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로·나마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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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레로·나마 집단학살은 1904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 제국이 식민지였던 남서 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상대로 자행한 대량 학살 사건이다. 독일은 1904년 헤레로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로타어 폰 트로타 장군의 지휘 아래 헤레로족을 사막으로 몰아넣고, 우물에 독을 풀거나 포로들을 강제 수용소에 감금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의 약 80%, 나마족 인구의 약 50%가 사망했다. 독일은 2016년 이 사건을 '인종 학살'로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2021년에는 11억 유로 규모의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 사건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20세기 대량 학살의 선례로 평가받으며, 과거사 청산과 배상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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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로·나마 집단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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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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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 |
대상 | 헤레로족 및 나마족 |
기간 | 1904년–1908년 |
유형 | 집단 학살 대량 학살 기아 강제 수용소 인체 실험 노동을 통한 절멸 노예화 |
사망자 | 헤레로족: 24,000명–100,000명 나마족: 10,000명 |
가해자 |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과 독일 식민 군대 |
동기 | 집단 처벌 정착민 식민주의 독일 제국주의 인종 차별 독일 권위에 대한 반란에 대한 보복 |
관련 정보 | |
관련 전쟁 | 헤레로 전쟁 |
독일어 명칭 | Foelkoermort an den Herero und Nama |
관련 캠페인 상자 | 헤레로 전쟁 |
2. 배경
현재 나미비아 지역의 원주민은 산족과 코이코이였다. 18세기 중반, 반투어족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헤레로족이 나미비아로 이주해 와 소를 기르는 목축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소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소가 위협받을 때는 강력한 저항을 보이기도 했다.[16] 헤레로족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기존 원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밀어냈다.
19세기 후반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독일 제국은 이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83년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더리츠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해안 지역 토지를 구매한 것을 계기로,[18] 독일은 1884년 이 지역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보호령으로 선포했다.[19]
독일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헤레로족과 독일 정착민 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헤레로족 추장 마하레로는 외부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독일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으나,[20] 독일인들의 토지 약탈과 전시 성폭력 등 조약 위반 행위는 계속되었다.[21] 마하레로의 아들 사무엘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최고 추장이 되는 대가로 많은 땅을 넘겨주기도 했다.[20][18]
독일 식민 당국은 토착민들을 특정 보호 구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들의 토지와 가축을 빼앗아 독일 정착민과 회사에 분배하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했다.[23] 이러한 토지 약탈과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 착취,[24][25][26][27][28][29] 그리고 인종 차별적인 대우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등 토착민들의 극심한 불만을 야기했다. 이는 결국 1904년 헤레로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24][26] 당시 총독이었던 테오도르 로이트바인조차 독일 통치하에서 헤레로족의 고통이 커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2. 1. 헤레로족과 독일의 조우
현재 나미비아 지역의 원주민은 산족과 코이코이였다. 반투어족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헤레로족은 18세기 중반 나미비아로 이주해 온 목축 민족이다. 이들은 소를 키우기에 적합한 고원 지대를 차지했으며, 농사일은 주로 노예로 삼은 코이산족이나 부시맨에게 맡겼다. 헤레로족은 점차 코이산족을 남쪽과 동쪽의 척박한 지역으로 몰아냈다.헤레로족의 생활 방식은 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언어인 헤레로어에는 소의 색깔과 무늬를 묘사하는 단어가 천 개 이상 있을 정도로 소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헤레로족은 소가 안전하고 목초지가 풍부하면 평화롭게 지냈지만, 소가 위협받을 때는 강력한 전사로 변모했다.[16] 로버트 가우디에 따르면, 헤레로족은 토착 코이산족보다 키가 크고 호전적이었으며, 소를 삶의 유일한 기반으로 삼는 데서 비롯된 강인함을 지녔다. 소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치 있게 여겼으며, 가축 관리와 보호에 매우 철저했다. 이러한 지배적인 태도와 위엄 있는 모습 때문에 초기 유럽인들은 헤레로족을 '자연 귀족'으로 여기기도 했다.
아프리카 분할 시기, 헤레로족이 차지한 지역은 다마라랜드로 알려졌다. 헤레로족의 남쪽에는 목축과 상업에 종사하는 나마족이 살고 있었다.[17]
1883년,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더리츠는 현지 추장으로부터 뤼데리츠만(앙그라 페케나) 인근 해안 지역을 구매했다. 이 거래는 사기성이 있었으나, 독일 정부는 이 지역에 보호령을 선포했다.[18] 당시 이곳은 유럽인의 정착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유일한 독일 해외 영토였다.[19]
헤레로족의 추장인 마하레로는 모든 헤레로족을 통합하려 했으나, 헨드릭 비트보이가 이끄는 코이코이 부족의 공격을 받았다.[18] 이에 마하레로는 1885년 10월 21일, 독일 제국의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헤르만 괴링의 아버지)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에서 헤레로족의 땅을 넘겨주지는 않았다. 독일 측이 비트보이에 대한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자 1888년 조약은 파기되었으나, 189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20]
그러나 조약 이후에도 헤레로 지도자들은 독일인에 의한 헤레로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강간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독일 판사와 검사들은 이러한 범죄를 처벌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1]
1890년, 마하레로의 아들 사무엘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오바헤레로족의 최고 추장 자리에 오르는 대가로 많은 땅을 독일에 넘겨주었다.[20][18] 1894년, 독일이 부족 간 분쟁에 개입하면서 불안정한 평화가 찾아왔다.[24] 같은 해 테오도르 로이트바인이 이 영토의 총독이 되었고, 이 지역은 급속한 발전을 겪었으며, 독일 정부는 이 지역을 진정시키기 위해 Schutztruppe|슈츠트루페de(제국 식민지 군대)를 보냈다.[22]
독일 식민 당국과 유럽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을 보호 구역에 수용하고 그들의 토지를 정착민과 회사에 분배하는,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아프리카 독일"을 구상했다.[23] 독일 식민 통치 하에서, 식민주의자들은 토착 헤레로족과 나마족에게서 토지와 가축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 노동자로 예속하도록 장려했다.[24][25][26][27][28][29]
토착민들 사이에서는, 독일 목장주들이 남서 아프리카에 도착하면서 그들의 지위와 재산을 잃고 전통적인 정치적 위계가 해체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전에는 지배 부족이었던 부족들은 이전에 그들이 지배하고 노예로 삼았던 다른 부족들과 같은 지위로 격하되었다. 이러한 불만은 1904년에 시작된 헤레로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24][26]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총독 테오도르 로이트바인 소령은 독일 식민 통치가 헤레로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헤레로족은 어릴 때부터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이었고, 용감하고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독일 통치가 점차 확대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통이 해마다 증가했다."
1903년 1월, 디트리히라는 독일인 상인이 새로운 말을 사기 위해 자신의 농장에서 가까운 오마루루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다. 디트리히의 목적지에 절반쯤 갔을 때, 헤레로족 추장의 아들, 그의 아내, 아들을 태운 마차가 멈춰 섰다. 헤레로 지역의 일반적인 예절에 따라, 추장의 아들은 디트리히에게 차를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날 밤, 디트리히는 매우 취했고 모두가 잠든 후, 추장의 아내를 강간하려 했다. 그녀가 저항하자, 디트리히는 그녀를 쏘아 죽였다. 빈트후크에서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던 디트리히는 피해자를 강간하려 한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캠프가 공격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무작정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그는 헤레로 여성의 살해가 불운한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디트리히가 "열대열"과 일시적 심신상실을 겪고 있다며 그를 무죄로 판결했다.
