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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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영식은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아들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873년 문과에 급제했다. 1880년 정삼품에 승진한 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우정총국의 총판을 맡아 근대 우편 제도 정비에 힘썼다. 김옥균 등과 급진개화파를 형성하여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나 실패하여 청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후 신원되어 복권되었으며, 충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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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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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한글 | 홍영식 |
한자 | 洪英植 |
로마자 표기 | Hong Yeong-sik |
생애 | |
출생 | 1855년 10월 15일 |
사망 | 1884년 12월 6일 (향년 29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홍순모 |
학력 | |
최종 학력 | 박문국 |
경력 | |
주요 경력 | 우정총국 총판 박문국 총판 한성순보 발행 |
2. 생애
1873년 문과에 급제한 홍영식은 1880년 정삼품으로 승진하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한 후 일본육군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882년 참의교섭통상사무, 1883년 종이품으로 승진하여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1] 1883년 11월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품종 농작물과 농기계 도입을 조정에 건의하였다.[1] 1884년 3월 우정총변이 되어 근대 우편 제도 정비에 힘썼다.[3]
김옥균 등과 급진개화파를 형성한 홍영식은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청나라를 배후로 하는 흥선대원군 세력을 몰아내고 신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2. 1. 생애 초반
홍영식은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차남으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873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고 1880년 정삼품에 승진하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일본육군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1881년 11월), 참의교섭통상사무(1882년)를 거쳐 1883년 1월 종이품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12월에는 병조참판, 1884년 3월에는 우정총변이 되어 근대 우편 제도 정비에 힘썼다.한편, 김옥균 등과 함께 급진개화파를 형성하였다.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청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흥선대원군 세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홍영식은 1856년 2월 5일, 훗날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좌부승지였던 아버지 홍순목은 이미 사별하고 37세에 재혼한 부인 전주 이씨에게서 홍영식을 얻었다.[3] 홍순목에게는 큰아들 홍만식(洪萬植)이 있었으나, 홍영식의 큰아버지 홍순경(洪淳敬)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1849년 홍순경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1853년 부인을 잃고 재혼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홍영식이다.[3]2. 1. 2. 소년 시절
어려서 병약했던 홍영식은 8세에 생모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홍순목은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면, 이재선, 이명복(훗날의 고종)에게 글을 가르쳤으나, 홍영식은 박규수와 오경석의 문하에 가서 글을 배웠다.1868년 그는 양주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후에 이씨와 재혼하였다. 1869년경부터 박규수의 문하생으로서 지도를 받으며 서재필,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이동인 등과 서로 잘 알고 지냈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청나라인 위원의 《해국도지》, 청나라 사람 서계여의 《영환지략》 등 중국의 개화서와 박지원의 《연암집》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해나갔다. 또한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1876년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유대치로 알려진 유홍기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청소년 무렵에 신문물을 접하면서 신학문에 열중하면서 부인 양주 조씨와의 관계는 다소 멀어졌고 보수적인 부친 홍순목과는 항상 상반된 의견으로 대립이 잦았다 한다. 그 중간에서 형 홍만식의 중재로 평온을 유지하였다.
2. 1. 3. 관직 생활
1872년(고종 9년) 음력 7월 칠석제(七夕製)에서 고종이 친히 주관하는 대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전시 응시 자격이 주어져 18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홍순목은 아들에게 관직을 맡기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판단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여 2년간 사가독서를 허락받았다.[3] 이후 1878년 4월 11일(음력 3월 9일) 교리, 1878년 12월 22일(음력 11월 29일) 문학, 1880년 9월 13일(음력 8월 9일) 상례, 1880년 음력 12월 참의를 역임했다.[3] 규장각 정자·대교, 규장각 직각,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다.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약 4개월간 일본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했다.
2. 2. 개혁 개화 정책
187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80년 정삼품으로 승진한 홍영식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한 후 일본 육군의 구성과 규칙 등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에 파견되었을 당시 병제 시찰뿐 아니라 우편 제도에도 관심을 보였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에지마에게 직접 조선에 우편 제도 도입을 권유받았다고 한다.[3] 1870년대부터 일본에서 시행되던 우편제도를 상세히 검토하고, 당시 일본인들이 부산에서 멋대로 우편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였다. 또한 조선이 우편제도를 시행하도록 적극 도와줄 것과, 조선에서 우편제도가 시행되면 조선의 제도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냈다.1882년 참의교섭통상사무, 1883년 종이품에 승진,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에 건너갔다.[1] 1883년 11월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1] 12월에는 병조 참판, 1884년 3월에는 우정총변이 되어 근대 우편 제도 정비에 힘썼다.[3] 1883년 1월 12일 (1882년 음력 12월 4일) 교섭통상아문에 근대식 체신기관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자, 우정사 담당 협판이 되었다.[3] 1883년 음력 9월 보빙사 부사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했으며, 귀국 후 고종에게 우편 업무 개설을 건의하였다.[3][2] 1884년 4월 22일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되자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에 임명되었다.[3]
한편 김옥균 등과 급진개화파를 형성했다. 1882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국가 개혁 방안을 토론하였다.
