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쿠니 나루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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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1887년 교토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군사 전술을 공부했으며,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 스즈키 간타로의 뒤를 이어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종전 절차를 주도했고, '일억 총참회론'을 주장했다. 전후에는 민간인으로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990년 10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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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쿠니 나루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전하, 대장 |
이름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 |
원어 이름 | 東久邇宮稔彦王 |
로마자 표기 | Higashikuni-no-miya Naruhiko Ō |
출생 | 1887년 12월 3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교토부 가미교구 교토 어원 |
사망 | 1990년 1월 20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 일본 적십자사 의료 센터 |
묻힌 곳 | 도쿄도 분쿄구 오쓰카 도요시마가오카 묘지 |
국적 | 일본 제국, 일본 |
직업 | 황족, 군인 |
종교 | 신토 → 히가시쿠니교 → 신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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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 히가시쿠니노미야 |
아버지 |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
어머니 | 데라오 우타코 |
배우자 | 히가시쿠니 도시코 (泰宮聡子内親王, 메이지 천황의 딸) |
자녀 | 모리히로 왕 모로마사 왕 아키쓰네 왕 도키히코 왕 |
친척 | 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이복 형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 이복 형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 이복 형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이복 형 다가 왕, 이복 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8년 - 1945년 |
최종 계급 | 대장 |
주요 참전 |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
수상 | |
훈장 | 국화 대훈장 욱일동화대수장 금치훈장 |
정치 경력 | |
직책 | 제43대 내각총리대신 제32대 육군대신 귀족원 의원 |
내각 | 히가시쿠니 내각 |
총리 임기 시작 | 1945년 8월 17일 |
총리 임기 종료 | 1945년 10월 9일 |
천황 | 쇼와 천황 |
육군대신 임기 시작 | 1945년 8월 17일 |
육군대신 임기 종료 | 1945년 8월 23일 (총리 겸임) |
귀족원 의원 임기 시작 | 1907년 12월 3일 |
귀족원 의원 임기 종료 | 1946년 5월 23일 |
군사 경력 | |
소속 군대 | 일본 제국 육군 |
지휘 | 제4사단 육군비행전대 제2군 방위총사령부 |
왕족 정보 | |
왕위 계승 | 히가시쿠니노미야 |
재위 기간 | 1906년 11월 3일 – 1947년 10월 14일 |
유형 | 재위 |
후계자 | 칭호 폐지됨 |
히가시쿠니 가문 수장 | 히가시쿠니노미야 |
재위 기간 | 1906년 11월 3일 – 1990년 1월 20일 |
유형 | 재위 |
후계자 | 히가시쿠니 노부히코 |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1887년 12월 3일 교토에서 구니 아사히코 왕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8][17] 그의 아버지는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왕의 아들이었다. 고준 황후의 아버지인 구니 쿠니요시 왕의 이복 형제였다.[8] 학습원 초등과 동기생으로는 이복 형인 야스히코 왕 등이 있었다.[8]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17] 1920년부터 1926년까지 프랑스에서 군사 전술을 공부했다.[1] 귀국 후에는 근위보병 제3연대장, 제2사단장, 제4사단장, 육군 항공 본부장을 역임했다.[17]
1930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5 보병 여단장(1930–1934)을 맡았고, 1934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4사단 사령관(1934–1937)을 맡았다.[1] 중일 전쟁 발발 후,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1937–1938)를 지휘했으며, 1938년–1939년에는 제2군을 지휘하여 중국에 주둔했다.[1] 중일 전쟁(중국사변)에서는 제2군 사령관으로서 화북에 주둔하며, 우한 공략 작전에 참가했다.[17] 1939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17]

1938년 8월 16일, 히가시쿠니 친왕은 중국인에 대한 독가스 사용을 승인했다.[1] 그는 인체 실험을 장려하고 가능하게 했으며, 만주국 방문 중에 군의관들이 실시한 인체 실험을 직접 목격했다.[2]
1941년 쇼와 천황은 "군부는 통수권의 독립을 주장하며 멋대로 행동하여 곤란하다."라고 말했고,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천황 대권에 의해 육군을 막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쇼와 천황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고집이 강하여 히가시쿠니노미야의 조언은 닿지 않았다.[20]
태평양 전쟁 전야에는 악화되는 일본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개전에 이르렀다.[20] 1941년 12월에 방위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17] 1942년 정초, 쇼와 천황으로부터 해군의 실정을 처음 알게 되었고, 일본의 앞날에 대해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대전 중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와 함께 대전 종결을 위해 분주했다.
