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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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길준은 1856년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다. 그는 개화 사상을 수용하여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서유견문》을 저술하여 근대 문명을 소개했다. 갑오개혁에 참여하여 단발령을 주도했고,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연구와 보급에도 힘썼다. 일본 유학, 미국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며, 입헌군주제와 지방 자치제 도입을 주장했다. 한편, 친일 행적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의 연루 의혹, 갑신정변 실패 이후 민중을 경멸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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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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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유길준 |
한자 표기 | 兪吉濬 |
로마자 표기 | Yu Gilju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Yu Kilchun |
호 |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 |
자 | 성무(聖武) |
출생일 | 1856년 11월 21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북촌 계동 |
사망일 | 1914년 9월 30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
묘지 |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산 1-16 |
학력 | |
학교 | 게이오기주쿠 (중퇴) 덤머 아카데미 (중퇴)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유진수 |
어머니 | 한산 이씨 |
배우자 | 초배 경주 김씨 계배 충주 이씨 |
자녀 | 유만겸(장남) 유억겸(차남) |
형제 | 유회준(형) 유성준(아우) |
친인척 | 유각경(조카딸) 유옥겸(조카) 이경직(외할아버지) 윤덕영(사돈) 윤택영(사돈) |
경력 | |
직업 | 문신, 정치가, 철학자, 개화 사상가 |
소속 정당 | 온건개화파 잔존 후예 |
관직 | 조선국 내무협판 |
임기 | 1895년 12월 17일 ~ 1896년 2월 11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총리대신 김홍집 |
종교 | 유교(성리학) |
훈장 | |
훈장 | Order of the Taegeuk, 1st class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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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사망 원인 | 신장염과 과로, 스트레스의 합병증 |
2. 생애
1881년 유길준은 민영익의 천거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사유람단은 부산항을 출발해 쓰시마를 거쳐 일본에 도착, 규슈,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고베, 요코하마 등지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5월 25일 도쿄에 도착했다. 유길준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기주쿠에서 수학하며 최초의 한국인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1]
1883년에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에드워드 S. 모스의 도움으로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최초의 한국인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1] 그는 북미 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갑신정변 이후 1885년에 귀국했지만, 개화파 일원으로 간주되어 체포, 유폐 생활을 보냈다. 유폐 중에 유럽과 미국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서유견문』을 저술했다.
청일전쟁 과정에서 성립된 김홍집 내각에 입각하여 갑오개혁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되어 이듬해 의정부 도헌, 내각총서, 내무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2년, 유길준 음모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일본의 의도가 한일 병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1907년에 귀국하여 흥사단·한성부민회를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문전』을 저술하여 한글의 보급을 추진하는 등 한국 근대화와 독립 유지를 주창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귀족의 일원으로 남작을 수여받게 되었지만,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퇴하고, 1912년 12월 6일 작위를 반납했다.[3]
2. 1. 생애 초반
유길준은 1856년 11월 21일 조선 서울에서 기계 유씨로 태어났다.[2][1] 아버지 유진수와 그의 후처 충주 이씨 부인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어려서 아버지와 외조부 이경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870년 박규수(朴珪壽) 문하에 들어갔는데, 박규수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해외 학문을 통해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유길준은 곧 외국 서적 읽기에 흥미를 느꼈다.
1881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했고, 1883년에는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가서 워싱턴 D.C., 보스턴에서 수학했다.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모스에게 배웠다.
2. 1. 1. 출생과 가계
1856년 11월 21일 한성부 북촌 계동에서 진사 유진수(兪鎭壽)와 이경직(李耕稙)의 딸 정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회준(兪會濬)이 있고 동생으로 유성준(兪星濬)이 있었다. 할아버지 유치홍(兪致弘)은 청송부사를 지냈고, 아버지 유진수는 당시 진사였으나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6]기묘사화 당시 사림파 학자 유여주의 형 유여림(兪汝霖)의 후손으로, 본래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의 외할아버지이자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유홍의 12대손이다.[6] 그러나 유홍의 9대손 유인환의 아들 유치홍이 유홍의 삼촌인 숙민공 유강의 10대손 유돈환의 양자가 되면서 유강의 13대손이 되었다.[7] 유강의 증손자이자 유길준의 10대조 유성중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고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양증조부 유돈환의 할아버지이자 5대조인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은 저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였다. 유한준은 이재의 문인 남유용의 문인으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했으며[8], 평생 송시열을 흠모하여 송자대전을 늘 옆에 두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서양인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한성부 사람들이 피난을 가자, 유길준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덕풍리로 피신하여 은거했다. 광주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만인 1869년 봄에 한성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서 한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어려서 소년 유길준은 암기력에 능하였고 홀로 사색하거나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책을 스스로 읽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조숙하여 음식과 잠자리로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외할아버지 이경직은 최종 관직이 정3품 도정(都正)을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한성부 북촌(北村)의 노론 실학파 학자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했고 살림도 넉넉하여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의 문하에서 한학, 성리학을 배운 뒤 소년기에는 외할아버지 이경직 댁에 머무르면서 각종 고전과 서양의 서적을 접하게 됐다. 기억력이 좋았던 그는 외조부로부터 소개받은 서구에 미지의 문명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흥미를 품게 된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소년기에 홍대용,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의 서적을 두루 탐독했다.
