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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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동 전투는 1950년 7월 26일부터 27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 하동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군 제29연대 제3대대가 투입되었으나, 매복해 있던 북한군에게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채병덕 소장이 전사했으며, 미군은 5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다수의 장비를 손실했다. 하동 전투의 패배로 진주-마산 축선이 위협받았지만, 북한군은 보급 문제로 인해 공세를 지속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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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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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7월 27일 |
장소 | 경상남도 하동군 |
결과 | 조선인민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유엔군 | 미국 |
조선인민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유엔군 | 해럴드 W. 모트 조지 F. 샤라 |
조선인민군 | 방호산 |
병력 규모 | |
유엔군 | 약 925명 |
조선인민군 | 약 500명 |
피해 규모 | |
유엔군 | 전사: 307명 총 사상자: 495명 |
조선인민군 | 미상 |
참전 부대 | |
유엔군 | 미 29 보병 연대 3대대 |
조선인민군 | 조선인민군 6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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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유엔은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1] 미국은 북한의 침공을 막고 한국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상군을 한반도에 파견했다.[1]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극동 주둔 미군은 꾸준히 줄어들었고, 당시 가장 가까운 병력은 일본에 사령부를 둔 미국 제8군의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지만,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이었다.[1]
제24보병사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는 임무를 맡고 한국에 투입된 첫 미군 부대였다.[2] 이들은 조선인민군을 지연시키려 했지만,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에 놓여 미국 제7보병사단, 미국 제25보병사단, 미국 제1기병사단 및 기타 제8군 지원 부대가 배치될 시간을 벌었다. 한편, 대한민국 육군 부대는 체계적으로 패배하여 한국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후퇴했으며, 사단 전체가 조선인민군의 우수한 화력과 장비에 의해 궤멸되었다.[2] 제24보병사단의 선두 부대는 7월 5일 미군과 북한군 간의 첫 전투인 오산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3] 이후 첫 한 달 동안, 제24보병사단은 조선인민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에 밀려 계속해서 패배하고 남쪽으로 밀려났다.[4][5]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밀려났고,[4] 대전 전투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거의 전멸했고, 7월 2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그쳤다.[6] 그 무렵, 제8군 전투 병력은 북한군과 거의 비슷한 규모인 각 7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으며, 매일 새로운 유엔 부대가 도착하고 있었다.[7]
2. 1. 한국 전쟁 초기 상황
1950년 7월 25일, 육군본부는 채병덕 소장에게 남원-하동 방어선에서 이응준 부대와 민기식 부대를 통합 지휘하도록 명령했다.[35] 그러나 당시 통신이 끊긴 상황에서 이응준 부대는 순천을 거쳐 여수로 철수 중이었고, 민기식 부대는 운봉에서 함양으로 지연전을 펼치고 있었다.[35] 이 때문에 하동에는 이영규 중령이 지휘하는 신편 제5사단 15연대의 일부 병력 100여 명만이 흩어진 채로 모여들고 있었다.[35]한편,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준장은 7월 23일 호남 방면으로 우회한 북한군이 진주에 도달했다는 정보 보고를 받고, 존 H. 처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을 진주로 급파했다.[35] 이에 따라 제19연대는 7월 24일 밤에, 제29연대는 7월 25일 저녁에 진주로 이동했다.[35] 제29연대는 7월 14일 오키나와에서 출동 명령을 받았으며, 연대 본부는 새로운 연대 편성을 위해 잔류하고 제1, 제3대대만 7월 25일에 진주에 도착했다. 제29연대는 병력 및 장비가 거의 100%에 가까웠다.[35]
유엔은 북한의 남침에 따른 한국 전쟁 발발 이후, 한국을 위해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1] 미국은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고 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군을 한반도로 파견했다.[1] 당시 가장 가까운 병력은 일본에 사령부를 둔 미국 제8군의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극동 주둔 미군이 꾸준히 감축되어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태였다.[1]
제24보병사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띠고 한국에 투입된 최초의 미군 부대였다.[2]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에 놓여 오산 전투를 시작으로,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대전 전투 등에서 계속 패배하며 남쪽으로 밀려났다.[3][4][5][6]
2. 2. 미군과 한국군의 준비 상황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채병덕 소장에게 하동이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며, 진주 및 사천으로 가는 통로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35] 이에 채병덕 소장은 정래혁 중령에게 하동 현지에 남아 정보를 수집하고 흩어진 부대를 수습하여 방어할 것을 지시했다. 채병덕 소장은 진주로 돌아가 미 제19연대장 네드 D. 무어 대령에게 하동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양측은 하동을 지키기로 합의했다.[35]한편,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준장은 7월 23일 진주에 적이 도달했을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존 H. 처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을 진주로 급파했다. 이에 따라 미 제19연대는 7월 24일 밤에, 제29연대는 7월 25일 저녁에 진주로 이동하여 제19연대에 배속되었다.[35] 그러나 제19연대는 실전 병력이 600명에 불과했고, 장비도 부족했으며, 연대장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대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제29연대는 7월 14일 오키나와에서 출동 명령을 받았으나, 연대 본부는 새로운 연대 편성을 위해 잔류하고 제1, 제3대대만 7월 25일 진주에 도착했다. 이들은 병력과 장비는 거의 100%에 가까웠지만, 전투 경험이 부족하고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35]
7월 25일 오전, 하동 화개장터 인근에서 국군 15연대에 자원입대한 학도의용군들이 북한군 6사단 선봉대대와 교전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12시간가량 지연시킨 '화개 전투'가 있었다.[35]
3. 전투 과정
미군은 대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보충 병력을 받은 조선인민군 제4사단이 하동 지역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판했다.[16] 실제로는 방호산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었다.[15] 제4사단과 제6사단은 유엔군의 좌익을 포위하기 위해 협력하면서 넓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백 명 규모의 소규모 부대만이 하동 지역을 통과하며 진격했고, 일부는 소수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16]
3. 1. [[7월 26일]]: 하동으로 가는 길
7월 25일 오후 11시 육군본부로부터 작전명령 제72호가 하달되었다. 그 내용은 하동 방면으로 남하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장갑차를 동반하고 있으니, 영남편성관구 사령관은 하동으로 진격하여 격퇴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장갑차 공격 시에는 화염병을 사용하라는 지시도 포함되었다.[15]그러나 채병덕 소장에게는 가용 병력이 없었고, 박현주 중령과 부관 이상국 소령 및 김영혁 대위만 수행했다.
