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다 구니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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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다 구니히코는 일본의 생리학자이자 문부대신이었다. 1882년 돗토리 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 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제3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도 유임되었으나, 1945년 전쟁 범죄 혐의로 출두 요구를 받자 자택에서 자살했다. 그는 생리학 연구 외에도 철학, 특히 선에 조예가 깊었으며,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저서를 통해 과학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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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다 구니히코 | |
---|---|
기본 정보 | |
이름 | 하시 다 구니히코 |
원어 이름 | 橋田 邦彦 |
로마자 표기 | Hashida Kunihiko |
출생 | 1882년 3월 15일 |
사망 | 1945년 9월 14일 |
국적 | 일본 |
직업 | 의사 |
2. 생애
1882년 돗토리현의 한방 의사 후지타 구니히코의 차남으로 태어나 돗토리 중학교 재학 중에 가와무라 군 나가세야도(長瀬宿)의 의사 하시다 우라쿠라(橋田浦蔵)의 양자가 되었다. 제1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생리학 교실에 들어갔다. 1914년 독일 유학을 하고 귀국 후 생리학 조교수가 되었고, 1922년 교수가 되어 실험적 생리학, 특히 전기생리학의 연구 개발에 노력했다. 생리학의 많은 저작 외에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선에 통달했다.
하시다 구니히코의 학력 및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08년 | 도쿄 제국 대학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
1909년 | 도쿄 제국 대학 의과대학 조수 |
1914년 | 생리학 연구를 위해 유럽 유학 (~ 1918년 9월). 독일에 체류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본과 독일의 교전으로 인해 스위스에서 연구를 계속함. |
1918년 | 도쿄 제국 대학 의과대학 조교수 |
1921년 | 의학박사 |
1922년 | 도쿄 제국 대학 교수 |
1935년 | 문부성 사상 시학 위원 |
1937년 | 제1고등학교 교장 겸임 |
1940년 |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취임 |
1941년 | 문부대신 겸 대일본청소년단장, 10월의 도조 내각 성립 후에도 유임. 11월에 문부대신의 충원 직으로 대일본산업보국회 고문에 취임[4] |
1944년 | 교학 연성소장 (친임관 대우) |
1945년 | 태평양 전쟁의 책임을 지고 도쿄 스기나미구 오기쿠보 자택에서 청산칼륨으로 음독 자살[3] (향년 64세). |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2년 돗토리 현의 한방 의사 후지타 구니히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돗토리 중학교 재학 중에 가와무라 군 나가세야도(長瀬宿)의 의사 하시다 우라쿠라(橋田浦蔵)의 양자가 되었다.[2][7] 제1고등학교를 거쳐[2] 도쿄제국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생리학 교실에 들어갔다. 1914년 독일 유학을 하고 귀국 후 생리학 조교수가 되었고, 1922년 교수가 되어 실험적 생리학, 특히 전기 생리학의 연구 개발에 노력했다. 생리학의 많은 저작 외에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선에 통달했다.[2]하시다 가문은 운슈의 무사인 하시다 도케이의 후손이며, 나가세 마을(현・유리하마정 하와이 나가세)에서 대대로 의업을 해왔다.[7] 3대 겐테이, 4대 켄류는 번의 가로 츠다 치쿠고의 시의를 역임했으며, 3인 부양 14 표를 지급받았다. 우라쿠라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우노 마을 안라쿠지 절의 이토 가문에서 양녀를 맞이했다. 키미에라고 하며, 후에 하시다 구니히코 부인이 되었다. 구니히코가 우라쿠라의 양자가 된 것은 1899년으로 16세, 돗토리 중학교 재학 중이었으며, 이때 우라쿠라는 나가세 마을을 나와 요나고 동쪽 마을(현・요나고시)로 이주하여 병원을 개업했고, 키미에, 구니히코도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908년 도쿄에서 구니히코의 의학자로서의 발전을 기대하며 도쿄로 나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1922년 구니히코의 도쿄대 교수 취임을 앞두고 병사했다.[7]
{| class="wikitable"
|+ 하시다 가문[7]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도케이 || 미치마스 || 겐테이 ||
켄류 |
우라쿠라……키미에 |
|-
| || || ||
{| class="wikitable"
| 슌도
|-
| 코이에츠
┏이소시 |
┫ |
┗토미에 |
|}
|}
|}
후지타 가문은 대대로 돗토리번의 무사였으며, 구니히코의 아버지인 겐조는 6대째에 해당한다.[6] 초대 젠자부로(가사쿠)는 1702년의 조 편성 장부에서는 5인 부양 60 표를 받았던 무사였지만, 겐조가 대를 이은 1862년경에는 과거 양자 입양이 계속되면서 4인 부양 30 표가 되었다. 겐조는 23, 4세에 의학을 지망했으며, 한방의 대가 아사다 소하쿠의 가르침을 받은 탓에, 사제 모두 완고할 정도로 한방으로 일관했다.[6]
{| class="wikitable"
|+ 후지타 가문[6]
|-
! (초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
| 젠자부로 || 가헤이지 || 곤노우에몬 || 젠자부로 || 가헤이지 || 겐조 ||
┏토시히코 |
┫ |
┗구니히코 |
|}
다음은 하시다 구니히코의 학력 및 경력이다.
