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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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래혁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 복무를 시작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성으로 예편한 인물이다. 그는 1926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중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육군 참모총장 비서실장, 제3사단장, 제2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상공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지냈으며, 제9, 10대 국회의원과 제11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84년 부정축재 혐의로 재산을 헌납하고, 2002년 욱일대수장을 수훈받았다. 2022년 사망했다.

정래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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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래혁
로마자 표기Jeong Rae-hyuk
한자 표기丁來赫
출생일1926년 1월 17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곡성군
사망일2022년 5월 17일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본관나주(羅州)
석연(石淵)
직업군인, 정치인
교육한국국방대학교
정당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군 경력
최종 계급소위(일본군), 중장(대한민국 국군)
복무 기간일본군(1945), 대한민국 육군(1948~1968)
지휘 경력제3사단
제27사단
제6군단
육군사관학교
제2군
참전한국 전쟁
정치 경력
국회의원제9대 국회의원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제10대 국회의원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6일)
제11대 국회의원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지역구성북구(1973), 담양군·곡성군·화순군(1981)
국회의장제1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주요 직책
국방부 장관제18대 국방부 장관 (1970년 3월 10일 ~ 1971년 8월 25일)
상공부 장관제17대 상공부 장관 (1961년 5월 20일 ~ 1962년 7월 10일)
훈장
주요 훈장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에티오피아훈장
페루 대훈장
가족 관계
배우자주숙
자녀4남 1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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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정래혁은 1926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나 2022년 5월 17일 노환으로 별세하기까지 군인, 정치인으로서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군과 경찰에서 경력을 쌓았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육군본부 작전과장, 제3사단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제3보병사단장, 보병학교장, 제27보병사단장 등 군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상공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에도 제1군 부사령관, 제6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군 내 영향력을 유지했다. 1968년 예편 후에는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지냈다.

1970년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요도호 납치 사건 협상과 실미도 사건 처리 과정에서 논란을 겪고 1971년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72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주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겨 국회의장까지 역임하며 정치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984년 부정축재 사실이 드러나 재산을 헌납하고 정치적 몰락을 겪었다. 이후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하였다.

2002년에는 안보 및 한일 양국의 경제 교류와 우호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일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2.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정래혁은 1926년 1월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 58기생으로 입학하여 예과를 졸업하고 만주 부대에서 수습 장교로 근무하다 1945년 6월 졸업하였다. 조선군에 배치되어 광주를 거쳐 전주에 신규 편성된 연대 작전과에서 근무 중 종전을 맞이하였다.

귀국 후 경찰에 들어갔으나, 1946년 2월 3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0040번)하여 제3연대 창설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군 고문과 충돌하여 사직하고 다시 경찰에 들어가 전라남도 경찰청 경비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군에 복귀하여 1948년 8월 경비사관학교 특별 7기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1547번)하였다. 한국육군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1949년 육군참모학교 교관이 되었다.

1950년 6월 10일 육군본부 작전과장이 되었고, 6월 30일 임시 편성군 사령부 참모가 되었다. 7월 하순 임시 편성군 사령관 채병덕 소장이 전사하자 육군본부 작전과장으로 복귀하였다. 9월 1일 제3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951년 1월 제3군단 작전주임참모가 되었고, 3월 육군본부 작전과장이 되었다. 7월에는 육군 참모총장 비서실장이 되었다.

1952년 6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하였다.

1953년 9월 보병학교 부교장이 되었다.

1954년 4월 제3보병사단 부사단장이 되고, 6월 사단장에 취임하였다. 8월 보병학교장이 되었다.

1956년 4월 제27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고, 11월 육군본부 작전국장이 되었다.

1958년 9월 군수참모부 차장이 되었다.

1959년 5월 대한민국 국방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1961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하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5월 20일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1962년 7월 제1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1963년 제6군단장이 되었다.

1964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1966년 제2군 사령관이 되었다.

1968년 예편하고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되었다.

2.2. 5.16 군사정변과 군사정권

1961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하고,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군사혁명위원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5월 20일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다.

1962년 제1군 부사령관, 1963년 제6군단장을 거쳐 1964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2군 사령관을 지냈다.

