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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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1839년 독일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로이센 왕국 육군에서 기병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친구였으며, 1885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의 제국 변무관을 역임하며 식민지 통치를 이끌었다. 이후 아이티 총영사를 지냈으나, 자유주의적인 성향과 유색 인종에 대한 발언으로 인해 조기 퇴관 후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괴링은 1913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헤르만 괴링은 나치 독일의 고위 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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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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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 |
원어 이름 | Heinrich Ernst Göring |
직업 | 독일 외교관 |
경력 | |
직책 |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제국 전권 위원 |
임기 시작 | 1885년 5월 |
임기 종료 | 1890년 8월 |
이전 | 구스타프 나흐티갈 |
다음 | 루이스 넬스 |
직책 2 |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주재 독일 공사 |
임기 시작 2 | 1892년 |
임기 종료 2 | 1895년 |
이전 2 | 에두아르트 그리제바흐 |
다음 2 | 하인리히 폰 룩스부르크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39년 10월 31일 |
출생지 | 에메리히암라인,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913년 12월 7일 |
사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배우자 | 프란치스카 티펜브룬 |
자녀 | 5명 (헤르만, 알베르트 포함) |
친척 | 에다 괴링 (손녀) |
2. 초기 생애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1839년 10월 31일 엠메리히암라인에서 빌헬름 괴링(1791–1874)과 카롤리네 마리아 데 네레(1815–1886)의 아들로 태어났다.[9] 프로이센 왕국 라인 주(Rheinprovinz) 출신으로, 본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본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9] 프로이센 왕국 육군에 입대하여 기병 장교가 되었으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프로이센 왕국 라인 주(Rheinprovinz)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 육군에 입대하여 기병 장교가 되었으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14]
프로이센 왕국 라인 주 (Rheinprovinz)에서 태어났다. 본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본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센 왕국 육군에 입대하여 기병 장교가 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도 참전했다.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개인적인 친구였던[9] 그는 1885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현 나미비아)의 제국 변무관을 역임했다.[9] 괴링은 헤레로족과 호텐토트족 등 독일 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한 부족을 달래어 남서 아프리카 통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빈트후크에는 한때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하기도 했다.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아이티 총영사를 지냈다.[9] 그러나 독일 제국 고위 관료로서는 드물게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었고, 식민지 현지인인 유색 인종들을 인간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입지가 약해졌다.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아이티 총영사를 끝으로 조기 퇴관해야 했다.[10]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10]
괴링은 5명의 자녀를 둔 아내 카롤리네보다 먼저 사망했다. 남서 아프리카 파견 전인 1885년 봄, 식민지 통치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되었으며, 티롤 출신의 프란치스카 티펜브룬과 재혼했다. 프란치스카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넷째 아들이자 차남이 1893년 1월 12일에 태어난 헤르만 괴링이다.[11]
아이티에서 귀국한 후, 괴링 가족은 잠시 베를린의 프리데나우(Friedenau)에서 거주했다. 1900년부터는 남서 아프리카 시절에 알게 된 친구이자 아내 프란치스카와 연인 관계였던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의 잘츠부르크 교외 마우테른도르프 성(Burg Mauterndorf)과 뉘른베르크 북쪽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Neuhaus an der Pegnitz)의 펠덴슈타인 성(Burg Veldenstein)에서 살았다.[12][13]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의 관계를 처음에는 묵인했지만,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3년 에펜슈타인에게 리리라는 젊은 애인이 생겨 프란치스카가 소외되자, 에펜슈타인과 심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괴링 가족은 1913년 봄 펠텐슈타인 성을 떠나 뮌헨에서 살게 되었으나, 병상에 눕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아들 헤르만은 바덴 육군 보병 연대 '프린츠 빌헬름' 소위였지만, 휴가를 받아 뮌헨의 묘지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4] 헤르만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경멸하고 대부인 에펜슈타인을 존경했지만,[15]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외교관으로서의 위대함을 알고 후회하며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14]
