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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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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표는 위나라의 공자로, 기원전 225년 위나라 멸망 이후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형 위구와 함께 진승·오광의 난 당시 위나라 부흥에 참여했으나, 이후 항우에게 서위왕으로 봉해진 후 유방에게 귀순했다가 배신했다. 한신에게 패배하여 체포된 후 유방에게 처형되었으며, 사망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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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표
기본 정보
이름위표
원어 이름魏豹
로마자 표기Wei Bao
사망 연도기원전 204년
정치
직함서위의 왕
통치 기간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5년
가족 관계
아버지경민왕

2. 생애

위표는 위나라의 공자로, 기원전 225년 위나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평민으로 격하되었다.[6][7][8]위구와 달리 위표는 군호를 받은 기록이 없어, 위나라가 멸망할 당시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8년 음력 12월, 진승·오광의 난 때 위표의 형 위구가 진나라를 탈출하여 진승의 부하장수 주불의 도움으로 위나라 왕이 되었고, 위표도 이때 형과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이 위나라를 세울 때 이미 진승의 군대는 장한에게 참패하고 초왕 진승마저도 살해당했다. 장한의 군대는 다음 해 1월 위나라 수도 임제를 포위했고, 6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위왕 위구는 백성들을 위해 항복하고 분신자살했다. 이때 위표는 탈출해 초나라 동아지역으로 피신했고, 초회왕 미심은 위표에게 지원군을 보내 위나라 방어를 도왔다.

기원전 208년 음력 9월, 위표는 초나라 지원군을 기반으로 평양(平陽, 지금의 산시 성 린펀 시)에서 다시 위나라를 선포하고 위왕에 올랐다. 위왕 위표는 위나라 지역을 점령한 뒤 거록으로 군대를 몰아 항우군을 지원해 전공을 세웠고, 이후 항우의 군대에 합류해 진나라 본토로 진격해 멸망시켰다.[6][7][8]

기원전 206년, 항우가 제후왕들을 임명할 때 위표는 서위지역을 분봉받아 위왕이 되었다. 위표는 항우를 도와 거록대전과 진나라 함락에 공을 세웠지만, 항우는 동쪽 양지역을 자신의 서초에 합병하고 남은 땅을 나눠 은나라를 만들어 사마앙을 은왕에 임명하고 위표는 서위지역만 다스리게 했다. 항우의 이런 조치에 위표는 불만을 가졌는지, 이듬해인 기원전 205년 3월, 한왕 유방이 임진(臨晉, 지금의 웨이난 시 다리 현)에서 황하를 건너오자 장병들을 거느리고 유방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그해 4월 팽성 대전에서 유방의 연합군이 대패하고 형양까지 후퇴하자,[13][14] 위표는 어버이의 병을 구실로 위나라로 돌아가 황하의 나루를 끊고 서초 편으로 돌아섰다. 한왕이 보낸 역이기의 설득에도 유방이 욕을 많이 한다는 이유를 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4] 일설에는 관상쟁이 허부가 후궁 박씨(후의 효문태후)가 천자를 낳을 것이라고 하자 스스로 천자가 되리라는 야망을 품고 중립으로 돌아선 것이었다.[9] 위표의 후궁 박씨는 위표 멸망 후 유방의 후궁이 되어 훗날 한문제가 되는 아들을 낳았다.

위표의 배신에 한나라는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관영을 딸려 서위를 공격했다. 위표는 백직을 대장으로 삼고 풍경과 항타(項它)에게 기병과 보졸을 맡겨[10] 포판(蒲坂, 지금의 윈청 시 융지 시)에 주둔해 황허를 끼고 임진에 주둔한 한군과 대치하며 한군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신이 임진을 건너는 척하고 몰래 임진보다 북쪽에 있는 하양(지금의 웨이난 시 한청 시)에서 황허를 건너 안읍을 습격하자 위표는 맞아 싸웠다가 패했고,[11] 곡양에서 조참의 공격을 받아 동원까지 달아났으나, 9월 위표는 동원에서 사로잡혀[12] 형양으로 압송되었다. 유방은 위표를 폐위시키고, 위표가 다스리던 서위의 국토는 한에 흡수되어 하동군·상당군·태원군으로 나뉘었다.[14][13]

몇 달 뒤 형양에서 항우의 공격을 막다가 궁지에 몰린 유방은 탈출하고, 어사대부 주가(周苛)·종공(樅公)과 함께 남아 성을 지켰다. 그러나 주가와 종공은 위표가 배반한 왕이라 하여, 주가와 종공에게 죽었다.[13][14] 위표가 죽은 시점이 한왕 4년 8월, 한왕 5년 4월 두 번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사망 시점을 알기 어렵다.

