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창
1. 개요
서재창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처형된 조선 후기의 개화파 인물이다. 186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박규수, 유대치의 문하에서 개화 사상을 접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 문물을 익혔다. 갑신정변 실패 후 체포되어 1884년 1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으며, 1895년 서광범의 건의로 복권, 1908년 최종 복권되어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서광효, 형 서재필 등이 있으며, 그의 가족은 갑신정변 실패로 몰락하였으나 후손들이 생존하여 가계를 이어갔다.
| 이름 | 서재창 |
|---|---|
| 한자 표기 | 徐載昌 |
| 로마자 표기 | Seo Jaechang |
| 한글 표기 | 서재창 |
| 아명 | 서창필(徐昌弼) |
| 출생 | 1866년 10월 29일 |
|---|---|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동복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 |
| 사망 | 1884년 12월 13일 (19세)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종로방 군기시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배우자 | 안동 김씨 부인(본부인), 평양 조씨 첩(측실) |
|---|---|
| 부모 | 서광래(양부), 서광효(생부), 성주 이씨 부인(생모) |
| 친척 | 서상기(친조부), 서상우(양조부), 서호석(조카), 서희원(서손자), 서재형(이복 형), 서씨 부인(이복 누나), 정해은(이복 매부), 서재춘(친형), 서재필(친형), 서재우(친아우), 서기석(친누이동생), 서재영(사촌 남동생), 서광하(7촌 재종숙부), 이교문(외사촌 형), 서광범(13촌 족숙부), 서명원(종손자), 서희원(종손자), 이용순(외종손자) |
| 자녀 | 서찬석(양적자) |
| 복무 | 조선 관군 |
|---|---|
| 복무 기간 | 1882년 ~ 1884년 12월 |
| 최종 계급 | 조선 육군 중사 |
| 소속 | 조선 육군 무위영 별기군 작전관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갑신정변 |
| 교육 |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 단기과정 수료 |
|---|---|
| 기타 이력 | 증(贈) 규장각부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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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마 대학 동문 -
긴류 시즈카
긴류 시즈카는 렌뇨 연구를 중심으로 호쿠리쿠 지역 종교사, 홋카이도 불교사, 잇코잇키를 연구한 일본의 학자이자 승려로, 도야마 대학 졸업 후 나고야 대학에서 아미노 요시히코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원만사 주지, 본원사 사료 연구소 연구원 및 부소장을 역임했다. -
도야마 대학 동문 -
요시다 미쓰키
요시다 미쓰키는 일본의 분자생물학자이자 의학자로, 온코바이러스와 암의 관계를 밝히고 성인 T 세포 백혈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등 암 연구 분야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
19세기 한국 사람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19세기 한국 사람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급진개화파 -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868년부터 18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의 급격한 개혁으로, 도쿠가와 막부 붕괴 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폐번치현, 징병제, 학제 개혁, 서구 문물 수용 등을 통해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나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시기이다. -
급진개화파 -
권동진
권동진은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가담 후 천도교에 입교, 3·1 운동 민족대표,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2. 생애
전라남도 동복군 출신으로, 전라도 보성군에서 성장하였다. 일찍이 개화사상을 접하고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군인으로 복무하여 정6품 무위영 별기군 작전관에 이르렀다. 박규수, 유대치의 문인이었다.
생전에 친척 서상우의 양손자로 입양되었으나 후사는 없다.
1884년 김옥균, 서광범, 형 서재필 등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후 복권과 추탈을 거쳐 1908년 최종 복권되었고, 증 규장각부제학에 추증되었다.
2.1. 출생과 가계
1866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528번지 가내마을(당시 동복군 문덕면 용암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전라도 보성군 용문면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대구이며, 다른 이름은 창필(昌弼)이다.
아버지는 동복군수를 지낸 서광효이며, 어머니는 이기대(李基大)의 딸인 성주 이씨이다. 부모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또는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로는 영조의 장인인 달성부원군 서종제, 연잉군 추대를 시도했던 서덕수, 정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 등이 있다.
