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티 후마윤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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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티 후마윤 칙령은 1856년 오스만 제국에서 발표된 개혁 칙령으로, 귈하네 칙령의 개혁을 확대하여 종교와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의 신변, 재산, 명예를 보호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종교적 자유 보장, 교육 기회 확대, 사법 제도 개혁, 공공 안전 강화, 병역 및 납세 제도의 변화 등을 포함한다. 이 칙령은 아르메니아 공동체 내에서 불만을 야기하고, 오스만 제국 정부에 대한 외국 강대국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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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하티 후마윤은 귈하네 칙령으로 시작하여 계급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제국 내 모든 국민에게 이전 개혁을 적용하여 그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하고 명예를 지키도록 했다.[9]
하티 후마윤은 정부가 이전의 의무를 면제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밀레트 또는 기타 비무슬림 보호령에 대한 영적 면제 사항도 포함했다.[9] 각 밀레트는 오스만 문명의 발전에 필요한 개혁안을 논의하고 제출하기 위해 임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9]
개혁 칙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9]
- 비무슬림 신민의 모든 공직 참여 허용
- 신앙의 자유 보장
- 비무슬림 공동체 대표의 권리 재규정
- 비무슬림의 공립학교 입학 허가
- 각 지방 의회에서 무슬림·비무슬림 대표 선출 방법 개선
- 비무슬림 대표가 최고 사법 심의회에 참여 허용
-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 용어 사용 금지
- 비무슬림의 병역 의무 부과
- 비무슬림 공동체의 학교 설립과 독자적인 교육 과정 편성 승인
- 혼합 재판소에서 비무슬림 증인 인정
이로써 탄지마트 2단계는 종교법(샤리아)과 유럽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한 신법전 제정,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개설, 국유지 원칙을 바꿔 근대적 토지 사유 제도를 인정하는 토지법 시행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10]
이 개혁 칙령은 귈하네 칙령에 비해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고, 대부분 비무슬림의 권리 보장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에게 비판을 받았으며, 발포 후에는 "특권 칙령"이라고 불리며 혐오감을 샀다.[11]
3. 주요 내용
하티 후마윤은 귈하네 칙령으로 시작된 이전의 모든 개혁을 통합하여 제국 내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였다.[9] 이는 계급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신민의 신변, 재산, 명예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하티 후마윤은 각 밀레트가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안을 논의하고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기독교 밀레트 등 비무슬림 공동체의 종교적 면제를 유지하면서도, 오스만 제국의 발전에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신민의 생명, 재산, 명예 보장 및 종교적 특권 재확인[9]
- 종교, 언어, 민족 차별 및 차별적 표현 금지[9]
- 신앙의 자유 보장 및 개종 강요 금지[9]
- 능력에 따른 관리 채용 및 모든 학교 입학 허용, 공동체별 학교 설립 허용[9]
- 형사·상사 소송 시 혼합 법정 공개 재판 및 종교별 선서 후 증언[9]
- 감옥 개량 및 고문 금지[9]
- 비무슬림 병역 부과 및 면제 납세 방법 확립[9]
- 주 및 현 의회 개혁을 통한 무슬림 및 비무슬림 대표 의견 반영[1]
- 부동산 소유 및 매각 법률 평등 적용, 외국인 부동산 소유 허용 (국내법 준수 및 세금 납부 조건)[1]
- 세금 징수 부정 방지 및 직접 징수[9]
- 예산 작성 및 공개[9]
- 고등 사법 심의회에서 자유로운 의견 표명 보장[9]
- 부정행위 법률의 모든 계층 및 직무에 동등 적용[9]
- 제국 재건을 위한 경제 조치 및 유럽 지식·자본 도입[1]
3. 1. 종교 및 시민적 권리
하티 후마윤 칙령은 모든 형태의 종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어떤 신민도 종교 활동에 방해받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했다.[9] 또한 누구도 종교를 바꿀 것을 강요받지 않도록 했다.[9]칙령은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을 강화했다.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 랍비들은 합의된 양식에 따라 취임 시 선서를 하고, 그들은 선서를 지킬 책임이 있었다. 신뢰를 구축하고 뇌물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의 수입은 고정 수입으로 대체되었고, 성직자의 중요성, 계급, 존엄성에 비례하여 수당과 급여가 할당되었다.
