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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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인직은 186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국민신보》와 《만세보》의 주필, 《대한신문》 사장을 역임하며 언론 활동을 했다. 그는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하고, 극장 원각사를 설립하여 신극 운동을 펼쳤다. 1910년에는 한일 병합 교섭에 관여하고,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1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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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인직 |
한글 이름 | 이인직 |
한자 이름 | 李人稙 |
일본어 가나 이름 | りじんしょく |
일본어 가타카나 이름 | イ・インジク |
공직 정보 | |
직책 | 대한제국 중추원 예하 부찬의 |
재임 기간 | 1908년 3월 ~ 1908년 4월 |
군주 | 순종 이척 |
개인 정보 | |
출생일 | 음력 1862년 7월 27일 |
사망일 | 1916년 11월 1일 |
배우자 | 김씨 부인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이천 |
사망지 | 일제 강점기 경성부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1862년 7월 27일,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1900년 2월, 38세의 나이로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정치학교에 입학했다. 1903년, 동경정치학교를 졸업했다. 1904년, 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2]
1906년 2월,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주필이 되어, 처녀작인 「백로주강상촌(白鷺洲江上村)」을 연재하였다. 같은 해 6월, 천도교(天道教) 계열의 신문인 『만세보』로 옮겨, 7월부터 10월까지 「혈의 누」를 연재하였다. 또한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귀의성(鬼の声)」을 연재하였다. 1907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혈의누」의 속편을 집필하였으나 중단하였다. 같은 해 7월, 『대한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대한신문』은 이후 이완용의 용(御用) 신문으로 활동하였다.[2]
1908년 신극 운동을 벌이던 그는 국립극장 협률사를 인수하여 사설극장 원각사로 바꾼 뒤, 《은세계》를 공연했다. 1908년 무렵부터는 한동안 창작 활동에서 멀어져, 일한(日韓)을 오가며 신극 운동, 천리교(天理教)의 포교 활동을 하는 한편,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와 내통하여 한국 병합을 위한 암약에 종사하였다.[2]
1910년 8월 4일에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3] 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경학원의 사성(司成)을 지내면서 한일 병탄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잡지》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 또한 다이쇼 천황이 즉위할 때 친일 헌송문을 지어 바쳤다.[2]
1916년 11월 1일 이인직이 죽자,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하였다.[2]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2]
2. 1. 일본 유학 및 러일전쟁 참전
1900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정치학교에서 약 3년간 수학했다.[2]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 육군의 통역으로 발탁되었다.[2] 1906년에 《국민신보》와 《만세보》 주필을 거쳤다.[2] 그해 소설 《혈의 누》를 썼고 1907년에 《대한신문》 사장이 되었다.[2]1908년 신극 운동을 벌이던 그는 국립극장 협률사를 인수하여 사설극장 원각사로 바꾼 뒤, 《은세계》를 공연했다. 1910년 8월 4일에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3] 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경학원의 사성(司成)을 지내면서 한일 병탄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잡지》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2] 또한 다이쇼 천황이 즉위할 때 친일 헌송문을 지어 바쳤다. 1916년 11월 이인직이 죽자,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하였다.
1903년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에 유학 중인 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으나, 이인직은 이에 응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다.[2] 이후 창업을 생각하며 도신문(都新聞)의 수습을 하였다.