위로 친형 서재춘과 7촌 아저씨 서광하의 양자로 간 형 서재필, 이복 형 서재형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또는 형) 서재우가 있었다. 누나 1명과 여동생 1명도 있었다. 큰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의 정해은(鄭海殷)과 결혼했다.
1884년 19세 때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친척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서재창 본인에게는 후손이 없으나, 생가의 형 서재춘의 아들들과 동생(또는 형) 서재우의 유복자 등을 통해 가계가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형 서재필 등과 함께 박규수, 유대치의 문하에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접했다. 이후 어윤중, 유대치, 이동인 등의 권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사학, 영어, 양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에는 농업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2.2. 유년기와 수학
1866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당시 동복군 문덕면)에서 동복 군수를 지낸 서광효와 성주 이씨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또는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대구이며, 다른 이름은 창필(昌弼)이다. 영조의 장인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8대손이며,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 등이 그의 선조였다. 위로 친형 서재춘, 7촌 아저씨 서광하의 양자로 간 서재필, 이복 형 서재형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 서재우가 있었다. 누이도 2명 있었다.
어려서부터 형 서재필 등과 함께 개화사상의 선구자인 박규수, 유대치의 문하에 드나들며 새로운 사상을 접했다. 이후 어윤중, 유대치, 이동인 등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영어, 양잠학, 군사학 등을 공부하였다. 형 서재필과 함께 도야마 육군 학교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1884년 7월 개화당의 갑신정변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농업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884년 19세 때, 사직동에 살던 먼 친척이자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2.4. 갑신정변 참여와 최후
1884년 (고종 21년) 1월부터 7개월간 일본의 도야마 육군 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7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마치고 1884년 7월 수료한 뒤 귀국하여 정6품의 품계를 받고 무위영 별기군 작전관에 임명되어 조선의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귀국 직후부터 상중이던 형 서재필, 박영교 등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군사 동원을 준비하였다. 그해 10월 11일에는 우정국 개설을 앞두고 우정국 사사(司事)에 임명되어 개설 업무에도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김옥균, 서광범, 형 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청군이 개입하였다. 박영교, 홍영식 등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피신한 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서재창은 한성부로 들어오는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병력의 열세로 부대는 전멸하고 패주하였다.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정변에 참여했던 이희정(李喜貞), 김봉균(金奉均), 신중모(申重模), 이창규(李昌奎), 이윤상(李允相), 오창모(吳昌模), 차홍식(車弘植), 남흥철(南興喆), 고흥종(高興宗), 이점돌(李點乭), 최영식(崔英植) 등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동지들이 처형당하자 서재창은 몸을 숨기고 도피를 시도했으나, 변복하고 상노를 앞세워 도주하던 중 수색 중이던 관군에게 붙잡혀 포도청(捕盜廳)에 감금되었다.
체포된 직후부터 수구파가 장악한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연일 탄핵 상소가 올라갔다. 서재창은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어 국문을 받았고, 결국 12월 13일 능지처참 판결을 받았다. 같은 날, 서재창은 박영효와 김옥균이 이끌던 독립당원들과 이창규, 오창모 등 네 명과 함께 금위영 국문장에서 끌려 나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는 당시 19세였다. 그의 가족들도 연좌되어 투옥되었고 일부는 자살하였으나, 형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졌다.
2.5. 가족의 몰락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서재창은 처형을 피하기 위해 변복하고 상노를 앞세워 도주했으나, 수색 중이던 관군에게 붙잡혀 10월 21일 포도청에 감금되었다. 체포된 직후부터 수구파 내각이 장악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 상소가 연이어 올라갔다. 서재창은 의금부로 이송되어 국문을 받았고, 12월 13일 참수형이 선고되었다. 같은 날, 그는 박영효와 김옥균이 이끌던 개화파 동지 이창규, 오창모 등과 함께 금위영 국문장에서 끌려 나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 당했다. 그의 나이는 당시 19세였다.
