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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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지라는 본래 혈연, 지연 관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으나, 종교적 이유로 인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에서 헤지라는 메카에서의 신앙 단계를 넘어 교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었다. 히즈라(Hijrah)는 아랍어로 '이주', '이동'을 의미하며, 무함마드와 무슬림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을 가리킨다. 헤지라는 경제적, 신변 안전을 위한 이동뿐 아니라 인간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슬람교의 역사적, 종교적, 사회적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헤지라'는 본래 혈연·지연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후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8][9] ''히즈라''(Hijrah)는 '떠나다', '이주하다' 또는 '이동하다'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 هجرة의 로마자 표기이다. 동사 어근 ''H-J-R''의 첫 번째 형태인 ''hajara''는 '우호적인 관계에서 단절시키다; 관계를 피하다'를 의미하며, 세 번째 형태인 ''hājara''는 '떠나거나 출발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상호 종료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적절한 맥락 없이 '친족 관계 또는 연관성의 단절'로 잘못 번역되기도 했다.[10] 1753년 이후, 이 단어는 영어에서 탈출을 의미하는 데에도 사용되어 왔다.[11]
헤지라는 본래 혈연·지연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후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메카에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되어, 이슬람력 기원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20][21][22]
هجرةar는 원래 혈연·지연 관계에서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후 종교적인 이유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메카에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2. 어원
히즈라(Hijra)는 아랍어로 "이주", "(새 등의) 이동"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주로 경제적인 이유나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어떤 지역에서 다른 지역, 어떤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20][21][22] 또한, 지금까지의 인간 관계를 끊고 새로운 인간 관계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슬람 용어로서의 히즈라는 다신교도를 의미하는 Shirk (Islam)|시르크영어의 지배하에 있어 종교적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지역에서 그 위험이 없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역사적 배경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하로지룬). 이미 메디나 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다. 메디나 측은 메카 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이들의 반대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헤지라는 메카에서 야스리브(메디나)로의 무함마드와 무슬림의 이주를 가리킨다. 하지만 615년 전후에 행해진 무슬림의 에티오피아 망명이나 이슬람교도의 대정복 시대에 정복지인 미스르에서의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헤지라라고 불렸다. 또한, 무라비트 왕조에서는 외부에서 진영에 가담하는 것, 식민지 시대의 마그레브와 인도에서는 비무슬림의 지배를 피해 무슬림 지배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도 헤지라라고 불렸다.
3. 1. 메카에서의 상황
610년경 히라 산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614년경부터 메카 시민들에게 선교를 시작했다.[1] 처음에는 메카 시민들이 무함마드를 조롱했지만, 신자가 늘어나면서 무함마드와 무슬림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개종을 강요받게 되었다.[2][3] 615년경에는 무함마드의 권유로 100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일신교인 기독교도가 통치하는 악숨 왕국으로 보호를 요청하여 망명했다.[4] 이로 인해 당시 무슬림의 대부분이 메카를 떠나 무함마드 곁에는 소수의 성인 남성만 남게 되었다.[4]
