 알로스트(현대 알스트, 벨기에)로 후퇴해야 했다.
요크는 후퇴의 일환으로 모든 영국 주둔군을 철수시켰지만, 뉘포르트(뉘포르트, 벨기에) 주둔군은 영국 전쟁 장관 헨리 던다스가 해상으로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대로 남겨졌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뉘포르트는 포위되어 7월 16일에 점령되었고, 주둔군 내의 프랑스 망명자들은 마을의 방어 해자에 있는 포병에 의해 학살되었다.
7월 5일 워털루에서 코부르크와 요크는 연합군이 안트베르펜에서 루뱅(뢰번), 와브르, 젬블루, 나뮈르까지의 방어선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다음 날, 브렌 르 콩트에서 젬블루까지의 전선에서 조르당(그의 부대는 6월 29일에 공식적으로 삼브르-뫼즈군으로 구성되었다)의 공격에 직면하여 코부르크는 합의를 취소하고 말린(메헬렌)과 루뱅으로 동쪽으로 후퇴하여 브뤼셀을 비우고 요크의 좌익을 노출시켰다.
7월 7일과 8일에 조르당은 나뮈르 근처에서 코부르크의 좌익을 공격하여 라미예로 후퇴시키고 나뮈르를 고립시킨 후 포위했다. 뫼즈강에서 잘릴 것을 두려워한 코부르크는 그의 군대 전체를 티르르몽(현대 티넨)으로 더 후퇴시켰고, 요크는 말린과 아스체를 거쳐 디일강(현대 디일)으로 더 후퇴하도록 했다.
이제 연합군은 요크의 3만 명이 안트베르펜에서 말린까지 디일강을, 오렌지 공의 네덜란드 군이 말린에서 루뱅까지를, 코부르크의 오스트리아 군이 루뱅에서 티르르몽, 란덴, 와렘을 거쳐 뫼즈강까지의 선을 방어했으며, 뫼즈강과 오르트강 사이의 강 건너편에 추가 부대가 배치되었다.
피슈그뤼는 7월 10일에 브뤼셀을 점령했고, 그의 군대와 조르당의 군대는 그날 승리 퍼레이드를 위해 브뤼셀을 통과했다.
5. 5. 멜레인에서 네덜란드와 뫼즈 강까지 연합군의 후퇴
이 퇴각 기간 동안 연합군은 크게 압박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로 피슈그루의 군대가 플랑드르 해안으로 이동했고, 조르당은 바르텔레미 셰러 휘하의 약 14만 명의 병력 중 4만 명을 프랑스 내륙의 주요 오스트리아 요새인 랑드레시, 르케스누아, 발랑시엔, 콩데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요새들은 오스트리아군의 퇴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7월 12일, 피슈그루는 18,000명의 병력으로 말린을 공격했고, 조르당은 뢰벤, 조도뉴, 뫼즈강의 휘를 공격했다. 피슈그루는 15일 요크로부터 말린을 쉽게 점령했고, 조르당은 같은 날 뢰벤을 점령했다. 조도뉴는 17일 전에 점령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남뮈르는 7월 19일에 항복했다.
뢰벤이 점령되었을 때, 네덜란드군은 디스트로 동쪽으로 퇴각하면서 도시를 방어하던 오스트리아군을 따르지 않고 북쪽으로 본국 방향으로 퇴각했다. 이때 네덜란드군은 코부르크의 오스트리아군 지휘 아래 있었지만, 자신들의 군사적 목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요크는 다시 노출된 좌익을 리에르에서 뒤펠까지 네테 강을 따라 후퇴시키면서 거부했고, 18일에 네덜란드군과 함께 말린을 재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8일, 요크는 코부르크로부터 자신의 주력을 티르르몽에서 랑덴으로 더욱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틀 후, 요크는 코부르크가 디스트에서 자신의 좌익을 보호하던 오스트리아군에게 그를 알리지도 않고 다시 동쪽 하셀트로 후퇴하라고 조용히 명령하여 배후를 다시 공격에 노출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부르크가 동쪽으로 더 후퇴하면서 요크는 다시 북쪽으로 후퇴하여 7월 22일 안트베르펜을 철수했고(3일 후 피슈그루에게 점령), 7월 24일 코부르크가 마스트리흐트에서 뫼즈강을 건너 포르옹르콩트 주변에 자리를 잡은 날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로젠달로 후퇴했다. 이 철수는 영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최종 분리를 의미하며, 두 군대가 이제 완전히 다른 목표를 추구함에 따라 이전의 명목상의 협력마저 종식되었다.
