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 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왕 성은 진나라 멸망 후 부활한 한나라의 왕으로, 장량의 추천으로 항량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는 한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진나라의 통일 전쟁으로 평민이 되었다가, 진나라에 대한 봉기 이후 한나라를 부활시키려는 장량과 함께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다. 한나라 왕이 되었으나, 장량을 유방에게 종군시킨 탓에 항우에게 감시받다가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이후 정창이 한왕으로 임명되었고, 장량은 유방에게 가서 한신을 새 한왕으로 세워 항우에게 대항하게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06년 사망 - 진왕 자영
진왕 자영은 혼란한 진나라를 잠시 다스린 마지막 군주로, 조고를 제거했으나 유방에게 항복 후 항우에게 처형당했으며, 그의 정확한 신분은 사료마다 달라 논란이 있다. - 기원전 206년 사망 - 전안
전안은 초한쟁패 시기 항우 휘하의 제나라 출신 장수로, 뛰어난 무예와 지략으로 항우의 신임을 얻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전영과의 갈등으로 항우와 대립하다 죽임을 당했다. - 진나라 사람 - 장창 (전한 초기)
장창은 전한 초기의 관료이자 학자로, 순자에게서 좌전을 배우고 진나라 관리를 거쳐 유방을 섬겨 항산태수, 대나라 승상 등을 역임하고 북평후에 봉해졌으며, 소하의 천거로 어사대부를 지낸 후 승상이 되어 한나라의 역법과 음률을 정비하는 데 기여했고, 만년에는 오행설 논쟁 후 관직에서 물러나 100세 넘게 살았다. - 진나라 사람 - 위표
위표는 진나라 멸망 후 위나라 재건을 시도했으나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게 붙었다가 한신에게 패하여 사로잡혔으며, 유방에게 재등용되었으나 살해당한 위나라 왕족 출신 인물이다. - 십팔제후왕 - 오예
오예는 진나라 말기에 봉기하여 형산왕과 장사왕을 역임했으며, 유방을 도와 진나라와 항우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 십팔제후왕 - 전한 고제
진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워 초한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전한 고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민생 안정에 힘썼다.
| 한왕 성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한왕 성 (韓王成) |
| 다른 이름 | 한성 (韓成) |
| 출생 | 불명 |
| 사망 | 기원전 226년 |
| 직업 | 왕 |
| 봉토 | 신정 (新鄭, 현재의 허난 성 신정시) 양책 (陽翟, 현재의 허난 성 위저우시) |
| 작위 | 한왕 (韓王) |
| 재위 기간 | 기원전 230년 ~ 기원전 226년 |
| 시대 | 전국시대 |
| 생애 | |
| 초기 생애 | 한성은 한(韓)의 공족이었다. 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한을 멸망시키자, 한성은 망국의 귀족으로서 평범하게 살았다. |
| 진승, 오광의 난 |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난을 일으키자, 장량은 경포에게 한성을 설득하여, 그를 한나라의 왕으로 옹립했다. 한성은 양책을 수도로 삼았다. |
| 항우의 책봉 | 기원전 206년, 초한전쟁이 시작될 무렵, 항우는 한성을 한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후작으로 강등시켜, 자신의 부하인 정창을 한왕으로 임명했다. |
| 사망 | 한성은 항우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
| 기타 | |
| 로마자 표기 | Han Seong |
2. 생애
진나라에 망한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 하나로, 장량의 말에 따르면 횡양군(橫陽君)이라는 군호(君號)가 있었다. 기원전 208년(진 2세황제 2년) 6월, 장량의 추천으로 재건된 한나라의 왕이 되었고, 장량은 사도가 되었다.[1] 옛 한나라 땅 일부를 회복했으나, 진나라의 반격으로 도로 잃고 영천에서 유군을 이끌었다.[2]
유방이 남양군을 공략할 때 장량과 함께 참여하여 한나라의 10여 성을 함락하기도 했다. 유방은 한왕 성에게 양책을 지키게 했다.[2]
2. 1. 한나라 왕족과 몰락
한성은 전국시대 한나라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기원전 230년 진나라의 통일 전쟁으로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평민으로 살았다. 횡양군(橫陽君)이라는 군호(君號)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문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다.[1]기원전 209년, 진나라에 대한 봉기가 중국 전역에서 발생했을 때, 한성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한나라를 부활시키려는 희망으로 항량의 반군에 합류했다. 그는 가는 길에 옛 한나라 관료 가문의 후손인 장량을 만났다. 장량은 항량을 설득하여 옛 한나라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고, 한성은 그 통치자로 임명되었으며, 장량이 그의 재상으로 섬겼다. 항량은 또한 한성에게 군대를 제공했고 그가 영천의 진나라 수비대를 공격하도록 허락했다.[1]
항우가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를 멸하고 각지에 제후들을 봉건하면서, 한성도 한왕이 되었고 서울은 양책에 두었다. 그러나 장량을 한왕 유방에게 종군시켰기 때문에, 군공이 없다 하여 항우가 봉국으로 보내지 않고 서초의 서울 팽성에 머무르게 해 감시를 받았다.[2] 결국 왕위를 뺏겨 열후로 강등되었고, 살해됐으며, 정창이 항우에게서 대신 한왕으로 임명되었다.[2][3][4]
2. 2. 진나라 말기 봉기와 한나라 부활
기원전 209년, 진나라에 대한 봉기가 중국 전역에서 발생하자, 한성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부활시키려는 희망으로 항량의 반군에 합류했다. 가는 길에 옛 한나라 관료 가문의 후손인 장량을 만났다. 장량의 설득으로 항량은 한성을 한나라 왕으로 추대하고 장량을 사도로 삼았다. 항량은 한성에게 군사를 지원하여 영천의 진나라 수비대를 공격하게 했다.[1]2. 3. 한나라 왕 즉위와 최후
기원전 208년(진 2세황제 2년) 6월, 한성은 장량의 추천으로 재건된 한나라의 왕이 되었고, 장량은 사도가 되었다.[1] 한성은 옛 한나라 땅 일부를 회복했으나, 진나라의 반격으로 도로 잃고 영천에서 유군을 이끌었다.[2]유방이 남양군을 공략할 때 장량과 함께 참여하여 한나라의 10여 성을 함락하기도 했다. 유방은 한성에게 양책을 지키게 했다.[2]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18제후왕을 봉건하면서 한성은 한왕에 임명되고 양책을 서울로 삼았다. 그러나 장량을 유방에게 종군시킨 탓에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항우에 의해 봉국으로 가지 못하고 팽성에 머무르며 감시받았다. 결국 왕위를 빼앗기고 열후로 강등된 후 살해당했으며, 정창이 항우에 의해 한왕으로 임명되었다. 장량은 유방에게 달아나, 유방 휘하의 한나라 왕실 자손 한신을 새 한왕으로 세우고 항우에게 저항하게 했다.[2][3][4]
참조
[1]
서적
사기 (역사서)
[2]
서적
사기
[3]
서적
사기
[4]
서적
사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