15세 때 아버지 유진수에 의해 부인 경주 김씨와 결혼하여 청주로 분가했다가 다시 한성부로 올라와 낙산서재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때 민영익(閔泳翊) 등을 만나 친구가 된다. 본부인 경주 김씨는 1874년(고종 11년)에 병사하고 다시 충주 이씨와 재혼하였다.
어릴 적 아버지와 외조부 이경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870년, 열네 살의 나이에 효명세자의 신임을 받았던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규수는 실학(Silhak) 사회 개혁 운동 내 학파인 북학(Bukhak, 北學)의 대표적인 학자였다.[1] 북학은 당시 조선에서는 파격적인 사상이었던 해외 학문을 통해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곧 외국 서적 읽기에 흥미를 느꼈다.
항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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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유진수(兪鎭壽; 1825–1898) |
어머니 | 한산 이씨(韓山 李氏; 1824–1900) |
형제 | 형 – 유회준(兪會濬; 1847 – ?), 아우 – 유성준(兪星濬; 1859/1860 – 1934년 2월 27일) |
배우자와 자녀 |
2. 1. 2. 유년 시절
1856년 11월 21일 한성부 북촌 계동에서 진사 유진수(兪鎭壽)와 이경직(李耕稙)의 딸 정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회준(兪會濬)이 있고 동생으로 유성준(兪星濬)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청송부사를 지낸 유치홍(兪致弘)이고, 당시 진사였던 아버지 유진수는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유길준은 기묘사화 때 사림파 학자인 유여주의 형 유여림(兪汝霖)의 후손으로, 본래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의 외할아버지이자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유홍의 12대손이다.[6] 그러나 유홍의 9대손 유인환의 아들 유치홍이 유홍의 삼촌인 숙민공 유강의 10대손 유돈환의 양자가 되면서 유강의 13대손이 되었다.[7] 유강의 증손자이자 유길준의 10대조 유성중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청백리였으며, 양증조부 유돈환의 할아버지이자 5대조인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은 저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였다. 유한준은 이재의 문인인 남유용의 문인이자 송시열 학통을 계승했으며[8], 평생 송시열을 흠모하여 송자대전을 늘 옆에 두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서양인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한성부 사람들이 피난하자, 유길준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덕풍리로 피신하여 은거했다. 광주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만인 1869년 봄에 한성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서 한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1870년, 열네 살의 나이에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규수는 실학(Silhak) 사회 개혁 운동 내 학파인 북학(Bukhak, 北學)의 대표적인 학자였다.[1] 북학은 당시 조선에서는 파격적인 사상이었던 해외 학문을 통해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유길준은 곧 외국 서적 읽기에 흥미를 느꼈다.
2. 2. 개화 사상 형성
1870년경 유길준은 외할아버지 이경직을 통해 박규수를 소개받았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윤식 등 개화 청년들과 함께 실학 사상을 배웠다. 1871년 봄, 경기도 향시에 장원한 그는 박규수를 찾아갔는데, 당시 박규수는 청나라의 북학파 사상에 정통했으며, 개화사상을 펴고 있었다.박규수의 서실에서 유길준은 지구본을 처음 접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규수가 추천한 중국인 위원의 《해국도지》 등 개화 사상서를 접하면서 국제정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은 《해국도지》를 읽은 뒤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박지원의 저술들, 중국의 양무운동에 관한 책을 탐독하였다. 김윤식, 어윤중, 윤웅렬,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훗날 개화파로 활약했던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1877년 박규수가 죽은 뒤, 김옥균 등을 따라 유홍기와 오경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유홍기와 오경석에게서 배운 김옥균 등은 급진개화파가 되었으나, 유길준은 김윤식 등과 함께 강위에게서도 지도를 받아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1881년, 조선 외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1년 동안 게이오 기숙학교에서 유학하여, 일본으로 유학한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 되었다.[1] 1882년 임오군란 발생 후, 민영익의 권고로 1883년 1월 귀국했다.[1]
1883년 7월,[1] 미국 특사 파견에서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북미 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중 한 명이 되었다.[1] 에드워드 S. 모스의 후원으로 약 1년 반 동안 미국에 머물렀고,[1] 1884년 가을,[1] 매사추세츠주 바이필드에 있는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1]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1884년 12월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했다.[1]
2. 2. 1. 서구 문물과의 만남
1870년경 유길준은 외할아버지 이경직의 소개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윤식 등 개화 청년들과 교류하며 실학 사상을 배웠다.[9] 1871년 봄, 경기도 향시에서 장원한 그는 박규수를 찾아갔다. 박규수는 청나라의 북학파 사상에 정통했고, 개화사상을 전파하던 인물이었다.박규수의 서실에서 유길준은 지구본을 처음 접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규수가 추천한 중국인 위원의 《해국도지》 등 개화 사상서를 읽으며 국제정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은 《해국도지》를 읽은 후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박지원의 저술, 중국의 양무운동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김윤식, 어윤중, 윤웅렬,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훗날 개화파로 활약한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과거시험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라며 시험을 거부하였다.