619년에는 무함마드의 아내인 하디자 빈트 후와일리드와 무함마드의 삼촌이자 하심 가문의 수장으로서 무함마드를 보호하던 아부 탈리브가 사망했다.[5] 새롭게 하심 가문의 수장이 된 아부 라합은 처음에는 무함마드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내 그는 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배신자라며 무함마드에 대한 보호를 철회했다.[6][7][8] 하심 가문의 보호를 잃은 무함마드와 무슬림에 대한 박해는 더욱 격렬해졌다.[6] 무함마드는 포교와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메카에서 60km 정도 동쪽에 있는 타이프로 향했다. 무함마드는 몰래 현지의 유력자들에게 접촉하여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무함마드를 쫓아냈다.[7][8][9] 그 후, 무함마드는 나우팔 가문의 가주인 무트임의 지와르(이웃에 대한 보호)에 의해 메카로 들어갈 수 있었다.[9]
3. 2. 메디나(야스리브)의 상황
메카에서 약 418.43km 북쪽에 있는 메디나는 푸른 오아시스였다.[1] 이슬람 자료에 따르면 이 도시는 로마에 대항한 반란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세웠다.[2] 아랍 부족에게 농업은 생소했지만, 유대인들은 오아시스에서 토지를 경작하는 훌륭한 농부였다.[2] 도시에는 바누 카이누카, 바누 나디르, 바누 쿠라이자 등 세 개의 주요 유대인 부족이 있었다.[3] 시간이 지나면서 아라비아 남부에서 온 아랍 부족들이 이 도시로 이주하여 유대인 공동체와 함께 정착했다.[2] 이 아랍 부족들은 바누 아우스와 바누 카즈라지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바누 카일라로 불렸다.[4] 620년 이전에 이 두 아랍 부족은 거의 100년 동안 싸움을 벌였다.[1] 각 부족은 유대인 부족의 지원을 구하려 했으며, 이는 때때로 유대인 부족 간의 내부 싸움으로 이어졌다.[1]
620년, 무함마드는 카바를 방문한 각 부족의 순례단 사이를 돌며 선교를 했다. 이때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듣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 중 야스리브(메디나의 옛 이름)에서 온 Banu Aws|아우스족영어과 Banu Khazraj|하즈라지족영어의 순례단 6명이 있었다. 야스리브로 돌아간 그들은 이슬람을 전파했다.[5][6]
야스리브는 현재의 메디나로, 메카에서 북쪽으로 약 350km, 홍해에서 약 160km 내륙에 있었다. 주민의 약 3분의 1은 Banu Qurayza|쿠라이자족영어, Banu Nadir|나디르족영어, Banu Qaynuqa|카이누카족영어 등 유대교도였고, 3분의 2는 다신교도 아랍인이었다.[7][8] 당시 야스리브에서는 아우스족과 하즈라지족이 유대교도를 끌어들여 수십 년에 걸친 항쟁을 벌였다.[5][7] 당시 아라비아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원이 살해당했을 때 적대 부족을 살해함으로써 세력 균형을 꾀하는 "피의 복수" 제도가 있었다. 양 부족은 복수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고, 야스리브는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조정자,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5]
3. 3. 제1차 아카바 서약과 제2차 아카바 서약
620년, 무함마드는 카바를 방문한 각 부족의 순례단 사이를 돌며 선교를 했다. 이때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듣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 중 야스리브에서 온 Banu Aws|아우스족영어과 Banu Khazraj|하즈라지족영어의 순례단 6명이 있었다. 야스리브로 돌아간 그들은 이슬람을 포교했다.[12]
그 다음 해인 621년 순례의 달에, 야스리브에서 작년에 메카를 방문하여 개종한 6명 중 5명을 포함한 12명의 부족 대표자가 메카의 무함마드를 방문했다. 무함마드와 그들은 메카 교외의 아카바 계곡에서 회견을 가졌다. Ubadah ibn al-Samit|우바다 빈 알 사미트영어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 회견에서 그들은 다신교 숭배, 도둑질, 간통, 여아 살해, 이웃에 대한 중상 등을 그만둘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맹세는 "제1차 아카바의 맹세"라고 불린다. 그 후, 무함마드는 신뢰하는 제자인 Mus'ab ibn Umayr|무사브 이븐 우마이르영어를 야스리브로 보내 새로운 신도를 얻는 데 힘썼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야스리브에서는 어느 가정에서든 가족 중 누군가는 무슬림이라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13] 무사브는 다음 해 순례 시기 직전에 메카로 돌아와 그 성공을 무함마드에게 보고했다.
622년 6월에는 남성 73명, 여성 2명으로 구성된 75명의 야스리브의 사절단이 무함마드를 방문했다. 다시 아카바에서 회견한 그들은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인정하고 무력으로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이를 "전투의 맹세" 또는 "제2차 아카바 맹세"라고 한다.[14] 카아브 빈 말리크가 말한 바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그들 중에서 각 부족의 지도자 12명을 선택한 후 그들을 야스리브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여, 하즈라즈족을 중심으로 하는 개종자를 중심으로 한 야스리브의 주민들은, 항쟁의 조정자로서 무함마드를 맞이하기로 결단했다.
