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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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5세는 108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교황 간의 서임권 투쟁 속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교황 파스칼 2세와의 협상을 통해 서임권을 해결하려 했으나, 대관식에서 합의가 무산되면서 갈등을 겪었다. 이후 제후들의 반란과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서임권 투쟁을 마무리했지만,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1125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통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종교적 유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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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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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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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인리히 5세 (Heinrich V.) |
출생 | 1081년 8월 11일경 ~ 1086년 8월 11일경 |
출생지 | 작센 공국 고슬라어 |
사망 | 1125년 5월 23일 (38세 또는 43세) |
사망지 | 위트레흐트 |
매장지 | 슈파이어 대성당 (시신), 위트레흐트 성 마르틴 대성당 (심장 및 내장) |
왕조 | 잘리어 왕조 |
통치 | |
신성 로마 황제 | 재위: 1111년 4월 13일 – 1125년 5월 23일 대관식: 1111년 4월 13일 이전: 하인리히 4세 이후: 로타르 3세 |
독일 왕 (공식적으로 로마인의 왕) | 재위: 1099년 – 1125년 5월 23일 이전: 하인리히 4세 이후: 로타르 3세 |
이탈리아 왕 | 재위: 1098년 – 1125년 5월 23일 이전: 콘라트 2세 이후: 콘라트 3세 |
가족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마틸다 (1110년 결혼) |
아버지 | 하인리히 4세 |
어머니 | 사보이의 베르타 |
2. 생애
하인리히 5세는 108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사보이의 베르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황제였던 아버지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098년 형 콘라트가 교황을 따르다 폐위되면서, 하인리히 5세는 1099년 공동 왕에 올랐다.[80][81]
하인리히 4세는 교회와의 불화로 권력 행사에 제약을 받았고, 영주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1104년 하인리히 5세는 바이에른 영주들과 협약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82] 1105년 유력 영주들과 교황의 지지를 받은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퇴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는 저항했으나 1106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83][84]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투쟁을 해결하고자 1110년 로마 원정을 시작했다.[107] 교황 파스칼 2세는 서임권 포기 대신 황제가 교회에 하사한 토지와 권리 반환을 제안했고,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관식 때 합의가 공개되자 독일 교회와 영주들이 반발했고, 하인리히 5세는 교황을 투옥하고 강제로 성직 임명권을 받아낸 후 1111년 4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107]
1106년 봄, 하인리히 5세는 제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후 회의(호프타크)를 소집하여 제후들과의 합의를 추구했다.[17] 그는 반지와 지팡이를 사용한 서임 관행을 계속했지만, 성직 제후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14] 1107년 살리안 왕가는 제후들의 참여와 승인을 통해 여러 주교구를 점령했다.[24][25]
그러나 교황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성직자 서임 완전 포기를 요구했고, 1106년과 1107년의 합의 시도는 실패했다.[24][26] 1110년 호프타크에서 로마 진군 계획이 수립되었고, 1111년 2월 수트리에 도착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로 출발하면서 새로운 왕실 인장을 만들었다. 바이에른 공작 벨프 2세는 별동대를 지휘했고,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군대 통과를 허용했다.[29] 하인리히 5세는 마틸다에게 평화와 국왕의 명예를 위한 메시지를 보냈다.[30]
하인리히 5세는 30,0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동반했고, 프라이징의 오토는 이를 "세속적 권력 과시"라고 표현했다. 그의 군대는 롬바르디아에서 인정을 받았고, 그로솔라노 대주교는 그에게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씌워주려 했다.[31][32]
교황 파스칼은 이탈리아 노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풀리아의 로저와 카푸아의 로베르 1세가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지원을 얻지 못했고, 카푸아 공작 로베르 1세가 보낸 군대는 격퇴되었다.[34][4]
하인리히 5세는 주교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수도원 및 황실 수도원에 대한 충성 맹세와 서임 권리를 계속 주장했다. 교황 파스칼은 서임 포기 대신 왕실 레갈리아 영지, 화폐, 시장 및 관세 권리 반환을 제안했다. 1111년 2월 4일 예비 계약이 체결되었으나, 이는 주교들의 권리와 수입을 박탈하는 것이었다.[32] 2월 9일, 하인리히 5세는 교황의 ''수트리 협약''을 받아들였다.[35][14][36][28][37]
1111년 2월 12일 대관식 축하가 시작되었고, 하인리히 5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38][4] 그러나 주교들은 합의에 항의했고,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교황을 가두고 서임권을 회복한 후 대관식을 요구했다. 파스칼은 거부했고, 하인리히 5세는 그를 가두었다. 두 달 후 하인리히 5세는 ''폰테 마몰로 조약''에서 서임 권리를 얻었고, 4월 13일 대관식이 완료되었다.[26][39] 그러나 교황 투옥으로 하인리히 5세는 인정을 잃었고, 1112년 3월 서임 특권은 폐지되었다.[40][13][3]
독일로 돌아온 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고 이전 협약을 무효화했다.[90][91]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와 작센 공 로타르 3세(훗날 황제 로타르 3세)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1115년 하인리히 5세는 패배했다.[91] 1119년 마인츠 왕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5세는 교황과의 화해를 강요당했고,[92] 1122년 9월 23일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93][94]
보름스 협약으로 황제는 주교 임명권을 일부 포기하고 교회법에 따른 선출에 동의했지만, 독일 왕국 내에서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상징적 근거를 잃게 되었다.