1870년경부터 과거 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한 그는, 노론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뇌물과 연줄로 합격자가 결정되는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 과거 응시를 단념했다. 1877년 2월 박규수 사후, 김옥균 등을 따라 유홍기와 오경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유홍기와 오경석에게서 배운 김옥균 등은 급진개화파가 되었으나, 유길준은 김윤식 등과 함께 강위에게서도 지도를 받아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박지원과 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친구이자 원수였다.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풍자하면서 감정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원수가 되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심하게 비난했다.
박종채는 유한준을 '백세의 원수'라고 칭했다. 유한준은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였고, 집안끼리도 인연이 있어 젊은 시절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비평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연암은 저암의 문장을 '기교에 치우쳤다'고 혹평했고, 저암은 연암의 저작을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이라며 비난했다.[9] 이후 유한준 집안과 박지원 집안은 묘지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박종채는 유한준 집안을 '백세의 원수'로 규정했고,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는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비판했다.
1871년 홍문관 대제학 박규수는 향시 장원 시를 보고 유길준을 불렀다. 유길준은 유한준의 4대손이었다.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는 집안의 원수 관계를 들어 박규수를 만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박규수는 유길준에게 집안 간의 불화를 잊고 화목하게 지내자고 제안하며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1881년, 조선 외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그는 게이오 기숙학교에서 1년간 유학했다.[1] 이는 그를 일본으로 유학한 최초의 한국 유학생으로 만들었다.[1] 1882년 임오군란 발생 후, 민영익의 권고로 1883년 1월 귀국했다.[1]
1883년 7월,[1] 미국 특사 파견에서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북미 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중 한 명이 되었다.[1] 에드워드 S. 모스의 후원으로 약 1년 반 동안 미국에 머물렀다.[1] 1884년 가을,[1] 매사추세츠주 바이필드에 있는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1]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1884년 12월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했다.[1]
2. 2. 2. 과거 제도 비판과 개혁론
1871년(고종 8년) 봄, 경기도 지역 향시(鄕試, 지방 과거시험)에 장원한 유길준은 지공거였던 박규수를 찾아갔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윤식 등 개화 청년들과 실학 사상을 배웠다.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은 박규수의 집에서 《해국도지》를 읽은 뒤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박지원의 저술들, 중국의 양무운동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1870년경부터 과거 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노론 명문가 자제였지만, 뇌물과 배경, 연줄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보고 과거 응시를 단념한다.
1877년 과거 제도의 폐해를 비판하는 과문폐론(科文弊論)을 지었다.[10] 그는 과거 제도가 양반들의 신분 세습 수단이며, 하급 관료 시험인 취재조차도 세습과 인맥으로 채용하는 등 부작용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지나친 관직열과 과거 만능주의는 국익과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10]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지적하는 그의 글이 발표되자 당시 정부와 기득권층은 크게 충격받고 당황했다. 그러나 그가 어린 소년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논란은 흐지부지되었다.
2. 3. 일본, 미국 유학
1881년 유길준은 민영익의 천거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사유람단은 부산항을 출발해 쓰시마를 거쳐 일본에 도착, 규슈,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고베, 요코하마 등지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5월 25일 도쿄에 도착했다. 유길준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기주쿠에서 수학하며 최초의 한국인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1]1883년에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에드워드 S. 모스의 도움으로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최초의 한국인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1] 그는 북미 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2. 3. 1. 갑신정변과 귀국
1881년 봄, 유길준은 민영익의 추천으로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국고가 아닌 고종이 내린 특별 내탕금 5만 냥으로 운영되었으며, 63명의 수행원과 2명의 일본인 통역관으로 구성되었다. 유길준은 배경이 없었지만 홍영식, 어윤중, 박정양의 후원과 김옥균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수행원에 선발될 수 있었다.[1]1881년(고종 18년) 5월 7일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출발하여 쓰시마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 조사 시찰단은 규슈,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고베, 요코하마 등지의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5월 25일에 도쿄에 도착했다. 유길준은 9월까지 4개월 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정치, 군사, 문교, 내무, 농상공부 등 각 부처의 업무와 시설, 세관, 군사, 조폐, 무역, 외국인 출입, 교역, 농업, 제사, 양잠업 등 다양한 분야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발전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1881년, 유길준은 조선 외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1년 동안 게이오 기숙학교에서 유학하며 최초의 한국인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1]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영익의 권고로 1883년 1월 귀국했다.[1]
1883년 7월, 유길준은 최초의 미국 특사 파견에서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참여하여 북미 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중 한 명이 되었다.[1] 그는 일본에서 만났던 미국 동물학자 에드워드 S. 모스의 후원으로 1년 반 동안 미국에 머물렀다.[1] 1884년 가을, 매사추세츠 주 바이필드에 있는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최초의 한국인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1]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했다.[1]
3. 정치 활동과 개혁, 계몽 운동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기주쿠에서 공부했고, 1883년에는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 D.C.와 보스턴에서 수학했다.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모스에게 배웠다. 갑신정변 이후 1885년 귀국했지만, 개화파로 간주되어 체포되었고 유폐 생활을 했다.[3]
청일전쟁 이후 김홍집 내각에 입각하여 갑오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894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되었다. 1895년 의정부 도헌, 내각총서, 내무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3]
1902년 유길준 음모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3] 1907년 일본의 의도가 한일 병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귀국하여 흥사단, 한성부민회를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문전』을 저술하여 한글 보급을 추진하는 등 한국 근대화와 독립 유지를 주창했다.[3]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조선귀족의 일원으로 남작을 수여받았지만,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퇴하고, 1912년 12월 6일 작위를 반납했다.[3]
