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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렌스부르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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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1945년 5월,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이후 카를 되니츠가 수립한 독일의 임시 정부이다.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대통령 겸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되니츠는 서방 연합군과의 항복 협상을 추진하고 동부 전선에서의 전투를 지속하려 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나치 잔당을 내각에 포함시키고, 소련과의 대립을 시도하여 연합국의 불신을 샀다. 결국 연합국의 해산 결정에 따라 5월 23일 체포되었고, 6월 5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연합국에 의해 독일의 최고 권한이 장악되면서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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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렌스부르크 정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요한 루트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정부 명칭플렌스부르크 정부
독일어 명칭Flensburger Regierung
관할 국가나치 독일
정부 형태내각
주요 인물
국가 원수카를 되니츠
정부 수반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부수반(정보 없음)
정치
정치 체제일당 독재
여당나치당
역사
성립1945년 5월 2일
해산 (사실상)1945년 5월 23일
해산 (법률상)1945년 6월 5일
이전 정부요제프 괴벨스 내각
이후 정부연합국 관리 위원회
이후 정부 (1949년 9월 20일)콘라트 아데나워 내각
이후 정부 (1950년 11월)동독 각료회의
주요 사건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주요 사건 발생일1945년 4월 30일
주요 사건정부 요인 체포
주요 사건 발생일1945년 5월 23일
주요 사건베를린 선언 (독일국 소멸)
주요 사건 발생일1945년 6월 5일
구성
각료 수10명
이전 각료 수(정보 없음)
총 각료 수(정보 없음)
기타
통화라이히스마르크

2. 성립 배경

히틀러가 포위된 베를린에 남아 죽을 의향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독일 국방군의 전반적인 지휘는 독일군 최고사령부(OKW)를 통해 이루어졌다. 독일이 점령한 영토가 분할될 것을 예상하여 4월 15일 남부와 서부 지역의 군대는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지휘하에 풀라흐(Pullach)에, 북부와 동부 지역의 군대는 카를 되니츠 대제독의 지휘하에 플뢴(Plön)에 임시 군사 및 민간 사령부가 설치되었지만, 히틀러는 그들에게 군사 지휘권을 이양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4월 27일 육군 최고사령부의 빌헬름 카이텔과 알프레드 요들은 라인스베르크에서 되니츠와 하인리히 힘러와 만나 베를린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된 현재의 전황을 논의했다. 힘러는 히틀러의 예상 후계자였던 헤르만 괴링의 실각 및 해임 이후 인정받는 히틀러의 부관(Führer)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 4월 28일 라인스베르크를 떠날 때 힘러는 되니츠에게 자신이 구성할 후임 정부에서 봉직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날 영국과 미국은 서부와의 별도 평화 협상에 대한 힘러의 비밀 제안(그들이 거부한)을 발표했고, 히틀러는 이에 반응하여 힘러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고 반역죄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마르틴 보르만이 4월 29일과 30일에 보낸 전보는 되니츠에게 이러한 사건과 히틀러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돌프 히틀러 사망 당시 유럽 제2차 세계 대전 상황. 흰색 지역은 독일군이 통제하는 지역이고, 분홍색 지역은 연합군이 통제하는 지역이며, 빨간색 지역은 최근 연합군의 진격을 나타냅니다.


괴링과 힘러가 계승에서 제외됨에 따라, 히틀러는 그의 정치 유언장에서 되니츠를 대통령 겸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하고,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Chancellor of Germany)로 지명했다.[20] 나치 법률에 따르더라도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임명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었다.[1][2] 총리는 임명직이었지만 대통령은 선출직이었다. 1933년 권한 강화 법(Enabling Act of 1933)이 히틀러에게 바이마르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을 통과시킬 권리를 부여했지만, 그 2조는 대통령의 권한은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대통령직을 변경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3]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망 후 히틀러는 전날 통과된 독일 국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자신에게 흡수했다.[4] 그러나 1932년 헌법은 새로운 선거가 있을 때까지 총리가 아닌 독일 제국 법원(Reichsgericht) 대통령이 권한대행 대통령이 되도록 수정되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한 강화 법은 총리가 2조를 위반했을 경우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명시하지 않았으며, 법적 이의 제기는 전혀 없었다. 괴벨스는 5월 1일 총통지하벙커(Führerbunker)에서 자살했다. 같은 날 되니츠는 독일 국방군과 독일 국민에게 별도의 방송 연설을 통해 최고사령관 및 국가 원수직을 수락했다. 베를린 함락으로 도망쳐 홀슈타인(Holstein) 플뢴 근처 베어마흐트(Wehrmacht) 병영에 있는 되니츠에 합류한 히틀러 내각의 잔여 장관들은 다음 날 사임했다. 보르만이 베를린에서 탈출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되니츠는 히틀러의 전 재무장관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를 만나 새로운 제국 정부를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