1111년 로마에서의 사건과 1115년 패배는 주교와 왕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인리히 4세 때보다 주교령 관련 문서 발행이 크게 감소했다.[47][48]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 이후 독일 반대 세력은 궤멸되었고, 트리부르에서 평화가 선언되었다.[63] 1119년 교황 갈리스토 2세가 즉위했고, 무종에서 서임권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이 재개되었으나 실패했다. 1119년 10월 랭스에서의 만남은 왕의 참회의 종말이자 전환점으로 여겨진다.[3][64] 1122년 보름스 협약 체결 후 하인리히 5세는 참회 없이 교회에 복귀했다. 협상 실패 후 교황은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에게 특사 영예를 부여했다.[3][64]
1121년 상황이 악화되었고, 하인리히 5세는 마인츠의 아달베르트에 대한 군사 작전을 결정했다. 양측은 협상을 시작했고, 1121년 가을 황제는 평화를 추구하도록 촉구받았다. 제후 평화 위원회가 임명되었고, 1121년 9월 29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제후 회의가 열려 황제에게 교황과의 화해를 강요했다.[43][3]
1122년 9월 23일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갈리스토 2세는 추기경 오스티아의 람베르토가 대표했다. 협약 조항은 제후들 사이에서 협상되었다. 황제 문서(''하인리키아눔'')와 교황 문서(''칼릭스티눔'') 교환은 서임권 분쟁의 공식적 해결을 의미했다. 주교 서품 시 현세적 재산과 영적 권위를 구분해야 했다. 서품은 ''"성직자와 백성"''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다. ''하인리키아눔''은 제후들의 정치적 행위로 분류되었고, 하인리히 5세는 서임 관행을 중단해야 했다. 왕은 교회 재산을 복원해야 하며, 제후들과 함께 통치해야 한다.[65] ''칼릭스티눔''은 황제가 주교와 수도원장 서품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인리히 5세는 새로 선출된 사람에게 그의 홀로 제국 레갈리아를 수여할 수 있다. 최종 서품은 주교의 경우 수도 대주교가, 수도원장의 경우 주교가 수행해야 했다. 1119년 10월 랭스에서 정식으로 파문당했던 하인리히는[66] 그의 전 교황 지명자 그레고리오 8세를 버리고 다시 로마 교회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67][68]
보름스 협약 이후 황제의 권위는 하락했다. 1123년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2세 사후,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의 가신을 임명하려 했으나, 콘라트가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와 동맹을 맺고 반발했다. 로타르는 황제와 무관하게 콘라트를 임명했고, 하인리히 5세는 이를 지켜봐야 했다.[70]
1111년부터 하인리히 5세는 독단적인 통치를 펼쳤다. 많은 성직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특히 자르브뤼켄의 아달베르트와의 결별이 중요했다. 아달베르트는 1115년 석방 후 살리 왕조의 반대자가 되었다.[28]
작센에서도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1112년 작센 공작 로타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1113년 카르니올라 변경백 울리히 백작 사망 후, 하인리히 5세는 상속 재산을 제국에 귀속시키려 했으나 작센 법과 충돌했다. 로타르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반슈타트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사면받았다.[43][17]
쾰른 대주교 프리드리히 1세도 하인리히 5세와 결별했다. 쾰른 시민들은 하인리히 5세 신하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었고, 프리드리히 대주교는 교회의 비참한 상황을 비난했다. 보름스와 마인츠 주교좌는 수년간 공석이었고, 주교의 세속적 권리는 왕실 행정관에 의해 수행되었다. 1113년부터 하인리히 5세는 살리 왕조의 ''점령 관행''을 채택했다. 힐데스하임 주교와 메르제부르크 주교 임명 역시 작센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24][44]
반군들은 쾰른 대주교를 중심으로 단결했고, 1114년 초 황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하인리히 5세는 쾰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패배했다. 1115년 로타르 공작은 벨페스홀츠 전투에서 하인리히 5세를 격파하여 작센에서 살리 왕조 지배를 끝냈다.[46] 로타르는 작센에서 왕과 같은 통치를 유지했고, 하인리히 5세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1115년 호프타크에는 제후 중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5세는 말년에 플랑드르 원정과 마르크그라프schaft 마이센의 계승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70] 1125년 5월 23일 위트레흐트에서 병으로 사망했고,[70] 유해는 슈파이어에, 심장과 내장은 위트레흐트 성 마르틴 대성당에 묻혔다. 적자 없이 사망하여 조카 프레데리크 2세에게 재산을 남겼다.[71] 그의 죽음으로 프랑코니아 왕조, 잘리어 황제의 왕가는 단절되었다.
