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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슈투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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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나치 독일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반유대주의 정책과 행정 시스템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22년 나치당에 가입하여 맥주 홀 폭동 이후 금지될 때까지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에는 법원 판사, 주 위원, 국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슈투카르트는 뉘른베르크법 제정에 참여하고, 반제 회의에 참석하여 유대인 절멸 대신 혼혈의 강제 불임 시술을 지지하는 등 나치 이념을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관료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석방되었으며, 195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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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슈투카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7년 연합군 구금 당시의 슈투카르트
1947년 연합군 구금 당시의 슈투카르트
이름빌헬름 슈투카르트
출생1902년 11월 16일
출생지비스바덴,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사망1953년 11월 15일
사망지하노버, 니더작센주, 서독
사망 원인자동차 사고
직업변호사
학력뮌헨 대학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경력
소속 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수상황금 당 마크
관직
임기 시작1945년 5월 5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23일
대통령카를 되니츠
총리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수석 장관)
이전파울 기슬러
이후직위 폐지
직책 2국무장관, 제국 내무부
임기 시작 21938년 4월 1일
임기 종료 21945년 5월 23일
장관 2빌헬름 프리크
하인리히 힘러
이전 2알 수 없음
이후 2직위 폐지
관련
알려진 이유뉘른베르크 법
반제 회의 참가자

2. 초기 생애

비스바덴에서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자랐다.[2] 초기에는 극우 활동을 하여, 1919년 프란츠 폰 에프가 이끄는 자유군단에 참가해 루르 점령에 저항했다.[2] 1922년,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와 괴테 대학교 프랑크푸르트에서 법학과 정치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해 12월 나치당(NSDAP)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378,144).[2] 1923년 실패한 맥주 홀 폭동 이후 당이 금지될 때까지 당원으로 남아 있었다.[2]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1924년 프랑크푸르트의 나사우 지방 은행에서 일하며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2] 1928년 "Erklärung an die Öffentlichkeit, insbesondere die Anmeldung zum Handelsregister" (공공에 대한 선언, 특히 상업 등록소 등록에 관한)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3]

3. 나치당 및 행정 경력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1930년부터 지방 법원 판사로 재직했다.[3]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과 관계를 갱신하고 당 동지들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했으나, 당시 판사는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시 당에 재가입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어머니가 당원 번호 378,144번으로 그를 대신하여 당에 가입했다.[3]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슈테틴(현재 슈체친)에서 돌격대(SA)의 변호사이자 법률 비서로 일했다.[3]

1933년 4월 4일, 슈투카르트는 슈테틴의 시장 겸 주 위원이 되었고, 주의회와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에 선출되었다.[3] 1933년 5월 15일 프로이센 과학, 예술 및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33년 6월 30일 국무장관이 되었다.[3] 1934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의 귈프 보물(Welfenschatzde) 획득에 깊이 관여했다. 이는 중세 독일에서 살아남은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 중 하나로, 당시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여러 독일계 유대인 미술상들의 손에 있었으며, 헤르만 괴링 총리 휘하의 프로이센 주가 획득했다.[5]

1934년 7월 7일, 베른하르트 루스트 휘하의 제국 과학, 교육 및 문화부 중앙 사무소의 국무장관 겸 수장이 되었으나, 상사와의 불화로 1934년 11월 14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직했다.[6] 1935년 2월부터 3월까지 다름슈타트에서 상급 지방 법원의 회장으로 일했다.[3] 1935년 3월 7일, 제국 내무부 제1부(헌법 및 법률부)에서 헌법, 시민권 및 인종법을 담당하는 업무를 시작했다.[3] 1935년 4월 1일 장관으로 승진했고, 1935년 9월 13일 한스 풍트너, 베른하르트 뢰세너, Franz Albrecht Medicusde와 함께 반유대주의적인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 보호법''과 ''제국 시민권법''을 공동 집필하는 임무를 받았다. 이 법들은 뉘른베르크법으로 통칭되며, 1935년 9월 15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3][7]

