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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파 드 툴루즈 여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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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파 드 툴루즈 여백작은 1073년경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와 모르탱의 엠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툴루즈 백작위 상속녀였던 필리파는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와 결혼하여 툴루즈를 되찾으려 했고, 1098년 툴루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114년 기욤 9세가 정부를 들이자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은거했으며, 1118년 사망했다. 그녀의 손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툴루즈 백작위를 주장했고, 자녀로는 기욤 10세, 레몽 드 푸아티에, 아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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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파 드 툴루즈 여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툴루즈 여백작
칭호아키텐 공작 부인, 가스코뉴 공작 부인, 푸아티에 백작 부인
출생1073년경, 툴루즈
사망1118년 11월 28일 (약 45세), 퐁트브로 수도원
가문루에르그 가문
통치
툴루즈 여백작 재위1098년–1101년, 1109년–1114년
아키텐 공작 부인 재위1094년경–1116년경
가계
아버지기욤 4세
어머니모르탕의 엠마
배우자기욤 9세
자녀기욤 10세
레몽, 안티오크 공작
아녜스, 아라곤 왕비

2. 생애

2. 1. 성장기와 결혼

필리파는 1073년경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와 모르탱 백작 로베르의 딸 모르탱의 엠마 사이에서 태어났다.[9] 그녀는 기욤 4세의 유일한 생존 자녀였으므로, 툴루즈 영지의 법에 따라 상속녀가 되었다.[9] 1088년 아버지 기욤 4세는 팔레스타인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동생 레몽 4세를 후견인으로 지정했다.[9]

1094년 아버지 기욤 4세가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 중에 사망했다.[4] 필리파의 할아버지 툴루즈 백작 퐁스는 기욤 4세가 남자 상속인을 남기지 않고 사망할 경우, 툴루즈 백작위 및 유산 상속인으로 레몽 4세를 지명했었다.[4] 그 때문에 필리파는 삼촌에게 툴루즈 백작위를 찬탈당한다.[4]

필리파가 아라곤 왕과 결혼했다는 주장이 있으나,[9] 사료에 따르면 아라곤 왕은 1094년에 죽을 때까지 이전 부인과 결혼 생활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7][8]

레몽 4세가 상속인이 된 직후, 필리파는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기욤 9세와 결혼했다.[4][5] 기욤은 미남자에다 여자의 마음에 맞춰줄 줄 알았으며, 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작 중의 하나였기에, 필리파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9] 아키텐 공작령은 툴루즈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기에, 그녀가 툴루즈를 되찾을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었고, 기욤은 아내가 될 사람에게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9] 둘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9]

2. 2. 툴루즈 탈환과 통치

1096년 레몽 4세는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기 위해 아들 베르트랑에게 영지를 맡기고 떠났다.[4] 그러나 1098년 봄, 기욤 9세와 필리파는 툴루즈로 진군하여 무혈 점령에 성공했다.[11] 1099년 기욤 9세는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필리파를 푸아티에의 섭정으로 임명했다.[11]

1100년경, 필리파는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여 퐁트브로 수도원 설립을 지원했다.[12] 같은 해, 남편 기욤 9세가 십자군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툴루즈를 베르트랑에게 저당 잡히자 필리파는 큰 충격을 받았다. 툴루즈에서 나와 푸아티에 영지의 수도로 간 그녀는 남편의 부재 기간 동안 섭정으로 영지를 다스렸다.

기욤이 돌아온 후, 둘은 아녜스를 포함한 다섯 명의 딸과 아들 레몽을 더 낳았다.

1112년 베르트랑이 시리아에서 사망하자, 1113년 툴루즈는 두 부부에게 돌아왔다. 알퐁스-조르당은 베르트랑의 이복동생으로 당시 9살이었다. 필리파는 1114년까지 툴루즈를 다스렸다. 1114년 툴루즈에서 푸아티에로 되돌아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샤텔르로 자작 부인 당제로사를 정부로 삼아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필리파는 친구들과 교회에 도움을 받아 연적을 축출하려고 했으나, 누구도 공작에게 정부를 포기하라는 충고를 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의 노력은 무위로 그쳤다.

2. 3. 남편과의 불화와 은거

기욤 9세가 십자군에서 돌아온 후, 필리파는 여러 자녀를 낳으며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다.[11] 그러나 필리파는 종교, 특히 퐁트브로 수도원에 심취하여[12] 남편의 여성 편력과 성적인 자랑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6] 이는 남편과의 불화를 야기했다.

1112년 베르트랑이 사망하고, 1113년 기욤 9세는 어린 알퐁스 주르댕을 대신하여 툴루즈 통치권을 주장, 1114년까지 툴루즈를 다스렸다.

1115년경, 기욤 9세는 당주뢰즈 드 릴부샤르를 정부로 삼아 궁에 들였다. 이에 필리파는 크게 반발했으나, 당시 봉건 제도하의 권력 관계상 저지할 수 없었다.

1116년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낀 필리파는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은거했다. 그곳에서 기욤 9세의 전처인 에르망가르드 당주와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 서로를 위로하며 지냈다.

1118년 11월 28일 필리파는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에르망가르드는 필리파의 복수를 위해 당제로사를 쫓아내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3. 유산

필리파의 툴루즈 백작위 계승권은 유효했으며, 그녀의 손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비가 된 후, 1141년에 툴루즈 백작위를 주장하며 점령하려 했다. 엘레오노르의 두 번째 남편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1세도 잉글랜드와 툴루즈의 병합을 꾀했다.

16세기 말까지 "필립(Philippe)"이라는 이름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사용되었으며, 필리파의 원래 이름은 "필립"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필리파"라는 이름은 영국에서는 17세기에, 프랑스에서는 19세기에 나타난, 남성 이름 "필립"의 여성형이다.

4. 자녀

필리파 드 툴루즈는 기욤 10세(1099년 - 1137년), 안티오키아 공 레몽(1099년 이후 - 1149년 6월 29일), 아녜스(1103년 - 1159년)를 낳았다. 기욤 10세는 아키텐·가스코뉴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이었다. 레몽은 안티오키아 공이 되었으나, 그의 생모를 당주루즈로 보는 설이 있다. 아녜스는 투아르 부백 에메리 5세와 결혼 후 사별하고, 아라곤 왕 라미로 2세와 재혼했다.

성 막상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욤 9세에게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딸이 4명 더 있었고, 그들의 어머니가 필리파라는 설이 있다. 그 중 한 명인 필리파는 페리고르 백작 엘리와 결혼했고, 아델라이드(1102년경 - ?)는 샤텔로 부백 에메리 1세와 당주루즈의 차남 페이-라-비누즈 영주 라울 드 페이와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1] 논문 Ramire II le Moine, roi d'Aragon et Agnes de Poitou dans l'histoire et la légende 1966
[2] 웹사이트 Guillaume IV de Toulouse http://fmg.ac/Projec[...]
[3] 웹사이트 Guillaume IX d’Aquitaine http://fmg.ac/Projec[...]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저널 Ramire II le Moine, roi d'Aragon et Agnes de Poitou dans l'histoire et la légende 1966
[8] 저널 The wives of the first troubadour Duke William IX of Aquitaine https://archive.org/[...] 1993
[9] 문서 Eleanor of Aquitaine
[10]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1] 서적 Queens Consort, England's Medieval Queens https://archive.org/[...] Weidenfeld & Nichelson
[12]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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