1968년 예편 후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지냈다. 1970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적군파와의 협상을 맡았다.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3. 국방부 장관과 실미도 사건

1970년 3월 국방부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적군파와 협상을 맡았다. 1971년 8월 25일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4. 정치 활동

1970년 3월 국방부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적군파와 협상을 맡았다. 1971년 8월 25일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72년 제9대 국회의원(서울 성북구, 민주공화당)이 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서울 성북구, 민주공화당)이 되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 겸 부의장이 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전라남도 담양군·곡성군·화순군, 민주정의당)이 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83년 10월 15일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1984년 세무조사를 통해 부정축재가 발각되어, 부정축재로 모은 돈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발각 전에 관련 내용을 각종 기관에 고발하는 문서가 접수되었으나, 조사 결과 당시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 관계였던 문형태가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문형태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제5공화국 체제 종결 후인 1988년 3월 “헌납한 재산은 정치 권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정영하는 “당시 제가 건축 사업을 했는데, 그것을 아버지가 한 것처럼 몰아세워 빼앗긴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5. 부정축재와 몰락

1984년 세무조사를 통해 부정축재 사실이 발각되어, 부정하게 모은 돈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발각 전, 각종 기관에 관련 내용을 고발하는 문서가 접수되었으나, 조사 결과 당시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 관계였던 문형태가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문형태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제5공화국 체제 종결 후인 1988년 3월, 정래혁은 “헌납한 재산은 정치 권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정영하는 “당시 제가 건축 사업을 했는데, 그것을 아버지가 한 것처럼 몰아세워 빼앗긴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6. 사망

鄭來赫일본어은 2022년 5월 17일 오전 5시 14분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3. 학력

* 광주서중학교 졸업
*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 군사영어학교 1기 졸업
* 육군사관학교 7기 졸업
* 육군참모학교 졸업
* 육군보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 국방대학교 졸업

4.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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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직책 및 내용
1946년군사영어학교 졸업, 소위 임관 (군번 10040번), 제3연대 창설 참여
1948년경비사관학교 특별 7기생 졸업, 소위 임관 (군번 11547번)
1949년육군참모학교 교관
1950년육군본부 작전과장 (6월 10일), 임시 편성군 사령부 참모 (6월 30일), 육군본부 작전과장 복귀 (7월 하순), 제3사단 참모장 (9월 1일)
1951년제3군단 작전주임참모 (1월), 육군본부 작전과장 (3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비서실장 (7월)
1952년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유학
1953년보병학교 부교장
1954년제3보병사단 부사단장 (4월), 사단장 (6월), 보병학교장 (8월)
1956년제27보병사단 사단장 (4월), 육군본부 작전국장 (11월)
1958년군수참모부 차장
1959년국방부 총무국장
1961년국방대학원 졸업, 군사혁명위원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5월 16일), 상공부 장관 (5월 20일)
1962년제1군 부사령관
1963년제6군단장
1964년육군사관학교 교장
1966년제2군 사령관
1968년예편, 한국전력공사 사장
1970년국방부 장관,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적군파와 협상
1971년실미도 사건 책임으로 국방부 장관직 사임 (8월 25일)
1972년제9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민주공화당)
1978년제10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민주공화당)
1980년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 겸 부의장
1981년제11대 국회의원 (전남 담양·곡성·화순, 민주정의당), 국회의장 역임
1983년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0월 15일)
기타대한민국 예비역 장성모임 성우회 고문,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5. 논란 및 비판

정래혁은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1984년 세무조사 결과 부정축재 사실이 드러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이후 정래혁은 "정치 권력에 의해 강제로 재산을 빼앗겼다"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권위주의 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 겸 부의장이 되었고, 1981년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 및 국회의장을 역임했으며, 1983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5.1. 부정축재

1984년 세무조사를 통해 부정축재 사실이 드러나, 모은 돈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발각 전 이와 관련된 고발 문서가 여러 기관에 접수되었으나, 조사 결과 당시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 관계였던 문형태(文亨泰)가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문형태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제5공화국 체제 종결 후인 1988년 3월, 정래혁은 "헌납한 재산은 정치 권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정영하는 "당시 제가 건축 사업을 했는데, 그것을 아버지가 한 것처럼 몰아세워 빼앗긴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5.2. 권위주의 정권 협력

정래혁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군사혁명위원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5월 20일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70년에는 국방부 장관이 되어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적군파와의 협상을 맡았다. 1971년 8월 25일에는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 겸 부의장이 되었으며,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전남 담양·곡성·화순, 민주정의당)이 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83년 10월 15일에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1984년에는 세무조사를 통해 부정축재가 발각되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이후 정래혁은 "헌납한 재산은 정치 권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하였다.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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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신안 주씨
아들정채하
슬하정영준, 정영하, 정희숙, 정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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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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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선 여부비고
1973년총선9대국회의원서울 성북구민주공화당96,186표 (30.14%)2위당선초선
1978년총선10대국회의원서울 성북구민주공화당71,408표 (29.63%)2위당선재선
1981년총선11대국회의원전남 담양군·곡성군·화순군민주정의당63,762표 (48.75%)1위당선3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