카를 되니츠


1939년 MV Patria호. 1941년부터 이 선박은 플렌스부르크 항구에 정박하여 병영선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5월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의해 접수되었다.


슈베린 폰 크로지크 내각은 5월 2일 그와 그의 장관 직원들이 대피한 오이틴(Eutin)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5월 2일 후에, 뤼벡(Lübeck)에 접근하는 영국 제2군(Second Army (United Kingdom))의 빠른 진격을 고려하여, 되니츠는 슈베린 폰 크로지크, 파울 베게너, 힘러, 카이텔을 만나 추가 이전의 절박한 필요성을 논의했다. 힘러는 그가 직접 협상하기를 바랐던 진격하는 미국군에 더 가까운, 당시 독일 손에 있는 마지막 주요 중앙 유럽 수도인 프라하(Prague)로 이동할 것을 주장했지만, 되니츠는 독일 국경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Protectorate of Bohemia and Moravia)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되니츠는 대신 덴마크 국경 근처 플렌스부르크에 있는 뫼르빅 해군학교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내각은 해군학교 체육관에서 회의를 열었고, 각 부처의 행정 사무실과 숙소는 플렌스부르크 항구에 정박한 lt=''Patria''/Patriade호 여객선에 설치되었다. 이틀 전 라인스베르크에서 노이슈타트 인 홀슈타인(Neustadt in Holstein)으로 이동한 독일군 최고사령부도 플렌스부르크로 이전했고, SS 지도부는 4월 28일부터 플렌스부르크에 모여 있었다.

2. 1. 정부 기능 이전

1945년 4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친위대 전국 지도자이자 내무장관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수도 기능 이전을 실행하기 위해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를 이전 지역으로 결정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는 당시 프로이센 자유주의 속주였다.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로의 이동 경로


4월 20일, 아돌프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육군 총사령부(OKH), 공군 총사령부(OKL) 및 각료들의 피난을 허가하고, 독일 북부의 독일군 통수권을 카를 되니츠 제독에게 위임했다.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되니츠는 킬 근처 오이틴을 거쳐 플렌의 해군 총사령부(OKM)로 이동하여 지휘를 하였다.

4월 21일,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마르틴 보르만을 제외한 주요 각료들도 피난했다. 빌헬름 카이텔 육군 원수와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을 포함한 국방군 최고사령부와 육군 총사령부 일부는 되니츠와 합류하기 위해 플렌으로 이동했다.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를 포함한 공군 총사령부와 국방군 최고사령부, 육군 총사령부의 대부분,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는 오베르잘츠베르크로 피난했다. 피난한 각료 대부분은 오이틴으로 이동했고, 4월 23일에는 이전 후 첫 각료회의가 지방 의회 의사당에서 열렸다. 각료회의 의장은 루트비히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이 맡았다.

2. 2. 히틀러의 죽음과 되니츠의 승계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자살했다(아돌프 히틀러의 죽음).[37][40] 히틀러는 정치 유언장에서 카를 되니츠를 대통령 겸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Chancellor of Germany)로 지명했다.[28] 그러나 나치 법률에 따르더라도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임명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었다.[1][2]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망 후, 히틀러는 독일 국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자신에게 흡수했었다.[4]

4월 29일 새벽, 히틀러는 총통 비서관인 트라우델 융게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유서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의 정치적 유서)를 작성하게 하였고, 이 유서에는 헤르만 괴링하인리히 힘러를 배신자로 규탄하고 당에서 추방한다는 내용이 있었다.[29] 당시 괴링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어 감시를 받고 있었고,[30] 힘러는 되니츠 곁에 있었지만, 히틀러의 이러한 선고를 알지 못했다.[25]