칙령은 종교적 예배, 학교, 병원, 묘지를 위해 지정된 건물을 원래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수리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러한 활동이 마을, 작은 자치구 및 마을에서 "혼합되지 않은 공동체"에서 수행되는 경우, 역사적 건축물의 파괴를 방지하고 공공 투자를 추적하기 위해, 이러한 다른 건물의 계획은 새로운 건축의 경우, 총대주교 또는 공동체 수장의 승인을 받은 후 제국 칙령에 제출되거나 일정 시간 내에 그에 대한 의견을 밝혀야 한다.
3. 2. 교육
하티 후마윤 칙령은 모든 신민이 차별 없이 문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9] 모든 공동체는 과학, 예술 및 산업 분야의 공립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립 학교의 교육 방법과 교사 선택은 "혼합 공교육 위원회 (공교육 위원회)" (교육부)의 통제를 받았다.[9]개혁 칙령에는 비무슬림의 공직 참여, 신앙의 자유, 비무슬림 공동체 대표의 권리, 비무슬림의 공립학교 입학, 지방 의회에서 무슬림·비무슬림 대표 선출, 비무슬림 대표의 최고 사법 심의회 참여,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 용어 사용 금지, 비무슬림의 병역 의무, 비무슬림 공동체의 학교 설립과 독자적인 교육 과정 편성, 혼합 재판소에서 비무슬림 증인 인정 등의 내용이 명시되었다.[9] 이로써 탄지마트 2단계에서는 종교법(샤리아)과 유럽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한 신법전 제정,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개설, 국유지 원칙을 바꿔 근대적 토지 사유 제도를 인정하는 토지법 시행 등 과감한 개혁이 추진되었다.[10]
3. 3. 사법
하티 후마윤 칙령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 또는 서로 다른 종파의 비무슬림 간의 모든 상업, 교정, 형사 소송을 혼합 재판소에 회부하여 공개 재판을 하도록 했다.[9] 당사자들은 대질심문을 받았고, 증인 소환 및 선서 후 증언 채택이 허용되었다.[9] 민사 소송은 공개 재판을 받았으며, 민사 문제는 총독과 재판관이 참여하는 혼합 지방 평의회에서 해결되었다.새로운 법전(형법, 교정법, 상법, 소송 규칙)이 제정되어 모든 언어로 번역, 공포되었다.[9] 교도소 및 기타 시설 개혁이 허용되었으며, 인류의 권리와 정의의 권리를 조화시키고 신체 형벌은 폐지되었다.[9]
개혁 칙령은 혼합 재판소에서 비무슬림의 증인을 인정하는 내용을 명확히 담고 있었다.[9] 이는 탄지마트 2단계에서 종교법(샤리아)과 유럽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한 신법전 제정 등의 개혁 추진으로 이어졌다.[10]
칙령은 국내외 개혁 추진을 위한 새로운 정의의 실시를 표명했다. 무슬림·비무슬림 간, 또는 기독교도 및 그 외의 비무슬림 간의 형사·상사 소송은 혼합 법정에서 공개 재판에 부쳐지고, 증인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선서 후 증언하도록 했다.[9]
모든 감옥은 개량되고, 감옥 내 고문과 폭력은 금지되었다. 고등 사법 심의회에서 모든 공동체의 장과 황제 임명 구성원은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할 수 있으며, 부정행위에 대한 법은 모든 계층과 직무에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3. 4. 공공 안전
하티 후마윤 칙령은 경찰 조직(정책 및 규정)이 인신 및 재산 안전에 대한 보장을 거부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개정 후 관료들이 책임을 지게 되었다. 경찰은 수도, 지방 도시, 그리고 시골 지역에 별도의 조직으로 구성되었다.3. 5. 병역 및 납세
비무슬림에게도 병역이 부과되었지만, 병역 면제를 위한 납세 방법도 확립되었다.[9] 계층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신민에게 부과되는 세금 징수에 있어 부정함을 없애고, 징세 청부 대신 직접 징수 방법을 도입했다.[9]3. 6. 기타
지방 의회 개혁을 통해 무슬림과 비무슬림 대표의 의견이 올바르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하였다.[1] 외국인에게도 부동산 소유를 허용하였다.[1] 은행 개설, 자본 투하, 교역로 확보, 농업 및 상업 확대를 위한 장벽 제거 등 경제 발전을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1]4. 영향 및 평가
하티 후마윤 칙령은 오스만 제국 시민 간의 평등을 목표로 했지만, 유럽을 기쁘게 하기 위한 조치로 더 인식되었다. 주요 변화는 오스만 제국이 "소수 민족"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전에는 무슬림만 가능했던 정부 기관(민간 및 군사 학교)에 비무슬림 시민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공식 국어(오스만 투르크어) 원칙이 무너지고 다중 언어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총대주교가 국가 수준에서 사법을 시행하게 되면서 국가의 사법 주권이 약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오스만 제국의 쇠퇴 시기, 외국 강대국들은 외채, 원조, 밀레트 제도, 유대인 및 기독교인 소수 민족 집단의 착취를 통해 오스만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4. 1. 긍정적 측면