4. 헤지라의 실행
무함마드는 신봉자들에게 서약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메카의 추종자들에게 야스리브로 이주하라고 지시했다. 이 이주는 약 3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이 메카에 남아있는 동안 혼자 메디나에 도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앞서 가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뒤에 남았다.[1]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쿠라이쉬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무함마드의 어린 시절 친구에서 적으로 변한 아부 자흘은[4] 쿠라이쉬 각 씨족 대표들이 무함마드를 공동 암살할 것을 제안했다.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이 사실을 듣고, 사촌 알리에게 자신의 녹색 하드라미 망토로 덮인 침대에 누워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5] 그 후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에서 남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사우르 산 동굴에 숨었다.[6]
히지라는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소문은 메카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쿠라이쉬족의 유력자들은 모여 협의를 진행했고, 그 결과 각 가문에서 건장한 젊은이를 한 명씩 암살자로 보내 일제히 무함마드를 칼로 찔러 죽인다는 안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이는 각 씨족의 대표자가 일제히 무함마드를 죽임으로써 보복의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2]
무함마드의 암살은 같은 해 9월에 행해질 예정이었지만, 무함마드는 이 계획을 사전에 감지했다.[3] 아이샤가 말한 바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의 집으로 가서 히즈라를 행할 것을 알리고,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스마와 아이샤가 식량을 준비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길 안내인을 고용하고, 낙타를 맡긴 후 3일 후에 사우르 산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 후 무함마드는 밤이 되면 무함마드의 침대에서 자도록 알리에게 지시했다.[8] 심야에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집 뒷문으로 빠져나와 도보로 메카를 탈출했다.[9]
메카를 떠난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먼저 메디나와 반대편인 남쪽의 사우르 산 정상 근처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10]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무함마드가 아니라 알리였고, 무함마드가 이미 메카를 탈출했다는 것을 알게 된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의 목에 낙타 100마리를 걸고 수색대를 보냈다.[12]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가 동굴에 숨어 있는 동안, 아부 바크르 가문의 노예였던 아미르 이븐 푸헤이야가 양을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의 발자취를 지우고,[11] 짠 젖을 그들에게 마시게 하거나, 아스마가 식량을 가져오기도 했다. 또한 메카에 남아있던 아부 바크르의 아들 압둘라는 밤이 되면 동굴을 방문하여 메카의 상황을 보고했다. 압둘라가 메카로 돌아갈 때, 아미르가 양을 그의 뒤를 따르게 하여 발자취를 지웠다.[13]
수색대는 동굴 앞까지 왔지만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떠났다. 후세의 전설에 따르면, 한 마리의 거미가 입구에 거미줄을 쳤고,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알을 낳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본 수색대는 안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고 지나갔다고 한다.[14] 동굴에 잠복한 지 3일째 되는 밤, 압둘라는 수색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무함마드에게 알렸다.[15] 4일째에는 약속대로 길 안내인이 낙타를 사우르 산으로 데려왔고, 아스마가 식량을 낙타에 묶었다.[16]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낙타를 타고 아미르와 압둘라 빈 쿠라이크와 함께 4명이 야스리브로 출발했다.[8][9] 그들은 대상들이 다니는 인파가 많은 길이나 유명한 루트를 피해서 갔다. 9월 24일(헤지라력 원년 3월 12일 월요일) 오후, 그들은 야스리브 교외의 쿠바에 도착했다.[11][12][13]
무함마드의 도착 전, 야스리브에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탈출했다는 정보는 들어와 있었지만,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3일간 잠복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야스리브의 개종자들과 메카에서 온 이주자들은 메카로 가는 길에서 1,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하라트라고 불리는 바위산에 진을 치고, 무함마드가 도착하기 10일 이상 전부터 그곳과 집을 왕복하며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14][15] 무함마드가 도착한 9월 24일, 그들은 이미 하라트에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대추야자 밭에서 일하던 한 유대인이 쿠바로 향하는 무함마드 일행의 모습을 보고, 집 옥상에서 "너희의 행운이 왔다!"라고 외쳤다.[16][17] 무슬림들은 급히 쿠바로 향했고, 야스리브에 도착한 무함마드를 시를 읊거나 탬버린을 치며 기쁨을 표현하며 맞이했다고 한다.[18][19]