로이트바인에 따르면, 그 살인은 "헤레로 지역에서, 특히 살해된 여성이 한 추장의 아내이자 다른 추장의 딸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곳에서 '백인이 원주민 여성을 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총독 로이트바인이 개입했다. 그는 검찰이 디트리히의 무죄 판결에 항소하도록 했고, 두 번째 재판(식민지의 최고 법원에서)이 열렸으며, 이번에는 디트리히가 과실치사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조치는 로이트바인을 "인종 반역자"로 여기는 독일 정착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 2. 아프리카 분할과 독일의 식민 지배
아프리카 분할 시기, 헤레로족이 점령했던 지역은 다마라랜드로 알려졌고, 목축과 상업을 하던 나마족은 헤레로족의 남쪽에 살았다.[17]1883년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더리츠는 현지 추장으로부터 뤼데리츠만(앙그라 페케나) 인근 해안 지역을 구매했다. 구매 조건은 기만적이었으나, 독일 정부는 이 지역에 보호령을 선포했다.[18] 당시 이 지역은 독일이 보유한 해외 영토 중 유일하게 유럽인의 정착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곳이었다.[19]
한편, 헤레로족의 추장 마하레로는 모든 헤레로족을 통합하며 권력을 강화하고 있었다.[18] 그는 헨드릭 비트보이가 이끄는 코이코이 부족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1885년 10월 21일 독일 제국의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헤르만 괴링의 아버지)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헤레로족의 땅을 양도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독일 측이 비트보이에 대한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자 마하레로는 1888년 조약을 파기했지만, 1890년에 다시 복원했다.[20]
헤레로 지도자들은 독일인들이 조약을 위반하는 사례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특히 헤레로 여성과 소녀들이 독일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독일 판사와 검사들은 이러한 범죄를 처벌하는 데 소극적이었다.[21]
1890년, 마하레로의 아들인 사무엘은 자신이 오바헤레로족의 왕위를 계승하고 최고 추장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독일에게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넘겨주었다.[20][18] 1894년, 독일은 헤레로족과 다른 민족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불안정한 평화를 가져왔다.[24] 같은 해 테오도르 로이트바인이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며, 독일 정부는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제국 식민지 군대인 Schutztruppe를 파견했다.[22] 이러한 독일의 식민 통치 강화는 이후 헤레로족 및 나마족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2. 3. 헤레로족의 저항과 독일의 탄압



헤레로족은 소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목축 민족으로, 18세기 중반 현재의 나미비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소를 방목하기 좋은 고원 지대를 차지했다.[16] 이들은 자신들의 핵심 자산인 소가 위협받을 때 강력한 전사로 변모하는 특성을 지녔다. 당시 헤레로족이 점령한 지역은 다마라랜드로 알려졌으며, 남쪽에는 나마족이 거주했다.[17]
1883년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더리츠가 현지 추장으로부터 뤼데리츠만 인근 해안 지역을 사들였는데, 이 과정에는 사기성이 있었으나 독일 정부는 이를 계기로 이 지역에 보호령을 선포했다.[18] 이곳은 당시 유럽인이 정착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유일한 해외 독일 영토였다.[19]
헤레로족의 추장 마하레로는 모든 헤레로 부족을 통합하려 했으며,[18] 헨드릭 비트보이가 이끄는 코이코이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1885년 10월 21일 독일 제국 총독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헤레로족의 토지 양도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비트보이에 대한 독일의 지원 부족으로 1888년 폐기되었다가 189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20]
하지만 조약 이후에도 헤레로 지도자들은 독일인들의 조약 위반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특히 헤레로 여성과 소녀들이 독일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빈번했으나, 독일 판사와 검사들은 이러한 범죄를 처벌하는 데 소극적이었다.[21]
1890년, 마하레로의 아들 사무엘은 자신이 오바헤레로족의 최고 추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독일이 돕는 대가로 많은 땅을 독일에 넘겨주었다.[20][18] 1894년, 독일이 민족 간 분쟁에 개입하면서 불안정한 평화가 찾아왔고,[24] 같은 해 테오도르 로이트바인이 총독으로 부임했다. 로이트바인 총독 하에서 이 지역은 급속한 발전을 겪었으며, 독일 정부는 Schutztruppe|슈츠트루페de(제국 식민지 군대)를 파견하여 지역을 통제하려 했다.[22]
1903년, 헨드릭 비트보이의 지도 아래 일부 나마 부족이 독일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22]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904년 1월에는 헤레로족도 이 반란에 동참하게 되었다.
주된 갈등 요인은 토지 문제였다. 1903년 헤레로족은 독일이 철도 노선을 따라 그들의 영토를 나누고, 헤레로족을 특정 보호 구역에 강제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다.[30] 이미 헤레로족은 1903년까지 130000km2가 넘는 땅을 독일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빼앗긴 상태였다.[24] 이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내륙의 독일 정착지로 이어지는 오타비 철도 노선 완공 이전의 일이었는데,[80] 철도 완공은 더 많은 독일인들의 유입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었다.[31]
역사학자 호르스트 드렉슬러는 독일 식민 당국이 헤레로족을 원주민 보호 구역에 몰아넣으려는 논의를 진행했으며, 이는 독일인들이 헤레로족의 땅을 자신들의 소유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당시 Reichskolonialbund|라이히스콜로니알분트de(독일 식민지 연맹)는 법정에서 아프리카인 7명의 증언이 독일인 1명의 증언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고 주장할 정도로 극심한 인종 차별이 존재했다.[31] 브리지먼에 따르면, 독일 식민지 개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주민 아프리카인을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했으며, 일부는 그들의 절멸을 바라기까지 했다.[24]
1903년 11월에 시행된 새로운 채권 추심 정책 또한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많은 헤레로족이 높은 이자율로 독일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돈을 빌렸으나 변제 능력이 부족하여 빚이 누적되었다. 로이트바인 총독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 해까지 변제되지 않은 모든 부채를 무효화한다고 선언했지만,[24] 현금이 부족했던 상인들은 헤레로족의 소나 다른 가치 있는 물건들을 담보로 압류했다. 독일 관리들이 고리대금업자들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자 헤레로족의 분노와 절망감은 커져갔다.[24]
인종적 긴장도 극심했다. 독일 정착민들은 흑인 아프리카인들을 "개코원숭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24][32] 한 선교사는 "헤레로족이 독일인에 대해 품는 쓴맛의 진정한 원인은,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원주민을 고등 영장류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여기고 ('개코원숭이'는 그들이 원주민을 부르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동물처럼 취급한다는 사실에 있다. 정착민들은 백인에게 유용할 때만 원주민이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멸 의식은 정착민들이 헤레로족에게 폭력을 저지르도록 만들었다."[32]고 보고했다. 이러한 경멸은 특히 원주민 여성을 첩으로 삼는 행위, 즉 Verkafferung|페어카퍼룽de이라 불린 관행에서 두드러졌는데, 이는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유럽인 상인이나 목장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32]
1903년 말, 독일 당국이 남부의 본델츠바르츠 부족(코이산족의 일파)에게 총기 등록을 요구하며 충돌이 발생하자, 로이트바인 총독은 직접 남부로 내려가 지휘했고 북부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었다. 헤레로족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33]
1904년 초, 사무엘 마헤레로의 지휘 아래 헤레로족은 반란을 일으켜 독일인 정착민 123명에서 150명 사이, 보어인 7명, 여성 3명을 살해했다.[24] 닐스 올레 오어만은 이를 "필사적인 기습 공격"이라고 평가했다.[34] 헤레로족은 독일군이 무기 항복 요구 이후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킨 시점을 노렸으며,[24] 오카한자를 포위하고 수도 빈트후크로 가는 철도와 전신을 끊었다. 마헤레로는 자신의 군대가 영국인, 보어인, 관련 없는 민간인, 여성과 어린이, 독일 선교사를 해치지 말 것을 명령했다.[24] 몇 주 후에는 온동가족의 별도 반란과 나무토니 요새 전투가 이어졌다.[35][36]
로이트바인 총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무엘 마헤레로에게 협상을 제안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나, 당시 독일 내에서는 헤레로족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요구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초기 성공에 고무된 헤레로족은 "독일인들은 공개적으로 싸우기에 너무 겁이 많다"고 여기며 로이트바인의 평화 제안을 거부했다.