3. 1. 귀국과 감금, 정치 활동
1885년 귀국한 유길준은 개화당 인사들과의 관계로 인해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러나 한규설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에서 감금되었다.[1]구금 중에 유길준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1895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며,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서구 문명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입헌군주제 수립, 군사 개혁, 국제 무역,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 제도 등 다수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사회계약론과 같은 개념도 논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이후 갑오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
동학농민운동과 청일 전쟁이 끝난 후, 유길준은 친일파로서 정부에서 일했다.[1] 1894년부터 1895년까지 김홍집 내각에서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고, 1895년에는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1894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되어 이듬해 의정부 도헌, 내각총서, 내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1895년, 그는 한국 최초의 사전이자 문법서인 『조선문전』을 출판했다.[2]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앞두고 일본 제국과의 공모 혐의로 고종에 의해 '을미사변 4적' 중 한 명으로 낙인찍혔다. 시해 사건 이후 유길준은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접촉하여 사건에 대해 논의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파가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유길준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한국 젊은 졸업생들은 한국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은 양국 간 외교적 분쟁을 촉발했고, 유길준은 오가사와라 제도에 투옥되었다. 유길준은 고종이 퇴위한 1907년에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흥사단 부회장을 역임했다.[1][2]
1902년, 유길준 음모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1907년 귀국 후, 일본의 의도가 한일 병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흥사단·한성부민회를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문전』을 저술하여 한글의 보급을 추진하는 등 한국 근대화와 독립 유지를 주창했다.
3. 2. 갑오, 을미경장과 체제개편 운동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기주쿠에서 공부했고, 1883년에는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 D.C.와 보스턴에서 수학했다. 갑신정변 이후 1885년 귀국했지만, 개화파로 간주되어 체포되었고 유폐 생활을 했다. 청일전쟁 이후 김홍집 내각에 입각하여 갑오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894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되었다. 1895년 의정부 도헌, 내각총서, 내무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1902년 유길준 음모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1907년 귀국하여 흥사단, 한성부민회 등을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문전』을 저술하여 한글 보급에 힘쓰는 등 한국 근대화와 독립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3. 2. 1. 을미사변 전후
1885년 12월말 그는 미국과 국제정세에 관련된 저서인 '''조선중립론'''(朝鮮中立論)을 발표한다.[10] 여기에서 그는 미국을 맹신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그는 갑신정변이 지지층도 폭넓게 포섭하지 못했고, 시간이 너무 이르다는 점을 들어 실패를 예상하였고,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변은 예상대로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는 민중을 혐오, 경멸하였고 이후 민중을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와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1884년 12월 고종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에게 귀국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1885년 1월 고종의 친서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1885년 대서양을 건너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 시찰하고 수에즈 운하와 홍해를 구경한 뒤 배편으로 인도양을 건너 싱가포르에 왔다가 필리핀, 마카오, 홍콩,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개화당 인사들과의 관계 때문에 의심을 받았고, 결국 체포되었다. 한규설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에서 형을 살았다.[1]
구금 중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1895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며,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서구 문명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입헌군주제 수립, 군사 개혁, 국제 무역,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 제도 등 다수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사회계약론과 같은 개념도 논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이후 갑오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
동학 농민 운동과 그 뒤를 이은 제1차 청일 전쟁이 끝난 후, 친일파로서 정부에서 일했다.[1]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김홍집 내각에서 일했고, 1895년에는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1895년, 그는 한국 최초의 사전이자 문법서를 출판했다.[2]
1895년 10월,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앞두고 일본 제국과의 공모 혐의로 고종에 의해 '을미사변 4적' 중 한 명으로 낙인찍혔다. 시해 사건 이후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접촉하여 사건에 대해 논의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기간 중 친일파가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3. 2. 2. 아관파천과 일본 망명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정세가 급변했다. 귀국 후, 유길준은 개화파로 몰려 체포되었고,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고문을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했다.[17] 우포도장 한규설의 도움으로 종로구 가회동 취은정에 유폐되어 연금 생활을 했다.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시신이 국내로 압송되어 부관참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길준은 명성황후와 근왕파, 그리고 김옥균 암살에 동조한 조선 민중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유길준은 김홍집 내각에서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했고, 1895년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그러나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을미사변 4적'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자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중,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 젊은이들과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사건은 외교 분쟁으로 이어져 유길준은 오가사와라 제도에 투옥되었다.[1] 1907년 고종이 퇴위한 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 3. 교육, 계몽 활동
서유견문을 출간하여 뉴욕, 영국, 프랑스, 베트남에서 본 서양의 근대 문명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하였다. 조선인 스스로 개화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나, 서양인을 미개한 오랑캐나 털 난 야수가 아닌 선진 문명을 갖춘 인간 사회로 보는 그의 주장은 궤변으로 취급당했다.[18]서양의 사상보다는 건축술, 의복, 제지 기술, 의학 등의 기술을 우선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정부와 지식인이 주도적으로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였다. 1885년 3월 1일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이유로 거문도를 점령하자(거문도 사건), 러시아, 영국, 청나라, 일본 등 열강이 조선에 야욕을 품고 있음을 지적하고 조선 중립화론을 제기했으나 묵살당했다.