2. 1. 왕위 계승과 아버지와의 갈등
108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사보이의 베르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황제인 아버지와 교황 사이에서는 교회의 서임권을 둘러싼 다툼, 이른바 서임권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087년부터 공동 왕위에 올랐던 형 콘라트(1074-1101)는 십자군 운동을 제창한 교황 우르바노 2세를 따르기로 하면서 1093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이 때문에 콘라트는 1098년 마인츠의 왕국 회의에서 폐위되었고, 하인리히 5세가 독일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1099년 1월 6일 공동 왕에 올랐다.[80][81]하인리히 4세는 교회와 화해하지 않아 국왕으로서 완전한 권력 행사가 불가능했기에, 파문 해제를 전제로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하고 영주들에게 분쟁 제한을 명했다. 영주들은 이러한 제한에 불만을 가졌고,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고자 1104년 바이에른 영주들과 협약을 맺은 후 반기를 들었다.[82]
유력 영주들과 로마 교황마저 하인리히 5세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전투에서 패배한 하인리히 4세는 쾰른으로 도망쳤다가 마인츠에서 투옥된 후 1105년 퇴위당했다. 하인리히 4세는 왕위를 잃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리에주로 달아났다가 로렌 지방 사람들과 연합해 1106년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몇 개월 뒤 하인리히 4세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83][84]
2. 2. 황제 대관식과 서임권 투쟁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투쟁을 해결하고자 1110년부터 로마 원정을 시작했다.[107] 대규모 군대 앞에서 교황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에게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 독일 교회에 황제가 하사한 토지와 권리를 반환하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인리히는 이를 받아들여 대관식까지 진행하려 했다.하지만 하인리히 5세의 대관식 때 이 합의가 공개되자 독일 교회와 영주들이 크게 반발하여 대관식이 어렵게 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군사를 움직여 교황과 고위 성직자를 투옥하고 성직 임명권을 강제로 받아낸 후, 1111년 4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107]
1106년 봄,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실수를 돌아보며 ''"제후에 대한 무시는 제국의 몰락이었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통치는 제후들의 더 큰 책무 공유와 교회 개혁 인가로 특징지어졌다. 여러 문서에서 하인리히는 자신의 행동을 ''"제후들의 판단과 조언에 따라"'' 수행했다고 밝혔다. 제후들과 더 큰 합의를 위해 제후 회의(호프타게)를 소집했다.[17]
하인리히 5세는 반지와 지팡이를 사용한 서임 관행(''per anulum et baculum'')을 계속했고 성직 제후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14] 1107년, 살리안 왕가는 제후들의 명시적인 참여와 승인을 통해 할버슈타트, 마그데부르크, 슈파이어, 베르됭의 주교구를 점령했다. 왕은 소수의 귀족 가문의 동의만을 구했고, 이 가문들은 자신들의 계급 내에서 후보자들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이 관행은 세습적 선발 과정을 통해 성직 사무실을 장려했다.[24][25]
하인리히의 반지와 지팡이를 사용한 주교 서임은 교황과의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황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가 성직자 서임을 완전히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1106년 과스탈라 시노드와 1107년 샬롱 앙 샹파뉴에서 서임 문제에 대한 합의 시도는 실패했다.[24][26]
헨리 5세는 서임권 투쟁 해결에 주력했다. 1110년 8월 ''호프타크''에서 로마 진군 계획이 수립되었고, 서임권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치가 마련되었다. 군대는 대 생 베르나르 고개를 경유하여 피아첸차, 파르마, 피렌체를 거쳐 1111년 2월 수트리에 도착, 로마로 진군했다.