4월 30일, 히틀러가 베를린에 남아 죽을 의향임을 분명히 하자, 독일 국방군의 전반적인 지휘는 독일군 최고사령부(OKW)를 통해 이루어졌다. 독일 영토가 분할될 것을 예상하여, 4월 15일 남부와 서부 지역 군대는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지휘 하에, 북부와 동부 지역 군대는 되니츠의 지휘 하에 임시 군사 및 민간 사령부가 설치되었지만, 히틀러는 군사 지휘권 이양을 지연시켰다.

4월 27일, 빌헬름 카이텔알프레트 요들은 되니츠와 힘러를 만나 베를린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된 전황을 논의했다. 힘러는 히틀러의 부관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 4월 28일, 힘러는 되니츠에게 자신이 구성할 후임 정부에서 봉직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같은 날, 영국과 미국은 힘러의 비밀 평화 협상 제안을 발표했고, 히틀러는 힘러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고 체포를 명령했다. 마르틴 보어만이 보낸 전보는 되니츠에게 이러한 사건과 히틀러의 후계자 임명 사실을 알렸다.[25]

4월 30일 새벽, 되니츠는 힘러의 반역죄를 처리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나, 모든 권한은 힘러가 장악하고 있었고 실행하기 어려웠다.[25] 같은 날 오후, 되니츠는 히틀러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는 전문을 받았다.[32] 되니츠는 히틀러가 사망했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5월 1일, 되니츠는 히틀러의 사망과 자신의 후계자 취임을 공표했다.[39] 함부르크 방송의 특별 보도로 히틀러의 죽음이 발표되고, 되니츠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는 히틀러가 자살했지만, "전사"라고 한 것은 독일군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였다.[40] 되니츠는 볼셰비즘으로부터 독일군 및 독일 국민을 지키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며, 영국군과 미국군과는 이러한 행동을 방해할 때에만 교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25]

되니츠는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를 각료 수반(수상 대리)으로 지명하고 조각을 의뢰했다.[42] 괴벨스는 5월 1일 자살했고, 보어만은 5월 2일 베를린 시내에서 자살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각료회의가 열렸던 밀비크 해군사관학교 내의 해군체육학교/Marinesportschulede


5월 3일, 신정부는 밀비크 해군사관학교로 거점을 옮겼다.[43] 5월 5일,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첫 각료회의를 열었다.

3. 정부 구성과 활동

3. 1. 정부 구성

되니츠는 루트비히 슈베린 폰 크로지크를 총리 대행으로 임명하고 새 정부를 구성했다.[42] 5월 3일, 신정부는 거점을 플렌스부르크 교외의 밀비크 해군사관학교로 옮겼다.[43] 5월 5일에는 첫 각료회의가 열렸다.

되니츠 정부는 나치당의 주요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키는 것을 피했지만,[6] 친위대(SS)의 여러 현역 장교와 전 정권의 대량 학살 정책 수립 및 실행에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들을 포함시켰다. 예를 들어, 헝거 플랜의 저자인 허베르트 바케가 식량·농업·산림부 장관으로 유임되었고,[6] 경제생산부의 슈페어 부장은 오토 올렌도르프였는데, 그는 점령된 소련 영토에서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살해를 직접 지휘했다. 또한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 참석하여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에 대한 행정적 책임에 합의했다.[6] 오토 올렌도르프는 히믈러의 사무실에서 ''친위대 사령관''으로 직접 이동했으며, 전반적으로 플렌스부르크 정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350명의 직원 중 230명이 친위대 또는 다른 보안 기관의 구성원이었다.[6]

이러한 인선은 이용 가능한 인물에 의해 제한된 측면도 있었지만, 되니츠 정부의 '비정치적'이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사람들의 가장 일관된 특징은 볼셰비즘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1918년 혁명적 사건이 1945년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결의였다.[6] 되니츠는 당시 소련이나 폴란드에 항복할 의도가 없었고 "유대인과 기회주의자들"을 독일 국민의 적이라고 계속 규정했기 때문에,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살해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을 내각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거의 주저하지 않았다.[6]