2~3일 늦게 메카를 출발한 알리는 무함마드가 도착한 2일 후에 야스리브에 도착했다.[20][21]
4. 1. 무슬림들의 이주
'헤지라'는 원래 혈연이나 지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후 종교적인 이유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통해 메카에서의 개인적인 신앙 단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이는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식되어, 이슬람력의 시작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가 헤지라를 할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함께 메디나로 이주했다(무하지룬). 이미 메디나 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집단을 받아들이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메디나는 메카와 달리 다신교에 기반한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를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피쿤'이라고 불리며 경멸받았다. 이들의 반대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무함마드는 신도들에게 서약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메카의 추종자들에게 메디나로 이주하라고 지시했다. 이 이주는 약 3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이 메카에 남아 있는 동안 혼자 메디나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앞서 가지 않고 뒤에 남아 그들을 지켜보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설득했다.[1] 몇몇 쿠라이쉬 사람들은 가족들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2][3] 결국 메카에는 무슬림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2] 무함마드는 이 이주를 쿠라이쉬의 추방으로 보았다.[3]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쿠라이쉬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무함마드의 어린 시절 친구에서 적으로 변한 아부 자흘은[4] 쿠라이쉬 각 씨족 대표들이 무함마드를 함께 암살할 것을 제안했다.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이 사실을 듣고, 사촌 알리에게 자신의 녹색 하드라미 망토로 덮인 침대에 누워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5] 그 후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에서 남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사우르 산 동굴에 숨었다.[6] 아부 바크르의 자녀와 하인들은 메카에 머물면서 정기적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7] 사흘 동안 숨어 지낸 후, 그들은 아부 바크르가 미리 사둔 낙타를 타고 이교도 안내자 압달라 이븐 아르카트와 함께 메디나로 출발했다.[6]
메카에서의 선교가 막다른 길에 이르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무함마드는 야스리브(메디나)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제2차 아카바 맹세 며칠 후,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야스리브로 가라고 지시했다.
무슬림 중 가장 먼저 야스리브로 이주한 사람은 Abu Salama영어였다. 그는 에티오피아로 이주했다가 메카로 돌아왔다. Umm Salama영어에 따르면, 그는 아내 움 살라마와 아들 살라마와 함께 이주하려 했지만, 메카를 떠나자 움 살라마의 친족들이 그들을 쫓아와 "네 일은 네가 정하면 된다. 하지만 아내를 데려가는 것을 우리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느냐"라며 움 살라마와 아들을 떼어냈다. 그러자 아부 살라마의 친족들이 "살라마는 우리 일족의 것이다"라며 살라마를 아내에게서 떼어내 데려갔다. 양쪽 집안의 갈등에 휩싸인 아부 살라마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이주했다. 남편과 헤어진 움 살라마는 1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면서 지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친족들이 그녀의 이주를 허락해 아들과 함께 이주했다. 이후 아부 살라마는 전사했고, 움 살라마는 무함마드의 아내가 되었다.
히지라는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훗날 제2대 정통 칼리프가 되는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는 카바 신전에서 쿠라이시족에게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는 나에게 도전하라"고 당당하게 말한 후 메카를 떠났다고 한다.
70여 명의 무슬림들은 몇 명씩 가족 단위로 은밀히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로 이주했다. 일반적인 캐러밴이라면 11일 만에 도착할 거리를 그들은 2개월 정도 걸려 이동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쿠라이시족의 방해 없이 야스리브에 도착했다. 그들은 야스리브의 무슬림 집에 머물면서 무함마드의 도착을 기다렸다.