독일 사회는 헤레로족에 대한 극심한 증오심에 휩싸였다. 한 선교사는 "독일인들은 끔찍한 증오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헤레로족에 대한 피의 갈증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청소', '처형',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살', '사면 없음' 등에 대한 이야기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기록했다. 독일인들은 초기 몇 달간의 패배로 굴욕감을 느꼈고, 독일 제국 의회와 카이저까지 헤레로족의 완전한 근절을 요구했다. 심지어 독일 사회민주당의 한 의원이 헤레로족의 인간성을 주장했을 때 의회 내 보수파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다.
결국 로이트바인은 베를린에 증원군과 경험 많은 장교 파견을 요청해야 했다.[37] 1904년 6월 11일,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이 1만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남서 아프리카 주둔 독일군의 최고 사령관(Oberbefehlshaber|오버베펠스하버de)으로 임명되었다.[38][39]
로이트바인은 반란 주동 세력을 격파한 뒤 항복 협상을 통해 정치적 해결을 원했지만,[37] 트로타는 군사력을 동원한 완전한 진압을 계획했다. 그는 "많은 중앙 아프리카 국가(반투족 등)에 대한 나의 친밀한 지식은 흑인이 조약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억압적인 힘만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항상 확신시켜주었다."[18]고 공언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1904년 늦봄부터 독일 증원군이 식민지로 속속 도착했고, 1904년 8월 워터베르크 전투에서 주력 헤레로 군대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33]
2. 4. 독일 식민 정책
1883년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더리츠는 현지 추장으로부터 뤼데리츠만(앙그라 페케나) 인근 해안 지역을 구매했다. 이 구매 계약은 기만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독일 제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해당 지역에 보호령을 선포했다.[18] 당시 이곳은 유럽인의 정착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유일한 해외 독일 영토였다.[19]헤레로족의 추장 마하레로는 모든 헤레로 부족을 통합하여 권력을 강화했다.[18] 그는 헨드릭 비트보이가 이끄는 나마족의 한 분파인 코웨신족의 반복적인 공격에 시달리자, 1885년 10월 21일 독일 제국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헤르만 괴링의 아버지)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헤레로족의 토지를 양도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 측이 비트보이에 대한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자 조약은 1888년에 파기되었으나, 189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20] 헤레로 지도자들은 독일인들이 헤레로 여성과 소녀들을 강간하는 등 조약을 위반하는 사례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독일 판사와 검사들은 이러한 범죄를 처벌하는 데 소극적이었다.[21]
1890년, 마하레로의 아들 사무엘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오바헤레로족의 최고 추장 자리에 오르는 대가로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독일에 넘겨주었다.[20][18] 1894년, 독일이 부족 간 분쟁에 개입하면서 불안정한 평화가 찾아왔다.[24] 같은 해 테오도르 로이트바인이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했고, 독일 정부는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제국 식민지 군대인 Schutztruppe를 파견하며 본격적인 식민 통치 강화에 나섰다.[22]
독일 식민 당국과 유럽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을 특정 보호 구역에 강제로 이주시키고, 그들의 토지와 가축을 빼앗아 독일 정착민과 회사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백인 중심의 "새로운 아프리카 독일"을 건설하고자 했다.[23] 이러한 식민 정책 하에서 독일인들은 토착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노예 노동자로 부리도록 장려받았다.[24][25][26][27][28][29] 독일 정착민들의 유입으로 토착민들은 점차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잃어갔으며, 전통적인 사회 구조마저 해체되는 상황에 놓였다. 과거 지배 부족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지배했던 다른 부족들과 동등한, 혹은 더 낮은 지위로 격하되면서 불만이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은 결국 1904년 헤레로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24][26]
당시 총독이었던 테오도르 로이트바인 소령은 독일 식민 통치가 헤레로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훗날 "헤레로족은 태생적으로 자유를 사랑하고, 용감하며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었다. 독일의 지배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들의 고통은 해마다 커져갔다"고 기록했다.
1903년 1월, 디트리히라는 독일인 상인이 오마루루 마을 인근에서 헤레로족 추장의 아내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디트리히는 술에 취해 추장의 아내를 강간하려다 저항하자 총으로 쏘아 죽였다. 빈트후크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강간 시도를 부인하며 어둠 속에서 캠프가 공격받는 줄 알고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가 "열대열"과 일시적 심신상실 상태였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헤레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백인이 원주민 여성을 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공공연하게 제기되었다. 로이트바인 총독은 검찰에 항소를 지시했고, 두 번째 재판에서 디트리히는 과실치사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로이트바인을 "인종 반역자"로 여기는 독일 정착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3. 헤레로 전쟁 (1904년)
헤레로족은 18세기 중반 현재의 나미비아 지역으로 이주한 목축 민족으로, 소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16] 이들은 점차 원주민인 코이산족을 밀어내고 넓은 목초지를 확보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9세기 말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독일 제국은 나미비아 지역에 대한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1883년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더리츠가 현지 추장으로부터 해안 지역을 사들인 것을 계기로 독일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보호령을 선포했다.[18][19] 당시 헤레로족의 지도자 마하레로는 다른 부족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1885년 독일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일 측의 조약 위반과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양측의 관계는 불안정했다.[20][21]
마하레로의 아들 사무엘 마헤레로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최고 추장이 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토지를 독일에 넘겨주었다.[20][18] 이후 테오도르 로이트바인 총독의 주도 하에 독일 정착민 유입과 식민지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독일 식민 당국은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토지와 가축을 강탈하고 이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는 정책을 강화했다.[23][24][25][26][27][28][29] 특히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은 헤레로족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며 독일 식민 통치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로이트바인 총독조차 헤레로족이 겪는 고통이 커지고 있음을 인지할 정도였다.
