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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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비트 4세는 1089년부터 1125년까지 조지아를 통치한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국왕이다. 그는 1073년 게오르게 2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셀주크 제국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웠던 조지아 왕국을 재건했다. 다비트 4세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군사 개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디드고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조지아의 군사적 우위를 확립했다. 또한 문화 발전을 장려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조지아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현재 조지아의 국기는 다비트 4세 시대의 국기를 기반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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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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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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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그루지야의 왕 중의 왕 |
재위 기간 | 1089년–1125년 |
전임자 | 기오르기 2세 |
후임자 | 데메트레 1세 |
왕가 | 바그라티오니 |
아버지 | 기오르기 2세 |
출생일 | 1073년 |
출생지 | 쿠타이시 |
사망일 | 1125년 |
사망지 | 트빌리시 |
매장지 | 겔라티 수도원 |
종교 | 조지아 정교회 |
배우자 | |
배우자 1 | 아르메니아의 루수단 |
자녀 | |
자녀 | 데메트레 1세 외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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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기 및 즉위
1073년 쿠타이시에서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일원이자 그루지야 국왕 기오르기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089년 아버지 기오르기 2세가 귀족들의 압력으로 퇴위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2. 1. 유년기
게오르게 2세와 왕비 헬레나 사이의 외아들로 1073년 조지아 서부 쿠타이시에서 태어났다.[11] 다비트는 조지아 역사에서 암흑기 중 하나였던, 셀주크 부족들이 남캅카스로 대거 이주해 오던 시기(대터키 맹공격(디디투르코바))에 성장했다.[11]2. 2. 즉위
다비트 4세는 1073년 조지 2세 국왕과 그의 아내 엘레네 여왕의 아들로 태어났다.[11] 1089년, 아버지 게오르게 2세가 귀족들의 압력으로 퇴위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12]다비트 4세의 즉위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지아 왕국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조지아는 셀주크의 침입으로 영토가 축소되고 공물을 바쳐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왕권이 약화되어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3. 조지아 왕국 재건
다비트 4세는 1089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 기오르기 2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지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즉위 당시 조지아 왕국은 셀주크 제국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다비트 4세는 디드고리 전투(1121년)에서 셀주크 군대를 크게 무찌르며 조지아 왕국의 부흥을 이끌었다.[33] 이 승리를 통해 조지아는 코카서스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아니를 점령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 1122년에는 수도를 쿠타이시에서 트빌리시로 옮겼다.
다비트 4세는 군사적 업적 외에도 교육을 장려하고 겔라티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문화 발전에도 힘썼다.[34]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유학생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3. 1. 중앙 집권화
다비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의 정치에 뛰어들었다. 다비트 4세는 그의 스승이자 영향력 있는 성직자인 츠콘디디의 게오르게의 지지를 받아 단호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왕국에 명령을 내려, 세속 성직자들과 봉건 영주들을 구속하여 왕국을 중앙집권화했다.[37] 1093년, 그는 강력한 봉건 영주이자 조지아 왕권의 오랜 숙적인 리파리트 바그바시를 체포해서 조지아 밖으로 추방했다(1094년).[37] 리파리트의 아들 라티가 죽자, 다비트는 1103년에 그들의 클데카리 공작 지위를 폐지했다.1103년, 루이서-우르브니시-시노드라고 알려진 주요 성직자 회의가 루이시와 우르브니시의 수도원들에서 개최되었다. 다비트는 반대파 주교들을 완전히 퇴출시켰고, 조신직(''므트지그노바르투쿠체시'', 포정사)과 성직자(츠콘디디의 주교)직의 두 공무 직위를 수상과 거의 동급인 ''트츠콘디델-므트지그노바르투쿠체시'' 직위로 단일화시켰다.
대투르크 침입을 종식시키고 전통적인 봉건 제도를 재건한 후, 다비트 4세는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조지아 경제가 회복된 직후, 공작 클데카리의 리파리트 5세와 니니아 카케베리즈데 공자를 포함한 귀족의 상당 부분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행위는 이전 왕들에 대한 귀족 사회의 반응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변화를 나타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093년, 리파리트 5세는 다비트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다비트는 이 사실을 알고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리파리트를 감옥에 가두어 그를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2년 후, 그는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났으며 트리알레티와 클데카리 공작령 영지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 귀족은 그의 군주에 대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다비트에 대항하는 음모를 재개했다. 다비트 4세는 이러한 사건을 다시 알게 되자 더 유용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1097년까지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둔 후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리파리트의 아들 라티 4세는 불충한 인물이었으며, 1103년에 사망하여 리파리티드 가문의 반역적인 지파를 끝내고 군주가 그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했다.