헨리는 이탈리아로 출발하면서 ''획기적인 사건에 대한 생각''을 품었다.[28] 그는 새로운 왕실 인장을 만들게 했다. 바이에른 공작 벨프 2세는 제국의 남동쪽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두 번째 부대를 지휘했으며, 론칼리아 근처에서 주력 부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 대부분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용했다.[29]
헨리 5세는 마틸다에게 사절을 보내 ''"de pace [...] de regis honore suoque"'' (''평화와 국왕의 명예를 위하여 [...]'')라는 메모를 완료했다. 1079년 마틸다는 모든 재산을 교황에게 물려줄 의향이 있었지만, 이제 교황과 국왕 사이의 합의를 선택하고 '''''헨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30]
헨리는 제국 전역에서 온 30,0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를 동반했다고 한다. 프라이징의 오토에 따르면, "밤의 횃불 빛 속에서 인상적인 세속적 권력 과시"를 보여주었다. 그의 군대의 힘은 롬바르디아에서 일반적인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로솔라노 대주교는 그에게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씌워주려 했다.[31][32]
교황 파스칼은 이탈리아 노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풀리아의 로저와 카푸아의 로베르 1세는 지원을 약속했다. 파스칼은 로마 도시 귀족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지원을 얻지 못했다. 1111년 로디 현 점령으로 밀라노는 자체 영토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카푸아 공작 로베르 1세가 보낸 노르만 군대는 투스쿨룸 백작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격퇴되었다.[34][4]
헨리 5세는 주교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수도원 및 황실 수도원에 대한 충성 맹세뿐만 아니라 반지와 지팡이로 서임하는 자신의 권리를 계속 주장했다. 교황 파스칼은 헨리가 서임(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공작령과 변경백령의 모든 주권 왕실 레갈리아 영지와 화폐, 시장 및 관세 권리를 돌려받을 것을 제안했다. 헨리와 교황 파스칼은 1111년 2월 4일에 이 아이디어에 대한 예비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주교들이 카롤링거 왕조 이후 그들에게 속했던 권리와 수입, 국왕에 대한 봉사를 가능하게 하고 보상하는 수단을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32] 2월 9일, 헨리 5세는 교황의 ''수트리 협약''을 받아들였다. 교황 파스칼에게 성직 매매의 원인은 서임이 아니라 주교들의 세속화였다.[35][14][36][28][37]
대관식 축하는 1111년 2월 12일에 시작되었다. 헨리 5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의식은 1111년 대관식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미래 황제들의 대관식에서 공식적인 의식이 되었다.[38][4]
주교들은 대관식 전에 파스칼과 헨리의 합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항의가 터져 나왔고, 도시 자체에 혼란이 발생하여 대관식이 취소되어야 했다. 헨리는 서임권을 회복하고 즉시 대관식을 요구했다. 파스칼은 거부했고, 헨리는 그를 성 베드로에 가두었다. 두 달 후 헨리는 4월 12일에 ''폰테 마몰로 조약''에서 파스칼로부터 부친(헨리 4세)의 면죄를 받고 반지와 지팡이로 서임할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4월 13일, 파스칼은 제국 대관식을 완료했다. 또한 파스칼은 헨리를 파문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26][39]
그러나 교황의 투옥으로 인해 헨리는 광범위한 인정을 잃었다. 1112년 3월, 서임 특권은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청에 의해 폐지되었고 ''타락한 특권'' (''프라빌레게'')으로 지정되었다.[40][13][3]
2. 3. 제후들의 반란과 보름스 협약
하인리히 5세가 독일로 돌아간 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여 이전에 맺었던 협약은 무효가 되었다.[90][91]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 확대를 꾀하던 각지의 제후들이 하인리히 5세에 대항했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라인란트 고지 지방에서 소요를 선동하고, 작센 공 로타르 폰 쥐플린부르크(훗날 황제 로타르 3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1115년 하인리히 5세를 패배시켰다.[91]1119년 7월 24일, 마인츠 왕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이 아버지를 강압하여 왕위를 빼앗았던 것처럼, 독일의 영주들에게 로마 교황과의 화해를 강요당했다.[92] 그 후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1122년 9월 23일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93][94]