1892년 가택 연금에서 해제되었으나, 서유견문 출간은 비용 조달의 어려움과 수구파, 위정척사파의 탄핵으로 미뤄졌다. 1895년 4월 중순, 을미개혁 중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4월 25일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출판사 '교순사'에서 발간하였다.
1904년 7월 귀국 직후, 일본이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것이며, 조선을 도와줄 나라가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교육과 계몽, 산업 시설 확충 등 부국강병을 역설하며 국민이 스스로 깨어 있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민경제회를 조직하고, 경제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인수와 운영에 참여하여 민족자본 육성에 힘썼다.
계산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노동야학회라는 야간 학교를 세워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문자와 글, 숫자를 가르쳤다. 1907년 고종 퇴위 후에야 완전히 귀국할 수 있었다.
1908년부터 조선문전이라는 한글 국어 사전을 간행했다. 1909년에는 조선문전을 정리한 종합 한글 국어 문법서 《대한문전 大韓文典》을 저술, 간행하였다.
1907년 12월 자신의 재산으로 사립융희학교를 설립하고 유옥겸, 윤치호 등을 교사로 초빙했으나, 1910년 9월 11일 기호학교에 병합되었다.
국민 개개인을 선비로 만들자는 취지로 흥사단을 창설했다. 흥사단을 통해 〈대한문전 大韓文典〉·〈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의 책을 저술·간행했다. 교사 양성 기관인 사범 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소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44]
3. 3. 1. 한일 병합 조약 전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길준은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지일파(知日派)였지만 을사조약에 반발했는데,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42]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을사늑약은 강제로 체결되었다. 을사조약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눈감아주기로 한 조약문을 입수하면서 미국을 의심하게 된다.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오랫동안 동지들과 함께 국권을 확립하고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려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유길준이 기독교로 귀의하는 데에는 오랜 친구인 윤치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 1907년 순종 황제의 특사로 귀국한 후 흥사단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와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또한 융희학교 설립 준비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을 당연한 징벌로 받아들였다. 조선이 개혁에 실패하고 애국자들을 탄압한 것이 바로 을사조약을 자초한 것이라고 보았고, 나라를 스스로 지켜내려면 일단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력이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독립해봐야 다시 파쟁과 분열로 지새거나 러시아 등 다른 열강의 식민지나 중국의 속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07년 민단(民團)이라는 민중 정당을 조직했으나 정계에서 밀려나고, 민단은 해체되고 만다.
1907년 6월, 한국이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43] 이완용 내각의 각료들과 대신들은 정미 7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했으나, 유길준은 정미 7조약 체결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홀로 조약 체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나 다수의 의견에 의해 묻혀졌다. 유길준은 정미 7적을 규탄하는 격문을 붙이고 거리에서 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하였다. 그는 또 《신지신문 新知新聞》에 정미 7조약을 반대한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일본이 모든 권한을 갖게 되니 슬프고 비통한 일이라며, 자신은 귀국하면 교육 사업에나 종사하겠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일본의 총리대신에게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일본이 정미 7조약을 무효로 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영원히 일본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길준이 정미 7조약에 완강히 반대했다는 소식은 한국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1907년 8월 16일,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사람들 중 유길준을 제외하고 모두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받았다. 고종은 우선 용양봉저정(유길준은 조호정이라고 불렀음)을 유길준에게 하사했으며, 흥사단(興士團)을 만들어 교육 사업을 벌이자 1만 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44] 그는 교육과 계몽을 통해 뒤늦었지만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1910년 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유길준은 병합에 반대했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단작 칭호를 거절했다.[1] 그 후 우울증에 빠졌다.[1][2] 1912년 12월 6일 작위를 반납했다.[3]
3. 4. 생애 후반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김홍집은 자결하려 하였으나, 유길준은 김홍집을 극구 말렸다.[25] 10월 9일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친일 내각에 의해 내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단발령을 다시 강행했다. 그는 고종에게 단발령의 유용성과 위생성을 역설했고 고종이 이를 수용하면서 고종은 정병하가, 황태자 척은 유길준이 직접 단발하였다.10월 중순 을미사변 직후 각지에서 왕비 암살에 대한 의혹과 반발 여론이 심화되자, 그는 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주조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접촉하여 사후 대응책을 토론하였다. 이어 그는 단발령을 내무부 고시로 공포하여, 관리들에게 칼과 가위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도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강제로 자르게 했다.