1945년 4월 16일, 도쿄 대공습으로 아자부에 있던 히가시쿠니노미야 고텐 본저택이 전소되었지만, 도쿄에 머물며 종전까지 생활했다.[21]
2. 2. 프랑스 유학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1920년(다이쇼 9년)부터 1926년(다이쇼 15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생시르 육군 사관학교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군사 전술을 공부했다.[18] 유학 기간 동안 1920년 중령, 1926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일본 제국 육군 상층부는 히가시쿠니에게 "될 수 있는 한 오래 외국에 체류하며, 그쪽의 유명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도록"이라는 언명을 내렸다.[17][19]히가시쿠니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았고, 또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적인 자각을 얻었다"라고 밝혔다.[17][19] 그는 클로드 모네, 조르주 클레망소, 조제프 조프르, 필리프 페탱 등과 교류했고, 자동차 운전이나 현지 연인과의 생활을 즐겼다.[17][19] 이러한 프랑스 유학 경험은 히가시쿠니가 황실 제일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히가시쿠니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를 중시하는 다이쇼 천황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다이쇼 천황의 건강 악화 소식에도 귀국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17][19] 결국 히가시쿠니는 다이쇼 천황 붕어 이후인 1927년(쇼와 2년) 1월에 귀국하여, 프랑스 체류는 7년이나 되었다.[17][19]
프랑스 유학 경험을 통해 구미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의 과학 기술력 격차와 정체성의 차이를 느낀 히가시쿠니는 1942년(쇼와 17년) 지바공업대학의 창설에 진력했다.
한편, 히가시쿠니는 현지 처와 숨겨둔 자식 의혹을 받았다. 형인 하토히코 왕은 히가시쿠니가 집을 빌릴 때 "친밀한 부인"의 존재를 감지했다.[8]
2. 3.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일본 제국 육군의 직업 군인이었다.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17] 1920년부터 1926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생시르 육군 사관학교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군사 전술을 공부했다.[1] 귀국 후에는 근위보병 제3연대장, 제2사단장, 제4사단장, 육군 항공 본부장을 역임했다.[17] 프랑스 유학 경험을 통해 육군의 근대화 방안을 제창하게 되었다. 중일 전쟁(중국사변)에서는 제2군 사령관으로서 화북에 주둔하며, 우한 공략 작전에 참가했다.[17] 1938년 8월 16일 중국인에 대한 독가스 사용을 승인했고,[1] 만주국 방문 중에 군의관들이 실시한 인체 실험을 직접 목격했다.[2]1939년 (쇼와 14년)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17] 1941년 (쇼와 16년) 8월 5일, 쇼와 천황을 알현했을 때,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천황 대권에 의해 육군을 막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지만, 영국 방문 시 감명을 받은 쇼와 천황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고집이 강하여 히가시쿠니노미야의 조언은 닿지 않았다고 한다.
미일 개전 직전 1941년 (쇼와 16년) 10월, 제3차 고노에 내각 총사직을 맞아 후임 총리 대신으로 이름이 거론되었다. 대미 전쟁 회피를 주장하는 자유주의파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를 총리로 삼아 내외의 위기를 막으려는 구상이었지만, 키도 코이치내대신의 황실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반대에 의해 이 구상은 무산되었고, 도조 히데키가 총리로 발탁되었다.[3][4]
그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대중국 전쟁의 개전과 장기화, 대미 전쟁 돌입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진 동시에 황족이자 육군 간부였던 히가시쿠니노미야는 평화주의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수반 후보로 거론되었다. 중일 평화를 설파하며, 태평양 전쟁 전야에는 악화되는 일본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 외교, 보도, 군 등 각 분야의 유력자들을 초청하여 전쟁 회피의 실마리를 모색했지만 결국 개전에 이르렀다.[20] 1941년 (쇼와 16년) 9월에는 토야마 미쓰루에게 장개석과의 평화 회담을 시도하도록 의뢰하고, 장제스로부터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지만, 새롭게 총리로 취임한 도조에게 "멋대로 행동하게 해서는 곤란하다"라고 거절당하여 회담은 무산되었다. 1941년 12월에 방위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17]
1942년 (쇼와 17년) 정초, 참내하여 축하 인사를 했을 때, 쇼와 천황으로부터 개전 직전인 1941년 (쇼와 16년) 11월 30일에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 듣고, 해군의 실정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연합국과의 전쟁에 대한 반대를 굳건히 지켰으며, 사이판이 함락된 후인 1944년 7월 아사카 야스히코 친왕,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그리고 전 총리 고노에와 함께 도조를 축출하는 음모에 가담했다.[5]