계속된 비로 대부분의 하천이 범람하여 차량 기동과 항공 지원이 제한되었다. 정래혁 중령은 하동에 남아 정보를 수집하며, 7월 25일 12시에 화개가 북한군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하동도 곧 공격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지원군을 기다렸다.
밤 10시경, 병사들이 "적이 나타났다"고 외치자, 정래혁 중령은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적을 지체시키기 위해 근거리에서 사격을 명령했고, 10여 분간 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이탈하여 12~3명만 남게 되었고, 결국 밤 11시에 하동을 떠나 진주로 향했다.
한편, 미 제19연대장 네드 D. 무어 대령은 하동이 함락된 사실을 모른 채, 제29연대 3대대장 모트 중령에게 하동으로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채병덕 소장은 도로 상황을 설명하며, 곤양으로 우회하는 경로를 제안했다. 제29연대 3대대는 7월 26일 새벽 0시 30분에 진주를 출발했으나, 도로 문제로 지연되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 하동에서 철수하던 정래혁 중령 일행을 만나 하동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채병덕 소장은 미군과 함께 하동으로 진격하기로 했지만, 남해안 도로를 통한 북한군의 침공을 우려하여 민기식 부대의 제30연대에게도 출격을 명령했다.
제30연대는 미 제29연대 3대대와 함께 진주를 출발하여 곤양을 거쳐 남해안 도로를 따라 진교까지 진출, 섬진강 강구에서 야영했다.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제29연대 3대대에게 진주 남서쪽 약 56.33km 지점의 하동 고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에는 약 500명의 북한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15][13] 미군은 북한군이 하동 마을에서 경찰과 교전 중이라는 보고도 받았다. 하동 마을은 고개에서 서쪽으로 약 1.61km 떨어져 있었다.[17] 제3대대장 모트 중령은 7월 26일 0시 30분에 대대를 출발시켰다.[13] 대대 병력은 925명이었다.[15] 이들은 부산으로 가는 남쪽 길목인 고개를 막아야 했다.[8] 하동은 방어 시설이 부족했지만, 진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18]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 부족으로 경찰 소수만이 방어하던 하동을 점령했다.[18] 이들은 마을 동쪽 도로에 자리를 잡고 정찰대를 보냈다. 이는 마산을 점령하여 유엔군의 취약한 남쪽 전선을 우회하려는 더 큰 작전의 일환이었다.[16] 북한군 제6사단장 방호산은 병력에게 최대한 빨리 진주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19]
채병덕 소장이 제3대대에 동행했다. 그는 서울 함락 이후 해임되었다.[15][20] 한국군 수뇌부의 신임을 잃은 그는 제3대대의 통역 및 안내 역할을 맡았다.[13] 그는 소수의 부관들과 함께 대대에 합류했다.[14] 대대는 도로 때문에 건양을 거쳐 우회해야 했고, 하동 도착이 지연되었다.[8] 새벽 직전, 병사들은 약 15명의 한국군 민병대가 탄 트럭과 마주쳤다. 민병대원들은 북한군에 의해 전멸한 400명 규모 부대의 잔존 병력이라고 주장했다.[21] 모트는 참모 장교를 통해 무어에게 추가 지시를 요청했고, 무어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대대는 무전 장비가 없어 연락병을 보내야 했고, 그는 해 질 무렵에 돌아와 대대는 하동에서 약 4.83km 서쪽 횡천 마을에서 밤을 새웠다.[13]
3. 2. [[7월 27일]]: 쇠고개(우치) 전투
7월 27일 07시 45분, 미 제29연대 제3대대는 하동 고개 방향으로 이동하여 한 시간 안에 도착했다. 고개에서 약 914.40m 떨어진 지점에서 선두에 있던 L 중대가 북한군 정찰대를 발견했다. 중대의 중화기가 정찰대를 향해 발사되어 후퇴시켰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L 중대는 09시 30분에 고개를 돌파하여 참호를 구축하고, 서쪽으로 약 1.61km 떨어진 하동 마을에 예정된 공습을 09시 45분에 기다렸다.[13] L 중대 뒤에는 대대 지휘 그룹이 있었고, 그 뒤를 K 중대와 M 중대가 따랐으며, I 중대가 후방을 지원했다.[22] 헤럴드 W. 모트 중령, 채병덕 소장과 대부분의 고위 장교를 포함한 대대 지휘 그룹은 L 중대가 길 왼쪽에 엄폐했을 때 고개로 접근했다. 그들이 고개에 접근했을 때, 동쪽으로 더 탐색하려는 정찰대의 일부인 조선인민군 병력의 중대가 길 위에서 발견되었다. L 중대는 북한군이 더 가까이 다가오면 매복을 시도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13] 그 전에 채병덕이 북한군에게 신원을 밝히라고 외쳤다.[14] 북한군은 즉시 길가 도랑으로 몸을 숨겼고, L 중대는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20][23]