7월 27일, 프랑스는 1789년 이후 세 번째로 리에주를 점령하여 주교령을 영구적으로 폐지했다. 혁명가들의 눈에 성직자의 권력과 압제의 상징이었던 생 랑베르 대성당 철거가 시작되었다.
5. 6. 네덜란드 공화국 침공
1794년 가을, 헤르만 빌렘 다엔델스가 이끄는 네덜란드 애국자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에인트호번을 점령하고 발 강에서 추격을 멈췄다. 네덜란드 오렌지파는 3주간의 격렬한 공성전 끝에 10월 12일 스헤르토헨보스를 항복시켰다. 요크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네이메헌을 구원하기 위한 반격 작전을 계획했지만, 하노버 분견대가 철수하면서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 11월 7일, 짧은 포위 공격 후 네이메헌은 방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 도시 역시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요크는 겨울 동안 발 강 유역을 방어할 준비를 했지만, 12월 초 영국으로 소환되었다.12월 10일, 헤르만 빌렘 다엔델스 휘하의 병력이 보멜러르트의 네덜란드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며칠 후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뫼즈 강과 발 강이 얼어붙어 프랑스군은 진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 12월 28일까지 프랑스군은 보멜러르트와 알테나 지역을 점령했다. 헤르만 빌렘 다엔델스와 피에르-자크 오스텐 휘하의 들마스 사단의 여단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네덜란드 워터 라인에 침투하여 20마일에 걸쳐 요새와 마을을 점령했다.
6. 1795년 전역
1795년, 프랑스군은 바알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고, 연합군은 로어 라인 뒤로 물러났다. 1월 15일, 영국군과 하노버군은 아메르스포르트, 아펠도른, 데벤터르를 거쳐 독일로 후퇴했다. 1월 16일 위트레흐트가 항복했고, 1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는 크라옌호프가 이끄는 네덜란드 혁명가들이 시를 장악하면서 바타비아 혁명이 일어났다. 오라녜 공 빌럼 5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1월 19일 바타비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후퇴하며 1795년 봄 브레멘 항구에 도착했다. 이후 영국군은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군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영국으로 철수했다. 1795년 6월 7일, 룩셈부르크의 항복으로 프랑스의 저지대 국가 정복이 완료되면서 플랑드르 전역이 끝났다.
6. 1. 네덜란드 공화국의 몰락
프랑스 선봉대가 바알 강을 건너자, 영국군과 헤센군은 튀일과 헤르더말센에서 성공적인 반격을 가했지만, 1월 10일 피슈그뤼는 잘트보멜과 네이메헌 사이의 얼어붙은 강을 건너 전면적인 진격을 명령했고, 연합군은 로어 라인 뒤로 후퇴해야 했다. 1월 15일, 앵글로-하노버군은 격렬한 눈보라 속에서 진지를 포기하고 아메르스포르트, 아펠도른, 데벤터르를 거쳐 독일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1월 16일, 위트레흐트 시가 항복했다. 크라옌호프가 이끄는 네덜란드 혁명가들은 1월 18일 암스테르담 시의회에 시를 넘길 것을 압박했고, 시의회는 자정을 조금 넘겨 시를 넘겨주었고, 이로 인해 친프랑스적인 바타비아 혁명이 일어났다. 그날 초, 오라녜 공 빌럼 5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네덜란드 혁명가들은 1월 19일 바타비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담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대중 축제 한가운데에서 자유의 나무를 세웠다. 오후, 프랑스 군대가 시에 입성했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1월 24일에는 덴헬데르에서 네덜란드 함대 나포가 뒤따랐다.6. 2. 영국의 철수
영국군은 동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는데, 심한 눈보라 속에서 제대로 된 옷도 입지 못하고 굶주린 채로 행군했다. 1795년 봄, 영국군은 네덜란드 영토를 완전히 떠나 하노버의 일부인 브레멘 항구에 도착하여 영국으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렸다. 피트는 대륙에서의 성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함께 후퇴했던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군대의 잔여 병력도 데려갔다. 요크 공작의 군대는 2년 동안의 전투에서 2만 명 이상을 잃었다. 1795년 4월, 대부분의 영국군이 영국으로 징집되었고, 던다스 소장 휘하의 소규모 부대는 그해 12월까지 대륙에 남아 있었다. 1795년 6월 7일, 룩셈부르크의 항복으로 프랑스의 저지대 국가 정복이 완료되었고, 이는 플랑드르 전역의 종식을 알렸다.7. 결과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상실했고, 영국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네덜란드 공화국을 잃었다. 프로이센은 바젤 평화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스페인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오스트리아는 1795년 라인 강 캠페인에서 성공했지만, 결국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서 프랑스의 네덜란드 정복을 인정했다.