1936년, 독일 법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행정법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938년 3월 16일,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오스트리아와 제국의 통일을 수행하는 사무실을 관리하도록 지시했고, 그는 시행령을 작성했다. 1938년 4월 1일 내무부 국무장관으로 정식 승진했다. 1938년 10월에는 주데텐란트 이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으며, 1939년 3월에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형성에 관한 법령을 작성했다. 1939년 8월 18일, "기형 신생아의 보고 의무"에 관한 기밀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는 나치 정권의 아동 안락사의 근거가 되었다.[8]

3. 1. 친위대 (SS) 경력

슈투카르트는 1932년부터 (SA)의 회원이었다.[3] 1933년 12월 (SS) 가입을 신청했다. 하인리히 힘러의 추천으로 1936년 9월 13일 SS로 전출되어(회원 번호 280,042) SS-슈탄다르텐퓌러 계급을 받았다. 1939년 1월 30일 황금당 배지를 받았으며, 1944년 1월 30일 SS-오버그룹펜퓌러 계급으로 승진했다.[24]

4. 법률 이론가로서의 활동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다작의 작가였으며, 특히 인종 법률과 공공 행정에 초점을 맞춘 나치 법률 전문가의 선두 주자로 여겨졌다. 1936년, "독일 혈통 보호를 위한 제국 위원회"의 의장으로서[3], 한스 글로브케와 함께 제국 시민권 및 혈통 보호 법률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독일 인종 법률 해설'을 공동으로 저술했다.[10] 이 해설서는 이 법률이 모든 독일인이 공통의 혈통으로 묶여 있는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 개념에 기초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나치 법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으로 여겼음) 독일 '민족(Volk)'의 구성원으로 태어나 권리를 얻는다고 보았다. '민족'의 이익은 항상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해야 했다. '민족'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며 민족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혼혈 금지 법률은 정당화되었고, 심지어 필요했다. 슈투카르트는 이 법률이 "유대인 문제의 잠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언급했다.[3]

1939년 10월, 슈투카르트는 분권화와 단순화를 통해 국가 행정 구조를 포괄적으로 합리화하는 임무를 맡았다.[4] 그는 현장 행정에 관한 광범위한 통합을 통해, 작은 내무부 모델을 선호했다.[4] 슈투카르트는 국가와 당이 '제국(Reich)'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최고 권력 수준에서 협력해야 하며, 기관 간의 현장 마찰을 상의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1] 국가 행정 체제를 규범 적용을 위한 기술적 장치에서 정치적 지도력 수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슈투카르트 모델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이상적인 나치 공무원은 "자유주의적 입헌 국가"의 수동적인 변호사가 아니라 "문화의 선구자, 식민주의자, 정치적, 경제적 창조자"여야 했다.[11]

4. 1. "서부 일반 계획"

1940년 6월 14일, 슈투카르트 또는 그의 측근이 작성한 내무부 메모에는 동부 프랑스의 특정 지역을 독일 제국에 합병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13] 이 문서에는 프랑스를 중세 시대 말의 신성 로마 제국 국경으로 축소하고, 합병된 영토의 프랑스 인구를 독일 정착민으로 대체하여 프랑스를 약화시키려는 계획이 제시되어 있었다.[13]

이 메모는 콩피에뉴 휴전 협정 이후 점령된 프랑스 영토에서 그려진 이른바 "북동선"("검은 선" 및 "퓌러 선"이라고도 함[14])의 기초가 되었으며, 솜 강 어귀에서 쥐라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13] 이 지역의 독일화에 대한 역사적 동기로 인해 도시와 지역은 전통적인 독일 이름으로 되돌아갈 예정이었다. 예를 들어, 낭시는 ''난지(Nanzig)''로, 브장송은 ''비잔츠(Bisanz)''로 불리게 되었다.[15] 역사학자 페터 쇨틀러는 이 계획을 ''동부 일반 계획''의 서부판이라고 언급한다.[13]

5. 반제 회의

슈투카르트는 1942년 1월 20일, 빌헬름 프리크를 대신하여 친위대(SS) 오버그룹펜퓌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반제 회의에 참석하여 "유럽 내 독일 영향권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의 부과를 논의했다.[24][3] 회의록에 따르면, 슈투카르트는 절멸 대신 "혼혈"의 강제 불임 시술을 지지했다.[16]