리파리트는 왕의 계획으로 인해 고통받은 유일한 귀족이 아니었다. 드자간 아블레티스제를 포함한 다른 여러 사람들이 반란 이후 같은 방식으로 심하게 처벌받았고, 그들의 영지는 왕실 영지로 편입되었다. 다비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주요 이니셔티브를 취했다. 그는 또한 그의 전임자들이 그들의 직함에 따라 선택한 고위 관리들을 해임하고, 일반적으로 하위 귀족 출신의 충성스러운 조언자들로 대체했다.
3. 2. 군사 개혁
다비트 4세는 셀주크의 군사 조직을 바탕으로 군대를 개혁했다. 우선 왕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개인 경호대인 '모나스파'를 구성하고, 봉건 민병대를 폐지하여 중앙 권력을 강화했다.[37] 군대는 도시와 요새를 지키는 수비대와 '겨울과 여름 모두 끊임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기본 군대로 나뉘었다. 군기는 비겁함에 대한 굴욕과 영웅주의에 대한 보상을 통해 유지되었다. 경제 회복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왕실은 대규모 동원이 가능해졌다.다비트 4세는 북캅카스의 킵차크 부족 14,000가구를 조지아에 재정착시켜 군사력을 강화했다. 조지아인들과 킵차크인들은 한 가구당 1명의 군인과 말 1필, 무기를 제공해야 했다. 이렇게 징집된 56,000명의 군사는 왕의 군대였다. 킵차크인들은 조지아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고, 일부는 내부 카르틀리 지방에, 다른 사람들은 국경 지방에 땅을 받았다. 그들은 조지아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었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비트 4세는 셀주크 투르크를 격퇴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1105년, 에르트주키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를 격파했고, 1110~1118년 사이에는 삼슈빌데, 루스타비, 기시, 로르리의 중요 요새들을 확보했다.
3. 3. 영토 확장
1099년경, 다비트 4세는 셀주크에 대한 공물 헌납을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인 판히페르세바스토스를 거부하며 조지아가 비잔틴 제국과 동등한 관계임을 주장했다. 1101년에는 카헤티와 헤레티 탈환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테다제니 요새를 점령했고, 3년 안에 조지아 동부 대부분을 해방시켰다.1103년에는 루이시와 우르브니시의 수도원에서 루이서-우르브니시 공의회를 개최하여 반대파 주교들을 퇴출시키고, 포정사와 성직자(트츠콘디디의 주교) 직위를 수상과 동급인 '트츠콘디델-므트지그노바르투쿠체시' 직위로 단일화하여 교회 개혁을 단행했다.
1105년, 다비트는 에르트주키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를 격파했다. 1110년~1118년 사이에는 삼슈빌데, 루스타비, 기시, 로르리 등 주요 요새들을 점령했다.

1120년, 다비트 4세는 조지아 동부에서 투르크인들을 격퇴했고, 시르반으로 진격하여 콰발라 마을을 점령했다. 1120년~1121년 겨울에는 트란스캅카스 동부와 남서부의 셀주크 정착지들을 공격했다.
4. 대외 관계
다비트 4세는 셀주크 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코카서스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다.[33] 아니를 점령하고 1122년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겼다.
바그라트 3세 이후 조지아 왕국이 강국으로 성장하면서 비잔티움 제국과 갈등을 겪었으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는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다비트 4세는 비잔티움과 긴밀히 협력하면서도 동등한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15]
십자군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예루살렘 공방전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19] 디드고리 전투에는 라틴인 부대가 참여했다.[18]
북캅카스 부족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킵차크 칸의 딸과 결혼하여 군대를 지원받고,[35] 북캅카스에 동방 정교회를 전파하고 조지아의 봉건 제도를 도입하여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4. 1.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다비트 4세는 셀주크 투르크 연합군을 대파하여 조지아의 군사적 우위를 확립했다.[16] 이 전투는 조지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군사적 성공으로 여겨지며, 조지아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였다.[17]1122년, 다비트는 트빌리시를 탈환하고 수도를 쿠타이시에서 트빌리시로 옮겼다.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설교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세금과 노역 제도를 폐지했으며, 수피즘과 무슬림 학자들을 보호했다.