2. 2. 언론 활동 및 신소설 발표
1900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정치학교에서 약 3년간 수학하고, 1903년 졸업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 육군의 통역으로 발탁되었다.[2] 1906년 《국민신보》와 《만세보》 주필을 거쳤다. 그해 소설 《혈의 누》를 썼고[2] 1907년에 《대한신문》 사장이 되었다. 《대한신문》은 이후 이완용의 용(御用) 신문으로 활동하였다.[2]1908년 신극 운동을 벌이던 그는 국립극장 협률사를 인수하여 사설극장 원각사로 바꾼 뒤, 《은세계》를 공연했다.[2] 1910년 8월 4일에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3] 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이인직은 『혈의누』에서 여러 가지로 한국어 표기를 시도하였다.[2] 『국민신보』에 실린 것은 한자 한글 혼용체로, 한자에는 한글로 작게 음독과 훈독이 붙어 있다. 훈독으로 루비를 붙이는 것은 매우 드문 것이다. 단행본으로 간행할 때는 모두 한글로 하였다. 조선의 신소설을 논할 때 이인직을 제외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혈의누』는 신소설의 효시이며, 최초의 조선 근대 문학이라는 평가도 있다.[2]
2. 3. 신극 운동
1908년 신극 운동을 벌이던 그는 국립극장 협률사를 인수하여 사설극장 원각사로 바꾼 뒤, 《은세계》를 공연했다.[3] 1908년 무렵부터는 한동안 창작 활동에서 멀어져, 일한(日韓)을 오가며 신극 운동, 천리교(天理教)의 포교 활동을 하는 한편,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와 내통하여 한국 병합을 위한 암약에 종사하였다.[2]2. 4.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관여 및 친일 행적
1900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정치학교에서 약 3년간 수학했다.[2]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 육군의 통역으로 발탁되었다.[2] 1906년에 《국민신보》와 《만세보》 주필을 거쳤고, 1907년에 《대한신문》 사장이 되었다.[2]1910년 8월 4일에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3] 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3]
경학원의 사성(司成)을 지내면서 한일 병탄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잡지》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2] 또한 다이쇼 천황이 즉위할 때 친일 헌송문을 지어 바쳤다. 1916년 11월 이인직이 죽자,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하였다.[2]
2. 5. 사망
이인직은 1910년 8월 4일에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3] 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경학원의 사성(司成)을 지내면서 한일 병탄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잡지》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 또한 다이쇼 천황이 즉위할 때 친일 헌송문을 지어 바쳤다. 1916년 11월 1일 이인직이 죽자,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하였다.3. 사후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고, 2006년 12월 6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2] 이인직은 『혈의누』에서 여러 가지로 한국어 표기를 시도하였다. 『국민신보』에 실린 것은 한자 한글 혼용체로, 한자에는 한글로 작게 음독과 훈독이 붙어 있다. 훈독으로 루비를 붙이는 것은 매우 드문 것이다. 단행본으로 간행할 때는 모두 한글로 하였다. 조선의 신소설을 논할 때 이인직을 제외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혈의누』는 신소설의 효시이며, 최초의 조선 근대 문학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3. 1.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고, 2006년 12월 6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2]4. 《혈의 누》와 만국공법
4. 1. 만국공법에 대한 인식
조선의 만국공법 수용은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4] 이인직에게 중요한 것은 배청친일이 아니라 만국공법의 준수여부였던 것이다.[4] 배청친일의 태도는 이에 따르는 부수적 입장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4] 《혈의 누》는 을사조약 이후 팽배한 일본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4] 그것은 을사조약 당시 일본이 내세운 핵심논리인 보호국론을 체화한 일본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4]그러나 이인직은 결코 만국공법이 지닌 근원적인 한계, 즉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라는 측면까지 인식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4] 유럽의 공법체제는 평등주의적 이념이 적용되는 유럽 내부와는 달리, 비서구지역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적용되고 있었던 것인데, 이인직은 이러한 만국공법의 한계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식을 보여주지 못한다.[4] 《혈의 누》가 창작되기 1년 전에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필리핀을 자신이 통치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역사적 사실은 별다른 주목이 되지 않는다.[4]
4. 2. 만국공법의 한계에 대한 인식 부족
조선의 만국공법 수용은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4] 이인직에게 중요한 것은 배청친일이 아니라 만국공법의 준수여부였으며, 배청친일의 태도는 이에 따르는 부수적 입장이었다.[4] 《혈의 누》는 을사조약 이후 팽배한 일본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을사조약 당시 일본이 내세운 보호국론을 체화한 일본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4]그러나 이인직은 만국공법이 지닌 근원적인 한계, 즉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라는 측면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다.[4] 유럽의 공법체제는 유럽 내부에서는 평등주의적 이념이 적용되었지만, 비서구지역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적용되고 있었는데, 이인직은 이러한 만국공법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했다.[4] 《혈의 누》가 창작되기 1년 전,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필리핀 통치를 조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역사적 사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4]
5. 주요 작품
이인직은 소설 작품으로 혈의 누, 은세계 등을 집필하였다. 1906년에는 『소설 단편』, 『혈의 누』, 『귀의 성』을 《만세보》에 게재하였다. 1908년에는 『치악산』과 『은세계』를 각각 유일서관과 동문사에서 출간하였다. 1912년에는 『빈선랑의 일미인』을 《매일신보》에, 『모란봉』을 동양서원에서 출간하였다. 1915년에는 『석사자상』을 《불교진흥회월보》에 게재하였다. 『血の涙』는 파타노 세츠코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어 광문사 고전신역문고에서 2024년에 출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이인직(李人稙)
http://encykorea.aks[...]
2022-08-24
[2]
웹사이트
`친일 반민족행위자' 106인 명단
https://www.hankyung[...]
2006-12-06
[3]
서적
조선병합의 이면
中外新論社
1920-00-00
[4]
논문
이인직의 「혈의 누」에 나타난 만국공법과 외국 인식
https://ih.snu.ac.kr[...]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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