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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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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석태는 188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일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이다. 1914년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서울에 한성 치과의원을 개원하여 순종 내외를 진료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활동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으며, 1925년에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구강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구강 위생 개선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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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태
함석태
함석태
함석태
본관양근 함씨
기본 정보
출생1913년 6월 11일
사망1976년 4월 22일 (향년 62세)
직업치과의사, 정치인
배우자김정례
자녀슬하 3남
학력
최종 학력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
경력
소속 정당자유당, 민주공화당
주요 경력제3·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횡성군)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

2. 생애

함석태는 188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1912년 일본에서 치의학을 공부한 후, 1914년 한국 최초로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인물이다.[1] 같은 해 서울에 한성 치과의원을 개원하여 진료를 시작했으며, 당시 황실이었던 순종 부부도 그의 진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는 한국인 치과의사로서 활동하며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후배 치과의사들의 길을 열어주고 구강 위생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힘썼다.[4][2] 특히 1925년에는 일본인 중심의 조선치과의사회에서 소외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안종서, 김용진 등과 함께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한국 치과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함석태는 188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1] 1912년 일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1]

그가 졸업할 당시에는 아직 치과의사 면허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정식 치과의사는 아니었다.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규칙'이 공포되고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치과의사가 되려면 조선 총독의 면허를 받아야 했다. 1913년 12월 11일 관련 절차가 제정되어 치과의사 업무는 의사, 의생과 같이 경찰이 관리하게 되었다. 함석태는 이 규칙에 따라 치과의사 면허 제1호로 등록하여, 1914년 2월 5일 면허를 허가받았고, 같은 해 3월 11일 관보에 게시되었다.[1] 그해 6월, 함석태는 서울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에 한성 치과의원을 개원하였다.[1]

당시 황실이었던 순종 내외도 일본인에게 치과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 치과의원을 찾았다고 전해진다.[2] 순종 내외는 진료비 대신 금시계나 금단추, 현금을 주기도 했다.[1]

그 무렵 서울에는 의사 120여 명 중 치과의사는 20여 명에 불과했다.[1] 일본인 의사들은 데이비드 에드워드 한(한국명 한대위)과 같은 외국인 의사의 개업을 경계했다.[1] 또한, 일제는 한국인이 치과의사와 같은 연구직이나 기술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사상이나 정치 분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함석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뒤를 이어 1917년 한동찬(韓東燦)이 동경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개업했으며, 1919년 김창규(金昌圭)가 동양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화문에서 개원했다.[1] 1921년에는 이희창(李凞昌)이 함석태와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무교동에서, 1922년에는 임택룡(林澤龍)이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1] 그러나 서울에서의 개업 환경이 녹록지 않아 1924년경에는 한국인 치과의사로는 함석태 혼자 개업 중이었다고 그 자신이 쓴 글 〈구강위생(口腔衛生)〉에서 밝히고 있다.[4]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인들이 구강 위생에 소홀하며 전반적인 관심이 부족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2]

1922년 4월 1일, 일제는 경성 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를 인가했고, 같은 해 4월 15일 개교했다.[1] 1925년 4월 15일, 이 학교에서 첫 한국인 졸업생 23명이 배출되자, 함석태는 안종서, 김용진 등 동료들과 함께 한국인만을 회원으로 하는 한성치과의사회(漢城齒科醫師會)를 조직했다.[1] 그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치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는 데 책임감을 느꼈다. 당시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에서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소외되는 현실 속에서 한국인만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 그는 한국인 치과의사로서 사회에 봉사하려는 의지가 강했으며, 나라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도 깊었다.[1] 한성치과의사회는 처음 회원 7명으로 시작했으며, 함석태는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1]

2. 2. 한국 최초 치과의사 면허 취득

함석태는 1912년 일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졸업 당시에는 아직 치과의사 면허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정식 치과 의사는 아니었다.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규칙이 발표되고, 1914년 3월 1일부터 이 법령이 시행되면서 치과의사가 되려면 조선 총독의 면허를 받아야 했다. 함석태는 이 규칙에 따라 치과의사 면허 제1호로 등록하여, 1914년 2월 5일 한국 최초로 치과의사 면허를 허가받았다. 이 사실은 그해 3월 11일 관보에 게시되었다.