1909년 신돌석이 사살되자, 그의 은신처를 신고, 제보한 사람이 조선인들이라는 것과, 신돌석이 평민 출신이란 점을 불쾌하게 여긴 양반 출신 의병들이 일본 헌병에 자수했다는 점과, 현상금에 눈이 먼 지역 주민들이 신돌석의 은신처를 알려준 점, 신돌석의 외척 등도 제보에 가담한 점을 접하면서 좌절하였다. 1909년 12월 20일 상무조합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되자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었다.[4] 일부 지식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정한론자들의 주장에 근거를 주게 되어 한일합방을 부추길 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의 훈1등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는 허탈 상태에 빠졌다.[44] 유길준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침묵을 지키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한때 극비리에 노백린 등 몇몇 유지와 합동, 서울 시내의 중학생을 동원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에 발각되어 집에 연금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합병에 공로가 있는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내려 귀족으로 앉히면서 유길준을 회유해보려고 남작 작위를 주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사절했다.[44] 조선총독부가 보내준 합방 은사 공채금 역시 받지 않고 되돌려보냈다. 이후 그는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경성부의 자택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신장병과 과로, 스트레스 등으로 쓰러졌고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후 외부 출입을 자제하며 자택에서 휴양하였다.
1911년 2월 조양구락부의 후원 단체로 정악유지회가 조직될 때, 이준용, 이지용, 윤치오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45] 1911년 6월 16일 정악유지회의 재단 이사가 되었다.[46]
만년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일 이외에 대외활동을 중단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쌓인 지병과 피로 역시 그의 대외활동을 제한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고생하다[44]가 노량진에 있는 자택에서 은거하던 중 지병이었던 신장염으로 1914년 9월 30일[47][48] 아침에 생을 마쳤다. 그는 임종시 아들과 조카 등에게 〈신약성서〉를 읽게 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살아서 아무런 공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죽게 되면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향년 59세였다.
그의 장례는 10월 7일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식은 이상재, 윤치호에 의해 거행되었다. 조문객은 대부분 조선총독부 관리였으며, 일제는 그들의 관점에서 유길준의 지도력을 평가하려 했다.[48]
명성황후 암살 가담자라는 것을 왕실에서도 알고 있었고, 한일 합방 이후 순종이 형식적으로 내리는 시호나 기타 사시(私諡) 조차 받지 못했다. 사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현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검단산의 부친 유진수 묘소 근처에 두 부인 경주 김씨, 충주 이씨와 합장되었다.
1910년 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유길준은 병합에 반대했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남작 칭호를 거절했다.[1] 그 후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1][2] 1914년 9월 30일, 그는 신장 질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2]
1907년 흥사단·한성부민회를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문전』을 저술하여 한글의 보급을 추진하는 등 한국 근대화와 독립 유지를 주창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귀족의 일원으로 남작을 수여받게 되었지만,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퇴하고, 1912년 12월 6일 작위를 반납했다.[3]
4. 사상과 신념
유길준은 국한문 혼용체론을 주장했으며, 전통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서구의 장점으로 보완하자는 '취장보단(取長補短)'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 중국의 양무 운동과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 도입, 상공업 및 무역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 제도 수립, 근대적인 교육 제도 실시 등을 주장했다. 또한, 현실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학문 대신 실용적인 학문과 기술을 배울 것을 강조했다.
4. 1. 동도서기론
유길준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 서양의 최신 과학 기술과 문명은 받아들이되 우리 고유의 것을 부정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 무모함, 준비 미숙, 짧은 준비 기간을 지적하였고, 갑신정변에서 희생된 동지들이 동도(東道)를 부정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점도 함께 지적하였다. 그는 윤리적, 정신적인 것은 우리 것을 중심으로 하고 정치, 제도, 문물 등은 서양의 것으로 할 것을 주장하며 온건 개량주의적 입장을 드러냈다.4. 2. 문명개화론과 점진적 개혁론
유길준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중국의 양무 운동과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폭넓게 받아 형성되었고,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하였다. 그는 비실용적이고 관념론적인 도덕과 학문 대신 현실에 맞는 학문과 기술을 배울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아무리 명분론적으로 옳고 이상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사상, 불필요한 학문이라 보았다.그는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를 당면 과제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계몽 강연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 신라의 이두,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조선의 거북선, 고려청자, 조선백자, 최무선의 화포와 총통, 조선 초기의 신기전 등 기술적 혁신을 이룩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서유견문〉에서도 조선의 과학기술이 낳은 위대한 성과로 이두, 고려자기, 거북선, 금속활자를 들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 조선 왕조 5백 년간 문인들만을 우대하고 기술자와 군인들은 천대하면서 이러한 훌륭한 기술과 성과들이 사장되었음을 역설했다. 