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되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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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되니츠는 독일의 해군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U보트 함대를 지휘하며 늑대떼 전술을 개발하여 대서양 해전에서 연합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43년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 사후에는 독일 대통령으로 잠시 재임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는 자신의 군 생활을 회고하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나치 정권에 헌신적이었고,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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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되니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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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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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되니츠 |
별칭 | 데어 뢰베(Der Löwe, 사자) 옹켈 카를(Onkel Karl, 카를 삼촌) |
출생 | 1891년 9월 16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그뤼나우 |
사망 | 1980년 12월 24일 (향년 89세) |
사망지 | 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아우뮐레 |
안장지 | 아우뮐레 발트프리드호프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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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독일 대통령 | 재임 기간: 1945년 4월 30일 ~ 1945년 5월 23일 |
총리 | 요제프 괴벨스 루츠 폰 크로지크(사실상) |
국방 장관 | 재임 기간: 1945년 4월 30일 ~ 1945년 5월 23일 |
총리 | 요제프 괴벨스 |
수석 장관 | 루츠 폰 크로지크 |
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군 복무 | 1910년 ~ 1918년, 1920년 ~ 1945년 |
최종 계급 | 그로스아드미랄(대제독) |
주요 지휘 경력 | SM UC-25 (1917년–1918년) SM UB-68 (1918년) 엠덴 (1934년–1935년) 제1 잠수함 전대 (1935년–1936년) 잠수함대 사령관(Führer der Unterseeboote) (1936년–1939년) 잠수함대 사령관(Befehlshaber der U-Boote) (1939년–1943년) 독일 해군 최고 사령부 (1943년–1945년) 국방군 최고 사령관(1945년)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대서양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호송선단 전투 |
해군 복무 | |
해군 최고 사령관 | 재임 기간: 1943년 1월 30일 ~ 1945년 5월 1일 |
전임 | 에리히 레더 |
후임 |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
잠수함대 사령관 | 재임 기간: 1935년 ~ 1943년 1월 30일 |
수상 경력 | |
훈장 | 기사 철십자 훈장 곡엽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잉게보르크 베버 (1916년 결혼, 1962년 사망) |
자녀 | 3명 |
재판 정보 | |
유죄 판결 | 침략 범죄 전쟁 범죄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형량 | 10년 징역 |
수감 | 슈판다우 교도소 |
석방 | 석방됨 |
2. 생애
되니츠는 1891년 9월 16일 베를린 근처 그뤼나우에서 엔지니어 에밀 되니츠와 안나 베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를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다. 1910년 되니츠는 Kaiserliche Marinede("제국 해군")에 입대했다.
1913년 9월 27일, 되니츠는 Leutnant zur Seede(부사관 대리)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지중해에서 경순양함 에서 복무했다. 1914년 8월, ''Breslau''와 순양전함 은 오스만 제국 해군에 매각되었다. 선박들은 각각 ''Midilli''와 ''Yavuz Sultan Selim''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들은 빌헬름 소촌 제독 휘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작전을 시작하여 흑해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과 교전했다. 1916년 3월 22일, 되니츠는 Oberleutnant zur Seede로 진급했다. 그는 1916년 10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잠수함 부대로의 전출을 요청했다. 그는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잠수함 학교에 다니며 1917년 1월 3일에 졸업했다. 그는 의 초계 장교로, 1918년 2월부터는 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18년 7월 2일, 그는 지중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의 지휘관이 되었다. 10월 4일,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은 후 되니츠는 수면 위로 부상하여 자신의 배를 자침시켰다. 그는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셰필드 근처의 로지 무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19년까지 전쟁 포로로 남아 있다가 1920년 독일로 돌아왔다.
1916년 5월 27일, 되니츠는 독일군 장군 에리히 베버 (1860–1933)의 딸인 간호사 잉게보르크 베버(1893–1962)와 결혼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딸 우르술라(1917–1990)와 아들 클라우스(1920–1944)와 페터(1922–1943).
되니츠의 두 아들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중 작전 중 사망했다. 페터는 1943년 5월 19일 가 북대서양에서 침몰했을 때 전원 사망했다. 히틀러는 되니츠와 같은 고위 장교가 전투에서 아들을 잃고 다른 아들이 군대에 있는 경우, 후자는 전투에서 물러나 민간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페터의 사망 후, 클라우스는 전투 역할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해군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1944년 5월 13일, 그의 24번째 생일에 그는 친구들을 설득하여 Selsey에 대한 공격을 위해 E-보트 ''S-141''에 탑승하도록 했다. 배는 에 의해 침몰되었고 클라우스는 사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계속 해군에 남은 되니츠는 한동안 순양함 함장 등을 지내며 군 생활을 했고, 1935년 재군비 선언 이후 대령 계급으로 잠수정지휘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유보트 건조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과 당시 잠수함 건조 기술의 한계를 감안한 늑대떼 전술을 창안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되니츠는 1891년 베를린 근교 그뤼나우에서 엔지니어 에밀 되니츠와 안나 베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에 입대했다.