1945년 (쇼와 20년) 4월 16일, 도쿄 대공습에 조우하여, 미나토구 아자부에 있던 아자부 고텐 본저택이 전소되었다.[21] 하지만 대전 말기에 일어난 궁성 사건에서는, 스즈키 간타로 총리 등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교전을 주장하는 사사키 타케오가 이끄는 "국민신풍대"에 의해 사저가 방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2. 4. 내각총리대신
1945년 8월 17일,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스즈키 간타로의 뒤를 이어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23] 히가시쿠니 내각의 주요 임무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른 일본군의 질서 있는 해산과 종전에 필요한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황족이자 육군 대장이었던 히가시쿠니노미야가 적합하다고 여겨졌으며, 쇼와 천황도 이를 승낙했다.[23]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처음에는 총리 임명을 고사했지만, 패전에 지친 천황의 간청에 뜻을 바꾸었다고 한다.[23]부총리 격인 국무대신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외무대신에는 시게미쓰 마모루, 재무대신에는 쓰시마 주이치, 내각서기관장 겸 정보국 총재에는 오가타 다케토라가 임명되었다.[23] 해군대신에는 요나이 미쓰마사가 유임되었고, 시게미쓰 마모루가 사임한 후 요시다 시게루가 후임 외상으로 임명되었다.[23] 육군대신은 시모무라 사다무 육군 대장이 귀국할 때까지 히가시쿠니노미야가 겸임했다.[23]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구 일본령이나 전쟁으로 일시 점령된 지역에 황족을 칙사로 파견하여 현지 부대를 설득했다.[24] 9월 2일, 도쿄 만 앞바다의 미주리호 위에서 일본 정부 및 일본군 통수부의 전권 대표 (시게미츠 마모루, 우메즈 요시지로)에 의해 일본의 항복 문서에 조인(일본의 항복)이 이루어져, 정식으로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이 종결되었다.
쇼와 천황의 퇴위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는 쇼와 천황의 전쟁 범죄 재판 회부 시 발생할 수 있는 반란 가능성과 점령 정책의 차질을 우려하여 이를 무마시켰다.[27][28]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평화로운 신 일본을 건설하여 인류 문화에 공헌하고자 한다'''"라는 국가 목표를 정했는데, 이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여겨진다.[30]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신일본 건설을 위해 언론과 여론의 역할을 강조하며 정치범 석방과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용인 방침을 밝혔다.[30] 그러나 정치범 석방은 내무성과 사법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30] 야마자키 이와오 내무대신은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견 사진 공표를 막으려 했으나, GHQ의 압력으로 철회했다.[29]
GHQ는 10월 4일 '정치적,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의 제거에 관한 건(각서)'(인권 지령)을 통해 치안유지법 등 자유로운 토의를 저해하는 법률 철폐, 특별고등경찰 폐지, 내무대신 이하 경찰 간부 파면 등을 요구했다.[30]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GHQ의 지령에 항의하며 다음 날 총사직했다.[30][31]
2. 5. 전후 활동과 사망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1946년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쇼와 천황의 퇴위와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의 섭정을 주장했다.[6] 같은 해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천황에게 퇴위 가능한 날짜를 제안했음을 시사했다.[7] 그러나 천황은 황족 신분 포기 요청을 거절했고, 히가시쿠니는 1947년 미국의 점령으로 공작 가문이 폐지되면서 지위와 재산의 대부분을 잃었다.[35]이후 민간인으로서 히가시쿠니는 여러 소매 사업을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선불교 기반의 히가시쿠니쿄를 창시했으나 미국 점령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38][39] 1958년 전시 일기 '이치 코조쿠노 센소 닛키'를 출판했고, 1968년 자서전 '히가시쿠니 닛키'를 출판했다. 1948년에는 세계 연방 운동 협회를 창설했다.[37]
1950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다.[40][41] 1960년에는 안보 투쟁 소동으로 당시 수상 기시 노부스케에게 퇴진을 권고했다. 1962년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있었으나, 다나카 가쿠에이등의 중재로 게이힌 급행 전철로부터 거액의 퇴거료를 받고 이주했다.[22]
1971년 일본 문화 진흥회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90년 1월 20일 심부전으로 도쿄에서 사망했으며,[42] 향년 102세였다. 그는 일본의 초대 전후 총리이자 최단명 총리로,[42] 사망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마지막 생존한 대장이었다.