그는 만약 후손들이 비실용적인 학문에 집착하지 않고, 이런 과학 기술 전통을 연구, 발전시켰더라면 지금 세계의 영광이 조선에 돌아갔을 것이지만, 후손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과학, 기술의 천대가 조선을 멸망의 나락으로 이끌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근대적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을 미개한 상황으로 판단하였다. 유길준은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를 원시화, 미개화, 반개화, 문명화의 4단계로 구분하고 조선은 미개의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류 사회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문명화를 지목하였다. 그는 한국은 미개의 상태에서 반개 또는 문명으로 가야 하고, 문명화를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내정을 개혁하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의 표면적인 기술 문명 이전에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합리성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문명사회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개화의 등급을 보면 서구 열강이나 일본 역시 완벽한 개화를 이룩한 것이 아니고 고도문명화로 가는 단계에 있으므로 조선도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4. 3. 입헌군주제와 지방자치제
유길준은 조선이 개혁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입헌군주정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지했고, 입헌군주제 하의 점진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구했다. 그는 입헌군주국 제도를 채택한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제를 가진 나라로 보았다. 그는 일본과 협력하면서 조선에 입헌군주정 도입과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4]1907년(융희 1년) 10월 순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첨부한 '평화극복책'에도 이러한 견해가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이 조선 왕실에게 군주의 신분, 지위를 보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하되 입헌군주정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치호, 서재필, 박정양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그는, 일본과 미국의 상원과 하원 양원제를 본뜬 양원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대한제국 중추원조차 왕실과 수구파,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유길준은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체제 개혁과 절대군주론, 군주의 절대권에는 반대했지만, 폭력 혁명이나 공화제보다는 군주가 다스리는 체제를 선호했다. 그는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고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보았다.[44]
4. 4. 교육, 계몽 중요론
1904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유길준은 국내외 정세를 보고 일본이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것과, 식민지가 되는 조선을 도울 나라는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교육과 계몽, 산업 시설 확충 등 부국강병을 역설하며 국민이 스스로 깨어 있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1] 그는 사회단체인 국민경제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경제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인수, 운영에 참여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려 노력하였다.이때부터 계산학교(桂山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교육이 시급하다 생각한 그는 노동야학회라는 야간 학교를 세워,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야간에 문자와 글, 숫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종과 근왕파들의 질시와 경계를 받았고, 이후 그는 일본과 조선을 오가다가 1907년 고종이 퇴위한 뒤에야 완전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문자 해독이 어려운 것을 알고 1908년대부터 조선문전이라고 하는 한글 국어 사전을 계속 간행하였다. 1909년에는 기존에 편찬한 조선문전을 정리하여 종합 한국어 문법서 《대한문전 大韓文典》을 저술, 간행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교육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교육을 통해 무지와 무식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일관된 신념이었다. 국민 교육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국왕 고종에게 바친 상소문 언사소(言事疏)(1883)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10]
그는 교육을 통해 무지함을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중들이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한글의 사용과 보급을 건의, 역설하기도 했다.
4. 5. 한글 연구와 국한문 혼용
1890년부터 한글의 문법을 연구하여 1895년 최초의 한글 국어사전이자 문법서인 《조선문전 (朝鮮文典)》을 간행하였다. 10여년 간의 연구와 증보 끝에 1909년 《대한문전 (大韓文典)》을 편찬하였다. 이후 최광옥(崔光玉)의 이름으로 증보되어 증보 《대한문전 (大韓文典)》이 간행되었다.[52]유길준은 백성들의 계몽과 개화를 위해 계몽사상을 설파하고 야학당을 개설하였지만 글자를 모르는 문맹들이라 그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문법 연구와 한글 보급의 필요성을 깨닭아 한글 사용을 주장하였으나,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받았다. 결국 그는 한글 사용론에서 한발 후퇴한 국한문 혼용론을 주장하였다.[52]
조선문전과 대한문전은 제1장 총론, 제2장 언어론, 제3장 문장론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 총론은 한글 단어의 종류와 뜻, 문자와 음성에 대한 설명, 제2장은 단어의 동사, 명사, 조사 등 각 품사, 제3편은 각 문장에 관한 문법, 용법적인 것을 기술하였다. 그는 품사에 관한 설명에 품사 또는 언어 대신 '어종(語種)'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유길준의 어종, 품사의 분류는 후대 한글의 8품사 그대로다. 조사와 용언의 어미를 구별하여 기술하였으며, 각각 조동사, 접속사라 이름붙였다. 문장에 관한 것을 소개할 때는 부사를 설명하고 이것을 보족어(補足語)라고 이름붙였다.[52]