1123년에는 조지아 동부의 마지막 셀주크 거점인 드마니시를 해방시켰다.[24] 1124년에는 시르반을 정복하고 아르메니아의 도시 아니를 점령하여 왕국의 국경을 아락세스 유역까지 확장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다비트를 해방자라 칭송하며 그의 군대에 예비군을 제공했다.[25]
다비트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지아는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대(大) 코카서스 산맥에서 북부 아르메니아까지 확장되어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4. 2.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바그라트 3세의 치세 하에 조지아 왕국이 코카서스 지역 강국으로 부상한 이래, 비잔티움 제국과 조지아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여러 차례 충돌했는데, 특히 타오-클라르제티 (역사적 지역) 지역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비잔틴-조지아 전쟁을 포함하여, 이 두 국가는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여 왕위 계승자, 찬탈자, 또는 비잔티움의 경우 반역한 귀족을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지원했는데, 이는 국왕의 권력에 반하는 전략이었다.수년간 여러 평화 제안이 있었지만, 비잔틴과 셀주크 제국 간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야 비로소 비잔틴과 조지아 왕국은 투르크 무슬림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셀주크에 대항해 비잔티움 제국이 현저히 약화되어 조지아가 굴복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러나 1090년대에 투르크의 종주권으로부터 코카서스가 해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다비트 4세는 비잔티움을 향한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는 더 긴밀한 협력과 동시에 제국과 동등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 특정 문제에 대해 비잔틴에 반대하는 것을 결합한 것이었다.[15]
양자 관계는 조지아 국왕에게 반항한 귀족들을 그리스로 유배하는 비잔티움과 다비트 4세 간의 합의로 재개되었다. 동시에 다비트는 황실 가족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들을 위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만든 칭호인 판히페르세바스토스라는 비잔티움 칭호를 포기함으로써 조지아에 대한 비잔티움의 정치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포기했다.[15], 마지막으로, 다비트 건설왕의 치세부터 비잔티움과 조지아는 영적으로 충돌했는데, 국왕 다비트는 '동서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동방 정교회에서 비잔티움보다 더 큰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러한 징후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과 조지아 간의 관계는 좋은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1116년 다비트 4세의 딸 카타와 황실의 왕자 간의 결혼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일부 조지아 역사가들은 1118년 요한 2세 콤네노스의 권력 장악에 공주 카타의 수행원이 제공한 조지아 요원의 도움을 언급하기도 한다.[15] 그 결과, 요한 2세의 통치 초부터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고, 조지아 연대기는 두 군주를 '형제'라고 칭했다. 또한, 종교적 영역에서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비잔틴과 조지아는 일정 기간 동안 문화적으로 협력했으며, 목비 대성당의 대대적인 개축과 같이 양자 간의 노력으로 건설된 종교 건축물을 볼 수 있다.[15]
4. 3. 십자군과의 관계
다비트 4세는 십자군 세력, 특히 예루살렘의 발두인 1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지원의 표시로 많은 선물을 교환했다. 일부 자료는 1099년 예루살렘 공방전에 조지아 보조군이 참여했다고 언급한다.[19] 디드고리 전투에는 200명[18]에서 1,000명의 라틴인 부대가 참여했다. 역사학자 조지아의 이오안 공은 예루살렘의 발두인 2세가 조지아 왕실을 방문했다고 보고한다.[20] 강력한 조지아 왕국의 존재는 아랍 세계에서도 느껴졌는데, 조지아 군주의 무슬림 백성에 대한 친절함과 코란에 대한 지식이 유명했다. "왕 중의 왕 다비드, 메시아의 검"이라는 아랍어 비문이 새겨진 동전이 중동 전역에 유통되었다.4. 4. 북캅카스와의 관계
바그라트 4세와 기오르기 2세 치하에서 경제가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조지아 군대의 질이 저하되었고, 이는 군대의 기강을 훼손했다. 