5월 6일, 되니츠는 입각을 원했던 히믈러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모든 직무에서 해임했다.[44] 이는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연합국에 의해 용인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세 개의 부처(항공부, 점령 동부 지역 부처, 국민계몽선전부)를 폐지했다.[6] 히틀러 내각과 괴벨스 내각의 일부 구성원을 유임시키면서, 되니츠는 베른하르트 루스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오토 게오르크 티어락 세 장관을 해임했다. 발터 푼크(경제)와 빌헬름 오네조르게(우정) 등 다른 전임 장관들도 새 자리를 얻지 못했다.[6]

되니츠는 육군 최고사령관이자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참모총장으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임명하기를 바랐지만, 5월 2일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그 직책을 유지했고, 이 직책으로 카이텔은 5월 8일 베를린에서 독일 최고사령부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카이텔이 최고사령관으로 계속 유임된 또 다른 요인은 되니츠가 유지를 필수적이라고 인식한 국방군 작전본부장 알프레트 요들 장군의 지지였다. 요들은 프랑스 랭스에서 연합군과의 협상에서 되니츠를 대표하게 되었다.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5월 1일 되니츠가 대제독(Generaladmiral)으로 승진시킨 후 되니츠의 뒤를 이어 해군(Kriegsmarine)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공군은 연료 부족으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지상에 묶여 있었으므로 새로운 임명은 없었다.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원수는 공군(Luftwaffe) 사령관으로 남아 있었다.[6]

빌헬름 카이텔


[[File:Die_Sportschule_Flensburg-Mürwik_(Mai_2014),_Bild_002.JPG|thumb|right|250px|플렌스부르크 정부의 각료회의가 열렸던 밀비크 해군사관학교 내의

3. 2. 주요 활동

되니츠의 최우선 과제는 독일군 사령관들과 소통하고, 서방 연합국과의 부분적 항복 협상을 추진하면서 동부의 소련군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그의 정책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7] 이를 위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등 나치 고위 인사들을 배제했다.[7] 그는 연합국을 분열시키고, 가능하다면 반볼셰비키 전선의 구성 요소로 독일 군부대를 제공하려 했다.[7] 또한, 가능한 한 많은 독일군을 소련의 포로 수용소에서 구출하고자 한니발 작전(Operation Hannibal)을 강화했다.[7] 5월 2일, 되니츠는 노르웨이, 쿠를란트, 동프로이센, 보헤미아의 독일군 사령관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았다.[7]

되니츠는 나치당을 금지하거나 해산하지 않았고, 나치 독일의 제복, 휘장 등을 유지하는 등 이전 정권과의 연속성을 보였다.[7] 네로 칙령(Nero Decree)은 철회했지만,[7] 노르웨이 등 점령 지역에 대한 파괴 명령은 5월 6일에야 철회되었다. 민간 처벌 및 군 기율을 위한 즉결 재판은 폐지되지 않았고, 항복 후에도 히틀러를 모욕한 것에 대한 군사 처형이 확인되었다.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SS 지도자들은 되니츠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장 세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힘러에게 충성했다.[7] 되니츠는 항복 협상이 시작되자 힘러와 SS 기구를 제거해야 했다.[7] 1945년 5월 5일, 되니츠는 힘러에게 해임을 통보하고 위장 서류와 신분을 약속했다.[7] 다음날 힘러와 SS 지도자들은 도망쳤다.[7]

되니츠 정부는 노이엔감메 수용소의 전 수감자들이 뤼벡 만(Bay of Lübeck)에 정박한 선단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석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7] 1945년 5월 3일, 감옥 선단은 영국 공군에 의해 침몰되었고, 7,000명이 넘는 수감자가 익사했다.[7]

5월 2일, 도니츠는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이 서방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7] 그는 서방 연합군에게만 독일군을 항복시켜 영국과 미국을 소련으로부터 분리할 기회를 노렸다.[7] 동쪽에서는 독일군에게 계속 싸울 것을 명령했고, 베를린의 독일 사령관이 소련에 항복하기로 한 결정을 번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7]

육군원수 버나드 몽고메리(Field Marshal Bernard Montgomery)