그는 백성들이 한자가 어려워서 해석하지 못한다고 보고 언문을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의 한글 전용보다는 국한문 혼용을 통한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조선도 일본처럼 언문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52]
한문은 너무 어렵고 뜻이 복잡하여 글을 배우지 못한 자들이 쉽게 배우지를 못하므로 보다 쉽고 간편한 한글을 연구, 보급시켜서 언문일치와 무지몽매한 조선 백성들에게 글과 신사상 교육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계몽시켜보자 라는 취지에서 한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문전을 써서 한글의 언어와 방언, 문법 등을 연구하였고 이를 여러번의 수정, 개정 끝에 대한문전으로 펴냈다.[52]
5. 저서
- 《서유견문》
-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 (1908년)
- 《영법로토(영국-프랑스-러시아-터키) 제국 가리미아(크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 《노동야학독본》
- 《구당시초》
- 《구당집》
- 《세계대세편》
- 《정치학》
- 《평화광복책》
- 《이태리 독립전사》
- 《파란 쇠망전사》
- 《구당서간집》
- 《유길준전서》
- 《문자지교》 - 후쿠자와 유키치 저
- 《조선문전》 - 1895년에 출판된 한국 최초의 사전이자 문법서.[2]
- 《대한문전》 - 1909년에 출판된 한국어 문법책.[1]
1971년에 유길준의 다섯 권의 책이 모두 재출판되었다.[1][2]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할아버지 | 유치홍 | 1800년 | ? | |
아버지 | 유진수(兪鎭壽) | 1825년 | 1898년 | |
어머니 | 한산이씨(韓山李氏) | 1824년 | 1900년 | |
형 | 유회준(兪會濬) | 1847년 | 호는 창랑(滄浪) | |
동생 | 유성준(兪星濬) | 1860년 음력 9월 7일 | 1934년 2월 27일 | |
부인 | 경주김씨(慶州金氏) | ? | 1874년 | |
부인 | 충주이씨(忠州李氏) | ? | ? | |
첫째 아들 | 유만겸(兪萬兼) | 1889년 7월 13일 | 1944년 12월 13일 | |
며느리 | 이름 미상 | 함경북도의 중인 출신, 유만겸의 본처 | ||
며느리 | 파평윤씨 | |||
손자 | 유병덕(兪炳德) | 1932년 | 2000년 6월 20일 | 감사원 제1국장[59], 제4국장, 감사원 심의실장 역임[60] |
둘째 아들 | 유억겸(兪億兼) | 1896년 10월 23일 | 1947년 11월 8일 | |
며느리 | 해평윤씨 | |||
외할아버지 | 이경직(李敬稙) |
7. 평가
유길준은 안창호[4]와 윤치호에게 애국자로 추모되었으나, 그의 노력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흥사단을 통해 국민 계몽에 힘썼고, 안창호는 이에 감화받아 흥사단을 재건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 가담,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주관,[4] 한성부민회를 통한 일본 고관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 강제 동원[4] 등은 비판받는 부분이다.
정치적으로 일본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일본의 호의를 의심했으며, 을사늑약과 한일 합방에 반대했다. 그러나 홀로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0년 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유길준은 병합에 반대하여 일본 정부가 수여한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1]
7. 1. 긍정적 평가
안창호[4]와 윤치호는 유길준을 애국자로 추모하였다. 안창호는 그를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4]'로 평가하고, 그의 흥사단을 본떠 흥사단을 재건하였다.윤효정은 유길준이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이자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윤효정은 "세상에는 상당한 학식과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자가 수없이 많지만 유길준처럼 그 뜻을 전적으로 펼쳐보지 못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17]"라고 하며, "그는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박학함과 본래 자신이 품고 있던 큰 야망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했고, 《서유견문》조차 제대로 간행을 끝내지 못했다[18]"라며 안타까워했다.
권동진은 삼천리지에서 유길준을 "그때 우내(宇內)의 대세를 살피는 정객이었다. 일찍 게이오 의숙을 마치고 미국 화성돈에 가서 보스턴 대학을 졸업한 당시에 있어서는 희유한 신지식의 소유자였다. 명문의 아들이었으며, 두뇌 명석하였고[40]", 또 "의지불굴의 기골이 있어 대각에도 올랐다[61]"고 평가하였다.
그는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넉넉히 급제할 수 있었지만, 관직에 오르는 지름길인 과거를 포기한 '선각자[10]'였다는 평가도 있다.
7. 2. 부정적 평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전국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한 점 등은 비판받는 부분이다.[4]1908년 그가 조직한 한성부민회에서 일본 고관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을 강제 동원한 것은 추악한 행각이라는 비판이 있다.[4] 일본 망명 후 귀국(1907년)하여 보인 '식산흥업과 교육 헌신, 정치 불참' 방침은, 곧 닥쳐올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실력양성론' 및 '일본 지도하 조선 문명화'와 유사하다는 비판도 있다.[4]
안창호는 그를 모범적 지도자로 추앙했지만,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교수 박노자는 안창호가 유길준을 '조선 민족의 모범적 지도자'로 미화하고 흥사단 명칭까지 본떴다고 비판했다. <윤치호 일기>에 유길준과 명성황후 시해의 관련성이 뚜렷함에도, 현행 교과서는 '근대화 선구자', '국민 계몽 주역' 등 긍정적으로만 서술한다는 비판도 있다.[4]
박노자는 1908년 한성부민회의 일본 고관 환영식 강제 동원을 비판하며, '교과서 등에서 유길준의 '계몽주의'가 어떤 계층을 위하고, 어떤 가치 구조를 가졌는지 올바르게 다뤄야 군국주의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4]
7. 3. 종합적 평가
안창호[4]와 윤치호는 유길준을 애국자로 추모하였다. 조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그의 흥사단에 감화받아, 다시 흥사단을 재건하였다.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전국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한 점 등은 비판,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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