3. 군 경력
1885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현 나미비아)의 제국 변무관을 맡아 헤레로족과 호텐토트족 등 독일 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한 부족을 달래어 남서 아프리카 통치를 성공시켰다. 빈트후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하기도 했다.[15] 그 후,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아이티의 총영사를 지냈다.[9] 그러나, 괴링은 독일 제국 고위 관료로서는 드물게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었고, 식민지 현지인인 유색 인종들을 인간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져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아이티 총영사를 지낸 후 조기 퇴관을 하였다.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10]
4. 경력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개인적인 친구가 되었고, 1885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현 나미비아)의 제국 변무관을 맡았다. 괴링은 헤레로족과 호텐토트족 등 독일 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한 부족을 달래어 남서 아프리카 통치를 성공시켰다.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의 거리에는 한때 그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제국 판무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네덜란드어에 능통하여 1885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초대 제국 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2] 당시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상업적 이익을 위해 국가 재정으로 식민지 행정부를 창설해야 했다.[2]
괴링은 주요 헤레로족 추장인 마하레로와 "보호 조약"을 체결했지만,[3] 괴링이 지원을 제공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었다. 나마족의 반복적인 무장 공격으로 조약의 무력함이 증명되었다. 결국 몇 년 후 마하레로는 조약을 파기하고 헤레로 영토에서 괴링을 추방했다.[4]
1887년경 금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사기로 밝혀졌다. 금광으로 추정되는 곳은 암벽에 발사된 금 조각의 잔해였다. 사기범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호령에 투자를 유치하려던 괴링에게 의심이 쏠렸다.[4]
예상되었던 금 매장량은 독일 정착민과 투자자들을 서아프리카로 몰려들게 했고, 이들의 행동은 헤레로족을 더욱 소외시켰다. 이것은 결국 헤레로와 나마 족 학살 (1904–1908)로 이어졌다. 헤레로족의 두개골은 카이저 빌헬름 인류학, 인간 유전학 및 우생학 연구소에서 우생학 정책 연구에 사용되었다.[1]
괴링은 헤레로족과 오르람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1890년 8월 남서 아프리카를 떠났다.[5] 이후 1892년부터 1895년까지 괴링은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일 주재 공사로서 포르토프랭스에 거주했다.[6]
; 아이티 총영사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아이티의 총영사를 지냈다.[9] 그러나 독일 제국 고위 관료로서는 드물게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었고, 식민지 현지인인 유색 인종들을 인간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져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아이티 총영사를 지낸 후 조기 퇴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10]
; 퇴임 이후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아이티 총영사를 지낸 후 조기 퇴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10]
괴링은 5명의 자녀를 둔 아내 카롤리네 드 네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티롤 출신의 프란치스카 티펜브룬 (Franziska Tiefenbrunn)과 재혼했다. 프란치스카와의 사이에서도 5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넷째 아들인 차남이 헤르만 괴링이었다.[11]
아이티에서 귀국한 후, 괴링 가족은 잠시 베를린의 프리데나우 (Friedenau)에서 살았다. 1900년부터는 남서 아프리카 시대에 알게 된 친구이자 아내 프란치스카와 연인 관계였던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 (Hermann Ritter von Epenstein)의 잘츠부르크 교외의 마우테른도르프 성 (Burg Mauterndorf), 이어서 뉘른베르크 북쪽의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 (Neuhaus an der Pegnitz)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 (Burg Veldenstein)에서 살게 되었다.[12][13]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의 관계를 처음에는 묵인했던 하인리히 괴링이었지만, 1913년 에펜슈타인에게 리리라는 젊은 애인이 생겨 프란치스카가 소외되자, 에펜슈타인과 심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1913년 봄에 괴링 가족은 펠텐슈타인 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괴링은 뮌헨에서 살았지만, 병상에 눕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아들 헤르만은 이 무렵 바덴 육군 보병 연대 '프린츠 빌헬름'의 소위였지만, 휴가를 받아 뮌헨의 묘지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4]