결국 1904년 1월 12일, 사무엘 마헤레로의 지도 아래 헤레로족은 독일 식민 통치에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헤레로 전쟁의 서막이었다. 초기 봉기 과정에서 헤레로족은 독일 정착민들에게 타격을 입혔으나, 마헤레로는 여성, 어린이 등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은 금지했다.[24]
독일 본국에서는 헤레로족의 봉기에 대해 강경 대응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초기 전투에서의 예상치 못한 고전 이후, 독일 정부는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헤레로족의 저항을 무력으로 완전히 분쇄하기로 결정했다.[37][38][39] 트로타의 강경한 진압 방침은 이후 헤레로족에게 닥칠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었다.[18]
3. 1. 디트리히 사건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3. 2. 긴장 고조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 식민 당국과 유럽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을 보호 구역에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정착민과 회사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아프리카 독일"을 만들려고 했다.[23] 독일 식민 통치 아래에서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인 헤레로와 나마에게서 땅과 가축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 노동자로 삼도록 장려받았다.[24][25][26][27][28][29]원주민들 사이에서는 독일 목장주들이 남서 아프리카에 도착하면서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잃고 전통적인 정치 구조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이전에는 지배적이었던 부족들이 과거 자신들이 지배하고 노예로 삼았던 다른 부족들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이러한 불만은 1904년에 시작된 헤레로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24][26]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총독 테오도르 로이트바인 소령은 독일 식민 통치가 헤레로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헤레로족은 어릴 때부터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이었고, 용감하고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독일 통치가 점차 확대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통이 해마다 증가했다."
1903년, 헤레로족은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남부에서는 독일의 총기 등록 요구를 거부하는 본델츠바르츠라는 멀리 떨어진 코이산 부족이 있었다. 본델츠바르츠는 독일 당국과 교전을 벌여 독일인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헤레로 식민지 총독 테오도어 로이트바인 소령은 직접 지휘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고, 이로 인해 북쪽에는 거의 병력이 남지 않게 되었다.[33] 이는 헤레로족에게 반란의 기회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3. 3. 봉기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 식민 통치 아래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토지와 가축을 빼앗기고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24][25][26][27][28][29] 토착민들 사이에서는 독일 목장주들의 등장으로 지위와 재산을 잃고 전통적인 정치 구조가 해체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과거 지배 부족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지배했던 다른 부족들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이러한 불만은 1904년 헤레로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24][26]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총독 테오도르 로이트바인 소령은 독일 식민 통치가 헤레로족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알고 있었다. 그는 훗날 "헤레로족은 태생적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이었고, 용감하며 자부심이 강했다. 독일의 통치가 점차 확대되면서 그들의 고통은 해마다 커져갔다"고 기록했다.
1903년, 헤레로족은 봉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남부에서는 본델츠바르츠라는 코이산족 부족이 독일의 총기 등록 요구를 거부하며 독일 당국과 교전을 벌여 독일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로이트바인 총독은 직접 지휘를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고, 이로 인해 북부 지역의 독일군 병력은 크게 줄어들었다.[33]
헤레로족은 1904년 초 봉기를 일으켜, 123명에서 150명 사이의 독일인 정착민과 7명의 보어인, 3명의 여성을 살해했다.[24] 닐스 올레 오어만은 이를 "필사적인 기습 공격"이라고 평가했다.[34]
헤레로족의 공격 시점은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로이트바인 총독은 헤레로 부족에게 무기 항복을 성공적으로 요구한 후, 그들이 평화로워졌다고 판단하여 식민지에 주둔한 독일군 병력의 절반가량을 철수시킨 상태였다.[24] 사무엘 마헤레로 족장의 지휘 아래 헤레로족은 오카한자를 포위하고 식민지 수도인 빈트후크로 향하는 철도와 전신망을 차단했다. 마헤레로는 자신의 군대가 영국인, 보어인, 관련 없는 민간인,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독일 선교사를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24] 헤레로족의 봉기는 몇 주 후 온동가족의 별도 봉기와 나무토니 요새 전투로 이어졌다.[35][36]
1895년 독일 당국과의 인터뷰에서 한 헤레로족 전사는 가축 도둑으로 의심되는 자를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을 설명했는데, 이는 봉기 동안 독일 군인과 민간인에게도 적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몇몇 코이산을 만나 그들을 죽였습니다... 먼저 귀를 잘라내며 '다시는 헤레로 소 울음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으로 코를 잘라내며 '다시는 헤레로 소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입술을 잘라내며 '다시는 헤레로 소 맛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을 베었습니다."
로이트바인은 독일 제국의 분노가 헤레로족에게 미칠 것을 우려하여 사무엘 마헤레로 족장에게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 독일 내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요구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헤레로족은 초기의 성공에 고무되어 "독일인들은 공개적으로 싸우기에는 너무 겁이 많다"고 여기며 로이트바인의 평화 제안을 거부했다.
한 선교사는 당시 독일인들의 분위기를 "독일인들은 끔찍한 증오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헤레로족에 대한 피의 갈증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입니다. '청소', '처형',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살', '사면 없음' 같은 이야기만 들립니다"라고 기록했다.
독일인들은 1904년 초 몇 달간 패배를 겪으며 굴욕감을 느꼈다. 그들의 현대식 군대가 '반쯤 벌거벗은 야만인' 무리를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 의회와 카이저까지 헤레로족의 완전한 근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한 의원이 헤레로족도 독일인과 같은 인간이며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지적하자, 의회 내 보수파 의원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결국 로이트바인은 베를린의 독일 정부에 증원군과 경험 많은 장교 파견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37]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이 10,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1904년 6월 11일 도착하여 남서 아프리카 주둔 독일군의 최고 사령관(Oberbefehlshaberde)으로 임명되었다.[38][39]
로이트바인은 가장 완강한 헤레로 반군을 격파한 뒤 나머지와 협상을 통해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려 했으나,[37] 트로타는 군사력을 동원해 원주민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계획이었다. 그는 "나는 많은 중앙 아프리카 부족(반투족 등)을 잘 알고 있으며, 흑인은 조약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무력에만 굴복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18]
1904년 늦봄부터 독일 증원군이 식민지로 대거 투입되었고, 8월에는 워터베르크 전투에서 주요 헤레로 부대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격파당했다.[33]
4. 독일의 진압과 대량 학살
헤레로족의 봉기가 거세지자 독일 제국 정부는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새로운 최고 사령관(Oberbefehlshaberde)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을 파견했다.[37][38][39] 트로타는 협상보다는 무력을 통한 완전한 진압을 선호했으며, 아프리카 부족은 오직 잔혹한 힘에만 굴복한다고 믿었다.[18]
1904년 8월, 트로타가 이끄는 독일군은 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 주력 부대를 격파했다.[37] 전투 후 독일군은 후퇴하는 헤레로족을 포위 섬멸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물이 없는 칼라하리 사막의 오마헤케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트로타는 사막으로 통하는 길을 봉쇄하고 우물에 독을 푸는 등[46][47] 헤레로족의 생존 가능성을 차단했으며, 1904년 10월 2일에는 독일 국경 내 모든 헤레로족 남성을 사살하고 여성과 아이들도 추방하거나 사살하라는 내용의 '섬멸 명령'(Vernichtungsbefehlde)을 발표했다.[51] 이로 인해 수많은 헤레로족이 사막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사망했다. 소수의 생존자만이 영국령 베추아날란드로 탈출할 수 있었다.[44][48]
헤레로족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던 중, 1904년 10월에는 나마족 역시 헨드릭 비트보이의 지도 아래 봉기했으나,[134] 이들 또한 독일군의 잔혹한 진압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
전투와 학살에서 살아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생존자들은 샤크 아일랜드 강제 수용소를 비롯한 여러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곳에서 생존자들은 강제 노역, 기아, 질병,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55]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수용소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62][63] 이 집단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의 약 80%(약 6만 명), 나마족 인구의 약 50%(약 1만 명)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35]
4. 1. 트로타의 섬멸 명령

테오도르 로이트바인 총독은 베를린의 독일 정부에 증원군과 경험 많은 장교를 요청해야 했다.[37]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은 1904년 6월 11일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여 남서 아프리카의 최고 사령관(Oberbefehlshaberde)으로 임명되었다.[38][39] 그는 빌헬름 2세 황제의 지원을 받는 독일 참모 본부에 군사적 보고를 했으며, 베른하르트 폰 뷜로 재상이 지원하는 프로이센 외무부의 민간 식민지 부서의 지시를 받았다.[24][40]
로이트바인은 가장 완강한 헤레로족 반란군을 격파한 뒤 나머지와 항복 협상을 통해 정치적 해결을 원했으나,[37] 트로타는 군사력을 통해 원주민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계획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많은 중앙 아프리카 국가(반투족 등)에 대한 나의 친밀한 지식은 흑인이 조약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억압적인 힘만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항상 확신시켜주었다.[18]
트로타의 군대는 1904년 8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벌어진 워터베르크 전투에서 3,000명에서 5,000명 사이의 헤레로족 전사들을 격파했지만, 후퇴하는 생존자들을 완전히 포위하여 전멸시키지는 못했다.[37] 독일군은 도망치는 헤레로족이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고 칼라하리 사막으로 더 깊숙이 몰아넣었다. 지쳐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 헤레로족이 땅에 쓰러지자 독일 군인들은 남성, 여성,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46] 당시 독일군의 안내인으로 활동했던 얀 클로에테는 독일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31]
: 저는 헤레로족이 워터베르크 근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전투 후 독일군 손에 들어온 모든 남자, 여자, 아이들은 부상자든 아니든 무자비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 후 독일군은 나머지 사람들을 추격했고, 길가와 모래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들은 총으로 쏘아 살해당했습니다. 헤레로족 남성들은 대부분 무장하지 않아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가축과 함께 도망치려 했을 뿐입니다.