셋째 형 서재필은 박영효, 김옥균 등과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에 숨어 겨우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다. 주조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제물포까지 피신했으나, 출국 직전 다케조에가 변심하여 이들을 배에서 내리라고 요구하며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재창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에게는 가혹한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 아버지 서광효는 옥중에서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 맏형 서재춘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 둘째 형은 관군에게 살해당했다.
* 어머니 성주 이씨와 형수 광산 김씨는 관노들이 들이닥치자 독약을 마셨다. 시어머니는 즉사했으나 며느리는 죽지 못하자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기록에서는 이들이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도 살해당했다.
* 담양군 남면 지실의 정해은에게 시집간 큰누나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면했다.
*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쳐 가산이 탕진되고 가족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손자 이용순은 살아남아 훗날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참극 속에서도 일부 가족은 살아남았다. 맏형 서재춘의 아들 서찬석(徐灒錫, 1882년생)과 서호석(徐灝錫), 그리고 동생 서재우의 유복자 아들 서호석(徐昊錫)이 기적적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동생 서재우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훗날 사면되었다.
3. 사후
갑신정변 실패 후 처형당한 뒤, 1894년 12월 16일 이후 척족 대신들은 그의 시신을 훼손하여 길에 걸어놓으라고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으며 현재까지 묘소도 없다. 아버지 서광하의 묘소는 충청남도 은진에, 어머니 성주 이씨의 묘소는 논산군 연무읍 죽평리(연무대 자리)에 있었으나 후에 육군 제2훈련소가 들어서면서 근처로 이장되었다. 형 서재춘과 형수 광산 김씨(서재필의 본처)의 시신 역시 수습되어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집안에서는 이름의 항렬자인 '광(光)'자 대신 '병(丙)'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원래의 항렬자를 그대로 쓰기도 하였다.
1895년 3월 1일,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개화파 동지이자 13촌 족숙인 서광범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후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면서 다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최종적으로는 1908년 3월 25일에 사면되어 복권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 순종의 특별 명령으로 하응선, 윤영관(尹泳觀), 백낙운(白樂雲) 등과 함께 증 통정대부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어 사후에나마 명예를 회복하였다.
4. 가족 관계
대구 서씨로, 영조의 장인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8대손이며,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 등이 그의 선조이다.
아버지는 동복군수를 지낸 서광효이고 어머니는 성주 이씨이다. 5남 2녀 중 넷째 아들(또는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친형 서재춘, 서재필(7촌 아저씨 서광하의 양자로 감), 누나 한 명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서재우, 여동생 서기석이 있었다.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도 있었다. 큰누나는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담양군의 연일 정해은(鄭海殷)에게 시집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19세 때인 1884년에는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12촌 할아버지뻘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양아버지는 서광래(徐光萊)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큰 비극을 겪었다. 아버지 서광효는 옥중에서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어머니 성주 이씨 역시 남편을 따라 자결했으나, 일설에는 관노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결했다고도 한다. 맏형 서재춘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둘째 형은 관군에게 살해당했다. 형 서재필의 부인 광산 김씨는 시어머니(서재창의 어머니)와 함께 독약을 마셨으나 바로 죽지 못하자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 자결했다. 이복형 서재형 역시 처형되었고, 서모와 다른 이복 동생들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외가까지 미쳐 가산이 탕진되는 참변을 당했으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손자 이용순은 살아남아 훗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참화 속에서도 일부 가족은 살아남았다. 큰누나 외에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함경도로 피신하여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평민 이씨와 결혼했다. 맏형 서재춘의 아들 서찬석(徐灒錫, 1882년생)과 서호석(徐灝錫), 그리고 당시 나이가 어려 사형을 면한 동생 서재우와 그의 유복자 서호석(徐昊錫)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가계를 이었다.