보름스 협약으로 황제는 주교의 상징인 홀(笏)과 반지를 수여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교회법에 따른 주교 선출에 동의해야 했다. 독일 왕국 내에서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거에 황제가 참석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황제가 선거에 참석함으로써 가해지는 무형의 압력은 황제가 바라는 대로 결정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복수의 후보자가 다투는 선거에서 결정이 되지 않을 경우 황제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같이 인정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독일 왕국 내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서임권을 여전히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교회가 가지는 토지와 재산 같은 세속적인 권리도 황제에 의해서 부여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결정은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중에 독일 왕국에 한정된 것이었고, 토지와 같은 세속적인 권리 부여 역시 형식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가장 큰 손실은 카를 대제로부터 시작해 오토 왕가, 잘리어 왕가를 거쳐오는 동안 통일된 기독교 제국을 다스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상징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1111년 로마에서의 사건과 1115년 작센 반대 세력에게 패배한 것은 주교와 왕 사이의 거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인리히 4세 치하에서 모든 문서의 3분의 1이 주교령을 위해 발행되었지만, 이 양은 하인리히 5세의 문서 중 단지 12분의 1로 감소했으며, 38개의 모든 주교령 중 13개만이 다루어졌다.[47][48]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 이후 독일의 반대 세력은 점차 궤멸되었고, 트리부르에서 일반적인 평화가 선언되었으며,[63] 서임권 분쟁 해결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었다.
1119년 2월 2일, 교황 갈리스토 2세가 교황직을 맡았다. 1119년 10월 24일, 교황과 황제는 무종의 뫼즈 강에서 서임권 분쟁 해결을 위해 다시 협상했다. 하인리히는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 광범위한 약속을 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협상은 실패했다. 1119년 10월 랭스에서의 만남은 ''"중세 유럽에서 왕의 참회의 종말이자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금지령 해결에 대한 협상 과정에서 하인리히 5세는 화해 의식에 따르고 맨발로 교황을 만나는 것을 ''힘들고, 심지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아버지의 카노사의 굴욕 (1077년) 이후, 참회의 개념과 사회적 지위 내에서의 개인적 노출은 교황에 대한 종속을 상징하는 내재적 의미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교황의 금지령과 화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협상이 그런 상황 때문에 실패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122년 보름스 협약이 체결된 후에야 하인리히는 참회나 교회 공동체에 대한 복종 없이 교황 사절에 의해 재입회되었다. 협상이 실패한 후 교황 칼릭스토는 마인츠의 대주교 아달베르트에게 교황 특사라는 영예를 부여하여 하인리히에 대한 반대를 강화했다.[3][64]
1121년에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고 하인리히는 마인츠의 아달베르트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대주교는 마인츠 방어를 위해 주로 작센에서 온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두 군대가 도시 근처에서 대치하면서 양측의 지휘 제후들은 협상을 시작했고, 1121년 가을에 황제에게 평화를 추구하고 교황과의 균형 잡힌 정책을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이러한 제후들의 행동은 제후들이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주도하기 위해 협력하여 통치 형태를 합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전적 단계였다. 동등한 수의 위원들로 구성된 제후 평화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하인리히의 지지자 12명과 반대자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모든 제국 신분을 대표하고자 했다. 연대기 작가 아우라의 에케하르트가 ''"많은 '국가의 수장'(tot capita rei publicae)''들의 모임이라고 칭한 제후 회의는 1121년 9월 29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열렸으며 황제에게 마침내 교황과 화해할 것을 강요했다.[43][3]