헤르만은 어렸을 때, 아버지 하인리히 괴링에 대해 퇴관 후 알코올에 빠진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경멸했고, 대부인 에펜슈타인을 더 존경했다.[15] 그러나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외교관으로서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한 번도 가지려 하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하며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14]
4. 1.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제국 판무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네덜란드어에 능통하여 1885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초대 제국 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2] 당시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상업적 이익을 위해 국가 재정으로 식민지 행정부를 창설해야 했다.[2]
괴링은 주요 헤레로족 추장인 마하레로와 "보호 조약"을 체결했지만,[3] 괴링이 지원을 제공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었다. 나마족의 반복적인 무장 공격으로 조약의 무력함이 증명되었다. 결국 몇 년 후 마하레로는 조약을 파기하고 헤레로 영토에서 괴링을 추방했다.[4]
1887년경 금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사기로 밝혀졌다. 금광으로 추정되는 곳은 암벽에 발사된 금 조각의 잔해였다. 사기범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호령에 투자를 유치하려던 괴링에게 의심이 쏠렸다.[4]
예상되었던 금 매장량은 독일 정착민과 투자자들을 서아프리카로 몰려들게 했고, 이들의 행동은 헤레로족을 더욱 소외시켰다. 이는 결국 헤레로와 나마 족 학살 (1904–1908)로 이어졌다. 헤레로족의 두개골은 카이저 빌헬름 인류학, 인간 유전학 및 우생학 연구소에서 우생학 정책 연구에 사용되었다.[1]
괴링은 헤레로족과 오르람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1890년 8월 남서 아프리카를 떠났다.[5] 이후 1892년부터 1895년까지 괴링은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일 주재 공사로서 포르토프랭스에 거주했다.[6]
4. 2. 아이티 총영사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아이티의 총영사를 지냈다.[9] 그러나 독일 제국 고위 관료로서는 드물게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었고, 식민지 현지인인 유색 인종들을 인간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져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아이티 총영사를 지낸 후 조기 퇴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10]
4. 3. 퇴임 이후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아이티 총영사를 지낸 후 조기 퇴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10]
괴링은 5명의 자녀를 둔 아내 카롤리네 드 네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티롤 출신의 프란치스카 티펜브룬 (Franziska Tiefenbrunn)과 재혼했다. 프란치스카와의 사이에서도 5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넷째 아들인 차남이 헤르만 괴링이었다.[11]
아이티에서 귀국한 후, 괴링 가족은 잠시 베를린의 프리데나우 (Friedenau)에서 살았다. 1900년부터는 남서 아프리카 시대에 알게 된 친구이자 아내 프란치스카와 연인 관계였던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 (Hermann Ritter von Epenstein)의 잘츠부르크 교외의 마우테른도르프 성 (Burg Mauterndorf), 이어서 뉘른베르크 북쪽의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 (Neuhaus an der Pegnitz)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 (Burg Veldenstein)에서 살게 되었다.[12][13]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의 관계를 처음에는 묵인했던 하인리히 괴링이었지만, 1913년 에펜슈타인에게 리리라는 젊은 애인이 생겨 프란치스카가 소외되자, 에펜슈타인과 심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1913년 봄에 괴링 가족은 펠텐슈타인 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괴링은 뮌헨에서 살았지만, 병상에 눕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아들 헤르만은 이 무렵 바덴 육군 보병 연대 '프린츠 빌헬름'의 소위였지만, 휴가를 받아 뮌헨의 묘지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4]
헤르만은 어렸을 때, 아버지 하인리히 괴링에 대해 퇴관 후 알코올에 빠진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경멸했고, 대부인 에펜슈타인을 더 존경했다.[15] 그러나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외교관으로서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한 번도 가지려 하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하며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14]