면허 취득 후, 함석태는 그해 6월 서울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에 한성 치과의원을 개원했다. 당시 순종 내외도 일본인에게 치과 진료를 받고 있었으나, 한국인이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 치과의원을 찾았다고 한다.[2] 순종 내외가 진료를 받을 때 치료비는 따로 정하지 않고, 때에 따라 금시계나 금단추, 현금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서울에는 약 120여 명의 의사가 있었고, 그중 치과 의사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인 의사들은 외국인 의사의 개업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는 한국인이 치과의사와 같은 연구직이나 기술직으로 진입하는 것을 표면적으로는 막지 않았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민족의식 고취나 정치 참여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계산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함석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2. 3. 한성 치과의원 개원과 순종 진료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후, 함석태는 같은 해 6월 서울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에 한국인 최초로 한성 치과의원을 개원하였다. 당시 순종 황제 부부는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 치과의원을 찾았다고 한다.[2] 순종 부부는 진료비 대신 금시계, 금단추, 현금 등을 하사하였다.

2. 4. 초기 치과의사 활동과 일제의 차별

함석태는 1913년 11월 15일 발표된 치과의사규칙에 따라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 제1호를 취득하였고, 같은 해 3월 11일 관보에 게시되었다. 그해 6월, 함석태는 서울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에 한성 치과의원을 열었다. 당시 순종 내외도 일본인에게 치과 진료를 받고 있었으나, 한국인 치과의사가 개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 치과의원을 찾았다고 전해진다.[2] 진료비는 정해져 있지 않았고, 때에 따라 금시계나 금단추, 현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 무렵 서울에는 의사 120여 명 중 치과의사가 20여 명 정도였다. 당시 일본인 의사들은 데이비드 에드워드 한과 같은 외국인 의사들이 개업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일제는 한국인이 치과의사와 같은 연구직이나 기술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표면적으로 막지는 않았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사상이나 정치 분야로 나아가는 것을 억제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뒤를 이어 한동찬(1917년 평양 개업), 김창규(1919년 광화문 개업), 이희창(1921년 무교동 개업), 임택룡(1922년 세브란스 병원 치과 근무) 등이 치과의사의 길을 걸었으나, 서울에서의 개업은 쉽지 않았다. 함석태는 1924년 자신의 글 〈구강위생(口腔衛生)〉에서 당시 서울에서 개업한 한국인 치과의사는 자신뿐이라고 밝히며 어려움을 토로했다.[4] 또한 이 글에서 구강 위생에 대한 한국인의 전반적인 관심 부족을 안타까워했다.[2]

1922년 4월 15일 경성 치과의학교가 개교하고 1925년 4월 15일 첫 한국인 졸업생 23명이 배출되자, 함석태는 안종서, 김용진 등 동지들을 모아 한국인만을 회원으로 하는 한성치과의사회(漢城齒科醫師會)를 조직했다. 이는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 내에서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겪는 소외와 차별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 치과의사로서 사회적 인식 개선과 후진 양성에 책임감을 느꼈으며, 나라와 동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한성치과의사회를 이끌었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성치과의사회는 처음 회원 7명으로 시작했다.

2. 5. 후배 양성과 조선인 구강 위생 개선 노력

함석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한국인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해 연구직이나 기술직 진입을 허용하는 정책 속에서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뒤를 이어 후배 치과의사들이 배출되었다. 1917년 한동찬(韓東燦)이 동경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개업하였고, 1919년 김창규(金昌圭)가 동양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화문에서 개원하였다. 1921년에는 이희창(李凞昌)이 함석태와 같은 일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무교동에서 개업했으며, 1922년에는 이희창의 1년 후배인 임택룡(林澤龍)이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서의 개업 환경은 녹록지 않아, 1924년 함석태는 자신의 글 〈구강위생(口腔衛生)〉에서 서울에서 개업 중인 한국인 치과의사는 자신 한 명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4] 또한 같은 글에서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구강 위생에 대해 소홀한 현실을 지적하며 전반적인 관심 부족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2] 이는 한국인들의 건강 증진과 위생 관념 개선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2. 6. 한성치과의사회 조직

1922년 4월 1일 일제강점기 하에서 경성 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가 인가되었고, 같은 해 4월 15일 개교식을 가졌다. 1925년 4월 15일, 이 학교에서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23명이 배출되자, 함석태는 안종서, 김용진 등 십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인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한성치과의사회(漢城齒科醫師會)를 조직하였다.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치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후배 치과의사들의 길을 열어주는 데 책임감을 느꼈다. 당시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 내에서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소외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인 치과의사로서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며, 나라와 동포를 생각하는 마음도 깊었다.

이러한 함석태의 뜻에 공감한 조동흠이나 총독부의원 치과에서 조수로 근무하던 김연권 등도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치과의사회는 처음에 회원 7명으로 시작하였으며, 함석태는 회원들의 추대를 받아 회장직을 맡았다.

참조

[1] 간행물 대한치과의사협회지 1993-01-01
[2]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3] 논문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 https://web.archive.[...] 2008-09-20
[4] 뉴스 구강위생(口腔衛生) 동아일보 192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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