3. 사상과 평가
3. 1. 자유주의적 사상
3. 2. 일억 총참회론
가가와 도요히코는 수상 관저로 초청받아 일본의 국가적 방침에 대해 논의했고, 일본 기독교단의 단원들과 상담 후, 히가시쿠니노미야에게 총참회 운동을 제안했다.[25]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가가와의 제안을 받아들여 라디오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참회를 호소했다.[25]1945년 8월 17일,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기자 회견에서 "국민의 도의가 쇠퇴한 것도 원인 중 하나"이며, "군·관·민·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해야 하며 "전 국민 총참회하는 것이 우리나라 재건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9월 5일 제국 의회 시정 방침 연설에서도 "'''전 국민 총참회'''"를 강조하며, "군도 관도 민도 모두, 국민 모두 조용히 반성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일억 총참회론"은 전쟁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하고 쇼와 천황에 대한 문책을 회피하기 위한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패전 직전 내각 정보국은 "개전 및 전쟁 책임 추궁 등은 전혀 무익하고 비생산적이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통달을 내렸고, 패전 후 각 성청은 관계 서류를 소각·폐기했다. 9월 12일 종전 처리 회의에서는 전쟁 범죄에 관해 일본에 의한 자주적인 재판을 개정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한편 GHQ는 "일억 총참회론"의 신장을 억제하고[26]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도쿄 재판) 준비에 착수했다.
3. 3. 한국과의 관계
4. 가족 관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테라오 우타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등과 형제 관계이다.[55][56][57] 메이지 천황은 1906년 11월 3일 나루히코 친왕에게 '히가시쿠니노미야'의 칭호를 주고 황족의 새로운 분가를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루히코 친왕은 1915년 5월 18일에 메이지 천황의 아홉 번째 딸인 야스 공주 도시코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5. 기타
5. 1. 일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은 것이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켰으나, 메이지 천황은 그의 지적 호기심을 높이 평가했다.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도 메이지 천황은 "노인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신적 강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프랑스 유학 전 자동차 운전을 익혔으며, 유학 중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의 드라이브 초대를 거절하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을 대신 초대했다. 그러나 기타시라카와노미야의 과속 운전으로 사고가 발생, 기타시라카와노미야는 즉사하고 아사카노미야는 중상을 입었다. 파리 유학 중에는 애인과의 생활에 탐닉하여[50] 귀국 명령을 거부하다 고마츠 테루히사 후작의 설득으로 귀국, 황족 중 자유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51]

고노에 후미마로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회피 및 미일 협상 지속을 위한 차기 총리로 지명받았으나, 기도 내대신의 판단으로 내각이 성립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유학 중 클로드 모네에게 조르주 클레망소를 소개받아 친교를 맺었고, 필리프 페탱과 클레망소로부터 "미국이 일본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충고(오렌지 계획 참조)를 받았다.[52] 귀국 후 미일 전쟁 반대를 설득했으나 사이온지 긴모치 외에는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52] 미일 협상 막바지, 도조 히데키에게 클레망소의 충고를 전하며 협력을 설득했지만, 도조는 "책임상 미국의 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52]
프랑스 유학 중 한 노파로부터 "일본에 대혁명이나 대동란이 일어날 때 총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는데, 실제로 총리에 취임한 후 "섬뜩함을 느꼈다"고 일기에 썼다.[53]
제302해군항공대의 반란(아쓰기 항공대 사건)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고조노 야스나 대령을 구속하고 노비 해군병원 정신과에 강제 수용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는 "매일 매일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대해 "전체와 부분의 혼동"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연합군 점령 직후 "'종전'"이라는 어구 사용을 비판했으나, 시모무라 육군 대신의 설득으로 국민 혼란 방지 및 시국 수습을 위해 "'종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국민 의견 반영을 위해 편지를 받겠다고 호소하여 매일 수백 통의 편지를 받았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면회했을 때 "나는 봉건적 유물"이라며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맥아더는 "당신의 사상・행동은 비민주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전후 일본 상황을 보며 "젊은 혁신 정당"이 대개혁을 했다면 더 나은 일본이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 애인: 신바시의 기생 "슈키쿠"
- 자녀:
- * 기쿠코 (1936년 - )
- * 히데오 (1940년 - )
- * 카즈코 (1944년 - )
5. 2. 관련 작품
226(1989년, 배역: 토쿠다 요시오)과 지고, 이기다 ~전후를 만든 남자·요시다 시게루~(2012년, NHK, 배역: 이마이 토모히코)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참조
[1]
웹사이트
Emperor Hirohito on Localized Aggression in China
http://chinajapan.or[...]