1882년 음력 12월부터 덴마크와 미국의 전신회사들과 교섭하여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1883년 1월 24일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에 약정을 허가하고 계약하여, 조선에 전신 통신선 설치 공사를 시작하였다.
2. 2. 1. 견문과 개화 활동
1881년(고종 18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김옥균, 박정양, 어윤중, 조준영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시찰하였다. 이때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온 이상재와도 교류하였다. 홍영식은 일본의 군사 시설을 시찰하며 《일본육군총제 日本陸軍總制》, 《일본육군조전 日本陸軍操典》 등을 작성했다.1870년대부터 일본에서 시행되던 우편제도를 상세히 검토하고, 당시 일본인들이 부산에서 멋대로 우편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였다. 또한 조선이 우편제도를 시행하도록 적극 도와줄 것과, 조선에서 우편제도가 시행되면 조선의 제도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냈다. 이후 1882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국가 개혁 방안을 토론하였다.
귀국 후 민영익과 함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 겸 총리국장으로 군무사 총리국(總理局)을 관장했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 규장각직제학, 규장각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임오군란 때는 시위대를 설득, 군란 수습에 기여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신설되자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종2품으로 승진하여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2. 2. 2. 미국 사절단 파견
1883년(고종 20년) 6월, 전년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 사절이 한성부를 방문하고 돌아가자, 조선 정부는 미국에 대한 답방으로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이때 홍영식은 보빙부사 겸 전권부대신에 임명되어 보빙사 겸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1]보빙사에는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이 임명되었고, 그 밖의 시종무관들과 수행원들, 청나라 사람 오예당이 함께 출발하였다.[1] 홍영식과 민영익 일행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 도쿄를 거쳐갈 때 일본인 오카모토(宮岡恒次郞)를 통역관으로 참여시키고, 안내 겸 비서로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한국명 노월(魯越))을 고용하였다.[1] 이들은 태평양을 건너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였다. 일행은 기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9월 15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였다.[1]
2. 2. 3. 농기계 도입
1883년 11월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1] 그는 미국 워싱턴 D.C를 시찰하면서 기관차와 버스를 목격했고, 농작물을 수확, 절단하는 기계를 보고 이를 건의한 것이었다.[1]2. 2. 4. 우편 제도 도입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홍영식은 병제 시찰이 주 목적이었으나 우편 제도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에지마의 자서전 《우편창업담》에 따르면, 홍영식은 역체국을 방문하여 우편 관련 질문을 하고 모든 서류를 받았으며, 직원에게 우편 실무 설명을 듣고 마에지마에게 직접 조선에 우편 제도 도입을 권유받았다고 한다.[3]1883년 1월 12일(1882년 음력 12월 4일) 교섭통상아문에 근대식 체신기관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자, 홍영식은 우정사 담당 협판이 되었다.[3] 1883년 음력 9월 보빙사 부사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했으며, 귀국 후 고종에게 우편 업무 개설을 건의하였다.[3][2] 1884년 4월 22일(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되자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에 임명되었고,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서울·인천 간 근대식 우편 제도를 실시하였다.[3]
우정총국 건물은 선조 때 전의감(典醫鑑)으로 지어진 건물을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홍영식은 제물포에 최초로 분국을 설치하고, 인천, 부산 등 외국인과 교통이 잦은 곳에 임시 우정국 분국을 설치했다. 또한 박정양이 추천한 이상재를 제물포 우정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문위우표(文位郵票) 5종을 일본 인쇄소에 인쇄, 주문하였다. 그중 5문, 10문 2종은 1884년 10월 국내에 들어왔으나, 25문, 50문, 100문은 국내에 반입되지 못하였다. 우편 업무 취급 장정 제정, 인력 및 장비 준비를 거쳐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한성과 제물포분국, 인천분국 간 우편물 교환을 시작하였다.