1913년 9월 27일, Breslau/Leutnant zur See}}(부사관 대리)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지중해에서 경순양함 은 오스만 제국 해군에 매각되었다. 선박들은 각각 ''Midilli''와 ''Yavuz Sultan Selim''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들은 빌헬름 소촌 제독 휘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작전을 시작하여 흑해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과 교전했다.되니츠는 1916년 3월 22일에 Oberleutnant zur Seede로 진급하고, 잠수함 부대로 전출을 요청하여 1917년 1월 3일에 잠수함 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1월에 잠수함 당직 사관 과정을 마치고 발터 포르스트만 대위가 함장을 맡는 잠수함 U39에 근무했다. 의 초계 장교로, 1918년 2월부터는 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18년 7월 2일, 지중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의 지휘관이 되었다. 1918년에는 UB-86의 함장이 되었지만,[11] 10월에 함이 잠항 중에 항행 불능 상태가 되어 급부상한 곳을 영국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U보트 함장은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소문을 듣고, 발광한 척하여 1919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0월 4일,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은 후 되니츠는 수면 위로 부상하여 자신의 배를 자침시켰다. 그는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셰필드 근처의 로지 무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19년까지 전쟁 포로로 남아 있다가 1920년 독일로 돌아왔다.
2. 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되니츠는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에 계속 남았다. 1921년 1월 10일, 독일 해군(Vorläufige Reichsmarinede)에서 Kapitänleutnantde(소위)가 되었고, 어뢰정을 지휘했다.[12] 1928년 11월 1일에는 Korvettenkapitände(중령)으로, 1933년 9월 1일에는 Fregattenkapitände(대령)으로 진급했다. 1934년에는 순양함 ''엠덴''의 함장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를 원양 항해로 방문했지만, 미국에 가지 못한 것을 나중에 후회했다.1935년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13]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금지되었던 잠수함 함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되니츠는 대령 계급으로 잠수정지휘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 재건에 착수했다. 당시 건조된 3척의 보트, , 및 로 구성된 U보트 함대 Weddigende을 지휘했다.[13] 같은 해 9월 1일, Kapitän zur Seede(해군 대령)으로 진급했다.
되니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척의 잠수함을 묶어 상선 호송대를 공격하는 Rudeltaktikde(무리 전술, 일반적으로 "늑대떼"라고 함)을 고안했다. 이는 헤르만 바우어의 아이디어를 되살린 것으로, 전간기에 개발된 초고주파 송신기와 에니그마 암호 기계를 통해 통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39년 1월에는 Die U-Bootwaffede라는 소책자에 야간 공격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대서양 해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되니츠는 57척의 잠수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27척만이 대서양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되니츠의 첫 번째 주요 행동은 같은 날 늦게 침몰한 영국 여객선 ''아테니아'' 사건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수함의 항해 일지에서 이 사건을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U-보트에 의해 정지된 모든 상선이 무선 통신을 사용하면 침몰시키거나 나포하도록 승인했다. 10월 17일 독일 해군은 U-보트에게 적대 세력으로 확인된 모든 선박을 경고 없이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939년 11월까지 BdU는 무제한 잠수함전을 연습하고 있었다. 중립 선박은 독일로부터 미국의 중립법에 의해 미국 선박에 금지된 구역에 진입하지 말고, 등화 없이 항해하거나, 지그재그 항해를 하거나, 방어 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되니츠와 에리히 레더는 전쟁 발발과 함께 Z 계획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U-보트 프로그램만이 1939년을 넘겨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히틀러에게 잠수함 생산 계획을 월 29척 이상으로 늘리도록 로비했다. 1941년 말까지는 선박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하지 않았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3월까지 15척의 U-보트가 손실되었으며, 그중 9척은 호송 선단에 의해 격침되었다.
3. 1. 잠수함대 사령관
되니츠는 1939년 10월 1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 잠수함대 사령관(Befehlshaber der Unterseeboote)이 되었다. 그는 U보트를 활용한 늑대떼 전술을 지휘하여 대서양 전투 초기 연합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15]
개전 당시 되니츠는 57척의 U보트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대서양에 투입 가능한 수는 26척에 불과했다. 그는 최소 300척의 U보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훈련용으로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초기 U보트 어뢰는 자기식 신관의 잦은 오작동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노르웨이 전역에서 U보트는 어뢰 오작동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되니츠는 1940년 5월 "사람들이 그렇게 쓸모없는 무기에 의존해야 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1939년 9월부터 12월까지 U보트는 221척의 선박(755,237 총 톤수)을 격침시켰지만, 북대서양에서는 47척(249,195톤)에 그쳤다.