우마르가 말한 바에 따르면, Ayyash ibn Abi Rabiah영어라는 남자는 우마르와 함께 히지라를 했지만, 야스리브까지 찾아온 형제에게 "네 어머니가 맹세했다. 네가 나타날 때까지 머리를 빗지 않고, 낮에도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하지 않겠다고."라는 말을 듣고, 이것은 형제의 계략이라는 우마르의 충고를 무시하고 메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메카가 가까워지자 형제는 그를 묶어 마을을 끌고 다니며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4. 2. 무함마드의 메카 탈출
무함마드는 신봉자들에게 서약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카에 있는 추종자들에게 메디나로 이주하라고 지시했다. 이 이주는 약 3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이 메카에 남아 있는 동안 혼자 메디나에 도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앞서 가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뒤에 남았다.[1]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쿠라이쉬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무함마드의 어린 시절 친구에서 적으로 변한 아부 자흘은 각 쿠라이쉬 씨족의 대표들이 무함마드를 공동 암살할 것을 제안했다.[2]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사촌 알리에게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3] 그런 다음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에서 남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사우르 산의 동굴로 가서 그곳에 숨었다.[4]
히즈라는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소문은 메카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쿠라이쉬족의 유력자들은 모여 협의를 진행했고, 그 결과 쿠라이쉬족의 각 가문에서 건장한 젊은이를 한 명씩 암살자로 보내 일제히 무함마드를 칼로 찔러 죽인다는 안으로 의견이 일치했다.[5] 이는 각 씨족의 대표자가 일제히 무함마드를 죽임으로써 보복의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6]
무함마드의 암살은 같은 해 9월에 행해질 예정이었지만, 무함마드는 이 계획을 사전에 감지했다.[7] 아이샤가 말한 바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의 집으로 가서 히즈라를 행할 것을 알리고,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스마와 아이샤가 식량을 준비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길 안내인을 고용하고, 낙타를 맡긴 후 3일 후에 사우르 산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 후 무함마드는 밤이 되면 무함마드의 침대에서 자도록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게 지시했다.[8] 심야에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집 뒷문으로 빠져나와 도보로 메카를 탈출했다.[9]
메카를 떠난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먼저 메디나와 반대편인 남쪽의 사우르 산 정상 근처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10] 그들이 동굴에 숨은 후, 아부 바크르 가문의 노예였던 아미르 이븐 푸하이르가 양을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의 발자취를 지웠다고 한다.[11]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무함마드가 아니라 알리였고, 무함마드가 이미 메카를 탈출했다는 것을 알게 된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의 목에 낙타 100마리를 걸고 수색대를 보냈다.[12] 알리는 투옥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가 동굴에 숨어 있는 동안, 아미르 이븐 푸헤이야가 동굴 근처에 양을 데려와 짠 젖을 그들에게 마시게 하거나, 아스마가 식량을 가져오기도 했다. 또한 메카에 남아있던 아부 바크르의 아들 압둘라는 밤이 되면 동굴을 방문하여 메카의 상황을 보고했다. 압둘라가 메카로 돌아갈 때, 아미르가 양을 그의 뒤를 따르게 하여 발자취를 지웠다.[13]
수색대는 동굴 앞까지 왔지만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떠났다. 후세의 전설에 따르면, 한 마리의 거미가 입구에 거미줄을 쳤고,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알을 낳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본 수색대는 안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고 지나갔다고 한다.[14] 동굴에 잠복한 지 3일째 되는 밤, 압둘라는 수색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무함마드에게 알렸다.[15] 4일째에는 약속대로 길 안내인이 낙타를 사우르 산으로 데려왔고, 아스마가 식량을 낙타에 묶었다.[16]
알리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탈출한 3일 후에 무함마드의 처자식과 아부 바크르의 가족과 함께 메카를 탈출했다.[17]