2. 2. 5. 전신 도입
1882년 음력 12월부터 덴마크와 미국의 전신회사들과 교섭하여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1883년 1월 24일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에 약정을 허가하고 계약하여, 조선에 전신 통신선 설치 공사를 시작하였다.일본 규슈의 서북쪽 해안에서 쓰시마섬을 연결하여 조선의 부산 해안에 이르는 전선을 설치하고, 다시 부산에서 국내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신을 설치하는 공사를 체결하기 위해 1월 24일 일본과 조·일 간 조관 조약(條款條約)을 체결, 서명하였다.
2. 3. 갑신정변과 최후
1884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3월 우정총국이 설치되자 우정국총판(總辦)이 되어 우정사업을 담당했다. 그는 김옥균 등과 정변을 계획하였으나, 정변 계획이 탄로나자 기일을 앞당겨 우정국 낙성식으로 정하게 된다.[1]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국 총판에 임명되어 우정국의 설립에 전력하였다. 개화정책이 민씨정권에 의해 벽에 부딪히고 명성황후 등은 일부 급진파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그는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척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는 동조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왕실 인사들을 포섭하는 방안을 내세웠다. 1884년 7월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관생도 14명이 귀국하자 박영효, 김옥균 등과 정변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새어 나가자 다시 우정국 낙성식으로 거사 일을 바꾸었다. 그해 8월 신식 군사 훈련을 경계한 수구파의 반발로 조련국이 축소, 유명무실화되고 일부 사관들이 해임되면서 그는 이들을 우정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상주하여 우정국에서 임시로 머물게 한다.[1]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왕과 왕비는 경우궁으로 피신하고, 수구파 대신들은 왕명으로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진 뒤 살해되었다. 고종과 민비 내외를 호종하던 그는 정변이 성공하자 친위영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포장(右捕將)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의정을 거쳐서 갑신 내각의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 만에 진압되고 만다.[1]
3. 사후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홍영식은 청군에게 살해되었다.[3] 그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사형되었다는 설도 있다.[4]
1884년 12월 17일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그날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따라 일가 20여 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였고, 홍만식은 스스로 자수해서 살아남았으나, 1년이나 복역했다.[3] 아버지 홍순목은 자기 손자(홍영식의 아들)를 독살한 다음 왕궁을 향해 3배를 올린 뒤 자결하고, 계모 역시 자결하였다. 부인 이씨와 첩 한씨도 자결하였다. 그의 동생 홍정식(洪正植)은 이름을 홍정표(洪正杓)로 바꾸고 겨우 살아남았다.[5]
4. 평가
그는 수완이 있었고 해외 사정에 밝았으며, 온화하고 순박한 성품으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3] 박영효는 김옥균과 함께 정변 계획을 구상한 '모의 총람의 제 일인자'라고 평가했다. 반면,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영식을 건방지다고 혹평하기도 했다.[3]
5. 가족 관계
- 할아버지: 홍종원(洪鍾遠)
- 큰아버지: 홍순경(洪淳敬)
- 아버지: 홍순목(洪淳穆, 1816년~1884년, 시호는 문익)
- 어머니: 전주 이씨
- 계모: 이름 미상
- 형님: 홍만식(洪萬植, ?~1905년 11월 27일(음력 11월 1일), 시호는 충정), 큰아버지 홍순경의 양자로 감
- 동생: 홍정식(洪正植, 다른 이름: 홍정표(洪正杓))
- 부인: 양주 조씨(?~1875년)
- 후첩: 한씨(?~1884년), 음독 자살
- 부인: 이씨(?~1884년), 음독 자살
- 아들: 이름 미상, 1879년~1884년 독살당함
- 양자: 홍성겸(洪性謙)
- 양손자: 홍현기(洪賢基)
- 양손자: 홍응기(洪應基)
홍성겸의 아들 홍현기, 홍응기 등은 모두 6·25 전쟁 때 실종되었다. 홍응기의 아들 홍석호와 딸 홍해진은 외할아버지 심호섭에 의해 양육되었다. 홍응기가 경성부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중·고교)에 다닐 때 박영효가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홍응기의 부인 심재봉은 친정아버지인 충남 당진군 합덕면 운산리 심호섭의 집에 내려가 홍석호와 홍해진을 양육하였다.
참조
[1]
뉴스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
뉴스
[3]
뉴스
근대 우편은 언제 시작됐나 : '우편, 우표, 우체국 이야기'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06-04-21
[4]
백과사전
개화정책과 그 반향
글로벌세계대백과
[5]
서적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6]
웹사이트
제중원
http://navercast.nav[...]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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