다음은 하티 후마윤 칙령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비무슬림도 공무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2]
- 상속 사건을 총대주교에게 이관할 수 있게 되었다.[2]
- 살인 및 상업 관련 법률이 소수 민족의 언어로 출판되었다.[2]
- 고등 법원(사법부)이 설립되어 각 교구에서 두 명의 대표가 참여하게 되었다.[2]
- 사법 시행에 있어 총대주교의 권한이 확대되었다.[2]
- 외국인에게 재산권이 확대되었다.[2]
4. 2. 부정적 측면
하티 후마윤 칙령은 비무슬림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지만, 모든 변화가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점들은 비무슬림 사회에서 반발을 샀다.[2]- 병역 의무 부과: 이전까지 면제되었던 병역 의무가 비무슬림에게도 부과되었다. 다만, 병역 면제를 위한 납세 방법도 확립되었다.[9]
- 종교적 특권 재검토: 밀레트 간 평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밀레트는 다른 밀레트에 비해 특권을 잃게 되었다.[2]
- 성직자 수수료 폐지 및 급여 지급: 성직자들이 교구에서 부과하던 임의적인 수수료가 폐지되고, 영적 지도자(사제, 총대주교 등)에게 급여(고정 소득)가 지급되면서 일부 성직자들의 반발을 샀다.[2]
- 영적 지도자 충성 서약 의무: 영적 지도자에게 충성 서약 의무가 부과되었다.[2]
이러한 변화는 밀레트 간의 평등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 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2] 특히, 아르메니아 국민 의회와 권한을 공유하고 아르메니아 국가 헌법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된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이러한 변화를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침식으로 인식했다.[3]
또한, 이 칙령은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비무슬림의 권리 보장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반으로부터 "특권 칙령"이라고 불리며 혐오감을 샀다.[11]
4. 3.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반응
하티 후마윤은 밀레트 간의 평등을 가져오면서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 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2] 하티 후마윤 이전에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인(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귀족들의 억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 규정'을 만들고 싶어했는데, 이는 관할 구역이 50개 지역으로 확대되어 주교들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있는 총대주교의 권한을 제한했다.[2] 1860년 5월 24일, 의회는 초안 규정을 채택하여 바비알리(오스만 제국)에 제출했다. 바비알리는 1863년 3월 17일에 칙령으로 약간의 변경을 거쳐 비준했으며, 이를 발효시켰다. 1863년,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이 작성한 150개 조항으로 구성된 "규정집"의 오스만 제국 승인 형태인 아르메니아 국가 헌법(نظامنامهٔ ملّت ارمنیان|Nizâmnâme-i Millet-i Ermeniyânota)은 총대주교의 권한(오스만 밀레트 내의 지위)과 새롭게 형성된 아르메니아 국민 의회를 정의했다.[3]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아르메니아 국민 의회와 권한을 공유하고 아르메니아 국가 헌법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이러한 변화를 자신의 공동체 침식으로 인식했다.4. 4. 종합 평가
하티 후마윤 칙령은 오스만 제국 시민 간의 평등을 목표로 했지만, 유럽 열강을 만족시키기 위한 외교적 조치로 인식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2] 오스만 제국이 "소수 민족" 개념을 수용하면서, 이전에는 무슬림만 가능했던 정부 기관(민간 및 군사 학교)에 비무슬림 시민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공식 국어 원칙(오스만 투르크어)이 무너지고 다중 언어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총대주교가 국가 수준에서 사법을 시행하게 되면서 국가의 사법 주권이 약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2]비무슬림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긍정적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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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무슬림 사이에서 반발을 산 변화도 있었다.