1940년 5월, 독일은 작전명 하르트무트를 실행, 독일 항공기는 48척의 선박()을 격침, 독일 잠수함의 3배에 달하는 전과를 기록했다.
1940년 6월, 연합군의 서유럽 및 스칸디나비아 철수는 대규모 연합군 군함을 끌어들여, 많은 대서양 호송선이 서부 접근로를 무방비 상태로 지나가게 되었고, 독일 잠수함은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프랑스 멸망으로 독일은 로리앙, 브레스트, 생나제르, 라 팔리스/라 로셸 및 보르도에 U보트 기지를 확보, VII형 잠수함의 작전 범위가 확장되었다. 되니츠는 바다사자 작전에 회의적이었고, 장기전을 예상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가 패배한 후, 해상 무역 파괴는 영국에 대한 독일의 주요 전략이 되었다.
되니츠는 U보트 그룹을 호송선에 집중시켜 밤에 수면 위에서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탈리아 잠수함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의 훈련 부족과 잠수함 설계 문제로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1941년, 포케불프 Fw 200 콘도르와 같은 독일 항공기가 대서양에서 많은 선박을 격침시켰지만, 장기적으로 ''루프트바페''와의 협력은 어려웠다. 단일 폭격기/해상 초계 부대 확보 노력은 괴링에 의해 좌절되었고, 플리에거퓌러 아틀란틱은 1941년에 미미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국 측의 대응책 발전으로 영향력을 잃었다.
1940년과 1941년 초 U보트 함대의 성공은 오토 크레치머, 요아힘 셰프케, 귄터 프린 등 소수의 노련한 지휘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1941년 3월, 프린과 셰프케는 사망하고 크레치머는 포로가 되었다.
1941년 5월 7일, 영국 해군은 독일 북극 기상선 Münchende을 나포하여 에니그마 암호 해독기를 입수, 6월부터 U보트 무선 통신을 해독할 수 있었다. ''U-110''의 나포는 영국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1941년 8월부터 블레츨리 파크 요원들은 되니츠와 U보트 사이의 신호를 제한 없이 해독할 수 있었다.
1941년 12월 11일, 히틀러의 미국 선전 포고 후, 되니츠는 드럼비트 작전을 실행했다. 미국의 참전은 단기적으로 독일 잠수함에게 유리하게 작용, 미국과 캐나다 해안 공격을 통해 호송선단 형성을 막으려 했다.
1942년 1월 13일, 되니츠는 세인트로렌스 만에서 케이프 해터러스까지 기습 공격을 계획했으나, 울트라는 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세인트로렌스 해전의 시작이었다.
1942년 1월부터 7월까지, 되니츠의 잠수함은 미국 동부 해안과 카리브해에서 호위받지 않는 선박을 공격, 전쟁 중 가장 많은 선박과 톤수를 격침시켰다. ("두 번째 행복한 시간") 이는 미국 해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였다. 되니츠는 미국이 블랙아웃을 시행하지 않고, 선장들이 평시 안전 절차를 고집한 것이 성공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되니츠는 카리브 해에서 동시 작전을 명령, 카리브 해 해전을 통해 섬 간 무역에 큰 타격을 입혔다. 노이랜드 작전은 이 지역에서 가장 피해가 큰 해상 작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미국 해군의 호송선단 도입으로 "대학살"은 종식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역과 동부 전선 상황 악화로 히틀러는 지중해 해전으로 잠수함을 돌렸지만, 되니츠와 레더는 이에 반대했다. 지중해의 유보트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1942년, 되니츠는 "적의 해운은 단일하고 거대한 실체"라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승인, 본격적인 톤수 전쟁을 시작했다. 1942년 10월, 되니츠는 365척 중 196척을 작전 가능하게 만들어 1939년에 희망했던 목표 숫자에 도달했다.
1942년 11월, 대서양에서 134척의 선박(807,754톤)을 격침, 새로운 최고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횃불 작전을 막지 못해 전략적 패배를 겪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대잠 능력 강화와 미국의 참전, 그리고 에니그마 암호 해독 등으로 인해 전세는 점차 불리해졌다.
3. 2. 해군 총사령관
1943년 1월 30일, 카를 되니츠는 에리히 레더의 뒤를 이어 해군 총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Kriegsmarine) 겸 해군 최고 사령부(Oberkommando der Marine)의 대제독(Großadmiral)으로 취임했다. 취임 직후, 되니츠는 U보트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유지하고 히틀러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그의 충성심은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고,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되니츠는 해군 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어뢰정과 잠수함 건조에 집중했지만, 철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U보트 생산을 맡기는 대신, 매달 40척의 잠수함 완성을 요구했다. 또한, 히틀러를 설득하여 전함을 포함한 표면 함대의 폐기를 막았다. 비록 대서양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표면 함대가 영국 공군과 해군을 묶어두어 U보트에 대한 압력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3년, 연합군의 호위 항공모함과 장거리 항공기의 등장으로 U보트 작전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연합군 공군은 ASV 마크 III 레이더를 장착한 항공기를 투입하여 U보트 탐지 능력을 강화했고, RAF 해안 사령부는 ASV와 Leigh Light를 결합한 부대를 창설하여 야간 공격을 시작했다.
