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옹
1. 개요
형옹은 후한 말과 조위 시대의 인물로,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을 거절하고 조조에게 귀순했다. 그는 기주의 종사, 광종장, 행당령 등을 역임하며 농업 장려와 풍속 교화에 힘썼고, 조조의 아들 조식의 가승으로 예법을 엄격하게 지켰다. 이후 조조의 후계자 결정에 영향을 미쳐 태자소부와 태자태부를 거쳐, 조위 건국 후 시중과 상서복야를 지냈다. 사례교위와 태상을 역임했으며, 황초 4년에 사망했다. 그의 증손자인 형교는 서진 시대에 사례교위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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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관료 -
등애
등애는 위나라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농업 관리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전략적 식견으로 중용되어 강유의 북벌을 막고 촉한 정벌에 공헌했으나 종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명예가 회복되었다. -
조위의 관료 -
등양
조상의 심복이었던 등양은 위나라의 관료로 시중, 상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권세를 누렸으나, 탐욕스럽고 부패한 행적과 흥세 전투 참패의 원인이 되어 고평릉 사변 이후 조상 일파로 몰려 멸족되었다. -
223년 사망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223년 사망 -
가후
가후는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전략가로, 여러 군주를 섬기며 뛰어난 책략과 통찰력으로 활약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했고 사후 숙후에 추증되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형옹은 허베이성 슝 현 남쪽에 위치했던 하간군(河間郡) 모현(鄚縣) 출신이다. 젊은 시절 효렴으로 천거되고 사도부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우북평군으로 피난하여 전주와 함께 지냈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후, 형옹은 전주와 함께 조조에게 귀순하였다. 조조에게 귀순한 후 기주 종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덕행과 능력으로 신임을 얻었다. 광종현장, 행당현령 등을 역임하며 백성을 교화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이후 승상부의 문하독을 거쳐 좌풍익까지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하기도 했다.
조조의 아들 조식의 가승(家丞)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엄격한 예법 적용으로 조식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조조의 후계자 문제에서는 장자인 조비를 지지하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표명하였고, 조비가 태자로 책봉된 후에는 태자소부, 태자태부를 역임했다.
220년 조비가 조위를 건국한 후에는 시중, 상서복야에 임명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이후 사례교위, 태상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다 황초 4년(223년)에 사망하였다. 아들 형우(邢友)가 작위를 이었다.
2.1. 후한 말
형옹은 허베이성 슝 현 남쪽에 위치했던 하간군(河間郡) 모현(鄚縣) 출신이다. 젊은 시절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사도부(司徒府)에 벽소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름과 자를 바꾸고 우북평군(현 탕산시 일대)으로 달아나 전주와 함께 5년간 지냈다.
207년경, 군벌 조조가 기주(冀州, 현재 허베이성 대부분과 산둥성 일부)를 평정하자, 형옹은 전주에게 조조를 따를 것을 권하며 말했다. "황건적의 난 이후 20년 넘게 후한은 혼란에 빠져 백성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조공(조조)께서는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하시니, 백성들은 평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전주는 형옹의 뜻을 받아들여 함께 조조에게 귀순하였다. 형옹은 조조를 만나 원소의 아들들과 오환 동맹군에 맞선 백랑산 전투 (현재 랴오닝성 차오양 시 남서쪽 유성(柳城)) 공격에 자원했다. 조조는 그를 기주의 종사(從事)로 임명하였고, 형옹은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후 조조는 형옹을 광종현(廣宗縣, 현재 허베이성 광종현 동남쪽)의 현장(長)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에 섬겼던 태수가 죽자 의리를 지켜 사임하였다. 다른 관리들이 이를 문제 삼자 조조는 "형옹은 옛 상사와의 의리가 두터운 자이다. 그의 충절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문제 삼지 않았다.