2. 1. 위나라 왕족의 후손

위표는 위나라의 공자로, 기원전 225년 위나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평민으로 격하되었다.[6][7][8] 형 위구와 달리 위표는 군호를 받은 기록이 없어, 위나라가 멸망할 당시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8년, 진승·오광의 난 때 위구는 진나라를 탈출하여 진승의 부하장수 주시의 도움으로 위나라 왕이 되었고, 위표도 이때 형과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구가 위나라를 세울 때 진승의 군대는 장한에게 패하고 진승은 살해당했다. 장한의 군대는 이듬해 1월 위나라 수도 임제를 포위했고, 6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위구는 백성들을 위해 항복하고 분신자살했다. 이때 위표는 초나라 동아지역으로 피신하여 초회왕 미심에게 지원군을 받아 위나라 방어를 도왔다.

기원전 208년 음력 9월, 위표는 초나라 지원군을 기반으로 평양(平陽, 지금의 산시 성 린펀 시)에서 다시 위나라를 선포하고 위왕에 올랐다. 위왕 위표는 위나라 지역을 점령한 뒤 거록으로 군대를 몰아 항우군을 지원해 전공을 세웠고, 이후 항우의 군대에 합류해 진나라 본토로 진격해 멸망시켰다.[6][7][8]

기원전 206년, 항우가 제후왕들을 임명할 때 위표는 서위지역을 분봉받아 위왕이 되었다. 위표는 항우를 도와 거록대전과 진나라 함락에 공을 세웠지만, 항우는 동쪽 양지역을 자신의 서초에 합병하고 남은 땅을 나눠 은나라를 만들어 사마앙을 은왕에 임명하고 위표는 서위지역만 다스리게 했다. 항우의 이런 조치에 위표는 불만을 가졌는지, 이듬해인 기원전 205년 3월, 한왕 유방이 임진(臨晉, 지금의 웨이난 시 다리 현)에서 황하를 건너오자 장병들을 거느리고 유방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그해 4월 팽성 대전에서 유방의 연합군이 대패하고 형양까지 후퇴하자,[13][14] 위표는 어버이의 병을 구실로 위나라로 돌아가 황하의 나루를 끊고 서초 편으로 돌아섰다. 한왕이 보낸 역이기의 설득에도 유방이 욕을 많이 한다는 이유를 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4] 일설에는 관상쟁이 허부가 후궁 박씨(후의 효문태후)가 천자를 낳을 것이라고 하자 스스로 천자가 되리라는 야망을 품고 중립으로 돌아선 것이었다.[9] 위표의 후궁 박씨는 위표 멸망 후 유방의 후궁이 되어 훗날 한문제가 되는 아들을 낳았다.

위표의 배신에 한나라는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관영을 딸려 서위를 공격했다. 위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삼고 풍경과 항타(項它)에게 기병과 보졸을 맡겨[10] 포판(蒲坂, 지금의 윈청 시 융지 시)에 주둔해 황허를 끼고 임진에 주둔한 한군과 대치하며 한군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신이 임진을 건너는 척하고 몰래 임진보다 북쪽에 있는 하양(지금의 웨이난 시 한청 시)에서 황허를 건너 안읍을 습격하자 위표는 맞아 싸웠다가 패했고,[11] 곡양에서 조참의 공격을 받아 동원까지 달아났으나, 9월 위표는 동원에서 사로잡혀[12] 형양으로 압송되었다. 유방은 위표를 폐위시키고, 위표가 다스리던 서위의 국토는 한에 흡수되어 하동군·상당군·태원군으로 나뉘었다.[14][13]

몇 달 뒤 형양에서 항우의 공격을 막다가 궁지에 몰린 유방은 탈출하고, 어사대부 주가(周苛)·종공(樅公)과 함께 남아 성을 지켰다. 그러나 주가와 종공은 위표가 배반한 왕이라 하여, 주가와 종공에게 죽었다.[13][14] 위표가 죽은 시점이 한왕 4년 8월, 한왕 5년 4월 두 번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사망 시점을 알기 어렵다.

2. 2. 진나라 말기의 혼란과 위나라 재건

위표는 위나라의 공자로, 기원전 225년 위나라가 멸망하면서 평민으로 격하되었다.[6][7][8] 기원전 208년 진승·오광의 난 때, 형 위구는 진나라를 탈출하여 진승의 부하장수 주불의 도움으로 위나라 왕이 되었고, 위표도 형을 따라 위나라로 갔다. 그러나 장한의 공격으로 위구가 자결하자, 위표는 초나라로 피신하여 초나라의 지원군을 기반으로 기원전 207년 위나라를 재건하고 왕위에 올랐다. 위표는 항우를 도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6][7][8]