서재창 본인은 부인 안동 김씨(1865년 ~ 1941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다. 사촌 동생 서재영의 아들 서찬석(徐讚錫, 1893년생)을 양자로 삼았다. 또한 측실 평양 조씨에게서 아들을 두었고, 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서희원(徐希源, 1924년 ~ 2004년)은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교수를 지냈다.
| 구분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선조 | 8대조 | 서종제 | 영조의 국구(장인), 달성부원군 | |
| 선조 | 서용보 | 정조 때 영의정 | ||
| 조부모 | 친할아버지 | 서상기(徐相夔) | ||
| 친할머니 | 울산 김씨 | 김구조(金龜祖)의 딸 | ||
| 양조부모 | 양할아버지 | 서상우(徐相雨) | 1831년 ~ 1903년 | 보국숭록대부, 12촌 할아버지뻘 |
| 양할머니 | ||||
| 부모 | 친아버지 | 서광효(徐光孝) | 1800년 8월 22일 ~ 1884년 12월 19일 | 동복군수, 자는 성규(聖規), 다른 이름 광언(光彦). 갑신정변 후 자결 |
| 친어머니 | 성주 이씨(星州 李氏) | 1830년 ~ 1884년 12월 19일 | 이기대(李基大)의 딸. 갑신정변 후 자결 (또는 1885년 1월 노비로 끌려가 자살) | |
| 양아버지 | 서광래(徐光萊) | 서상우의 아들 | ||
| 서모 | 이름 미상 | 갑신정변 후 관비로 끌려감 | ||
| 형제자매 | 이복형 | 서재형(徐載衡) | 1851년 ~ 1884년 12월 13일 | 갑신정변 후 처형 |
| 친형 | 서재춘(徐載春) | 1859년 3월 4일 ~ 1888년 9월 5일 | 갑신정변 후 음독 자살 | |
| 친형 | 서재필(徐載弼) | 1864년 1월 4일 ~ 1951년 1월 5일 | 7촌 아저씨 서광하에게 양자로 감 | |
| 본인 | 서재창(徐載昌) | 1866년 ~ 1884년 12월 13일 | 다른 이름 창필(昌弼) | |
| 친동생 | 서재우(徐載雨) | 1868년 ~ 1905년 | 다른 이름 재우(載愚). 갑신정변 당시 어려서 사형 면함 | |
| 누나 | 서씨 | 갑신정변 전 출가하여 연좌제 면함. 매형 정해은(鄭海殷, 본관 연일). | ||
| 여동생 | 서기석 | 갑신정변 후 함경도로 피신, 이씨 성 가진 평민과 결혼 | ||
| 배우자 | 본처 | 안동 김씨(安東 金氏) | 1865년 ~ 1941년 3월 3일 | |
| 측실 | 평양 조씨(平壤 趙氏) | |||
| 자녀 | 양자 | 서찬석(徐讚錫) | 1893년 1월 29일 ~ ? | 사촌 동생 서재영의 아들. 부인 해평 윤씨(1892~?). |
| 아들 (측실 소생) | 이름 미상 | |||
| 손자 | 서정원(徐程源) | 1917년 ~ ? | 양자 서찬석의 아들 | |
| 서희원(徐希源) | 1924년 2월 21일 ~ 2004년 4월 7일 | 측실 소생 아들의 아들.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법학 교수, 송제교육재단 이사장. |
5. 기타
당시 의금부에서 작성한 추국안에 의하면 그는 주로 검은 양복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형 서재춘의 손자 서태원(전 감신대 교수)은 한국전쟁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었다. 생존 자손으로는 현재 종손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희원, 서태원의 아들이며 서재필의 종증손자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서동성이 있다. 서동성은 변호사 활동 외에 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 공동회장과 서재필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종손 서명원은 생부를 잃고 백부의 손에 자랐다고 하며,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은 혈육으로는 서재춘의 아들 서호석, 서찬석, 손자 서명원, 손자 서태원, 동생 서재우의 아들 서호석, 누이 서기석의 후손 등이 있었다. 1983년 당시 종손 서희원의 증언에 따르면, 서재필의 친족 약 50여 명이 미국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종증손자 중 한 명은 유길준의 증손녀와 결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