다비드 4세는 무슬림을 상대로 벌여야 할 미래의 전쟁을 위해 자신의 군대를 개혁하기 위해 셀주크 투르크의 군사 조직을 기반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지아 왕국의 해방에 전념한 다비드 4세는 셀주크 제국이 캅카스의 안보가 확보될 때까지 자신의 왕국에 영구적인 위협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국왕은 캅카스 민족을 자신의 지배하에 통합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지아 군주의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조지아 군주는 북캅카스의 많은 부족들과 대캅카스 산맥 너머에 있는 부족들과 견고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시작했다.1107/1108년 아르메니아 공주 루수단과의 이혼 직후 다비드 4세는 킵차크 칸인 오트로크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곧 구란두흐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35]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 후 10년 동안 양자 관계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지아가 셀주크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자 국왕은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킵차크는 용맹함, 민첩성, 전투에서의 맹렬함으로 이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지만, 북쪽의 키예프 루스와 남쪽의 알라니아를 상대로 두 개의 전선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다비트는 킵차크가 투르크에 대항하는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오트로크 공에게 이 두 적에 대항하는 지원을 제안하고, 공의 영지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충실한 조언자 조지 (치콘디디)와 개인 호위를 동반한 다비트 4세는 1118년에 다리알 통로를 통해 대캅카스를 건넜다.[36] 광범위한 협상 끝에 조지아인들은 오트로크에게 셀주크에 대항하여 싸울 수천 명의 킵차크 군대를 제공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이 협정에도 불구하고 킵차크는 알라니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조지아로 갈 수 없었다. 알라니아와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비트 4세는 막내딸 루수단을 알라니아 왕 아톤의 아들이자 알라니아 왕위 계승자인 자다론과 약혼시켰다.[37] 알라니아인과 킵차크를 모두 인질로 삼아 그는 두 민족 사이에 지속적인 평화를 협상하는 데 성공했고, 오트로크 자신이 이끄는 거의 4만 명의 킵차크 가족(거의 20만 명)과 함께 대캅카스 요새를 회복하고 확보한 후 조지아 왕국으로 돌아왔지만, 알라니아에서 협상 중에 사망한 조지 (치콘디디)는 남겨두었다.

많은 킵차크 가족들은 1080년대에 셀주크에 의해 조지아 인구의 상당 부분이 학살된 시다 카르틀리의 식민지 정착지에 정착했지만,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헤레티 왕국과 조지아 아르메니아 북부에도 정착했다. 그들은 또한 알라니아인, 쿠르드 용병들을 동반했다. 그들은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조지아어를 배우고, 유목 습관을 바꾸고 정착하여 점차 조지아인과 섞였다. 중앙 정부는 각 가족에게 조지아 군대를 위해 최소한 한 명의 군인을 제공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정착 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킵차크는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새로운 풍경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비트 4세는 죽을 때까지 특정 킵차크 집단이 조직한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와 쿠데타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상황을 거의 바꾸지 못했고, 이러한 협상 덕분에 군대 개혁이 완료되었으며 조지아 군대는 이제 거의 6만 명에 달했다.
킵차크와 조지아 사이의 이러한 동맹 외에도 다비트 4세는 북캅카스의 다른 민족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는 북캅카스에 문화적 영향력을 창출하고, 지역 민족들 사이에 조지아 교회를 세우는 것을 후원하여 동방 정교회를 설립했으며, 도시 공동체를 설립하고 조지아 봉건 제도를 이 지역에 도입하여 이 민족들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조지아 문화 역시 조지아 사회 용어가 도입되면서 지역 조직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다비트 4세는 지역 군주를 자신의 봉신으로 만들고 대캅카스 산맥을 통해 남캅카스에서 북캅카스로 이어지는 경로를 통제함으로써 북캅카스에서 자신의 왕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바리 및 다리알 통로를 요새화하고 데르벤트로 가는 길에 조지아 무역소를 설치했으며, 그 군주는 조지아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5. 문화 및 종교 정책
다비트 4세는 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어서 비잔틴 제국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조지아 왕국의 문화 발전에 힘썼다. 겔라티 아카데미를 비롯한 많은 학교와 아카데미를 건설하여 조지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34]
조지아 정교회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다른 종교에도 관용 정책을 펼쳤다.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부과되던 세금과 노역을 폐지하고 수피와 무슬림 학자들을 보호했다. "왕 중의 왕 다비드, 메시아의 검"이라는 아랍어 비문이 새겨진 동전을 중동 전역에 유통시키기도 했다.[20] 겔라티 수도원을 건립하고 그루지야 정교회를 지원했으며, 성경을 읽고 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등 매우 경건한 왕이었다.