영국에서 요크 공작은 무능한 아마추어로 묘사되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한다. 요크 공작은 이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장기간 재임했다.
연합군의 실패 원인으로는 지휘관들의 상충되는 목표, 국가 간의 빈약한 조율, 열악한 환경, 민간 정치인들의 간섭, 프랑스군의 유연성 등이 있었다.
이 전역은 영국 육군의 약점을 드러냈고, 요크 공작에 의해 대대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강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휘관들의 소심함과 보수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저지대 국가를 주요 작전 지역에서 포기하고, 영국은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는 전략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 영국은 1799년 다시 네덜란드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8. 유산
이 전역은 영국에서 유아용 노래인 "요크 공작 영감"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 노래는 전쟁보다 최소 200년 전에 존재했다. 알프레드 번은 1594년에 기록된 "프랑스 왕은 언덕으로 올라갔다"라는 거의 동일한 노래를 언급한다. 이 노래가 요크 공작이 다시 영국군을 저지대로 이끌었던 1799년 헬더 캠페인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남아있다.
영국은 이 전역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요크 공작의 주도 하에 모든 수준에서 광범위한 군대 개혁을 단행했다. 이후 반도 전쟁에서 활약한 강력하고 전문적인 군대는 1794년에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동맹국들은 1814년까지 프랑스 혁명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다시 얻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에게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상실은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 지역에서 공화주의의 지배가 신성 로마 제국의 질서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1806년 붕괴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프랑스의 네덜란드 지배는 프랑스 군대가 이후 몇 년 동안 독일 깊숙이 침투할 수 있게 했고, 나중에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 역시 전장에서의 승리는 국내의 위태로운 정부 상태를 굳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역 이후 삼브르-메즈 군은 주요 공격 부대가 되었고, 북부군은 주로 주둔군 지위로 축소되었다. 지휘관들 중 코부르크는 다시는 전장에서 복무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에 대한 음모에 연루된 후 신용을 잃고 나중에 감옥에서 사망한 피슈그루도 마찬가지였다. 요크 공작은 1799년 헬더 캠페인에서 두 번째 원정을 이끌었지만, 실패한 후 그의 경력 나머지 기간 동안 말 경호대에서 총사령관으로 남았다. 세습 공은 영국(1799년 헬더, 1800년 와이트), 프로이센(1806년 예나) 및 오스트리아(1809년 바그람) 군대에서 파란만장한 군 경력을 쌓은 후 1815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왕이 되었고, 재구성된 네덜란드 군대가 그의 아들인 또 다른 오렌지 공 윌리엄 2세 아래에서 워털루 전투에서 싸웠다.
이 전역은 훗날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할 여러 군사 지도자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는 베르나도트, 주르당, 네, 마크도날, 뮈라, 모르티에가 포함되었다.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카를 대공이 1794년 부상당한 알빈치 대신 그곳에서 첫 지휘를 받았고, 하노버 군대에서는 샤른호르스트가 요크 공작 아래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참여했다.
영국 육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데뷔는 아서 웰즐리(훗날 웰링턴 공작)가 1794년 말에 자신의 연대인 33 보병 연대에 입대하여 보크스텔 전투에서 복무한 것이다. 그는 인도와 반도 전쟁에서 자신의 더 성공적인 캠페인에서 이러한 경험을 활용했다.
버나드 콘웰의 허구적인 영웅 리처드 샤프는 자신의 첫 전투가 보크스텔 전투였다고 말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