5월 3일,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몽고메리에게 보내 북서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네덜란드, 덴마크의 독일군 항복을 제안했다.[7] 5월 4일,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를 대신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7] 되니츠는 한니발 작전(Operation Hannibal)에 참여한 함선에 은밀한 대피 항해를 명령하고, U보트 작전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 1945년 5월 5일, 바이에른주와 남서 독일의 모든 독일군도 미국군에게 항복했다.[7] 몽고메리는 언론 보도를 준비했지만, 독일어본에는 발트해 군함 등이 포함되지 않았고, 항복은 '휴전'으로 묘사되었다.[7] 조세프 스탈린의 의심을 증폭시킨 이 방송은 제3 기갑군과 제21군의 대부분이 소련이 아닌 영국과 미국에 항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더 이상 부분 항복 협상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7]

5월 4일, 되니츠는 중부 집단군이 미국군에 항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7] 칼 프랑크에게 괴뢰 체코 정부를 세우고 프라하를 개방 도시로 선포하도록 제안했지만, 5월 5일 프라하 봉기로 무산되었다.[7]

칼스호르스트에서 조인된 독일군 항복 문서.


대통령이 된 데니츠는 이미 독일이 체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더 이상 항복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데니츠는 독일 최고 지도자의 지위 계승이 “히틀러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에 항복한 국방군 병사와 난민들이 소련군 병사들로부터의 학살 등 용납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난민들의 진술과 소련군이 점령했던 마을들을 독일군이 탈환한 후의 현지 조사를 통해 “살인, 방화, 고문, 폭행, 약탈”에 대한 보고를 해군 법무국으로부터 이미 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데니츠는 서방(영국군과 미국군의 점령지)에서의 항복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동방(소련군)에서는 전투를 계속하고, 소련 측에 남아 있는 시민과 병사들의 본국과 서방 점령 지역으로의 탈출 경로와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부분적인 항복과 동부 지역에서의 전투 계속을 모의했다.[45]

5월 6일, 되니츠는 요들에게 연합군에 대한 국방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할 허가를 주었다.[46] 이튿날 5월 7일, 미영불 연합군에 대한 항복은 프랑스의 랭스에서 조인되었고, 5월 8일 오후 11시 1분이 정전 발효 시간으로 정해졌다.[46] 그러나 연합군이 베를린에서 항복 문서를 비준하는 조인식을 요구했기 때문에[46], 국방군 대표 카이텔 원수, 해군 대표 폰 프리데부르크 대장, 공군 대표 슈툼프프 상급 대장 등을 파견했다. 베를린 시간으로 5월 9일 0시 15분(런던 시간 5월 8일 오후 11시 15분, 모스크바 시간 5월 9일 2시 15분),[47] 베를린의 카를스호르스트에서 항복 비준 문서가 조인되었다. 이 문서들에 서명한 것은 국방군 군인들뿐이었고, 정부 대표자의 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6]

4. 연합군과의 항복 협상

되니츠는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방 연합군과의 개별적인 항복 협상을 시도했다.[45] 그는 서방 연합군에 독일군을 항복시키면 영국과 미국을 소련으로부터 분리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믿었다.[45]

5월 3일, 되니츠는 해군 총사령관 후임인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의 본부로 보내 항복을 제안했다. 몽고메리는 북서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네덜란드, 덴마크에 있는 모든 독일군, 해군 및 함선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5월 4일, 프리데부르크는 네덜란드, 덴마크, 북서 독일의 모든 독일군과 함선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45] 5월 5일에는 바이에른주와 남서 독일의 모든 독일군이 미국군에게 항복했다.

5월 5일, 프리데부르크는 프랑스 랭스에 있는 아이젠하워 사령부에 도착하여 추가 협상을 진행했다. 되니츠는 독일군과 난민들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방 열강에 항복할 수 있도록 협상을 최대한 오래 끌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모든 전선에서 즉각적인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며, 독일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서부 전선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5월 7일, 요들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46]

그러나 소련의 요구로 5월 9일 베를린에서 다시 항복 문서 비준식이 거행되었다.[46] 이 문서에는 독일 최고사령부만이 서명했고, 정부 대표자의 서명은 없었다.[26] 베를린에서 서명된 최종 항복 문서는 랭스에서 서명된 문서와 달리, 독일군이 무기를 넘겨주고 해산하여 포로가 되도록 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5. 해체와 베를린 선언

앞줄 군복을 입은 인물이 되니츠, 그 뒤에 있는 인물은 요들과 슈페어.]]