5. 1. 문화 발전
다비트 4세는 백성들의 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선발하여 비잔틴 제국으로 보내 "그들이 외국어를 배우고 그들의 번역서들을 고국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훗날 저명한 학자가 되었다.다비트 4세 시대 조지아에는 겔라티 특별 거주지와 그에 따르는 극소수의 학교들과 학원들이 있었다. 다비트 왕의 역사가는 겔라티 아카데미를 "지식 교육을 위해 모든 동방의 두 번째 예루살렘으로, 신성한 법에서 첫 번째 아테네를 훨씬 능가하는 모든 교회적 영광의 기준이다."라고 묘사했다. 겔라티 외에도 당시 조지아에는 이칼토 아카데미와 같은 다른 문화 계몽 및 학술 중심지가 있었다.
다비트 4세는 약 1120년 경 자유시 "회개의 찬양"(''갈로바니 시나눌리사니'')을 창작했다. 이 시는 8개의 성가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연은 난해하고 미묘한 감정을 담고 있는 8행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의 모든 성가는 기독교 성격이 강하며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고, 왕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비트는 스스로를 성경의 다윗이 환생한 사람으로 보았으며, 셀주크 제국에 대항한 투쟁에서 자신과 자연스레 동맹이 되었던 동시대 유럽의 십자군에 대한 이상주의의 열정도 성가에 함께 표현했다.
5. 2. 종교 정책
다비트 4세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 정책을 펼쳤다.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부과되던 세금과 노역을 폐지하고, 수피와 무슬림 학자들을 보호했다. "왕 중의 왕 다비드, 메시아의 검"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아랍어 비문이 새겨진 동전이 중동 전역에 유통되기도 했다.[20]겔라티 수도원을 건립하고 그루지야 정교회를 지원했다. 다비드 4세는 매우 경건한 왕으로, 성경을 읽고 기독교 전통을 따랐다. 1120년경 "참회의 찬가"를 작곡했는데, 이 시는 그의 기독교 신앙, 테오토코스 숭배, 그리고 왕으로서의 죄에 대한 회개를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을 성경 속 다윗과 동일시하며, 셀주크 제국과의 투쟁에서 동시대 유럽 십자군들의 이상을 공유했다.[1]
다비드 4세는 병원을 짓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등 자선 활동에도 힘썼다.[27] 그는 신학, 점성술,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페르시아 시와 코란을 읽었다고 전해진다.[27]
6. 사망 및 유산
다비트 4세는 1125년 1월 24일 수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겔라티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루지야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26]
다비트 4세는 조지아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조지아의 통일과 번영을 가져온 왕으로 평가받는다. 조지아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30][31][32]
6. 1. 죽음
다비트 4세는 34년간 통치한 뒤 1125년 1월 24일 수도 트빌리시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6] 그는 므츠그노바르투후체시 시몬 오브 치콘디디에게 국정을 맡기고, 장남 데메트레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26]
다비트 4세는 자신이 세운 겔라티 수도원 정문에 묻혔다. 묘비에는 아솜타브룰리 문자로 "그리스도여! 이것이 영원한 나의 안식처이니, 내가 이를 기뻐하리라. 내가 여기에 거하리라."라는 시편 131 (132) 14절을 본뜬 글귀가 새겨져 있다.[26] 이는 겔라티 아카데미를 찾는 모든 이들이 그의 묘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비트 4세는 그루지야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26]
6. 2. 유산
다비트 4세는 조지아의 황금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다. 조지아의 통일과 번영을 가져온 왕으로 추앙받으며, 현재 조지아 국기는 다비트 4세 시대의 국기를 기반으로 한다.[28] 조지아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30][31][32]미헤일 사카시빌리 전 조지아 대통령은 2004년 대통령 취임 선언을 겔라티 수도원에 있는 다비트 4세의 왕릉에서 하며, 조지아의 통일과 번영을 가져온 다비트 4세의 업적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다비트 4세 훈장"은 조지아의 독립과 부활, 사회 통합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일반 시민, 군인, 성직자에게 수여된다.[29] 다비트 4세 쿠타이시 국제공항, 국립 국방 아카데미 등 여러 기관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조지아에는 다비트 4세의 이름을 딴 기념물, 건물, 거리가 많다. 트빌리시에는 러시아-조지아 조각가 메라브 베르드제니슈빌리가 제작한 다비트 4세 기념비가 있으며, 1991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학교가 개교했다. 트빌리시에는 다비트 4세의 이름을 딴 대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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