하이드리히는 1942년 3월 6일에 후속 회의를 소집하여 "혼혈" 개인과 혼혈 결혼 부부의 문제에 대해 더 논의했다.[17] 이 회의에서 슈투카르트는 1급 ''미슐링''(두 명의 유대인 조부모를 둔 사람)만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아야 하며, 그 후 독일에 남아서 "자연 소멸"을 겪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18]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항상 독일인의 혈액을 반대편으로 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의 적들은 이 혈액의 바람직한 특성을 잘 활용할 것입니다. 일단 반 유대인이 독일 밖에 있으면, 그들의 높은 지능과 교육 수준이 독일적 유산과 결합되어 이 개인들을 타고난 지도자이자 끔찍한 적으로 만들 것입니다.[17]

슈투카르트는 또한 "인종 간" 부부의 독일인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18]

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슈투카르트는 1945년 5월 카를 되니츠플렌스부르크 정부에서 잠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19] 해당 정부가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에 의해 해산되자, 5월 23일 체포되어 캠프 애시칸에 수감되었으며, 빌헬름 프리크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문가 증인으로 소환되었다.[20]

1948년 관료 재판에서 반유대주의 법안을 제정하고 시행한 역할로 기소되었다.[21] 법정은 그를 열렬한 유대인 혐오자로 규정했으며, 그는 장관직의 안전함을 이용하여 반유대주의 캠페인을 벌일 수 있었다.[21] 전 내무부 동료 베른하르트 뢰제너는 슈투카르트가 반제 회의 이전에도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21] 슈투카르트의 변호는 혼혈인(Mischlinge)의 강제 불임 시술에 대한 그의 지지가 더욱 극단적인 조치를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21] 법원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1949년 4월 그에게 기결수 형을 선고했다.[21]

감금에서 풀려난 후, 헬름슈테트의 시 재무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니더작센의 경제 진흥 연구소 관리자로 근무했다.[21] 그는 또한 우익 정당인 전독일 블록/추방자 및 권리 박탈자 연맹의 지역 위원회에서 활동했다.[22] 1951년 그는 탈나치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동조자"로 분류되어 500마르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21]

7. 사망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1953년 11월 15일, 51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서독 하노버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21] 이 사고가 나치의 인종 및 반유대주의 정책과 활동에 연루된 슈투카르트를 표적으로 삼은 조작된 충돌이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모사드나 다른 전 나치에 대한 공격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단체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인정된 적은 없다.[21]

8. 평가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확고한 인종주의적 신념을 가진 나치 법률가이자 관료였다. 그는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행정 시스템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6년, 슈투카르트는 "독일 혈통 보호를 위한 제국 위원회" 의장으로서[3], 한스 글로브케와 함께 제국 시민권 및 혈통 보호 법률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독일 인종 법률 해설'을 공동으로 저술했다.[10] 이 해설서는 모든 독일인이 공통의 혈통으로 묶여 있는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 개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독일 '민족(Volk)'의 구성원으로 태어나 권리를 얻는다고 보았다.[10] '민족'의 이익은 항상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해야 했으며,[10] '민족'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며 민족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10] 따라서, 혼혈 금지 법률은 정당화되었고, 심지어 필요하다고 보았다.[10] 슈투카르트는 이 법률이 "유대인 문제의 잠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언급했다.[3]

1939년, 슈투카르트는 분권화와 단순화를 통해 국가 행정 구조를 합리화하는 임무를 맡았다.[4] 그는 국가와 당이 '제국(Reich)'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효과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11] 슈투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Herrschaftde(행정적 지배)를 이상화된 Führungde(지도력)과 구별했다.[12] 국가 행정 체제를 규범 적용을 위한 기술적 장치에서 정치적 지도력 수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슈투카르트 모델의 핵심이었다. 이상적인 나치 공무원은 "문화의 선구자, 식민주의자, 정치적, 경제적 창조자"여야 했다.[11]

슈투카르트는 인종 차별 법안과 행정 조직에 대한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4] 그의 법률 이론과 행정 개혁안은 나치 이념을 실현하고 독일의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전후,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나 책임 인정은 없었다.