기원전 206년, 항우가 제후왕들을 임명할 때 위표는 서위 지역을 분봉받아 서위왕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가 위나라 영토 일부를 자신의 영토로 합병하고 위표에게는 서위 지역만 다스리게 하자, 위표는 불만을 품었다. 기원전 205년 3월, 한왕 유방이 황하를 건너오자 위표는 바로 유방에게 귀순했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팽성 대전에서 유방의 연합군이 대패하자,[13][14] 위표는 부모의 병을 핑계로 위나라로 돌아가 황하의 나루를 끊고 서초 편으로 돌아섰다.[14] 역이기가 설득했으나, 유방을 비난하며 듣지 않았다.[14] 일설에는 관상가 허부가 후궁 박씨(후의 효문태후)가 천자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자,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중립으로 돌아선 것이라고 한다.[9]

위표의 배신에 한나라는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관영을 보내 서위를 공격했다. 위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풍경과 항타(項它)에게 군사를 맡겨[10] 포판(蒲坂)에 주둔시켜 한군을 막았다. 그러나 한신은 하양(지금의 웨이난 시 한청 시)에서 황하를 건너 안읍을 습격했고,[11] 위표는 패배하고[11] 기원전 205년 9월 동원에서 사로잡혀[12] 형양으로 압송되었다. 유방은 위표를 폐위시키고 서위의 국토를 한나라에 흡수하여 하동군, 상당군, 태원군으로 나누었다.[14][13]

몇 달 뒤, 형양에서 항우의 공격을 받다가 궁지에 몰린 유방이 탈출하고, 위표는 어사대부 주가(周苛)·종공(樅公)과 함께 성을 지켰다. 그러나 주가와 종공은 위표가 배반한 전력이 있다 하여 그를 죽였다.[13][14] 위표가 죽은 시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한왕 4년 8월, 한왕 5년 4월)이 있어 정확한 시점을 알기 어렵다.

2. 3. 초한쟁패기의 배신과 좌절

기원전 208년, 진나라의 장한위구를 죽이자, 위표는 초나라의 항량에게 의지하여 도망쳤다. 그리고, 회왕에게 수천의 병사를 빌려 위나라의 20여 성을 함락시켰다.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위왕을 칭했다.[6][7][8]

기원전 206년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위표는 영토를 삭감당해 서위왕이 되었다. 초한전쟁이 시작되고, 유방한신을 얻어 장한 등이 다스리는 삼진을 무너뜨리자, 위표는 스스로 유방과 동맹을 맺고, 팽성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팽성 전투에서는 각국이 제멋대로 진을 쳤기 때문에 통솔이 되지 않아, 항우의 3만 군세 앞에서 연합군은 대패했다.

패전 후, 위표는 어머니를 간호한다는 핑계로 귀국하여 유방을 배반하고 항우에게 붙었다. 위지에 전개했던 항우의 장수 항타는 위표를 거들었다. 위표의 배반을 우려한 유방은 여식기를 사자로 보내 설득을 시켰으나, 위표는 "나는 오만하고 무례하고 횡포한 한왕(유방)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며 이를 거절했다.

여식기는 유방에게 돌아와 위표의 장수들에 대해 보고했다. "대장은 백직, 기병의 장은 풍경, 보병의 장은 항타입니다." 유방은 "백직은 애송이이고, 한신의 적수가 못된다. 풍무택의 아들은 현명하지만 관영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항타도 조참의 적이 아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신 역시 "위표가 주숙을 대장으로 기용하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백직을 어리다고 평가했다.

기원전 205년,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서위를 공격하자, 위표는 백직을 대장으로, 풍경과 항타(項它)에게 기병과 보졸을 맡겨[10] 포판(蒲坂, 지금의 윈청 시 융지 시)에 주둔시켜 황하를 끼고 임진에 주둔한 한군과 대치하며 한군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신은 임진을 건너는 척 하고 몰래 임진보다 북쪽에 있는 하양(지금의 웨이난 시 한청 시)에서 황하를 건너 안읍을 습격했다. 위표는 이에 놀라 맞서 싸웠으나 패했고,[11] 곡양에서 조참의 공격을 받아 동원까지 달아났으나, 9월 위표는 동원에서 사로잡혀[12] 형양으로 압송되었다.

위표는 위나라의 공자로, 기원전 225년 위나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왕족에서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형 위구와 달리 위표는 군호를 받은 기록이 없어, 위나라가 멸망할 당시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8년 음력 12월, 진승·오광의 난 때 위표의 형 위구가 진나라를 탈출하여 진승의 부하장수 주불의 도움으로 위나라 왕이 되었고, 위표도 이때 형과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이 위나라를 세울 때 이미 진승의 군대는 장한에게 참패하고 초왕 진승마저도 살해당했다. 장한의 군대는 다음 해 1월 위나라 수도 임제를 포위했고, 6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위왕 위구는 백성들을 위해 항복하고 분신자살했다. 이때 위표는 탈출해 초나라 동아지역으로 피신했고, 초회왕 미심은 위표에게 지원군을 보내 위나라 방어를 도왔다.