헤레로족의 일부는 독일군을 피해 영국령 베추아날란드에 도달하기를 바라며 오마헤케 사막(칼라하리 사막의 일부)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1,000명 미만의 헤레로족만이 베추아날란드에 도착하여 영국 당국으로부터 망명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44] 그들의 귀환을 막기 위해 트로타는 사막으로 통하는 길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45] 나중에 독일 순찰대는 물을 찾으려는 헛된 시도로 파낸 13m 깊이의 구멍 주변에서 해골들을 발견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독일 식민군이 사막의 우물에 체계적으로 독을 풀었다고도 전한다.[46][47] 사무엘 마하레로와 500명에서 1,500명의 남성은 칼라하리를 건너 베추아날란드로 갔고, 그곳에서 바츠와나 추장 세크고마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48]
1904년 10월 2일, 트로타는 헤레로족에게 다음과 같은 악명 높은 경고문을 발표했다.
: 독일 군대의 위대한 장군인 내가 헤레로족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헤레로족은 더 이상 독일 신민이 아니다. 그들은 살인을 저질렀고, 훔쳤으며, 부상당한 군인의 귀와 신체의 다른 부위를 잘랐으며, 이제 비겁하게 더 이상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린다. 우두머리 중 한 명을 나에게 넘겨주는 사람은 1,000마르크를 받고, 사무엘 마헤레로를 데려오는 사람은 5,000마르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헤레로족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만약 거부한다면 나는 '긴 튜브' [대포]로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독일 국경 내에서 총이나 가축을 소지한 모든 헤레로족은 처형될 것이다.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에게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것이 헤레로족에게 하는 나의 말이다.[51]
그는 또한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추가 명령을 내렸다.
: 이 포고는 사열대에서 병사들에게 읽혀져야 하며 ... 여자와 아이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도록 머리 위로 총을 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이 포고가 더 이상 남성 포로를 잡지 않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잔혹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후자는 두 번 정도 총을 쏘면 도망갈 것이다. 군대는 독일 군인의 좋은 평판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26]
이는 사실상 트로타가 붙잡힌 헤레로족 남성은 처형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음이 확실한 사막으로 몰아넣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헤레로족 여성과 아이들이 "독일군을 그들의 질병으로 감염시킬 것"이라며 예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봉기를 "인종 투쟁의 시작이자 종착역"이라고 설명했다.[37] 전쟁 후 트로타는 자신의 명령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며, 1909년 "만약 내가 여성들에게 작은 물웅덩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면, 나는 베레지나 전투와 비슷한 아프리카 대참사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라고 썼다.[46]
독일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트로타의 "인종 투쟁" 개념과 "전 민족을 전멸시키거나 이 나라에서 몰아낼" 필요성에 대한 의도를 승인했지만, 그들의 항복을 유도하는 편이 낫다고 보며 그의 전략에 의문을 품었다.[54]
나중에 해임된 로이트바인 총독은 트로타의 행동에 대해 뷔로프 총리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는 트로타 장군의 명령이 민간 식민지 행정의 권한을 침해하고 정치적 합의의 기회를 망치고 있다고 보았다.[37] 컬럼비아 대학교의 마흐무드 맘다니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섬멸 정책에 대한 반대는 식민지 관리들이 헤레로족을 노동력의 잠재적 원천으로 보고 경제적으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발생했다.[43] 예를 들어, 로이트바인 총독은 "나는 헤레로족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광신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조치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심각한 실수로 간주할 것이다. 우리는 헤레로족을 가축 사육자... 특히 노동자로 필요로 한다"고 썼다.[18]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권한이 없었던 뷔로프 총리는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트로타의 행동이 "기독교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원칙에 어긋나고, 경제적으로 파괴적이며, 독일의 국제적 평판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다.[37]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트로타의 섬멸 명령은 즉각 철회되지 않았고, 헤레로족에 대한 잔혹 행위는 계속되었다.