따라서 1122년 9월 23일에 이른바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갈리스토 2세는 추기경 오스티아의 람베르토가 대표했다. 협약의 구체적인 조항은 제후들 사이에서 협상되었다. 황제의 문서 (''하인리키아눔'')와 교황의 문서 (''칼릭스티눔'')의 상호 교환은 교황과 황제 간의 ''서임권 분쟁''의 공식적인 해결을 의미했다. 향후 주교 서품 시 ''현세적 재산'' (세속적 재산 및 특권)과 ''영적 권위'' (영적 권위)를 구분해야 했다. 서품은 ''"성직자와 백성"''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다. ''하인리키아눔''은 명시적으로 제후들의 정치적 행위로 분류되었으며, 하인리히는 반지와 지팡이로 서임하는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왕은 모든 교회 재산을 복원해야 하며, 더 이상 제국의 유일한 대표자가 아니며, 이후 제후들과 함께 통치해야 한다.[65] ''칼릭스티눔''은 황제가 주교와 수도원장의 서품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하인리히는 새로 선출된 사람에게 그의 홀로 제국 레갈리아를 수여할 수만 있다. 최종 서품은 주교의 경우 수도 대주교가, 수도원장의 경우 주교가 수행해야 했다. 1119년 10월 칼릭스토에 의해 랭스에서 정식으로 파문당했던 하인리히는[66] 그의 전 교황 지명자 그레고리오 8세를 버리고 다시 로마 교회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67][68]
2. 4. 작센의 자립과 말년
보름스 협약으로 서임권 투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결정은 황제의 권위 하락을 가져왔다. 1123년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의 가신을 변경백에 임명했으나, 하인리히 2세의 친척인 콘라트가 작센 공작 로타르와 동맹을 맺고 반발했다. 로타르는 황제의 뜻과 무관하게 콘라트를 마이센 변경백으로 임명했고, 하인리히 5세는 이러한 사태를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70]1111년부터 하인리히 5세는 제후들의 합의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통치를 펼쳤다. 1111년의 사건 이후, 많은 성직자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특히 자르브뤼켄의 아달베르트와의 결별은 중요했다. 아달베르트는 1109년 마인츠 대주교로 임명되어 하인리히 5세와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으나, 트리펠스 성을 둘러싼 갈등으로 체포되어 3년 이상 구금되었다. 마인츠 시민들의 압력으로 1115년 11월에야 석방된 아달베르트는 이후 살리 왕조의 가장 큰 반대자가 되었다.[28]
작센에서도 영토 분쟁으로 갈등이 발생했다. 1112년 작센 공작 로타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1113년 카르니올라 변경백 울리히 백작이 사망한 후, 하인리히 5세는 상속 재산을 제국에 귀속시키려 했으나, 이는 작센의 법적 개념과 충돌했다. 로타르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반슈타트 전투''에서 패배했지만,[43] 나중에 사면받았다.[17]
쾰른의 프리드리히 1세 대주교 역시 하인리히 5세와 결별했다. 쾰른 시민들은 하인리히 5세의 신하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었고, 프리드리히 대주교는 교회의 비참한 상황을 비난하는 서한을 보냈다. 보름스와 마인츠의 주교좌는 수년간 공석이었고, 주교의 세속적 권리는 왕실 행정관에 의해 수행되었다. 1113년부터 하인리히 5세는 캄브레 대교구의 총독으로 궁정 사제인 부르차르트를 임명하는 등 살리 왕조의 ''점령 관행''을 채택했다. 힐데스하임 주교와 메르제부르크 주교 임명 역시 작센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24][44]
반군들은 쾰른 대주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1114년 초 황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하인리히 5세는 쾰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라인강 하류 지배는 종식되었다.
1114년 크리스마스에 작센에서 불안이 고조되었고, 1115년 2월 11일, 로타르 공작은 벨페스홀츠 전투에서 하인리히 5세를 격파하여 작센에서 살리 왕조의 지배를 끝냈다.[46] 이후 로타르는 작센에서 왕과 같은 통치를 유지했고, 하인리히 5세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1115년 11월 1일 마인츠에서 열린 ''호프타크''에는 제후 중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1111년 로마에서의 사건과 1115년 작센 반대 세력에게 패배한 것은 주교와 왕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인리히 4세 치하에서 모든 문서의 3분의 1이 주교령을 위해 발행되었지만, 하인리히 5세 때는 12분의 1로 감소했다.[47][48]
하인리히 5세는 말년에 플랑드르 원정과 마르크그라프schaft 마이센의 계승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70] 1125년 5월 23일, 하인리히 5세는 위트레흐트에서 병으로 사망했다.[70] 그의 유해는 슈파이어에 묻혔고, 심장과 내장은 위트레흐트 성 마르틴 대성당에 묻혔다. 적자 없이 사망했기에 조카 프레데리크 2세에게 재산을 남겼다.[71] 그의 죽음으로 프랑코니아 왕조, 잘리어 황제의 왕가는 단절되었다.