연도 | 내용 |
---|---|
1908년 | 도쿄 제국 대학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
1909년 | 도쿄 제국 대학 의과대학 조수 |
1914년 | 생리학 연구를 위해 유럽 유학 ( ~ 1918년 9월). 독일에 체류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본과 독일의 교전으로 인해 스위스에서 연구를 계속함. |
1918년 | 도쿄 제국 대학 의과대학 조교수 |
1921년 | 의학 박사 |
1922년 | 도쿄 제국 대학 교수 |
1935년 | 문부성 사상 시학 위원 |
1937년 | 제1고등학교 교장 겸임 |
2. 2. 학문적 업적
1914년 독일 유학을 하고 귀국 후 생리학 조교수가 되었고, 1922년 교수가 되어 실험적 생리학, 특히 전기 생리학의 연구 개발에 노력했다.[4] 생리학에 관한 많은 저작 외에도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선에 통달했다.오늘날에도 과학 교육 분야에서 종종 사용되는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문구는 하시다가 1940년에 발표한 동명의 저작이 시초라고 여겨진다. 하시다는 국민학교의 교육 과정에서 과학교육과 산수의 관련성을 강화하고, 1학년 단계부터 자연관찰을 포함시키는 등, 전후의 과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겐과 나카에 토주를 깊이 존경하여, 현재도 토주의 묘 옆에 하시다의 비석이 있으며, 도겐의 『정법안장』에 대해 해설한 저서를 출판했다.
2. 3. 문부대신 재임과 전시 교육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취임했다.[4] 1941년에는 문부대신 겸 대일본청소년단장, 10월의 도조 내각 성립 후에도 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문부대신의 충원 직으로 대일본산업보국회 고문에 취임했다.[4]오늘날에도 과학 교육 분야에서 종종 사용되는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문구는 하시다가 1940년에 발표한 같은 이름의 저작이 시초라고 여겨진다. 하시다는 국민학교 교육 과정에서 과학교육과 산수의 관련성을 강화하고, 1학년 단계부터 자연관찰을 포함하는 등 전후 과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겐과 나카에 토주를 깊이 존경하여, 현재도 토주의 묘 옆에는 하시다의 비석이 있으며, 도겐의 『정법안장』에 대해 해설한 저서를 출판했다.
하시다는 초빙되었지만, 처음부터 교육 정책을 둘러싸고 도조 히데키 총리와 의견이 맞지 않아, 군부가 추진하려던 대학교 등의 고등 교육 기관의 취학 연한 단축과 학도 출진 등에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2. 4. 전쟁 책임과 자결
1945년 9월 14일, 태평양 전쟁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도쿄 스기나미구 오기쿠보 자택에서 청산칼륨을 음독하여 자결했다.[3] 향년 64세.[8] 그는 오기쿠보 경찰서장과 특별고등경찰 주임이 자택에 찾아와 전쟁 범죄 혐의로 출두를 요구받자, 화장실에서 청산칼륨을 복용한 뒤 현관에서 "자, 나가자"라며 신발을 신으려다 절명했다.;유서(일부 발췌)[9]
: 대동아 전쟁 개시에 즈음하여 보필의 중임을 맡았으나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삼가 하늘에 사죄드립니다. 천황 폐하 만세.
:
: 이번 전쟁 책임자로 지명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자의 판결에 의해 책임의 경중이 결정되는 것은 신하로서 참을 수 없는 바입니다. 황국 국체의 본의에 따라 이에 자결합니다. 혹 충절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나는 나의 신념에 따를 뿐입니다. 대조(大詔)가 반포된 날 이미 결심했으나, 조국의 미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바가 있어 참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적의 소환을 받으니 때가 왔음을 기뻐합니다.
;사세(辭世)[10]
: 대군(大君)의 방패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 죽어가는 오늘이 좋은 날이로다
: 몇 번이나 태어나서 일본의
: 배움의 길을 지켜 세우리라
3. 사상과 신념
하시다는 청산칼륨을 복용하여 자결했다[8].