1943년 초, 되니츠는 전술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월에는 호송선 TM 1을 거의 파괴하여 제8군이 연료 배급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대서양이 최우선으로 지정되면서 연합군의 방어가 강화되었고, 블레츨리 파크는 에니그마 정보의 흐름을 복원하여 해군성이 호송대를 울프팩(Wolfpack) 주변으로 우회할 수 있게 되었다.
3월에는 호송선 SC 121과 호송선 HX 229/SC 122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연합군의 새로운 기술, 전술 및 기술이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1943년 4월, U보트 사기는 위기에 달했고, 많은 U보트가 파괴되었다.
연합군 지휘부는 대서양 중부 상공의 공중 지원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VLR(Very Long Range, 초장거리) 항공기를 투입했다. 1943년 3월 말에는 20대의 VLR 항공기가 작전 중이었고, 4월 중순까지 41대로 증가했으며, 모두 영국 승무원이 조종했다.
1943년 5월, 호송선 ONS 5, 호송선 SC 129, 호송선 SC 130 전투를 정점으로 U보트의 피해가 급증했고, 결국 되니츠는 패배를 인정하고 대서양에서 U보트를 철수시켰다. 이는 검은 5월로 불리며, 대서양 전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되니츠는 아조레스 제도 근처에 U보트를 배치하여 지브롤터-영국 호송로를 위협하고자 했지만, 연합군의 헌터킬러 그룹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는 음향 어뢰인 G7es 어뢰와 잠수함 스노클을 장착한 신형 잠수함에 희망을 걸었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4년, 되니츠는 오버로드 작전에 대비하여 비스케이 만에 잠수함을 유지했지만, D-데이 상륙 작전 이후 U보트 작전은 더욱 어려워졌다.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의 붕괴 이후, 대서양에 가장 가까운 독일 점령 노르웨이의 기지만 남게 되었고, 신형 잠수함도 충분히 생산되지 못했다.
1945년, 되니츠는 인간 어뢰를 포함한 모든 가용 무기를 전투에 투입했지만, 전황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되니츠가 그의 뒤를 이어 국가 원수가 되었고, 한스-게오르그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이 Kriegsmarinede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5월 4일, 뤼네부르크 황무지에서 독일의 항복이 이루어졌고, 되니츠는 모든 U보트에게 전투 작전 중단을 명령했다.
3. 3. 독일 대통령
히틀러의 자살 후, 히틀러의 정치적 유언에 따라 되니츠는 대통령(Reichspräsidentende)이 되었다. 히틀러는 괴벨스를 총리로 임명했으나 그가 자살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되니츠의 1인 정부가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헤르만 괴링 국가 원수는 연합군에 단독으로 강화를 제의하여 반역자로 직무를 박탈당했고, 하인리히 힘러 SS 장관도 4월 28일에 스웨덴을 경유하여 강화를 제의하여 반역자가 되었다. 1945년 4월 25일에 되니츠는 베를린 방어를 위해 1만 명 이상의 해병을 베를린에 파견했다[16]。히틀러는 에서 후계자를 되니츠로 지명했고, 4월 30일 마르틴 보어만으로부터 "총통은 전 국가원수 괴링 대신, 해군 원수 폐하(되니츠), 당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라는 전보를 받았다.[18][11] 되니츠는 즉시 히틀러 구출 부대를 결성해 베를린으로 보냈으나, 이 병사들 대부분은 전사했다.[19] 5월 1일, 되니츠는 히틀러의 죽음을 국민에게 공표했다.[20]
되니츠는 동프로이센 및 동부지역 민간인과 군 병력이 엘베강 서안으로 탈출해 미군에 항복할 수 있도록 항복 협상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연합군은 즉각적인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되니츠는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독일군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고, 독일 군인들이 소련이 아닌 영국군이나 미국군에게 항복하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5] 이러한 되니츠의 전술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약 180만 명의 독일 군인이 소련에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5]
5월 1일 오후, 괴벨스와 보어만이 공동 서명한 전보에는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괴벨스를 수상으로, 보어만을 나치당 장관으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외상으로 지명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2] 되니츠는 루트비히 슈베린 폰 크로지크를 수석 각료(leitenden Reichsminister, 수상 대행) 겸 외상으로 임명하고 조각을 의뢰했다.[23] 5월 2일, 새로운 제국 정부는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로 이동했다.[24]
되니츠는 독일 전역이 군사 점령되는 "자연적 종전"이 아닌 "공식 항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25] 5월 5일, 몽고메리 원수와 북독일의 부분 항복을 발효시키는 데 성공했다.[26] 5월 6일, 요들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미군의 아이젠하워에게 서부 전선에서의 무조건 항복을 신청했으나,[26] 아이젠하워는 5월 7일까지 소련군을 포함하여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미 항복한 북부 지구를 폭격하겠다고 통고했다.[27] 결국 5월 7일, 요들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4] 항복 문서에는 "독일 통제하의 모든 군대는 1945년 5월 8일 중앙 유럽 표준시 23시 01분에 활동을 중단한다"라는 문구가 포함되었다.[4]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4][5]

5월 23일, 되니츠 정부는 되니츠가 RAF 연대의 특수 부대에 의해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4]
4. 전후
== 뉘른베르크 재판 ==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주요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었다.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를 범하기 위한 공모, 침략 전쟁 계획, 시작 및 수행, 전쟁법 위반 등의 혐의였다. 그는 기소 혐의 중 첫 번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두 번째와 세 번째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웩슬러-벨레뷰 IQ 검사 결과 138점을 기록, 검사를 받은 나치 지도자들 중 공동 3위였다.