4. 3. 메디나 도착
무함마드는 신봉자들에게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약 3개월에 걸쳐 이주가 이루어졌다.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을 지켜보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뒤에 남았다.[1] 쿠라이쉬 사람들이 가족 구성원들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 했지만, 결국 메카에는 무슬림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2][3] 무함마드는 이 이주를 쿠라이쉬의 추방으로 간주했다.[4]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에서 남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사우르 산의 동굴로 가서 그곳에 숨었다.[5] 아부 바크르의 자녀와 하인들은 메카에 머물면서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6] 사흘 동안 숨어 지낸 후, 그들은 아부 바크르가 미리 사둔 낙타를 타고 이교도인 안내자 압달라 이븐 아르카트와 함께 메디나로 출발했다.[7]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낙타를 타고 아미르와 압둘라 빈 쿠라이크와 함께 4명이 야스리브로 출발했다.[8][9] 그들은 대상들이 다니는 인파가 많은 길이나 유명한 루트를 피해서 갔다. 사우르 산을 출발하여 북서쪽의 제다 방면으로 향한 후, 내륙으로 돌아갔다. 메카 북방의 우스판을 지나자 자주 교역로와 교차하게 되었다. 주흐파를 지나자 쿠라이쉬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원래의 교역로로 야스리브로 향했다고 한다.[10]
9월 24일(헤지라력 원년 3월 12일 월요일) 오후, 그들은 야스리브 교외의 쿠바에 도착했다.[11][12][13]
무함마드의 도착 전, 야스리브에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탈출했다는 정보는 들어와 있었지만,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3일간 잠복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야스리브의 개종자들과 메카에서 온 이주자들은 메카로 가는 길에서 1,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하라트라고 불리는 바위산에 진을 치고, 무함마드가 도착하기 10일 이상 전부터 그곳과 집을 왕복하며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14][15] 무함마드가 도착한 9월 24일, 그들은 이미 하라트에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대추야자 밭에서 일하던 한 유대인이 쿠바로 향하는 무함마드 일행의 모습을 보고, 집 옥상에서 "너희의 행운이 왔다!"라고 외쳤다.[16][17] 무슬림들은 급히 쿠바로 향했고, 야스리브에 도착한 무함마드를 시를 읊거나 탬버린을 치며 기쁨을 표현하며 맞이했다고 한다.[18][19]
2~3일 늦게 메카를 출발한 알리는 무함마드가 도착한 2일 후에 야스리브에 도착했다.[20][21]
5. 헤지라 이후
헤지라 이후, 무함마드는 야스리브 교외의 쿠바에 도착하여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모스크인 쿠바 모스크를 건설했다. 이후 야스리브 중심으로 이주하여 거주지를 건설했고, 이는 후에 예언자의 모스크로 이용되었다.
야스리브에서는 무함마드를 조정자로 받아들였다. 모든 주민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함마드는 주민 모두를 알라의 신자로 간주했다. 야스리브는 "예언자의 도시"를 의미하는 "마디나 알 나비"로 불렸으며, 줄여서 "마디나"로 불리게 되었다.
5. 1. 이슬람 공동체(움마)의 형성
'헤지라'는 본래 혈연·지연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후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메카에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되어 이슬람교 기원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했다(무하지룬).[14][15][16] 이미 메디나 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다. 메디나 측은 메카와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피쿤'이라 불리며 경멸적으로 묘사되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이 아닌 정치적 이유였다.623년 1월부터 무함마드는 홍해 동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메카 대상에 대한 여러 차례의 습격을 이끌었다. 서로 다른 부족의 구성원들은 절박한 상황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이러한 통합은 주로 혈연 관계에 기초했다.[14][15][16]
두 번째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는 헤지라가 발생한 무슬림 연도를 638년 또는 헤지라 17년, 즉 이슬람력의 첫 해로 지정했다.[17]
알 비루니, 이븐 사드, 이븐 히샴을 포함한 여러 이슬람 역사가와 학자들이 이러한 날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19]
야스리브 교외의 쿠바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모스크인 쿠바 모스크를 지었다. 이후 야스리브의 중심부로 이주한 무함마드는 고아의 토지를 사들여 그곳에 거주지를 건설했다. 이 거주지는 후에 예언자의 모스크로 이용되게 되었다.