기원전 204년, 형양 전투에서 유방은 위표를 남겨 형양을 방어하게 했다. 항우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형양을 지키는 유방의 또 다른 장교인 주가는 위표가 이전에 유방을 배신했기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가는 결국 위표를 처형했다.[13][14] 이때 위표가 죽은 시점이 다른 날짜에 두 번 기록되어 있어(한왕 4년 8월, 한왕 5년 4월) 정확한 사망 시점을 알기 어렵다.

2. 3. 1. 한신의 계략과 위표의 패배

기원전 208년, 진나라의 장한위구를 죽이자, 위표는 초나라의 항량에게 의지하여 도망쳤다. 그리고, 회왕에게 수천의 병사를 빌려 위나라의 20여 성을 함락시켰다.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위왕을 칭했다.[6][7][8]

기원전 206년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위표는 영토를 삭감당해 서위왕이 되었다. 초한전쟁이 시작되고, 유방한신을 얻어 장한 등이 다스리는 삼진을 무너뜨리자, 위표는 스스로 유방과 동맹을 맺고, 팽성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팽성 전투에서는 각국이 제멋대로 진을 쳤기 때문에 통솔이 되지 않아, 항우의 3만 군세 앞에서 연합군은 대패했다.

패전 후, 위표는 어머니를 간호한다는 핑계로 귀국하여 유방을 배반하고 항우에게 붙었다. 위지에 전개했던 항우의 장수 항타는 위표를 거들었다. 위표의 배반을 우려한 유방은 여식기를 사자로 보내 설득을 시켰으나, 위표는 "나는 오만하고 무례하고 횡포한 한왕(유방)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며 이를 거절했다.

여식기는 유방에게 돌아와 위표의 장수들에 대해 보고했다. "대장은 백직, 기병의 장은 풍경, 보병의 장은 항타입니다." 유방은 "백직은 애송이이고, 한신의 적수가 못된다. 풍무택의 아들은 현명하지만 관영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항타도 조참의 적이 아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신 역시 "위표가 주숙을 대장으로 기용하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백직을 어리다고 평가했다.

기원전 205년,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서위를 공격하자, 위표는 백직을 대장으로, 풍경과 항타(項它)에게 기병과 보졸을 맡겨[10] 포판(蒲坂, 지금의 윈청 시 융지 시)에 주둔시켜 황하를 끼고 임진에 주둔한 한군과 대치하며 한군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신은 임진을 건너는 척 하고 몰래 임진보다 북쪽에 있는 하양(지금의 웨이난 시 한청 시)에서 황하를 건너 안읍을 습격했다. 위표는 이에 놀라 맞서 싸웠으나 패했고,[11] 곡양에서 조참의 공격을 받아 동원까지 달아났으나, 9월 위표는 동원에서 사로잡혀[12] 형양으로 압송되었다.

2. 3. 2. 형양성에서의 죽음

위표는 위나라의 공자로, 기원전 225년 위나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왕족에서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형 위구와 달리 위표는 군호를 받은 기록이 없어, 위나라가 멸망할 당시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8년 음력 12월, 진승·오광의 난 때 위표의 형 위구가 진나라를 탈출하여 진승의 부하장수 주불의 도움으로 위나라 왕이 되었고, 위표도 이때 형과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이 위나라를 세울 때 이미 진승의 군대는 장한에게 참패하고 초왕 진승마저도 살해당했다. 장한의 군대는 다음 해 1월 위나라 수도 임제를 포위했고, 6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위왕 위구는 백성들을 위해 항복하고 분신자살했다. 이때 위표는 탈출해 초나라 동아지역으로 피신했고, 초회왕 미심은 위표에게 지원군을 보내 위나라 방어를 도왔다.

기원전 204년, 형양 전투에서 유방은 위표를 남겨 형양을 방어하게 했다. 항우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형양을 지키는 유방의 또 다른 장교인 주가는 위표가 이전에 유방을 배신했기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가는 결국 위표를 처형했다.[13][14] 이때 위표가 죽은 시점이 다른 날짜에 두 번 기록되어 있어(한왕 4년 8월, 한왕 5년 4월) 정확한 사망 시점을 알기 어렵다.

3. 가계

wikitext

위표

4. 평가

4. 1. 엇갈린 평가

5. 기타

5. 1. 관상가 허부의 예언

5. 2. 위표와 관련된 인물들

참조

[1] 서적 史記
[2] 서적 史記
[3] 서적 漢書
[4] 서적 漢書
[5] 서적 史記
[6] 서적 사기
[7] 서적 사기
[8] 서적 사기
[9] 서적 사기
[10] 서적 한서
[11] 서적 회음후열전
[12] 서적 조상국세가
[13] 서적 사기
[14] 서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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