재판에서 되니츠는 중립 선박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인 혐의와 1942년 10월 18일 히틀러의 특공대 명령이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유지되도록 허용한 혐의를 받았다. 또한 조선소에서 일하는 12,000명의 자원하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혐의도 받았다. 그는 검사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경의 반대 심문에 이 혐의에 대해 설득력 있게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1945년 2월 25일, 히틀러는 되니츠에게 제네바 협약을 폐기해야 하는지 물었으나, 되니츠는 협약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지만, 독일이 협약을 폐기하지 않았고, 되니츠의 관할 하에 있는 수용소에 있는 영국 포로들이 협약에 따라 엄격하게 대우받았기 때문에 법원은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형량을 감경했다.
되니츠는 1939년 전쟁 명령 154호를 발령하고 ''라코니아'' 사건 이후 또 다른 유사한 명령을 내려 잠수함의 공격을 받은 선박의 생존자를 구출하지 못하게 한 혐의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수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로 인해 1936년 제2차 런던 해군 조약을 위반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연합군이 유사한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제시되면서 그의 형량은 이 국제법 위반을 근거로 평가되지 않았다.
특히 영국 해군성은 1940년 5월 8일 스카게라크 해협의 모든 선박을 발견 즉시 격침하라고 명령했고,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미국 해군이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한 날부터 태평양에서 일본에 대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
되니츠의 변호는 독일 해군 총사령부 법무관이었던 오토 크란츠뷜러/Otto Kranzbühler (Jurist)de 전 상석 법무관이 맡았다.[32] 크란츠뷜러는 미국 해군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증인으로 내세워, 미 해군 역시 잠수함 작전에서 유사한 행위를 했음을 증언하게 했다.[34]
결국 되니츠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수감 기간 동안 뉘우치지 않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100명 이상의 연합군 고위 장교들이 되니츠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재판의 불공정성과 판결에 대한 실망감을 전달하기도 했다.
== 만년 ==
되니츠는 1956년 10월 1일에 석방되어 서독의 아움뮬레에서 은퇴 생활을 했다.[6] 그는 그곳에서 두 권의 책을 썼는데, 1958년에 출간된 회고록 ''Zehn Jahre, Zwanzig Tage''(《회고록: 10년과 20일》)에서는 U-boat 사령관 및 독일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다루었다.[6] 이 책에서 되니츠는 나치 정권을 시대의 산물이라 변명하고, 자신이 정치인이 아니었기에 정권의 범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재 정치를 비판하며 나치 시대 실패의 책임을 돌렸다. 역사학자 앨런 P. 렘스는 그의 회고록이 설득력이 없으며, "뉘른베르크 판결의 제약에서 벗어나 역사의 세척된 버전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1968년에는 1934년 이전의 삶을 다룬 Mein wechselvolles Lebende(《나의 변화무쌍한 삶》)을 출간했고, 1998년에는 Mein soldatisches Lebende(《나의 군대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6]
되니츠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고, 국가에 대한 의무감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움뮬레에서 여생을 보내며 독일 해군 역사 수집가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8] 1974년경에는 네오 나치 음모론자 만프레드 로더와 접촉하기도 했는데, 로더는 되니츠가 여전히 법적인 국가 원수라고 주장했지만 되니츠는 이를 부인했다.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 되니츠는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8] Großadmiralde(대제독) 계급을 가진 마지막 독일 장교였던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전직 군인과 외국 해군 장교들이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참석했다.[9][10] 그는 아움뮬레의 발트프리드호프 묘지에 묻혔으며, 군인들은 군복 착용이 금지되었으나 100명이 넘는 철십자 기사 훈장 수훈자들이 참석했다.[9][10]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 "외국의 법정이 어떻게 주권을 가진 다른 국가의 정부를 재판할 수 있는가"라며 비판했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그의 말은 항상 논리가 있어 보였고, 그의 요구는 독일을 위한 것이라고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괴링에 대해서는 "국가 사회주의의 문제는 분열된 집이었다는 것이고, 독일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에서 살아가려고 했다"는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되니츠는 강제 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인정했지만, "당시 수용되었던 것은 1만 2천 명의 정적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러시아는 세계 최악의 범죄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가장 사악한 사상이다"라고 비판했다.