연합국 간에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합의되었지만, 윈스턴 처칠은 이러한 협의에 따르기를 주저했다. 5월 8일 영국 국민들에게 승리를 선포하는 연설에서 처칠은 항복이 "독일 국가 원수로 지정된 괴링 대제독"에 의해 승인되었다고 명시했다.[11] 처칠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즉각 해산하지 말 것을 촉구하며, "잠시 상황을 그대로 두는 데 큰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12] 처칠의 이러한 태도는 소련군이 덴마크에 진출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영국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일시적으로 계속 존재하는 것을, 소련의 발트해 서부 지역에 대한 의도에 관한 협상에서 영국이 사용할 수 있는 교섭 카드로 보고, 동시에 독일군의 해산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대로 소련의 발표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서방과의 휴전을 통해 동부에서 소련군에 대한 저항을 유지하려는 반소련 집단으로 꾸준히 묘사했다. 5월 20일 소련 정부는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소련은 되니츠 정부를 "되니츠 패거리"라고 부르며 공격했고, 그 정부가 어떤 권력이라도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는 어떤 생각에도 강하게 비판했다.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13]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입장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었고, 되니츠와 그의 내각이 겉모습일 수 있으며, 실제 독일 지도부는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을 수 있다고 의심했다. 아이젠하워는 꺼리는 마음으로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의 견해를 따르기로 동의했지만, 되니츠 정부의 존속이 그를 국가 원수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합군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독일군의 식량 공급, 무장 해제, 의료 지원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이며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4]

5월 12일, 미 육군 로웰 워드 룩스(Lowell Ward Rooks) 소장과 그의 영국 부관인 E. J. 포드(E. J. Foord) 준장이 플렌스부르크에 도착하여 플렌스부르크 항구에 정박한 여객선 파트리아(Patria)호에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5월 13일, 영국 당국은 케이텔을 전쟁 범죄로 체포하였다. 되니츠는 요들을 그의 대체자로 임명하였다.[15] 5월 21일,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그 구성원들을 포로로 체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부를 해체하는 작전은 "블랙아웃 작전(Operation Blackout)"이라고 명명되었으며 5월 23일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체셔 연대(Cheshire Regiment)와 헤리퍼드셔 연대(Herefordshire Regiment)의 영국군이 제15/19 후사르 연대의 전차 지원을 받아 수행하였다. 펠른스보(Felnsbough)의 정부 건물과 글뤼크스부르크 성(Glücksburg Castle)이 점령되었고, 영국 해군 구축함인 조디악(Zodiac)호와 HMS 질러스(Zealous)호(R39)가 플렌스부르크 피오르드에 배치되어 정부 구성원들이 바다로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16]

그 후, 되니츠, 프리데부르크, 요들은 파트리아(Patria)호에 승선하였고, 룩스는 그들에게 정부 해산을 통보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독극물이 든 유리병(phial)을 소지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옷을 벗고 수색하도록 명령하였다.[18][19] 알몸 수색을 당할 처지에 놓인 프리데부르크는 자살하였고, 되니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슈페어, 요들과 해산된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은 포로가 되었다.[18] [20][21]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정부 체포와 함께 독일 최고 사령부도 해체되었고, 명목상이라도 독일을 통치하거나 승전국의 요구와 지시를 이행할 책임을 질 중앙 권력 기관이 남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 공백은 1945년 6월 5일까지 약 2주간 지속되었는데, 이때 연합국 4개국의 대표들이 독일의 패배와 연합국의 최고 권력 장악에 관한 선언(베를린 선언)에 서명했다.[22]

1945년 6월 5일 베를린에서 오후 6시에 발표된 이 선언에는 미국을 대표하여 아이젠하워, 영국을 대표하여 몽고메리, 소련을 대표하여 주코프, 프랑스 임시 정부를 대표하여 드 타시니(de Tassigny)가 서명했다.[22]