부정적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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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티 후마윤은 밀레트 간의 평등을 가져오면서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 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2] 칙령 이전에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이자 세속적 지도자였지만,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귀족들의 억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 규정'을 만들고자 했다.[2] 이들은 총대주교의 권한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1863년에 오스만 제국은 이를 승인했다. 아르메니아 국가 헌법(نظامنامهٔ ملّت ارمنیان|Nizâmnâme-i Millet-i Ermeniyânota)은 총대주교의 권한을 아르메니아 국민 의회와 공유하고 제한하도록 규정했고,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이를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침식으로 여겼다.[3]
오스만 제국의 쇠퇴 기간 동안, 외국 강대국들은 외채, 원조, 밀레트 제도, 유대인 및 기독교인 소수 민족 집단의 착취를 통해 오스만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개혁 칙령에는 비무슬림의 공직 참여, 신앙의 자유, 비무슬림 공동체 대표 권리 재규정, 공립학교 입학 허가, 지방 의회 대표 선출 방법 개선, 최고 사법 심의회 참여, 차별 용어 사용 금지, 병역 의무, 학교 설립 및 독자적 교육 과정 편성 승인, 혼합 재판소에서 증인 인정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9]
이 칙령은 이전의 귈하네 칙령보다 표현이 직설적이고, 대부분 비무슬림의 권리 보장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발포 후 "특권 칙령"이라고 불리며 혐오감을 샀다.[11]
5. 번역
사모스에서 Z. 이판드레브메노스(Z. Ypandrevmenos)가 번역한 그리스어 버전이 출판되었다.[4] 오스만 당국은 르 모니테르|Le Moniteur프랑스어와 페로-지로드(Féraud-Giraud)의 1866년 저서 레반트 및 바르바리 사다리에서의 프랑스 관할권에 관하여|De la juridiction française dans les échelles du Levant et de la Barbarie프랑스어에서 출판된 공식 프랑스어 번역본을 가지고 있었다.[5] 푸아드 파샤는 이 텍스트를 오스만 튀르크어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제국의 소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옹호했다.[6] "다언어 제국을 위한 헌법: ''카눈-으 에사시'' 및 기타 공식 텍스트의 소수 언어 번역"의 저자인 요한 스트라우스는 칙령의 초안 원본이 오스만 튀르크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추정할 수 있다"라고 썼다.[7]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벨랭은 자신의 메모가 포함된 프랑스어 번역본을 작성하여 먼저 ''아시아 저널''에 게재했고, 나중에 1862년에 출판된 저서 무슬림 국가, 특히 터키의 토지 소유에 대한 연구|Étude sur la propriété foncière en pays musulman et spécialement en Turquie프랑스어에 게재했다. 벨랭의 번역과 메모는 도메니코 가테스키(Domenico Gatteschi)의 또 다른 컬렉션인 오스만 공법 및 사법 매뉴얼|Manuale di diritto publico e privato ottomanoit에도 게재되었다.[5] 벨랭의 버전은 그레고리 아리스타르키스가 출판하고 데메트리우스 니콜라이데스가 편집한 프랑스어 오스만 법률 컬렉션 오스만 법률|Législation ottomane프랑스어에 다시 게재되었다.[7]
오스만 제국 프랑스어 공식 버전을 바탕으로 벨랭의 여러 메모가 포함된 칙령의 그리스어 번역본은 니콜라이데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버전의 ''뒤스투르''(Оθωμανικοί Κώδηκες|오토마니코이 코데케스|lit=오스만 법전el)에 나타나며, 니콜라이데스는 1860년에 발행된 그리스어 베라트|berattr를 포함한 추가 메모를 포함하고 벨랭의 일부 메모를 삭제했다. 요한 스트라우스는 이 메모가 "아마도 너무 비판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삭제되었다고 주장했다.[5]
참조
[1]
서적
Abdülhamid-i Sani ve Devr-i Saltanatı: Hayat-i Hususiye ve Siyasiyesi
https://books.google[...]
Kitaphane-yi İslam ve Askeri
[2]
간행물
La société armenienne contemporaine
1867-06
[3]
서적
The Armenian People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4]
서적
The First Ottoman Experiment in Democracy
https://menadoc.bibl[...]
[5]
서적
The First Ottoman Experiment in Democracy
https://menadoc.bibl[...]
[6]
서적
The First Ottoman Experiment in Democracy
https://menadoc.bibl[...]
[7]
서적
The First Ottoman Experiment in Democracy
https://menadoc.bibl[...]
[8]
문서
クリミア戦争では英仏の支援もあってかろうじて勝利を収めることができたが、オスマン帝国にとって重要なのは、[[1854年]]、ロシアと戦うための軍費の捻出に窮して、イギリスに初めて借款をしたことであった。[[#永田|永田(2002)p.297]]
[9]
문서
"[[#永田|永田(2002)pp.296-299]]"
[10]
문서
"[[#新井2009|新井(2009)pp.86-88]]"
[11]
문서
"[[#新井2001|新井(2001)pp.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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