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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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응선은 1883년 김옥균, 윤웅렬 등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도야마 육군학교에서 신식 군사 교육을 받았다. 1884년 조련국 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청나라 교관 초빙으로 파직되었고, 그해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병조의 군사 일부를 지휘하며 왕을 호종하다가 청나라 군에게 살해되었다. 사후 복권 및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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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하응선은 1883년(고종 20년) 김옥균, 윤웅렬 등 개화파 인사들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로 갔다. 그해 조선 개화파의 부탁으로 신문 간행을 위해 초빙되었던 일본인 우시바(牛場皁藏) 등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조선인 유학생 17명을 동반하였는데, 이때 하응선도 그중 한 명이었다. 1884년 1월 서재필, 이규완, 신응희, 임은명(林殷明), 신중모(申重模), 윤영관(尹泳寬), 정행징(鄭行徵) 등 13명과 함께 도야마 육군 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7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서재필, 서재창 등 수료생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1884년 12월 조련국 부사관장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병조의 군사 일부를 인솔, 지휘하고 사관생도 출신들과 함께 왕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청나라 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면서, 민씨 척족과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왕을 호종하던 홍영식, 박영교, 사관생도 7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1895년 3월 1일 법무대신 서광범의 건의로 복권되었다가 김홍집 내각의 실각으로 추탈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조선 건국 이후 각종 정변과 개혁 시 참화를 당한 인물들을 신원, 사면복권시키고 관직을 추증하자, 그해 7월 18일 순종의 특명으로 서재창, 윤영관(尹泳觀), 백낙운(白樂雲) 등과 함께 증 통정대부 규장각부제학에 추증되었다.

2.1. 일본 유학

1883년(고종 20년) 김옥균, 윤웅렬 등 개화파 인사들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로 갔다. 그해 조선 개화파의 부탁으로 신문 간행을 위해 초빙되었던 일본인 우시바(牛場皁藏) 등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조선인 유학생 17명을 동반하였는데, 하응선은 이때 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1884년 1월 서재필, 이규완, 신응희, 임은명(林殷明), 신중모(申重模), 윤영관(尹泳寬), 정행징(鄭行徵) 등 13명과 함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해 7월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7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서재필, 서재창 등 수료생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2.2. 갑신정변 참여와 최후

1884년 12월 조련국 부사관장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병조의 군사 일부를 인솔, 지휘하고 사관생도 출신들과 함께 왕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청나라 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면서, 민씨 척족과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왕을 호종하던 홍영식, 박영교, 사관생도 7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2.3. 사후

1895년 3월 1일 법무대신 서광범의 건의로 복권되었다가 김홍집 내각의 실각으로 추탈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조선 건국 이후 각종 정변과 개혁 시 참화를 당한 인물들을 신원, 사면복권시키고 관직을 추증하자, 그해 7월 18일 순종의 특명으로 서재창, 윤영관(尹泳觀), 백낙운(白樂雲) 등과 함께 증 통정대부 규장각부제학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