다시 사공의 연(掾)으로 벽소되었고, 행당현(行唐縣, 현재 허베이성 순핑현 북서쪽)의 현령(令)에 제수되었다. 임지에서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고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얼마 후 조조에게 다시 불려가 승상부의 문하독(門下督)을 거쳐 좌풍익(左馮翊, 현재 산시성 웨이난시 부근)으로 영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214년경, 조조가 아들들의 속관을 선발할 때 "귀족의 속관은 형옹처럼 예법에 밝은 자여야 한다"고 말하며, 형옹을 넷째 아들인 시인 조식의 가승(家丞), 즉 가신단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형옹은 예법을 엄격히 지키고 농담이나 사적인 비방을 금했기에, 자유분방한 성격의 조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식의 총애를 받던 문인 유정은 이를 우려하여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간언했다. "가승 형옹은 북방의 선비로, 젊어서부터 덕망이 높고 성품이 맑으며, 말이 적고 이치가 깊으니 참으로 고결한 선비입니다. [...] 폐하께서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각별한 대우를 해주시면서 형옹은 멀리하시니, 사람들이 폐하께서 어진 이를 멀리하고 예법을 가벼이 여긴다고 비방할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평판이 조조께 알려지면 저의 죄 또한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 형옹은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가 되었고, 재정을 담당하는 동조연(東曹掾)으로 전임되었다. 당시 조조는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는데, 조식이 총애를 받고 있었고 정이 등 측근들도 조식을 지지했다. 조조가 후계 문제에 대해 묻자, 형옹은 "서자가 적자를 제치고 가문을 잇는 것은 예로부터 경계하던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답하며 장자인 조비를 지지할 것을 암시했다. 조조는 형옹의 뜻을 알아차리고 결국 장남 조비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후 형옹을 태자소부에 임명했다가 태자태부로 승진시켰다.
조비(문제)가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한 후, 형옹은 시중,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이후 사례교위, 태상을 역임하였고, 황초 4년(223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형우(邢友)가 작위를 이었다. 증손 형교는 서진 때 형옹처럼 사례교위를 지냈다.
2.2. 조조 휘하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후(207년경), 형옹은 전주를 설득하여 함께 조조에게 귀순했다. 그는 조조가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혼란한 시대를 끝낼 인물이라 믿었으며, 원소의 아들들과 오환족을 공격하는 백랑산 전투에 길잡이로 자원하기도 했다.
조조는 형옹을 기주의 종사(從事)로 임명했으며, 당시 형옹은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후 광종현(허베이성 광종현 동남쪽)의 현장(長)으로 임명되었으나, 과거 자신이 섬겼던 태수가 사망하자 관직을 사임했다. 일부 관리가 이를 문제 삼았지만, 조조는 형옹의 옛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며 문제 삼지 않았다.
이후 조조는 형옹을 다시 불러 사공의 연(掾)으로 삼았다가, 행당현(허베이성 순핑현 북서쪽)의 현령(令)으로 임명했다. 형옹은 임지에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이후 승상부의 문하독(門下督)을 거쳐 좌풍익(左馮翊; 현재의 산시성 웨이난 부근)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214년경, 조조는 아들들의 속관을 선발하면서 "규율과 예법에 정통한 형옹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형옹을 평원후 조식의 가승(家丞, 가신단의 총책임자)으로 임명했다. 형옹은 매우 엄격하게 예법을 적용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자유분방한 성격의 조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식의 신임을 받던 유정(劉楨)은 형옹을 멀리하는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형옹과 같은 고결한 선비를 존중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조조의 평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며 간언했다.
이후 형옹은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를 거쳐 재정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동조연(東曹掾)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조조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총애하던 조식을 염두에 두고 정이 등 측근들도 조식을 지지하고 있었다. 조조가 후계자 문제에 대해 묻자, 형옹은 "[[적서차별|서자]]가 가문을 잇는 것은 예로부터 경계해 온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십시오!"라고 답하며 장자인 조비를 지지해야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조조는 형옹의 뜻을 알아차렸고, 결국 조비를 태자로 책봉했다. 이후 형옹은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임명되었다가 태자태부(太傅)로 승진했다.
2.3. 위나라 건국 이후
220년 말, 조비는 후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였다. 문제가 즉위한 후, 형옹은 시중(侍中중국어)과 상서복야(尚書僕射중국어)에 임명되었고, 관내후(關內侯zh-hant)에 봉해졌다. 이후 사례교위(司隷校尉)와 태상(太常)을 역임하였다. 황초 4년인 223년에 사망하였으며, 아들 형우(邢友중국어)가 관내후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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