; 유서 (일부 발췌)[9]
大東亜戦争|대동아 전쟁일본어 개시에 즈음하여 보필의 중임을 받들었으나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삼가 하늘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天皇陛下万歳|천황 폐하 만세일본어. 이번 전쟁 책임자로 지명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자의 판결에 의해 책임의 경중을 결정되는 것은 신하의 입장으로서 참을 수 없는 바입니다. 皇国国体|황국 국체일본어의 본의에 따라 이에 자결합니다. 혹은 충절을 다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나는 나의 신념에 따를 뿐입니다. 大詔|대조일본어가 반포된 날 이미 결심했으나, 조국의 미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바가 있어 참고 오늘에 이르러, 적의 소환을 받으니 때가 왔음을 기뻐합니다.
; 사세(辭世)[10]
大君|대군일본어의 방패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오늘이 좋은 날이로다. 몇 번이나 태어나서 일본의 배움의 길을 지켜 세우겠노라.
4. 평가
하시다는 1940년에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저서를 발표했는데, 이 문구는 오늘날에도 과학 교육 분야에서 종종 사용된다.[1] 국민학교 교육 과정에서 과학교육과 산수의 관련성을 강화하고, 1학년 때부터 자연관찰을 포함하는 등 전후 과학교육에 영향을 주었다.[1]
도겐과 나카에 토주를 존경하여 토주의 묘 옆에 하시다의 비석이 있고, 도겐의 『정법안장』 해설서를 출판했다.[1]
도조 히데키 총리와 교육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군부가 추진하던 대학교 등의 고등 교육 기관 취학 연한 단축과 학도 출진 등에 반대했다.[1]
4. 1. 긍정적 평가
오늘날에도 과학 교육 분야에서 종종 사용되는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문구는 하시다가 1940년에 발표한 동명의 저작이 시초라고 여겨진다.[1] 하시다는 국민학교 교육 과정에서 과학교육과 산수의 관련성을 강화하고, 1학년 단계부터 자연관찰을 포함시키는 등 전후 과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1]하시다는 도겐과 나카에 토주를 깊이 존경하여, 현재도 토주의 묘 옆에 하시다의 비석이 있으며, 도겐의 『정법안장』에 대해 해설한 저서를 출판했다.[1]
4. 2. 부정적 평가
하시다는 도조 히데키 총리와 교육 정책을 둘러싸고 의견이 맞지 않아, 군부가 추진하려던 대학교 등의 고등 교육 기관 취학 연한 단축과 학도 출진 등에 반대했다고 전해진다.[1]4. 3. 종합적 평가
하시다가 1940년에 발표한 '''과학하는 마음'''은 오늘날에도 과학 교육 분야에서 종종 사용되는 문구이다. 하시다는 국민학교 교육 과정에서 과학교육과 산수의 관련성을 강화하고, 1학년 단계부터 자연관찰을 포함시키는 등 전후 과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1]하시다는 도겐과 나카에 토주를 깊이 존경하여, 현재도 토주의 묘 옆에 그의 비석이 있으며, 도겐의 『정법안장』에 대해 해설한 저서를 출판했다.[2]
도조 히데키 총리의 초빙을 받았지만, 교육 정책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의견이 맞지 않아, 군부가 추진하려던 대학교 등 고등 교육 기관의 취학 연한 단축과 학도 출진 등에 반대했다고 전해진다.[3]
5. 가족 관계
구분 | 내용 |
---|---|
친가 (후지타 가) | |
양가 (하시다 가) |
; 후지타 가문
후지타 가문은 대대로 돗토리번의 무사였으며, 구니히코의 아버지 겐조는 6대째에 해당한다.[6] 초대 젠자부로(가사쿠)는 겐로쿠 15년 (1702년) 조 편성 장부에 5인 부양 60표를 받았던 무사로 기록되어 있지만, 겐조가 가문을 이은 분큐 2년 (1862년)경에는 계속된 양자 입양으로 인해 4인 부양 30표를 받게 되었다.[6] 겐조는 23, 4세에 의학을 지망하여 한방의 대가 아사다 소하쿠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승과 제자 모두 완고할 정도로 한방을 고집했다.[6]
```
(초대) (2대) (3대) (4대) (5대) (6대) ┏토시히코
젠자부로━━가헤이지━━곤노우에몬━━젠자부로━━가헤이지━━겐조━━┫