3. 유산
1125년 위트레흐트에서 하인리히 5세는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틸다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하인리히의 조카인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 2세(1105~1147)가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중앙 집권화를 우려한 영주들이 거부하였다. 대신 주플린부르크 출신의 작센 공 로타르(1075~1137)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1024년 콘라트 2세의 즉위로 시작된 잘리어 왕가는 101년 만에 단절되었다. 왕비 마틸다는 하인리히 5세 사후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재혼하여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그중 장남 헨리는 훗날(1154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보름스 협약에서 로마 황제는 표면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중세 서유럽의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왕국 통치를 전제로 부르군트 왕국, 그리고 로마 교회로부터 "독일 왕국"으로 불린 구 동프랑크 왕국을 주된 구성 요소로 하는데, 그중 실질적인 제국 본토인 "독일 왕국" 내에서는 주교·수도원장 선거에 황제가 입회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00] 로마 황제의 입회는 황제가 원하는 형태로 결정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았고, 서임을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있을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약속도 있었다.[100][101] 즉, "독일 왕국" 내에서는 사실상 서임권을 유보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교회 소유 토지와 재산의 수여와 같은 세속적인 권리는 로마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95] 이 점에서도 황제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신권적인 황제권을 잃었다. 작센 왕조, 잘리어 왕가, 카롤루스 대제 이래 역대 프랑크 왕, 로마 황제는 보편적인 기독교 제국 수립이라는 꿈을 좇았으나, 더 이상 그것을 지탱할 근거는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다음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1157년 3월 밀라노 토벌 이탈리아 원정을 위한 제후 소집장에서 프리드리히 1세가 처음으로 "신성 제국"이라는 말을 사용했다.[102] 신성함이 자명한 이치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신성"을 칭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은 중세적인 국가 체제가 붕괴된 직후의 로마 왕 빌헬름 이후의 일이다.[103]
3. 1. 정치적 유산
하인리히 5세는 말년에 플랑드르 원정과 마이센 변경백국 계승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반대 세력은 작센의 로타르의 지원을 받았다.[70] 1125년 5월 23일, 하인리히 5세는 위트레흐트에서 병으로 사망했다.[70] 그의 유해는 슈파이어에 묻혔고, 심장과 내장은 위트레흐트 성 마르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임종 시 아내 마틸데를 부탁하며, 적자가 없어 조카 프리드리히 2세 폰 호엔슈타우펜에게 재산을 남겼다.[71] 그의 죽음으로 프랑코니아 왕조, 잘리어 황제의 왕가는 단절되었다.
잘리어 왕조의 기념 장소로서 슈파이어의 중요성은 곧 쇠퇴했고, 황제가 오랫동안 파문당한 탓에 지크부르크 하의 개혁 수도원인 글라드바흐와 니더알타이히 제국 수도원만이 하인리히 5세를 추모한 유일한 수도원이었다.
마틸다는 황제의 권위 상징을 마인츠 대주교에게 넘기고 1126년 9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호엔슈타우펜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 5세와의 혈연 관계와 제국 통일 노력 참여로 왕위 계승 후보로 여겨졌으나, 1125년 8월 24일 마인츠 선거 회의에서 자유 선거(libera electio) 거부와 과도한 자신감으로 기회를 잃었다. 이는 오만함(ambicone cecatus)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왕위 후보로는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3세, 플랑드르 백작 샤를 1세가 있었고, 결국 로타르 3세가 선출되었다. 정통성은 더 이상 상속이 아닌 제국 제후들의 선거로 결정되었다.[60][72][73]
보름스 협약에서 로마 황제는 거의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중세 서유럽의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왕국 통치를 전제로 부르군트 왕국, 그리고 로마 교회로부터 "독일 왕국"으로 불린 구 동프랑크 왕국을 주된 구성 요소로 하는데, 그중 실질적인 제국 본토인 "독일 왕국" 내에서는 주교·수도원장의 선거에 황제가 입회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00]
로마 황제의 입회에 따른 압력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결정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서임을 둘러싼 의견 대립 시에는 로마 황제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약속도 있었다.[100][101] 즉, "독일 왕국" 내에서는 사실상 서임권을 유보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 소유 토지와 재산 수여와 같은 세속적 권리는 로마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기에,[95] 이 점에서도 황제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신권적인 황제권을 잃었다. 작센 왕조, 잘리어 왕조, 카롤루스 대제 이래 역대 프랑크 왕, 로마 황제는 보편적인 기독교 제국 수립이라는 꿈을 추구했으나, 더는 그것을 지탱할 근거는 사라졌다.