2011-07-21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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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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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ōwa tennō dokuhakuro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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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Records of the Army Staff: The Investigative Records Repository (IRR)
https://www.archives[...]
[6]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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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st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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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PRINCE SUGGESTED THAT HIROHITO QUIT; Higashi-Kuni Says He Gave Emperor Three Suitable Times for Abdication Considered Abdication; Admiral Ueda Released
http://timesmachine.[...]
194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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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落胤」を残した東久邇は皇族にならない可能性もあった! 社会学的皇室ウォッチング!/100 成城大教授・森暢平
https://weekly-econo[...]
週刊エコノミスト
2024-01-25
[9]
간행물
『官報』号外、昭和20年8月17日
https://dl.ndl.go.jp[...]
194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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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東久邇稔彦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11]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東久邇稔彦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12]
웹사이트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東久邇稔彦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13]
문서
内相及び内務警察官僚4000名の罷免と治安維持法の撤廃、特別高等警察の廃止
[14]
문서
東久邇宮首相は、副総理格の緒方竹虎の意見を求めると「占領されている以上拒否はできないが、承服したのでは政府の威信がなくなる。承服できないという消極的な意思表示の意味で内閣総辞職しよう」と述べ、これに首相が同意し、内閣は総辞職した(産経新聞 2002年6月10日掲載)
[15]
문서
2021年(令和3年)に第1次岸田内閣が38日で総辞職したため、内閣の在任記録はこちらが最短となった(ただし、総辞職後の特別会|特別国会で、岸田文雄が再び首相に選出されている)。
[16]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東久邇稔彦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17]
서적
歴代内閣・首相事典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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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Promotions l'ESG - de 1 à 107
https://www.ecole-su[...]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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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宮家の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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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やんちゃ孤独
[21]
뉴스
焼け跡に簡素な生活、東久邇宮(昭和20年8月17日 毎日新聞(東京))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94
[22]
뉴스
週刊エコノミスト Online 発掘スクープ 皇族首相、東久邇宮は御用邸居座りで「45億円」を手にした! 社会学的皇室ウォッチング! /99 成城大教授・森暢平
https://weekly-econo[...]
[23]
문서
宮家皇族の名前を公式表記する場合は宮号を冠さず「名+身位」とするのが正式なものであり、官報においては「内閣総理大臣 稔彦王」と表記されていた。
[24]
서적
神奈川県警史
[25]
웹사이트
社会的弱者の友として―賀川豊彦の生涯(13)国民総ざんげ運動ー 栗栖ひろみ筆
https://www.chris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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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写真を処分せよ
[27]
서적
田尻愛義回想録:半生を賭けた中国外交の記録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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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木戸日記
[29]
서적
敗戦直後の政治と社会 第2巻
大月書店
[30]
서적
占領期の朝日新聞と戦争責任 村山長挙と緒方竹虎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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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幣原喜重郎に組閣の大命(昭和20年10月7日 朝日新聞)
[32]
간행물
『官報』第5822号、昭和21年6月13日
1946-06-13
[33]
뉴스
『朝日新聞』
1947-10-17
[34]
뉴스
『朝日新聞』
1952-04-22
[35]
간행물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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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都会の風雲 : 安田朝信自伝
東京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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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기록
第3回国会 衆議院 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 第7号 昭和23年10月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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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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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結局「ひがしくに教」ってなに?
https://kikunomo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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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History of Freemasonry 2011
http://www.scribd.co[...]
Scribd
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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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七人の有名な日本人メィーソ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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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メソニックセンター
201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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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知的巨人たちの百歳学(143)世界の総理大臣、首相経験者の最長寿者としてギネスブック登録された昭和天皇の叔父の東久邇稔彦(102歳)
http://www.maesaka-t[...]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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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ランダ王国(Kingdom of the Netherlands)基礎デー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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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201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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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보
叙任及辞令
190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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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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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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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3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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辞令二
194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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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廷録事 勲章親授式
194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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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枢密院議長の日記
講談社現代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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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見宮―もう一つの天皇家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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やんちゃ孤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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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族
読売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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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本宮2代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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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訃報■多羅間"殿下"亡くなる=皇籍離脱した明治天皇の孫
http://www.nikkey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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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東久邇宮国際文化褒賞 TOP - 東久邇宮国際文化褒賞の由来 - 東久邇宮盛厚殿下について - 家系図
http://higashikunipr[...]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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