┗구니히코
```
; 하시다 가문
하시다 가문은 운슈의 무사인 하시다 도케이의 후손으로, 나가세 마을(현 유리하마정 하와이 나가세)에서 대대로 의업을 이어왔다. 3대 겐테이와 4대 겐류는 번의 가로 츠다 치쿠고의 시의를 역임했으며, 3인 부양 14표를 지급받았다. 우라쿠라에게는 아들이 없어 우노 마을 안라쿠지 절의 이토 가문에서 양녀를 맞이했는데, 그녀가 바로 하시다 구니히코의 부인인 기미에이다. 구니히코가 우라쿠라의 양자가 된 것은 메이지 32년 (1899년) 16세 때로, 돗토리 중학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우라쿠라는 나가세 마을을 떠나 요나고 동쪽 마을(현 요나고시)에 병원을 개업했고, 기미에와 구니히코도 함께 이주했다. 메이지 41년 (1908년), 구니히코의 의학자로서의 성장을 기대하며 도쿄로 이주하여 함께 생활했다. 다이쇼 11년 (1922년) 구니히코의 도쿄대 교수 취임을 앞두고 우라쿠라는 세상을 떠났다.[7]
```
(4대)
┏켄류━━우라쿠라……키미에
(초대) (2대) (3대) ┃
도케이━━미치마스━━겐테이━━┫
┃ ┏이소시
┗슌도━━코이에츠━┫
┗토미에
6. 저서
- 생물의 전기 발생|せいぶつのでんきはっせい|생물의 전기 발생일본어, 이와나미 강좌 생물학(1931년)
- 생리학|せいりがく|생리학일본어(1933년, 1941년 개정)
- 벽담집|へきたんしゅう|벽담집일본어, 야마기와 이치조 편, 이와나미 쇼텐(1934년)
- 공월집|こうげつしゅう|공월집일본어, 야마기와 이치조 편, 이와나미 쇼텐(1936년)
- 자연과 사람|しぜんとひと|자연과 사람일본어, 진문서원(1936년)
- 길로서의 교육|みちとしてのきょういく|길로서의 교육일본어, 일본 문화 제17책, 일본 문화 협회(1938년)
- 행위로서의 과학|こういとしてのかがく|행위로서의 과학일본어, 야마기와 이치조 편, 이와나미 쇼텐(1939년)
- 과학의 일본적 파악|かがくのにほんてきはあく|과학의 일본적 파악일본어, 교학 신서 7, 메구로 서점(1939년)
- 정법안장 석의|しょうぼうげんぞうしゃくい|정법안장 석의일본어 제1권, 산키보 불서림(1939년)
- 「정법안장 해설」, 「도겐 선사 소전」, 「정법안장 현성공안」, 「현성공안 석의」를 수재
- 정법안장 석의일본어 제2권, 산키보 불서림(1940년)
- 「심신학도」, 「행불위의」, 「정법안장 측면관」을 수재
- 과학하는 마음|かがくするこころ|과학하는 마음일본어, 교학 총서 제9집, 수학국(1940년)
- 전체와 전 기|ぜんたいとぜんき|전체와 전기일본어, 교학 신서 16, 메구로 서점(1941년)
- 정법안장 석의일본어 제3권, 산키보 불서림(1944년)
- 「정법안장 불성」, 「불성 석의」, 「아관 정법안장」을 수재
- 정법안장 석의일본어 제4권, 도쿄대 생리학 벽담회 편, 산키보 불서림(1950년)
- 「정법안장 행지(상)」, 「정법안장 간경」, 「정법안장과 과학자」를 수재
- 하시다 구니히코의 수정을 받지 않은 미정고.
- 정법안장의 측면관|しょうぼうげんぞうのそくめんかん|정법안장의 측면관일본어, 스기 야스사부로 편, 대법륜각(1970년)
- 생체의 전 기성|せいたいのぜんきせい|생체의 전기성일본어, 하시타 구니히코 선집, 도쿄 대학 의학부 생리학 동창회 편, 협동 의서 출판사(1977년)
- 상기 벽담집일본어, 공월집일본어, 자연과 사람일본어 등에서 발췌된 것.
- 정법안장 석의일본어, 하타 구니키치 교정, 산키보 불서림(1980년)
- 정법안장 석의일본어 제1권부터 제3권까지를 묶은 것.
하시다는 도겐과 나카에 토주를 깊이 존경하여, 정법안장에 대해 해설한 저서를 출판했다. 오늘날에도 과학 교육 분야에서 종종 사용되는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문구는 하시다가 1940년에 발표한 동명의 저작이 시초라고 여겨진다.
참조
[1]
학술지
A study of Hashida Kunihiko's thought: the life history and thought of an "outcast thinker"
[2]
서적
『第一高等学校一覧 明治33-35年』
[3]
뉴스
元文相、戦犯で出頭の直前に服毒自殺
『朝日新聞』
1945-09-15
[4]
뉴스
役員を正式に任命、総裁は金光厚相
『中外商業新報』
1940-11-24
[5]
서적
因伯の医師たち
[6]
서적
因伯の医師たち
[7]
서적
因伯の医師たち
[8]
간행물
橋田先生の御最期
1947-10-01
[9]
서적
追憶の橋田邦彦
鷹書房
1976-07-10
[10]
서적
전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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