이러한 가운데, 다음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 처음으로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1157년 3월 밀라노 토벌 이탈리아 원정을 위한 제후 소집장에서 프리드리히 1세가 처음으로 "신성 제국"이라는 말을 사용했다.[102] 신성함이 자명하지 않게 되었기에 "신성"을 칭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은 중세 국가 체제가 붕괴된 직후 로마 왕 빌헬름 이후의 일이다.[103]
3. 2. 종교적 유산
하인리히 5세의 통치 방식과 1111년 교황 투옥 사건은 사람들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권력 약화를 위한 행동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는 하인리히 5세의 즉위를 "교회와 제국의 탄압"으로 묘사하며, 다가오는 "선거"가 교회에 "자유"를,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74]프랑스 교회는 하인리히 5세를 문제아, 배신자, 폭군 등으로 묘사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르는 하인리히 5세가 1124년 프랑스 침공 1년 후 사망한 것을 정당한 결과로 보았다. 쉬제르는 교황에 대한 국왕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벤돔의 제프리는 하인리히 5세를 유다에 비유했고, 클뤼니의 리샤르는 자식이 없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배신의 벌이라고 주장했다. 투르네의 에리망은 하인리히 5세를 "로마에서 계획된 배신과 반역"의 죄를 저지른 폭군으로 묘사했다. 1111년 로마에서의 사건은 라틴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논의되었으며, 프랑스 연대기에서는 하인리히 5세의 교황 투옥을 주로 언급했다. 브르타뉴의 캥페를레 수도원의 ''Chronicon Kemperlegiense''는 교황 체포 기록에서 처음으로 "황제"를 언급하며, "황제 하인리히가 로마로 와서 반역으로 파스칼을 체포하고 맹세를 강요했다"라고 기록했다.[52][75]
보름스 협약에서 로마 황제는 표면적으로는 거의 잃은 것이 없었다. 중세 서유럽의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그리고 로마 교회로부터 "독일 왕국"이라 불린 구 동프랑크 왕국을 주요 구성 요소로 했다. "독일 왕국" 내에서는 황제가 주교·수도원장 선거에 입회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00] 황제의 입회는 황제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서임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있을 경우, 황제가 결정할 수 있다는 약속도 있었다.[100][101] 즉, "독일 왕국" 내에서는 사실상 서임권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 소유 토지와 재산 수여와 같은 세속적인 권리는 로마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95] 황제는 이 점에서도 잃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신성한 황제권이라는 중요한 것을 잃었다. 작센 왕조, 잘리어 왕조, 카롤루스 대제 이래 역대 프랑크 왕, 로마 황제는 보편적인 기독교 제국 수립을 추구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 "신성 제국"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1157년 3월 밀라노 토벌 이탈리아 원정을 위한 제후 소집장에서 프리드리히 1세가 처음으로 "신성 제국"이라는 말을 사용했다.[102] 신성함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신성"을 칭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중세 국가 체제가 붕괴된 직후 로마 왕 빌헬름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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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zenierung verpflichtet Zum Verständnis ritueller Akte bei Papst-Kaiser-Begegnungen im 12. Jahrhund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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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ürstliche Opposition gegen das Königtum im 11. und 12. Jahrhundert als Gestalterin mittelalterlicher Staatlich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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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Wormser Konkordat und der Südwesten des regnum Roman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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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st und Kaiser als Zwillinge?: Ein anderer Blick auf die Universalgewalten im Investiturstr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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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インリヒ5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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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トバンク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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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ローマ王は帝位の前提となった東フランク王位から改称された王号。現代から見れば実質ドイツ王だが、当時国家・地域・民族としてのドイツは存在しない。また[[イタリア王国 (中世)|イタリア]]と[[アルル王国|ブルグント]]への宗主権を備える。
[78]
문서
「5世」はドイツ王(東フランク王)として[[ハインリヒ1世 (ドイツ王)|ハインリヒ1世]]から数えた数字で皇帝、イタリア王としては4人目のハインリヒ。
[79]
문서
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の総称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教皇に任命され戴冠していた。神聖ローマ皇帝は歴史学的用語で実際の称号ではない。
[80]
문서
成瀬他、p. 195
[81]
문서
瀬原、p.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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瀬原、p. 34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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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瀬他、p.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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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문서
瀬原、p.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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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池、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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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瀬他、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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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야기 1
기획출판 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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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지식백과
하인리히 5세 [Henry V] - 살리 왕조의 마지막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왕가, 임동욱)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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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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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200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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