5. 사생활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프란치스카 티펜브룬과 두 번째 결혼을 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7] 자녀로는 법학자 카를-에른스트 괴링(1885–1932), 올가 테레제 조피 괴링(1889–1970), 파울라 엘리자베트 로자 괴링(1890–1960), 독일 정치인이자 군 지휘관이며 나치당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헤르만 괴링(1893–1946), 사업가 알베르트 괴링(1895–1966)이 있다.[8]
괴링은 프로이센 왕국 라인 주(Rheinprovinz)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본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센 왕국 육군에 기병 장교로 입대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
1885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현 나미비아)의 제국 변무관을 맡아 헤레로족과 호텐토트족 등 독일 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한 부족을 달래어 남서 아프리카 통치를 성공시켰다. 이후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아이티의 총영사를 지냈다.[9] 그러나 괴링은 독일 제국 고위 관료로서는 드물게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었고, 식민지 현지인인 유색 인종들을 인간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져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아이티 총영사를 지낸 후 조기 퇴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퇴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10]
괴링은 5명의 자녀를 둔 아내 카롤리네 드 네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남서 아프리카 파견 전에 런던으로 파견되었으며, 프란치스카 티펜브룬 (Franziska Tiefenbrunn)과 재혼했다. 프란치스카와의 사이에서도 5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넷째 아들인 차남이 헤르만 괴링이었다.[11]
아이티에서 귀국한 후, 괴링 가족은 베를린의 프리데나우(Friedenau)에서 잠시 살았지만, 1900년부터는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 (Hermann Ritter von Epenstein)의 잘츠부르크 교외의 마우테른도르프 성(Burg Mauterndorf), 이어서 뉘른베르크 북쪽의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Neuhaus an der Pegnitz)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Burg Veldenstein)에서 살게 되었다.[12][13]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의 관계를 처음에는 묵인했던 하인리히 괴링이었지만, 1913년 에펜슈타인에게 리리라는 젊은 애인이 생겨 프란치스카가 소외되자, 에펜슈타인과 심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1913년 봄에 괴링 가족은 펠텐슈타인 성을 떠나게 되었고, 괴링은 뮌헨에서 살다가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14] 아들 헤르만은 이 무렵 바덴 육군 보병 연대 '프린츠 빌헬름'의 소위였지만, 휴가를 받아 뮌헨의 묘지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4]
6. 죽음
괴링은 1913년 12월 7일 뮌헨에서 사망했다.[8] 그는 프로이센 왕국 라인 주(Rheinprovinz)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센 왕국 육군 기병 장교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8]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친구였던 괴링은 1885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현 나미비아)의 제국 변무관을 맡아 헤레로족과 호텐토트족을 달래는 등 통치에 성공했다.[8] 빈트후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었다. 이후 아이티 총영사를 지냈으나,[9] 자유주의적 성향과 유색 인종에 대한 발언으로 독일 제국 내 입지가 약해져 조기 퇴관 후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10]
괴링은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과 아내 프란치스카의 관계를 묵인했으나, 1913년 에펜슈타인에게 새 애인이 생기자 심하게 다투었다. 이후 괴링 가족은 펠텐슈타인 성을 떠나 뮌헨에서 살다가 병으로 사망했다.[14] 아들 헤르만 괴링은 바덴 육군 보병 연대 소위로 복무 중 휴가를 받아 장례식에 참석했다.[14] 헤르만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경멸했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외교관으로서의 업적을 알고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14][15]
7. 유산
7. 1. 헤레로·나마 집단학살과의 연관성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은 1885년 독일 최초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황실장으로 임명되었다.[16] 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처음에는 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일했다.[16] 네덜란드어에 능통했던 그는 부임 후 헤레로 지도자 마하레로와 보호 조약을 체결했지만, 실질적인 효력은 없었다.[16] 나마 일가의 공격과 마하레로의 추방으로 조약은 파기되었다.[16]괴링은 보호소에 투자를 유치하고자 노력했지만, 골드러시 사기 사건으로 실패했다.[17] 막대한 금 매장량에 대한 기대는 독일 이주민들과 투자자들을 서아프리카로 끌어들였지만, 이는 헤레로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고, 결국 헤레로·나마 집단학살로 이어졌다.[17] 헤레로의 두개골은 카이저 빌헬름 인류학, 인간 유전학, 그리고 우생학 연구소에서 사용되었고, 우생학 정책 추진에 이용되었다.[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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