항복 후 2주 동안 서방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완전히 무시했다. 이 기간 동안 되니츠 이하 플렌스부르크의 면면은 무의미한 "정부 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되니츠는 매일 오전 10시에 "각의"를 열었다. 또한 일당 독재의 "민족주의 국가"를 유지하려 국민을 향해 "복수 정당제의 광기"를 열심히 연설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각료 중 한 명이었던 슈페어는 "우리는 속이 빈 각서를 만들고 겉으로 활동적인 척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무의미함에 거스르려 했다. 우리는 최적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혹은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5월 23일이 되어서야 서방 연합국은 드디어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체했다. 되니츠와 그의 각료들은 한 곳에 모여 아이젠하워의 대리인으로부터 "전쟁 범죄 재판의 피고인으로 바트 몬도르프로 이송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요들은 이에 동요하여 되니츠에게 "해군 원수 각하, 아까의 전쟁 범죄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했을 뿐 아닙니까?"라고 물었지만 되니츠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경우에는 말이지. 히틀러가 죽었으니 그 후계자가 대리 역할을 하라는 것이겠지"라고 말했다[31]。
그 후 괴링이 수용되어 있던 룩셈부르크의 몬도르프의 팰리스 호텔로 보내져 8월 중순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되니츠와 괴링은 "피고인들 중 수장"을 놓고 다퉜다고 한다. 괴링과 되니츠는 문 앞에서 만나는 것을 피했고 각각 두 개의 테이블에서 좌장으로서 군림했다고 한다。
8월 중순,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다른 피고인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되니츠를 포함한 금고형을 선고받은 7명의 전범들은 잠시 뉘른베르크 형무소에서 복역을 계속했다. 1947년7월 18일에 DC-3기로 베를린으로 이송되어 호송차로 슈판다우 형무소로 보내져 그곳에 투옥되었다. 되니츠의 죄수 번호는 2번이었다。
형무소 내에서는 할당된 노역을 하면서 자유 시간에는 독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쇼펜하우어의 저작이나 조류학의 신비로운 책 등을 자주 읽었다고 한다。 가족으로부터의 편지가 한 달에 한 번밖에 허용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1952년 겨울에는 되니츠와 쉬라흐, 그리고 미국인 간수 1명이 형무소 뜰에서 눈싸움을 벌여 3명 모두 엄하게 벌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석방 두 달 전에 변호사 크란츠빌러와의 접견이 허용되었다. 되니츠는 서독 국민들이 자신을 유죄라고 생각하는지 크란츠빌러에게 물었다. 크란츠빌러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신의 유죄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언론도 당신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하지만, 나쁘게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해 되니츠를 안심시켰다。
1956년 9월 30일 오전 0시, 되니츠는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형무소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 영국군 소유의 리무진이 미끼로 먼저 나와 취재진을 유인하고, 그 후 되니츠가 탄 택시가 형무소를 나왔다。
알베르트 슈페어에 따르면, 되니츠는 히틀러의 후계자가 된 것을 격렬하게 후회하며, 슈판다우 형무소 출소에 즈음하여 (자신을 히틀러에게 추천했다고 믿었던) 슈페어에게 "네 탓에 나는 11년을 낭비했다. 네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나를 국가 원수로 삼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부하들은 모두 연방 해군에서 지휘권을 부활했다. 하지만 나를 봐라. 마치 범죄자 같지 않나. 나의 군 경력이 엉망이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되니츠의 비난에 대해 슈페어는 "저 전쟁에서 수백만 명의 인간이 살해당했다. 게다가 수백만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정부의 일부였다. 그러나 당신이 여기서 괴로워하는 것은 5천만 명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10년이다. 당신의 형무소에서의 마지막 말은 고작 '나의 군 경력!'인가?"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4. 1. 뉘른베르크 재판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주요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었다.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를 범하기 위한 공모, 침략 전쟁 계획, 시작 및 수행, 전쟁법 위반 등의 혐의였다. 그는 기소 혐의 중 첫 번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두 번째와 세 번째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웩슬러-벨레뷰 IQ 검사 결과 138점을 기록, 검사를 받은 나치 지도자들 중 공동 3위였다.재판에서 되니츠는 중립 선박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인 혐의와 1942년 10월 18일 히틀러의 특공대 명령이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유지되도록 허용한 혐의를 받았다. 또한 조선소에서 일하는 12,000명의 자원하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혐의도 받았다. 그는 검사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경의 반대 심문에 이 혐의에 대해 설득력 있게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1945년 2월 25일, 히틀러는 되니츠에게 제네바 협약을 폐기해야 하는지 물었으나, 되니츠는 협약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지만, 독일이 협약을 폐기하지 않았고, 되니츠의 관할 하에 있는 수용소에 있는 영국 포로들이 협약에 따라 엄격하게 대우받았기 때문에 법원은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형량을 감경했다.