4. 2. 독일 참모총부의 반응
독일 참모 본부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 행위를 인지하고 있었다. 참모총부의 공식 간행물인 ''Der Kampf''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 대담한 시도는 패배한 적을 추격하는 독일 지휘부의 무자비한 에너지를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다. 적의 저항의 마지막 잔재를 제거하는 데 어떤 노력도,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부상당한 짐승처럼 적은 다음 물웅덩이까지 추적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환경의 희생자가 되었다. 건조한 오마헤케 [사막]는 독일군이 시작한 것을 완성해야 했다. 즉, 헤레로족의 멸망."[52][53]이라고 기술하며 트로타 장군의 작전을 사실상 옹호했다.당시 제국 독일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트로타가 주장한 "인종 투쟁" 개념과 "전 민족을 전멸시키거나 이 나라에서 몰아낼" 필요성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군사 전략적 측면에서는 헤레로족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더 낫다고 보며 트로타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54]
한편,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총독이었던 테오도르 로이트바인은 트로타의 극단적인 조치에 반대했다. 그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 총리에게 트로타 장군의 명령이 식민지의 민간 행정 권한을 침해하고 있으며, 헤레로족과의 정치적 타협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37] 로이트바인은 특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헤레로족의 절멸은 심각한 실수라고 주장했다. 그는 헤레로족이 가축 사육자이자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으로서 중요하다고 보았다.[18]
뷜로 총리는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은 없었지만,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트로타의 행동이 "기독교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원칙에 어긋나며, 경제적으로 파괴적이고, 독일의 국제적 명성을 손상시킨다"고 조언하며 우려를 표명했다.[37]
빌헬름 2세 황제가 직접 집단학살을 명령하거나 승인했다는 명확한 서면 증거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국 시대의 프로이센 육군 문서 보관소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문서들은 트로타가 참모총장과 황제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으며, 나미비아에서 의화단 운동 진압 당시 중국에서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전술을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서면 명령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트로타에게 구두로 집단학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집단학살이 알려진 후에도 트로타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4. 3. 강제 수용소


워터베르크 전투 이후 학살에서 살아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생존자들은 독일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04년 말 새로운 명령이 내려지면서, 포로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거나 인체 실험의 피험자로 착취당했다.[55] 생존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였으며, 이들은 독일 군대와 정착민들을 위한 노동력으로 취급되었다.[58] 모든 수감자는 노동 가능 여부에 따라 분류되었고, 심지어 "굶주림에 따른 고갈로 인한 사망"이라는 문구가 미리 인쇄된 사망 진단서가 사용되기도 했다.[58] 영국 정부는 1918년 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독일의 만행을 고발했다.[59]
수용소 내 환경은 극도로 열악하여 많은 수감자들이 질병, 피로, 기아 및 영양실조로 사망했다.[5][60][61] 수용소의 사망률은 적게는 45%[62][63]에서 많게는 74%[29][62][63]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음식은 매우 부족했고, 주로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쌀밥이 전부였다.[64] 수감자들은 제대로 된 식기조차 없이 조리되지 않은 쌀을 받아 소화 불량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수용소에서 죽은 가축이 음식으로 배급되기도 했다.[26] 이질과 폐 질환이 흔하게 발생했지만,[26] 아픈 수감자들은 어떠한 의료 지원이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26]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수감자들은 매일 독일 경비병들의 가혹한 감시 아래 노동 현장으로 끌려 나갔다. 총격, 교수형, 구타는 물론, 가죽 채찍인 삼복을 이용한 폭행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26][65] 1905년 9월 28일 자 남아프리카 신문 ''케이프 아거스''는 "독일 남서 아프리카에서: 더욱 충격적인 혐의: 끔찍한 잔혹 행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퍼시벌 그리피스라는 인물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고발했다. 그는 뤼데리츠에서 수송 작업을 하며 목격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있는데,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몇몇 노인들입니다... 그들이 쓰러지면 감독하는 군인이 온 힘을 다해 삼복으로 때립니다... 한번은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 무거운 곡물 자루를 인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넘어졌습니다. 하사는 최소 4분 이상 그녀를 삼복으로 때렸고 아기까지 때렸습니다... 그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짐을 지고 갔습니다. 그녀는 그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아기는 매우 심하게 울었습니다.[68]
수많은 강제 수용소 중에서도 뤼데리츠 항구 근처의 샤크 아일랜드 수용소는 가장 잔혹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67] 당시 작은 둑길로만 본토와 연결되어 있던 이 섬은[68] 초목이 거의 없는 바위섬으로, 거센 바닷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황량한 곳이었다.[68] 수감자들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열악한 수용소 시설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독일 사령관 루트비히 폰 에스토르프는 1907년 4월까지 약 1,700명의 수감자(이 중 1,203명은 나마족)가 사망했다고 보고했으며, 1906년 12월에는 도착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나마족 291명이 사망하는 등(하루 평균 9명 이상 사망) 끔찍한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당시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에 12명에서 18명이 사망했으며, 샤크 아일랜드로 보내진 수감자의 약 80%가 결국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8] 다이아몬드 광부였던 영국인 프레드 코넬은 당시 샤크 아일랜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추운 날씨 – 밤에는 종종 몹시 추웠다 – 굶주림, 갈증, 노출, 질병 및 광기는 매일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그들의 시신을 실은 마차가 매일 해변 뒤로 실려 갔고, 썰물 때 몇 인치 모래에 묻혔다. 조수가 들어오자 시신이 떠내려가 상어의 먹이가 되었다.[68][66]
일부 연구자들은 샤크 아일랜드가 단순한 강제 수용소를 넘어 사실상 처형 수용소 또는 죽음의 수용소로 기능했다고 주장한다.[70][71][72] 또한, 헤레로족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성 노예가 되도록 강요당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43][69]
수용소가 폐쇄된 후에도 살아남은 헤레로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독일 정착민들의 노동자로 배분되었으며, 7세 이상의 모든 헤레로족은 노동 등록 번호가 새겨진 금속 원반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했다.[43] 또한, 목축 민족이었던 이들에게 필수적인 토지나 가축 소유는 엄격히 금지되었다.[64]
4. 3. 1. 샤크 아일랜드 강제 수용소
뤼데리츠 근처에 위치했던 샤크 아일랜드 강제 수용소는 헤레로·나마 집단학살 당시 운영된 여러 수용소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해는 이후 독일로 옮겨져 백인 우월주의를 뒷받침하려는 비과학적인 연구에 사용되는 등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았다.2008년 8월, 당시 주독일 나미비아 대사였던 페터 카트자비비는 1904년부터 1908년까지의 봉기 당시 독일로 반출된 헤레로족과 나마족 포로들의 두개골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독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독일 내 대학 두 곳에서 40개가 넘는 두개골이 보관 중이며, 이 중에는 샤크 아일랜드에서 사망한 나마족 추장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데 따른 것이었다.[122]
이러한 요구와 국제적인 관심 속에서 2011년 9월, 해당 두개골들이 나미비아로 반환되었다.[123] 이후 2018년 8월에는 독일에서 연구 목적으로 보관 중이던 나머지 모든 두개골과 유해가 추가로 반환되었다.[13][124] 이는 세 번째 유해 반환이었으며, 반환 직전 독일 개신교 주교 페트라 보세-후버는 "오늘 우리는 수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을 하려 합니다.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의 유해를 그들의 후손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며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13][124]
4. 3. 2. 의료 실험
1904년 말, 헤레로족과 나마족 포로들은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체 실험의 피험자로 착취당하기도 하였다.[55]일부 연구자들은 당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의사 오이겐 피셔가 수행한 의학 실험이 이후 나치 독일의 인체 실험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62] 피셔의 실험은 나치가 사용한 의학적 절차의 시험장이 되었다는 것이다.[62] 피셔는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총장이 되어 나치 의사들을 양성했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을 자행한 요제프 멩겔레의 스승 오트마르 프라이헤어 폰 페르슈어도 있었다.[95][96]
또한, 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들의 두개골 등 유해가 연구 목적으로 독일 제국 수도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 등으로 보내졌다. 이 유해의 일부는 2011년과 2013년에 나미비아로 반환되었다.
5. 피해 규모
독일 제국의 학살 이후 인구 통계에 따르면, 헤레로족은 전체 인구 약 8만 명 중 약 6만 명(80%)이 사망했으며, 나마족은 전체 인구 약 2만 명 중 1만 명(50%)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헤레로족의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2만 4천 명에서 최대 10만 명에 이른다는 다른 추정도 존재한다[135].