야스리브에서는 무함마드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조정자로 하는 것에 찬성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주민이 반드시 많지는 않았지만, 무함마드는 주민 모두가 알라의 신자가 되었다고 간주했다. 또한, 야스리브는 아랍어로 "예언자의 도시"를 의미하는 "마디나 알 나비"로 불리게 되었고, 줄여서 "마디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5. 2. 메카와의 관계
'헤지라'는 원래 혈연이나 지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지만, 나중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통해 메카에서의 개인적인 신앙 단계를 넘어,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이루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헤지라는 이슬람교 초기 신자들에게 이슬람 역사의 전환점으로 인식되었고, 이슬람력의 시작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가 헤지라를 할 때, 메카의 이슬람 신자들도 함께 메디나로 이주했다(무하지룬). 이미 메디나 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집단을 받아들이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메디나 사람들은 메카와 달리 다신교에 기반한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피쿤'이라고 불리며 경멸받았다. 이들의 반대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623년 1월부터 무함마드는 홍해 동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메카 대상(隊商)에 대한 여러 차례의 습격을 이끌었다. 이렇게 하여 서로 다른 부족 구성원들은 절박한 상황 때문에 통합되었다. 이러한 통합은 주로 혈연 관계에 기초했다.[14][15][16]
두 번째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는 헤지라가 발생한 해를 이슬람력의 첫 해(638년, 헤지라 17년)로 지정했다. 이는 나중에 라틴어로 ''Anno Hegirae''로 표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히즈리 날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17] Burnaby는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력 3개월째인 라비 '우-l-아왈(Rabi' al-Awwal) 초에 메카에서 도망쳤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Ibn-Ishak에 따르면, 그 달의 첫째 날 또는 둘째 날이었다"라고 말했다.[18]
알 비루니, 이븐 사드, 이븐 히샴 등 여러 이슬람 역사가와 학자들이 이 날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19]
6. 헤지라의 종교적, 역사적 의의
'헤지라'는 원래 혈연·지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후 종교적 이유로 인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통해 메카에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넘어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러한 이유로 헤지라는 이슬람교 초기 신자들에게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되었고, 이후 이슬람력 기원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했다(하로지룬). 메디나 측은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을 이미 맺은 상태였다. 메디나 측은 메카와 달리 다신교를 기반으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게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휘쿤'이라 불리며 경멸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종교적이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14][15][16]
623년 1월부터 무함마드는 홍해 동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메카 대상에 대한 여러 차례의 습격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부족 구성원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통합되었으며, 이는 주로 혈연 관계에 기초했다.
두 번째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는 헤지라가 발생한 무슬림 연도를 638년 또는 헤지라 17년, 즉 이슬람력의 첫 해로 지정했다. 이는 나중에 ''Anno Hegirae''로 라틴화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히즈리 날짜를 표시하는 데 사용된다.[17]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력 3개월째인 라비 '우-l-아왈 시작과 함께 메카에서 도망쳤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Ibn-Ishak에 따르면, 그 달의 첫째 날 또는 둘째 날이었다.[18] 알 비루니, 이븐 사드, 이븐 히샴을 포함한 여러 이슬람 역사가와 학자들이 이 날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19]
히즈라(Hijra)는 아랍어로 "이주", "(새 등의) 이동" 등을 의미하며, 주로 경제적인 이유나 신변의 안전을 위해 특정 지역에서 다른 지역,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20][21][22] 또한, 기존의 인간 관계를 끊고 새로운 인간 관계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슬람 용어로는 다신교도를 의미하는 시르크|shirk (Islam)ar의 지배하에 있어 종교적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지역에서 그 위험이 없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히즈라는 메카에서 야스리브로의 무함마드와 무슬림의 이주를 가리키지만, 615년 전후에 행해진 무슬림의 에티오피아 망명이나 이슬람교도의 대정복 시대에 정복지인 미스르에서의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히즈라라고 불렸다. 또한, 무라비트 왕조에서는 외부에서 진영에 가담하는 것, 식민지 시대의 마그레브와 인도에서는 비무슬림의 지배를 피해 무슬림 지배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도 히즈라라고 불렸다.
헤지라의 결과, 마디나에는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가 성립되어 이슬람 사회와 국가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마디나를 거점으로 하여 메카와 대항하여 이후의 대정복을 가능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의 사상과 역사에서는 이 헤지라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2대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가 638년에 역법을 정했을 때, 무함마드의 생일도 계시가 내려진 날도 아닌 이 헤지라를 기점으로 하였으며, 헤지라가 행해진 해의 아라비아력 1월 1일인 서기 622년 7월 16일을 헤지라력의 원년 원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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