되니츠는 1939년 전쟁 명령 154호를 발령하고 ''라코니아'' 사건 이후 또 다른 유사한 명령을 내려 잠수함의 공격을 받은 선박의 생존자를 구출하지 못하게 한 혐의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수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로 인해 1936년 제2차 런던 해군 조약을 위반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연합군이 유사한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제시되면서 그의 형량은 이 국제법 위반을 근거로 평가되지 않았다.
특히 영국 해군성은 1940년 5월 8일 스카게라크 해협의 모든 선박을 발견 즉시 격침하라고 명령했고,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미국 해군이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한 날부터 태평양에서 일본에 대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
되니츠의 변호는 독일 해군 총사령부 법무관이었던 오토 크란츠뷜러/Otto Kranzbühler (Jurist)de 전 상석 법무관이 맡았다.[32] 크란츠뷜러는 미국 해군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증인으로 내세워, 미 해군 역시 잠수함 작전에서 유사한 행위를 했음을 증언하게 했다.[34]
결국 되니츠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수감 기간 동안 뉘우치지 않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100명 이상의 연합군 고위 장교들이 되니츠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재판의 불공정성과 판결에 대한 실망감을 전달하기도 했다.
4. 2. 만년
되니츠는 1956년 10월 1일에 석방되어 서독의 아움뮬레에서 은퇴 생활을 했다.[6] 그는 그곳에서 두 권의 책을 썼는데, 1958년에 출간된 회고록 ''Zehn Jahre, Zwanzig Tage''(《회고록: 10년과 20일》)에서는 U-boat 사령관 및 독일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다루었다.[6] 이 책에서 되니츠는 나치 정권을 시대의 산물이라 변명하고, 자신이 정치인이 아니었기에 정권의 범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재 정치를 비판하며 나치 시대 실패의 책임을 돌렸다. 역사학자 앨런 P. 렘스는 그의 회고록이 설득력이 없으며, "뉘른베르크 판결의 제약에서 벗어나 역사의 세척된 버전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1968년에는 1934년 이전의 삶을 다룬 Mein wechselvolles Lebende(《나의 변화무쌍한 삶》)을 출간했고, 1998년에는 Mein soldatisches Lebende(《나의 군대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6]되니츠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고, 국가에 대한 의무감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움뮬레에서 여생을 보내며 독일 해군 역사 수집가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8] 1974년경에는 네오 나치 음모론자 만프레드 로더와 접촉하기도 했는데, 로더는 되니츠가 여전히 법적인 국가 원수라고 주장했지만 되니츠는 이를 부인했다.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 되니츠는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8] Großadmiralde(대제독) 계급을 가진 마지막 독일 장교였던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전직 군인과 외국 해군 장교들이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참석했다.[9][10] 그는 아움뮬레의 발트프리드호프 묘지에 묻혔으며, 군인들은 군복 착용이 금지되었으나 100명이 넘는 철십자 기사 훈장 수훈자들이 참석했다.[9][10]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 "외국의 법정이 어떻게 주권을 가진 다른 국가의 정부를 재판할 수 있는가"라며 비판했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그의 말은 항상 논리가 있어 보였고, 그의 요구는 독일을 위한 것이라고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괴링에 대해서는 "국가 사회주의의 문제는 분열된 집이었다는 것이고, 독일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에서 살아가려고 했다"는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되니츠는 강제 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인정했지만, "당시 수용되었던 것은 1만 2천 명의 정적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러시아는 세계 최악의 범죄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가장 사악한 사상이다"라고 비판했다.
5. 군 복무 경력
되니츠는 독일 제국 해군,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 나치 독일 해군에서 복무하며 대제독까지 승진했다.