6. 현대의 평가와 논란
헤레로·나마 집단학살은 현대에 들어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특히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의 연관성에 대한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1985년 휘태커 보고서는 이 사건을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말살하려는 시도로 규정하며, 20세기 초반에 발생한 중요한 집단학살 사례로 언급했다.[101] 이는 국제 사회에서 이 사건의 심각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
역사학계에서는 헤레로·나마 집단학살이 이후 나치 독일의 절멸 수용소 운영과 홀로코스트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90][91][92] 일부 학자들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이 생존권(Lebensraum) 개념과 같은 나치의 식민주의 및 집단학살 사상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93] 당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오이겐 피셔의 인종차별적 의학 실험은 이후 나치 인체 실험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으며[62], 피셔의 제자 중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의사였던 요제프 멩겔레도 있었다는 점[95][96], 그리고 훗날 나치 돌격대(SA)의 주요 인물이 되는 프란츠 리터 폰 에프가 이 학살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97] 등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또한, 학살을 지휘한 로타어 폰 트로타 장군이 "피의 강물로 아프리카 부족을 파괴"하고 "정화 후에야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18] 나치의 사회 진화론적 말살 논리와 유사하다는 분석도 있다.[43]
그러나 이러한 연관성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홀로코스트와 헤레로 집단학살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입증할 경험적 증거가 부족하며, 나치의 정책은 유럽 식민주의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99]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혁명 시기 자유군단의 활동과 같은 다른 역사적 요인들이 나치의 폭력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99] 또한, 하인리히 힘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가 독일 제국의 식민주의적 방식을 시대에 뒤떨어진 모델로 간주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 파시즘의 식민 통치 방식을 참고했다는 연구도 있다.[100]
이러한 역사적 평가와 논쟁 속에서 헤레로·나마 집단학살은 다큐멘터리, 소설, 연극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BBC 다큐멘터리 ''나미비아 – 집단학살과 제2제국''(2005)[126], 영화 ''100년의 침묵''[127], 역사 소설 ''마마 나미비아''[128], 토머스 핀천의 소설 ''V.''[129], 재키 시블리스 드러리의 연극[130]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과거의 비극이 현대 사회에 던지는 의미와 교훈을 되새기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6. 1. 독일의 사과와 배상 문제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독일 제국 시기 자행된 집단학살에 대한 독일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오랫동안 요구해왔다. 이는 단순한 사과를 넘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식민 전쟁과 대량 학살로 명확히 인정받으려는 염원이었다.[106] 헤레로족은 과거 독일 기업들이 나미비아에 입힌 피해에 대해 국제 사법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그러나 독일 정부는 해당 사건이 1951년 '인종 학살 범죄에 관한 유엔 협약' 발효 이전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인종 학살 (Genocide)'이라는 표현 사용을 오랫동안 꺼렸다. 이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태도와 대조를 이루며, 독일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같은 강대국에게만 사과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6년 독일 연방의회가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종 학살로 인정하자,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독일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과거 독일 외무부 장관 요슈카 피셔는 나미비아 방문 중 배상금 문제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한 바 있다.
1985년 유엔의 휘태커 보고서는 이 사건을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말살하려 한 시도로 규정하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 중 하나로 분류했다.[101] 1998년 독일 대통령 로만 헤르초크가 나미비아를 방문했을 때, 헤레로족 지도자 문주쿠 응구바우바 2세 추장은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헤르초크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는 데 그쳤다.[102]
독일 정부의 태도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2004년 하이데마리 비초레크초일 당시 경제협력개발부 장관이 학살 100주년 추모식에서 "역사적, 도덕적 책임을 인정한다"고 발언하며 도덕적 차원의 사과를 표명했고, 2011년에는 학살 과정에서 독일로 유출되었던 나미비아인들의 유골을 반환했다. 2007년에는 학살을 주도했던 로타어 폰 트로타 장군의 후손들이 직접 나미비아를 찾아 사과하기도 했다.[105] 이후 2015년 독일 외무부가 해당 사건을 "전쟁 범죄 및 집단 학살"로 지칭해야 한다는 내부 지침을 발표하면서[113][114][115], 2016년 독일 정부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인종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배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았다. 독일 정부는 법적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화해금'이나 '개발 지원금' 형태의 재정 지원을 제안했다. 2005년에는 2000만유로 규모의 "화해 이니셔티브"를 제안했으나 나미비아 측과의 조율 부족으로 무산되었고[137], 2021년에는 30년간 11억유로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 역시 '배상금'이 아닌 '지원금'으로 규정하며 법적 책임을 회피했다.[119][120][143][142]
피해자 후손들은 독일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반발하며 직접적인 배상과 협상 참여를 요구했다. 2001년과 2017년, 헤레로족과 나마족 후손들은 독일 정부와 도이체 방크 등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106][107][108][109] 그러나 독일 정부는 주권 면제를 주장했고, 미국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2019년과 2020년에 걸쳐 소송을 기각했으며, 2021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상고를 최종 기각했다.[110][111][112]
2021년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 간 합의안 역시 피해 당사자들의 참여 배제, 지원금 성격 및 수혜 주체 문제 등으로 인해 나미비아 내부는 물론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하며 최종 타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119][120][140][133]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133]
6. 1. 1. 2004년 독일의 사과
2004년, 헤레로·나마 집단학살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독일 연방 공화국의 경제 협력·개발 장관이었던 하이데마리 비쇼레크-초일은 독일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상세히 언급하며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당시 행해진 대량 학살은 오늘날이라면 제노사이드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하여 기존 독일 정부의 입장을 넘어서는 견해를 밝혔다. 비쇼레크-초일은 이를 통해 추모와 사죄의 뜻을 전 독일인을 대표하여 표명했으나, 이는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가 아닌 도덕적 차원의 사과로 평가되었다. 이에 대해 헤레로 측은 재정적 배상을 요구했으며, 헤레로 제노사이드 재단의 에스터 무인장게 의장은 "독일 정부가 진정으로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독일 연방 의회에서의 결의와 같은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136]6. 1. 2. 2016년 독일 정부의 제노사이드 인정
나미비아의 헤레로족은 오랫동안 독일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과거 제국주의 침략 행위를 식민 전쟁 및 대량 학살로 인정받기를 염원해왔다. 독일 정부는 이 학살이 1951년 '인종 학살 범죄에 관한 유엔 협약' 발효 이전 사건이라는 이유로 '인종 학살 (Genocide)'이라는 용어 사용을 꺼려왔다. 이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인종 학살에 대한 태도와 대조되어, 독일이 강대국에게만 사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6년 6월 독일 연방 의회가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종 학살로 인정하자,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독일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이전에도 2004년 독일 경제협력개발부 장관 하이데마리 비초레크초일이 학살 100주년 추모식에서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발언했으나, 이는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는 아니었다.