미군은 즉시 북쪽 능선에서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 북한군이 참호를 구축해 놓았던 곳이었다.[15] 첫 번째 기관총 사격으로 채병덕이 사망하고, 모트를 포함한 다른 지휘관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다.[20][23] 모트는 간신히 미군이 참호를 파놓은 도랑까지 갔지만, 곧 그의 근처에 있던 모든 미군이 사망하거나 후퇴하여 그 혼자 남게 되었고, 대대의 나머지 병력과 연락할 수 없게 되었다.[24] 조선인민군은 고개와 능선 모두에서 더 높은 지점에서 미 대대를 십자포화 속에 몰아넣었다.[14] 박격포 사격으로 미국 공군 전술 항공 통제반의 무선 지프차를 포함한 많은 주차된 차량이 파괴되었는데, 이 차량은 공습을 지휘할 예정이었다.[8] 전투 중에 두 차례의 미군 항공기 편대가 해당 지역 상공을 비행하며 통제반과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어떤 공격도 하지 못한 채 지역을 떠났다.[23]
제3대대는 준비된 북한군의 매복에 걸려, 준비되고 숨겨진 위치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았으며, 첫 발이 발사된 지 1분 만에 거의 모든 지휘 그룹이 제거되었다. 고개에 있던 L 중대는 언덕 위에 있는 조선인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중대의 제1소대는 참호에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 중대원 2명이 총검에 의해 사망했다.[23] L 중대는 능선 위로 진격하는 조선인민군에 의해 대대의 나머지 병력과 분리되었다.[25] K 중대는 구원을 위해 이동을 시도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26] 하지만 중대는 그 자리를 지켰다. 한편, I 중대는 지원을 위해 언덕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23] 조선인민군은 대대를 혼란스러운 집단으로 분열시킬 수 있었고, L 중대는 고개에서 교전하고 I 중대는 그들 뒤의 북쪽 능선에서 공격을 받았다.[27] 정오 무렵, 높은 지대에 있던 북한군은 미군을 포위했다.[14]
정오에 모트는 L 중대 지휘관 조지 F. 샤라 대위의 지위로 옮겨졌다. 모트는 샤라에게 지휘를 맡고 퇴각을 조직하라고 명령했다. 샤라는 자신의 세 개 소대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조선인민군 대대가 미군 진지를 향해 고개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I 중대 병력은 고개 남쪽의 벼논을 통해 철수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퇴각하면서 약 6.10m 폭의 개울을 건너야 했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익사했다. 대부분의 미군은 퇴각하면서 무기, 장비, 의류를 버려야 했다.[28] L 중대의 많은 병사들과 부상자 중 일부는 트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26]
제3대대 생존자들은 집단을 이루어 전투에서 이탈했다.[15] 97명의 생존자로 구성된 가장 큰 그룹은 약 8.05km 남쪽의 작은 항구 노량진(하동 남쪽 18km)으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어선이 그들을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까지 수송했다.[28] 다른 병사들은 언덕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진주로 돌아가기 위해 싸워야 했다.[27] 대대 장교의 대부분이 전투에서 사상되었고, 흩어지고 조직력이 붕괴된 퇴각은 대대를 궤멸시켰다.[14] 낙오병들은 그날 나머지 시간 동안 19연대 병력의 진지로 계속해서 흘러 들어왔다.[29]
4. 전투 결과 및 영향
하동 전투에서 미 제29연대 제3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궤멸되었다. 미군은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포함, 5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다수의 장비를 손실했다.[15][20][28][30][31] 채병덕 소장의 전사는 한국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동 전투 패배로 진주-마산 축선이 위협받게 되었으나, 북한군은 보급 문제로 인해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27] 이후 미군과 한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진주 전투 등에서 북한군에 맞섰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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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전국 첫 학도병 산화한 '화개전투' 발굴 8년째 잠잠
https://newsis.com/a[...]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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