독일 제국 해군 |
---|
1910년 4월 1일: 해군 생도/Seekadettde (사관 후보생) |
1911년 4월 15일: 해군 소위/Fähnrich zur Seede (사관 후보생) |
1913년 9월 27일: 해군 중위/Leutnant zur Seede (임시 소위) |
1916년 3월 22일: 해군 상위/Oberleutnant zur Seede (소위) |
국가해군 |
1921년 1월 10일: 해군 대위/Kapitänleutnantde (대위) |
1928년 11월 1일: 해군 소령/Korvettenkapitände (소령) |
1933년 10월 1일: 해군 중령/Fregattenkapitände (중령) |
크리그스마리네 (독일 해군) |
1935년 10월 1일: 해군 대령/Kapitän zur Seede (대령) |
1939년 1월 28일: 준장/Kommodorede (준장) |
1939년 10월 1일: 소장/Konteradmiralde (소장) |
1940년 9월 1일: 중장/Vizeadmiralde (중장) |
1942년 3월 14일: 대장/Admiralde (대장) |
1943년 1월 30일: 원수/Großadmiralde (원수) |
6. 되니츠에 대한 평가와 비판
뉘른베르크 형무소 소속 심리 분석관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실시한 웩슬러-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서 되니츠의 지능 지수는 138로, 헤르만 괴링과 함께 피고인 중 3위를 기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U보트 탑승 경험을 통해, 되니츠는 좁은 공간에서의 승무원 간 연대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우리는 바다 밑에서 완전히 고립된 큰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즉, U보트 승무원은 운명 공동체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 그 일원이라는 것은 최고로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라고 말했으며,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를 모토로 삼았다.
히틀러는 되니츠를 "바다의 롬멜"이라고 칭하며 깊이 신뢰했다.[43] 요제프 괴벨스는 괴링과 비교하며 "되니츠와 괴링은 얼마나 다른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병기의 심한 기술적 반동을 겪었다. 괴링은 포기해 버렸고, 그래서 안 되었다. 되니츠는 그것을 극복했다"라고 평가하며, 공군 지휘권을 되니츠에게 맡기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되니츠는 민주주의를 싫어하고 소련과 사회주의를 증오했지만, 그 외에는 뚜렷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지 않았으며, 나치당의 옛 당원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43]
6. 1. 긍정적 평가
되니츠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 U보트를 활용한 늑대떼 전술을 개발하고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연합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4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U보트 탑승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바다 밑에서 완전히 고립된 큰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즉, U보트 승무원은 운명 공동체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 그 일원이라는 것은 최고로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라고 회상하며,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를 모토로 삼았다.히틀러는 되니츠를 깊이 신뢰하여 그를 "바다의 롬멜"이라고 칭했으며,[43] 괴링과 비교하며 "되니츠와 괴링은 얼마나 다른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병기의 심한 기술적 반동을 겪었다. 괴링은 포기해 버렸고, 그래서 안 되었다. 되니츠는 그것을 극복했다"라고 평가했다.
뉘른베르크 형무소 소속 심리 분석관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실시한 웩슬러-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서 되니츠의 지능 지수는 138로, 헤르만 괴링과 함께 피고인 중 3위를 기록했다.
6. 2. 부정적 평가
되니츠는 헌신적인 나치이자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크리그스마리네 내에서 나치즘 확산에 기여했으며, 1944년 2월 1일에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또한 황금 당 배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념은 반마르크스주의 및 반유대주의적이었다. 그는 독일이 "유대인의 독"과 싸워야 한다고 믿었으며, 여러 차례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4년 독일 영웅의 날(3월 12일)에는 히틀러가 없었다면 독일은 "유대인의 독"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되니츠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전후에도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유지했다. 1953년 4월,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미국인과 유대인 중 선택해야 했다면 자신이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 "외국의 법정이 어떻게 주권을 가진 다른 국가의 정부를 재판할 수 있는가"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당시 수용되었던 것은 1만 2천 명의 정적뿐이었다고 주장하며, "어느 정도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며, "러시아는 세계 최악의 범죄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가장 사악한 사상이다"라고 비판했다.
6.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카를 되니츠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U보트 함대를 지휘하며 연합군에 큰 타격을 입힌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잠수함 전술은 해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업적은 나치 정권에 대한 헌신적인 충성과 분리될 수 없다.되니츠는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나치즘 확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1944년에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황금 당 배지를 수여받았으며, 히틀러 암살 시도에 해군 장교들이 가담하지 않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반마르크스주의, 반유대주의 신념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유대인의 독"과 같은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1944년 독일 영웅의 날 연설에서 되니츠는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가 없었다면 독일이 "유대인의 독"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전후에도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유지했다.
되니츠는 히틀러에게 깊이 신뢰를 받았고, "바다의 롬멜"이라고 불릴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요제프 괴벨스 또한 되니츠와 괴링을 비교하며 되니츠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되니츠는 민주주의를 싫어했고,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된것은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카를 되니츠는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나치즘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묵인, 그리고 전후 반성의 부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의 행적은 군사적 업적과 나치 부역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주며,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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