독일 점령 초기 단계 동안, 최고 권한은 연합 통제 위원회를 통해 모든 점령 지역에 대해 4개국이 공동으로 행사했다. 포츠담 협정에 따라 1945년 8월 2일 이후 연합 통제 위원회는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전쟁 전 독일 영토(즉, 오늘날 독일의 국경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관할권으로 제한되었다.[24]

6. 평가 및 영향

6. 1. 비판적 시각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SS 지도부가 떠나면서 강제 수용소 운영과 살해 시설 운영등의 잔혹 행위가 전적으로 히믈러와 SS에 의해 비밀리에 자행되었다고 주장했다. 괴링과 요들은 "독일 국방군이나 독일 국민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10]

6. 2. 긍정적 시각

참조

[1] 웹사이트 Karl Dönitz (1891–1980). Tabellarischer Lebenslauf zusammengestellt von Nikolas Dikigoros http://biogra.100ws.[...] 2024-03-12
[2] 웹사이트 Doch, das Deutsche Reich ist wirklich untergegangen https://www.welt.de/[...] 2024-03-12
[3] 웹사이트 Law to Remedy the Distress of People and Reich (Enabling Act) http://www.documenta[...] 2024-03-11
[4] 웹사이트 Law Concerning the Head of State of the German Reich http://www.documenta[...] 2024-03-11
[5] 웹사이트 Constitution of the German Reich (Weimar Constitution) http://www.documenta[...] 2024-03-11
[6] 웹사이트 After the Battle: The Flensburg Government https://www.39-45.or[...] Battle of Britain International Ltd. 2021-04-30
[7] 웹사이트 The German Surrender Documents – WWII http://www.ibiblio.o[...] iBiblio
[8] 문서 The text of the full p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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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The End: Germany, 1944-45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Limited 2011-08-25
[11] 웹사이트 End of the War in Europe http://www.winstonch[...]
[12] 서적 Triumph and Tragedy https://books.google[...] RosettaBooks 2014-05-11
[13]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Nazi Germany and Imperial Japan: A Pictorial History of the Final Days of World War II 1995
[14] 서적 The Royal Navy and German Naval Disarmament 1942-1947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05-05
[15] 웹사이트 After the Battle: The Flensburg Government https://www.39-45.or[...] Battle of Britain International Ltd. 2021-05-02
[16] 서적 The Royal Navy and German Naval Disarmament 1942-1947 Taylor & Francis 2020
[17] 서적 The Fourth Reich and Operation Eclipse Fonthill 2015
[18] 웹사이트 Chapter XV: The Victory Sealed http://www.globalsec[...]
[19] 뉴스 26 May 1945 – High Command Arrested http://nla.gov.au/nl[...] Trove.nla.gov.au 1945-05-26
[20] 서적 The RAF Regiment at War 1942-1946 Pen & Sword 2002
[21] 뉴스 Group Captain Mark Hobden https://www.telegrap[...] 2013-05-28
[22] 웹사이트 Defeat of Germany: assumption of supreme authority by Allied Powers https://www.loc.gov/[...]
[23] 서적 The International Law of Occupa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24] 서적 The International Law of Occupa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25] 웹사이트 ドイツ連邦共和国国歌 https://japan.diplo.[...] ドイツ連邦共和国大使館・総領事館 2022-03-14
[26] 간행물 「無条件降伏」とハーグ陸戦法規 日本にドイツ式「基本法」制定は可能であったか https://www.andrew.a[...] 2011-03
[27] 간행물 「無条件降伏」とハーグ陸戦法規 日本にドイツ式「基本法」制定は可能であったか https://www.andrew.a[...] 2011-03
[28]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29]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0]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1]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2]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3] 서적 デーニッツと灰色狼 フジ出版
[34] 서적 デーニッツと灰色狼 フジ出版
[35]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6]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7]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8]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39]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40]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41]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42]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43] 서적 フォルカー(2022年)
[44] 서적 ヒトラー最期の日 筑摩書房
[45] 웹사이트 The German Surrender Documents - Wwii http://www.ibiblio.o[...]
[46] 서적
[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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