2016년 7월 13일, 독일 정부는 112년 전인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에서 자행한 집단 살해 행위를 '인종학살 (Genocide)'로 공식 인정하고 사과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외교부는 나미비아 정부와 협력하여 2016년 말까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독일 외교부는 이 사과가 법적 배상의 근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직접적인 배상 대신 담수처리 시설 건설과 같은 인프라 지원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160]
한편, 독일은 2011년에 학살 과정에서 독일로 유출되었던 나미비아인들의 유골을 반환하며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강조한 바 있다. 당시 나미비아의 앙골라 총리는 유골 환영식에서 "이들 유골은 우리 국민에 대한 독일의 잔인함과 식민 통치의 참혹함을 보여준다"며 "나미비아는 이제 이들 유골의 환국을 비극적인 역사의 장을 마감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6. 1. 3. 2021년 독일-나미비아 합의와 비판
2021년 5월 28일, 독일 정부는 5년간의 협상 끝에 과거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잔혹 행위를 공식적으로 집단학살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119][120] 당시 독일 외무부 장관 하이코 마스는 이 발표와 함께 독일이 나미비아와 집단학살 피해자 후손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독일은 집단학살 인정의 의미로, 피해 지역 사회를 위해 30년에 걸쳐[140] 총 11억유로 규모의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119][120][141]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 지원금이 '배상'이 아니며, 해당 행위가 당시 국제법 위반이 아니었기에 법적 책임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집단학살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119][120][143][142][133] 합의안이 양국 의회에서 비준되면 독일 대통령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나미비아를 방문하여 공식 사과하기로 했다.[119][120]
이 합의는 발표 직후부터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협상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대표들이 배제되었다는 점이 주요 비판점이었다.[119][120] 나미비아 집단학살 협회 회장 라이드로 페링간다는 독일이 독일 정착민 후손들로부터 과거 조상들의 땅을 되사서 헤레로족과 나마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합의 내용을 비판했다.[119][120]
또한, 독일이 제공하기로 한 "지원금"의 수혜 주체가 집단학살 피해를 직접 입지 않은 오밤보족 중심의 현 나미비아 정부라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140] 이는 야당 지지 성향이 강한 헤레로족과 나마족 공동체의 반발을 샀다. 더불어 보츠와나 등 인접국에 거주하는 피해자 후손들이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도 비판점으로 지적되었다.[133]
나미비아 대통령 하게 게인고브는 독일의 제안을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며 수용 의사를 밝혔으나, 나미비아 의회는 제안 내용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하여 합의 이행은 보류되었다.[140]
202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국제 사법 재판소(ICJ)에 제기한 집단 학살 소송과 관련하여 이 합의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되었다. 게인고브 대통령이 가자 지구 분쟁에서 독일의 이스라엘 지지 결정을 비판하자, 오바헤레로 집단학살 재단의 난디 마제잉고는 나미비아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위해 독일을 ICJ에 제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팔레스타인(State of Palestine) 지지 사례를 언급했다.[121]
6. 2. 유골 반환
독일은 헤레로족 학살 과정에서 독일 제국 시절 연구 목적으로 독일로 가져갔던 나미비아인들의 유골을 여러 차례 반환했다.2008년 8월, 당시 주독일 나미비아 대사였던 페터 카트자비비는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의 봉기 때 독일로 옮겨져 백인 우월주의 연구에 사용된 헤레로족과 나마족 포로들의 두개골 반환을 요구했다. 이는 독일의 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독일 대학 두 곳에서 40개가 넘는 두개골을 발견했으며, 이 중에는 뤼데리츠 인근 샤크 섬에서 사망한 나마족 추장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도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122]
2011년 9월, 독일은 학살 과정에서 유출시킨 나미비아인들의 유골을 처음으로 반환했다.[123] 독일은 이 반환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강조했다. 당시 나미비아 총리는 공항 환영식에서 "이 유골들은 우리 국민에 대한 독일의 잔인함과 식민 통치의 참혹함을 보여준다"며, "나미비아는 이제 이 유골의 환국을 비극적인 역사의 장을 마감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2018년 8월에는 세 번째 유골 반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독일은 백인 우월주의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연구했던 나머지 두개골과 유해들을 모두 반환했다.[13][124] 이 반환 직전 독일 개신교 주교 페트라 보세-후버는 "오늘 우리는 수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을 하려 합니다.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의 유해를 그들의 후손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13][124]
2019년 5월 17일, 독일 정부는 반환 절차의 일환으로 1900년대에 나미비아에서 가져간 석재 상징물도 반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25]
7. 국제 사회의 반응과 한국의 입장
헤레로인들은 독일 제국의 식민 통치 시절 자행된 집단학살에 대해 독일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책임을 인정받기를 오랫동안 염원해왔다. 과거 독일 기업들이 나미비아에 입힌 막대한 피해에 대해 베를린의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국제 사법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오랫동안 이 사건을 '인종 학살(Genocide)'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다. 1951년 '인종 학살 범죄에 관한 유엔 협약' 발효 이전의 사건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인종 학살에 대한 태도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같은 강대국에게만 사과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6년 6월, 독일 연방의회가 오스만 튀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종 학살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터키 공화국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독일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라"고 비판하며 독일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과거 독일 외무부 장관 피셔는 나미비아 방문 중 배상 문제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한 바 있다.
2004년, 학살 100주년 추모식에서 독일 경제협력개발부 장관 비초레크초일 하이데마리가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발언했지만, 이는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아닌 개인적인 도덕적 차원의 사과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2016년 7월 13일, 독일 정부는 마침내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자행된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집단 살해 행위를 '인종학살(Genocide)'로 공식 인정하고 사과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외교부는 나미비아 정부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할 계획을 밝혔으나, 이 사과가 법적 배상의 근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배상 대신 담수 처리 시설 건설 등 인프라 지원 방안을 고려한다고 밝혔다.[160] 이는 진정한 책임 인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낳았다.
2011년에는 학살 과정에서 독일로 유출되었던 나미비아인들의 유골 일부가 반환되었다. 독일은 이를 통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강조하려 했으나, 나미비아 측에서는 이 유골이 독일의 잔혹한 식민 통치를 보여주는 증거임을 분명히 했다.
2021년 5월 28일, 독일 정부는 과거 행위가 집단학살이었음을 인정하며, 30년간에 걸쳐 11억유로 규모의 "지원금"을 나미비아에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140][141] 하지만 당시 국제법 위반은 아니었다며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고[142],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제노사이드였다는 단서를 달았다.[133] 또한 '배상'이나 '보상'이라는 표현 대신 '지원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143],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지원금의 수혜자가 학살 피해 당사자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아닌, 오밤보족 중심의 나미비아 정부라는 점[140], 그리고 보츠와나 등 해외에 거주하는 피해자 후손들이 배제되었다는 점[133] 등도 문제로 지적되며 내부적인 반발을 샀다. 하게 가인고브 나미비아 대통령은 독일의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의회는 제안이 불충분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아 합의는 보류되었다.[140]
이에 일부 헤레로족과 나마족 후손들은 독일 정부의 제안이 진정한 사과와 배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2017년 1월 미국 뉴욕 연방 법원에 독일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등[138][139], 국제 사회에 정의를 요구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과거 제국주의 강대국에 의해 고통받았던 약소 민족이 가해국의 책임을 묻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현대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과거 식민 지배와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겪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불충분한 사과와 배상 문제, 그리고 일본의 역사 왜곡 및 책임 회피 문제와 비교하며 국제 사회의 과거사 청산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 미디어
- BBC 다큐멘터리 ''나미비아 – 집단학살과 제2제국''(2005)은 헤레로-나마 집단학살과 그 주변 상황을 탐구한다.[126]
- 다큐멘터리 ''100년의 침묵''은 영화 제작자 Halfdan Muurholm과 Casper Erichsen이 제작했으며, 증조할머니가 독일군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23세 헤레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과거와 현재 나미비아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127]
- Mari Serebrov의 역사 소설 ''마마 나미비아''는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을 두 가지 시선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독일군에게 가족을 잃고 2년간 홀로 살아남은 12세 헤레로 소녀 자호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려 독일 군대에 자원했지만 집단학살의 참혹함을 목격하며 갈등하는 유대인 의사 코브의 이야기이다.[128]
- 토머스 핀천의 소설 ''V.''(1963)에는 집단학살에 대한 회상이 담긴 장이 있으며, 샤크 아일랜드 강제 수용소를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1904년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다룬다.[129]
- 재키 시블리스 드러리의 연극 ''우리는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서 1884년에서 1915년 사이에, 옛날에는 남서 아프리카로 알려졌던, 나미비아의 헤레로에 대한 발표를 제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는 헤레로-나마 집단학살에 대한 연극을 만드는 배우 그룹의 이야기를 다룬다.[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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