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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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협률사는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건립된 극장으로, 한국 최초의 원형 극장이었다. 고대 로마식 원형극장을 본떠 지어졌으며,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국립극장으로 운영되었으나, 콜레라와 러일 관계 악화로 인해 전문 흥행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풍기 문란 문제로 1908년 이인직이 주관하는 사설 극장 원각사로 전환되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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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률사 | |
|---|---|
| 극장 정보 | |
| 이름 | 협률사 |
| 종류 | 극장 |
| 개장 | 1902년 |
| 폐장 | 1906년 |
| 위치 | 서울 |
2. 역사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지어진 협률사는,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국 공연 예술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협률사는 본래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지어졌으나, 콜레라와 흉년, 러일전쟁 발발 등의 악재로 인해 행사가 취소되면서 전문 공연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으로서, 170여 명의 전속 예술인들이 활동하며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1908년 친일파 이완용과 이인직에 의해 사설극장 원각사로 전환되면서, 협률사는 짧은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원각사는 <춘향가>, <심청가> 등의 고전과 창극을 주로 공연하였고,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처음으로 극화하여 상연하기도 하였으나,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2. 1. 설립 배경
1902년 여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행사를 열기 위해 극장 협률사(協律社)를 짓게 되었다.[1] 당시 극장 이름은 희대(戱臺)라고 불렀다.[1] 또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외교 사절을 초청하여 기념 행사를 보여줌으로써 국가 위상을 새롭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1] '협률사'라는 이름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40여 년 전부터 있었던 명창들이 모인 연예(演藝) 단체의 이름이었다.[1] 명창들은 생계를 위해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돌며 공연하였다.[1] '협률사'라는 이름은 청나라의 협률창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1]2. 2. 협률사 운영 (1902년 ~ 1908년)
1902년 여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극장 협률사를 짓게 되었는데, 당시 극장 이름은 희대(戱臺)라고 불렸다. 이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외교 사절을 초청하여 기념 행사를 보여줌으로써 국가 위상을 새롭게 하려는 의도였다.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40여 년 전부터 있었던 명창들의 연예(演藝) 단체 이름이었다.[1] 명창들은 생계를 위해 이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돌며 공연하였다.극장 협률사의 외형은 고대 로마식 원형극장을 본떠 사방을 둥글게 벽돌로 쌓고 지붕을 얹은 건물로, 2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내부는 전면에 무대가 있고, 관객석이 3단으로 되어 있었으며, 무대와 관객석은 휘장으로 분리되었고, 준비실이 따로 있었다. 무대에는 백포를 둘러 배경을 하얗게 만들었으며, 약간의 소도구도 진열되었다.
고종은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명창 김창환, 송만갑 등에게 명을 내려 전국의 예인을 극장 협률사에 모이도록 했으며, 예행연습도 시켰다. 당시 170여 명의 예인이 모였으며, 이들은 협률사 전속으로 대우받았고 급료도 지급받았다. 그러나 그해 콜레라가 만연하여 기념 행사는 이듬해로 연기되었고, 이미 지은 건물은 전문 흥행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듬해에도 보리 흉작과 러시아, 일본의 관계 악화로 기념 행사는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협률사는 계속 공연을 하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국립극장이 되었다.
협률사에서 맨 처음 공연한 작품은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로, 유료 공연이었고 신문에 광고까지 냈다. 입장권은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누런 종이로 된 1KRW짜리 상등표, 붉은 종이로 된 70전짜리 중등표, 푸른 종이로 된 50전짜리 하등표였다. 예인들의 급료도 등급에 따라 달랐는데, 1급은 20KRW, 2급은 14KRW, 3급은 10KRW이었다. 공연은 1902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협률사에서는 대중의 기호와 재정 때문에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도 상영하였다.
그러나 풍기 문란과 그에 따른 반대 여론으로 인해 1908년 이완용의 신임을 받는 이인직이 주관하는 사설극장 원각사(圓覺社)로 바뀌게 된다. 당시 실내극장에 남녀가 함께 어울려 아름답지 못한 일이 일어났고, 《한성신문》에서 이를 '춘흥을 도발함을 예사'라는 등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2. 3. 원각사로 전환 (1908년)
1908년, 이완용의 신임을 받는 이인직이 주관하는 사설극장 원각사로 바뀌게 된다. 이는 풍기 문란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인데, 실내극장에 남녀가 함께 어울려 아름답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한성신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춘흥을 도발함을 예사'라고 표현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1] 친일파 이완용과 이인직에 의해 국립극장이 사설극장으로 전환된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문화예술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2. 4. 원각사 운영과 소실 (1908년 ~ 1914년)
1908년 이완용의 신임을 받는 이인직이 주관하는 사설극장 원각사로 바뀌었다. 이때 풍기 문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실내극장에 남녀가 한데 어울려 아름답지 못한 일이 일어났고, 《한성신문》에서 그런 일을 두고 ‘춘흥을 도발함을 예사’라는 등의 기사를 싣게 되었다. 원각사는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 등의 고전과 창극을 주로 공연하다가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처음 극화하여 상연하였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14년에는 화재로 소실되었다.3. 건축
1902년 8월, 심의석이 우리 나라 최초의 극장이자 최초의 원형극장인 협률사를 건립하였다.[4]
3. 1. 건축가
1902년 8월, 조선과 대한제국의 유명한 건축기사 심의석이 한국 최초의 극장이자 최초의 원형극장인 협률사를 건립하였다.[4]참조
[1]
서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2]
웹사이트
김창환협률사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광산구
http://www.grandcult[...]
2023-08-24
[3]
서적
The Cambridge guide to Asia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심의석(沈宜錫)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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