9. 저술

빌헬름 슈투카르트는 많은 글을 쓴 작가였으며, 특히 인종 법률과 공공 행정 분야에서 나치 법률 전문가로 손꼽혔다. 1936년, 슈투카르트는 "독일 혈통 보호를 위한 제국 위원회" 의장으로서[3] 한스 글로브케와 함께 제국 시민권 및 혈통 보호 법률에 대한 정부 공식 해설서인 '독일 인종 법률 해설'을 썼다.[10] 이 해설서는 법률이 모든 독일인이 공통 혈통으로 묶인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 개념에 기초한다고 설명했다.[10]

슈투카르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공동 저자비고
1934년역사 수업에서의 역사프랑크푸르트
1935년국가 사회주의 법 교육프랑크푸르트
1936년1935년 9월 15일의 제국 시민법. 독일 피와 독일 명예 보호를 위한 1935년 9월 15일 법률. 독일 국민의 유전 건강 보호를 위한 1935년 10월 18일 법률(결혼 건강 법률). 모든 시행 규정과 관련 법률 및 규정과 함께한스 글로브케베를린
1936년새로운 국가법빌헬름 알브레히트라이프치히
1937년국가 사회주의와 헌법베를린
1937년행정법발터 셰르바르트라이프치히
1938년당과 국가
1938년제3 제국의 법률에서 인종 및 유전 관리롤프 시데마이어라이프치히
1940년제국 방위(군사법)Harry von Rosen-von Hoewel|해리 폰 로젠-폰 회벨de라이프치히
1941년전시 지도력과 행정베를린
1941년유럽은 유럽인을 위한 것이다
1942년새로운 지방 자치법. 지방 자치 단체에 대한 설명과 함께Harry von Rosen-von Hoewel|해리 폰 로젠-폰 회벨de라이프치히
1942년헌법, 행정 및 유럽의 새로운 질서부쿠레슈티
1942년노르웨이의 헌법, 행정 및 경제 법률. 가장 중요한 법률, 규정 및 칙령의 모음Reinhard Höhn|라인하르트 횐de, 헤르베르트 슈나이더다름슈타트
1943년체계적인 설명에서 독일 제국의 국가 구조해리 폰 로젠, Rolf Schiedermair|롤프 쉬더마이어de라이프치히


10. 대중 매체


  • 텔레비전 영화 《음모》에서 콜린 퍼스가 슈투카르트를 연기했다.
  • 영화 《히틀러를 위한 학살 회의》에서는 Godehard Giese|고데하르트 기제de가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2] 서적 Wannsee house and the Holocaust McFarland
[3] 문서
[4] 서적 Government, party, and people in Nazi Germany University of Exeter Press
[5] 간행물 Jahrbuch Preußischer Kulturbesitz Stiftung Preußischer Kulturbesitz
[6] 서적 SS Elite: The Senior Leaders of Hitler's Praetorian Guard Fonthill Media LLC
[7] 서적 Hitler: A Biography W.W. Norton & Co.
[8] 문서 Civil Service Lawyers and the Holocaust: The Case of Wilhelm Stuckart Berghahn
[9] 문서
[10] 서적 Two cultures of rights: the quest for inclusion and participation in modern America and Germa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 문서
[12] 문서 "Herrschaft und Führung im nationalsozialistischen Reich"
[13] 학술지 'Eine Art "Generalplan West": Die Stuckart-Denkschrift vom 14. Juni 1940 und die Planungen für eine neue deutsch-französische Grenze im Zweiten Weltkrieg.'
[14] 서적 Frankreich in Hitlers https://books.google[...] Deutsche Vlg
[15] 서적 Hitler https://books.google[...] Verlag Ulstein
[16] 서적 Jewish forced labor under the Nazis: economic needs and racial aims, 1938–1944 Cambridge University Press
[17] 문서
[18] 문서
[19] 서적 After the Reich: The Brutal History of the Allied Occupation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2017-04-28
[20] 서적 The Participants: The Men of the Wannsee Conference Berghahn Books
[21] 문서
[22] 서적 The Participants: The Men of the Wannsee Conference Berghahn Books
[23] 문서
[24] 문서 서양 현대사의 블랙 박스 나치 대학살
[25] 문서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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