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코시 지로는 1903년 일본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항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항공 기술자이다. 1927년 미쓰비시 중공업에 입사하여 96식 함상 전투기, A5M, A6M 제로센, J2M 라이덴, A7M 렛푸 등 여러 전투기 설계를 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에 협력하여 군용기 개발에 참여했으며, 종전 후에는 YS-11 여객기 설계에 참여하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3년 욱일장 3등급을 수훈했으며, 1982년 사망했다. 그의 삶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바람이 분다》의 모티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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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6월 22일 군마현후지오카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구제 후지오카 중학교와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교 공학부(현 도쿄대학) 항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이 세 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했다.[1] 도쿄제국대학 재학 시절 동기로는 훗날 항공기 설계자가 되는 기무라 히데마사, 도이 타케오 등이 있다. 1927년 대학 졸업 후 미츠비시 내연기제조(현 미츠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 제작소에 입사하여 항공기 설계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2. 2. 미쓰비시 입사와 항공 기술자로서의 경력
1927년 미쓰비시 내연기제조(현 미쓰비시 중공업)에 입사했다. 입사 초기에는 최첨단 항공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1년 반 동안 유럽과 미국에 파견되었다. 호리코시의 초기 설계 중 하나인 미쓰비시 1MF10 실험기는 결함으로 인해 시제품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이 설계에서 얻은 교훈은 이후 성공적인 미쓰비시 A5M(연합군 코드명 "클로드") 개발로 이어져 1936년부터 양산되었다.
1932년, 입사 5년 만에 설계 주임으로 발탁되었고, 같은 해 사사키 스마코(佐々木須磨子)와 결혼하여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9] 그 해, 아직 복엽기가 주류이던 시기에 단엽기인 7시 함상전투기를 설계했으나, 시험 비행 중 시제기 2대가 모두 추락하여 채택되지 못했다.
1934년부터는 9시 단좌전투기의 설계 및 개발을 진행했다. 그는 기체 표면의 공기역학적 평활화를 철저히 하고, 시제 1호기에서는 역갈매기날개(Inverted Gull Wing)를 채용하는 등 혁신적인 설계를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35년, 시제 2호기가 96식 함상전투기로 채택되었다. 96식 함상전투기는 일본 제국 해군 최초의 전금속 단엽 전투기였으며, 일본에서 처음으로 기체 전면에 침두리벳을 사용한 항공기였다.
호리코시 지로는 특히 영식함상전투기(제로센)의 설계 주임으로 유명하다. 1937년, 호리코시와 그의 미쓰비시 팀은 일본 제국 해군으로부터 12호 시제기(쇼와 연호 12년에 해당) 설계를 의뢰받았다. 1940년 7월에 완성된 이 시제기는 해군에 의해 채택되었고, 1940년이 일본력 2600년이었기 때문에 "영식함상전투기" 또는 A6M 제로센, 약칭 "영전"(零戦)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로센 외에도 미쓰비시 J2M 라이덴과 미쓰비시 A7M 렛푸 등 다른 미쓰비시 전투기 설계에도 참여했다.
2. 3. 제로센(영식함상전투기) 설계
호리코시 지로의 초기 설계 경험은 결함이 있던 미쓰비시 1MF10 실험기를 거쳐 성공적인 미쓰비시 A5M 개발로 이어졌으며, 이는 1936년부터 양산되었다.
1937년, 호리코시와 미쓰비시 설계팀은 일본 제국 해군으로부터 12시제 함상전투기(十二試艦上戦闘機) 설계를 의뢰받았다. 이 전투기는 훗날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戦闘機), 통칭 제로센(零戦)으로 명명된다.
설계 과정에서 해군의 지나치게 높은 성능 요구에 직면했다. 호리코시는 회의에서 "격투 성능, 항속력, 속도 중 우선순위를 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겐다 미노루는 격투 성능을 최우선으로 두면서 다른 성능도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시바타 타케오(柴田武雄)는 공격기 호위를 위해 항속력과 속도를 중시하고 격투 성능은 조종사의 기량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기에, 호리코시는 두 가지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12시제 함상전투기는 1940년 7월에 완성되어 일본 제국 해군에 채택되었다. 1940년이 일본 황기(皇紀) 2600년에 해당했기 때문에 '영식(零式)', 즉 A6M 제로센으로 명명되었다.
제로센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방탄 성능 부족에 대해 호리코시는 "전투기 설계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며, (당시 기술 수준과 요구 성능 하에서) 방탄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훗날 제로센에 방탄 장비가 추가된 것을 두고 "미숙한 조종사들이 늘어난 탓에 부적절한 조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호리코시는 제로센 외에도 J2M 라이덴(雷電, 뇌전)과 A7M 렛부(烈風, 열풍) 등 다른 미쓰비시 전투기 설계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 기체의 설계는 후반부에 다른 부서로 이관되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전쟁에 대한 입장
미쓰비시와 일본 군부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향한 일본의 군비 증강에 직접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리코시 지로는 자신이 보기에 헛된 전쟁에 강하게 반대했다. 전쟁 마지막 해 그의 개인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은 1956년에 출판되었고 그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준다.
"1941년 12월 8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쟁에 휘말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의 엄청난 산업력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우리 대다수는 일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상황이 참담해지기 전에 분쟁을 종식시킬 외교적 조치를 정부가 마련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정부의 강력한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파멸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일본을 이 지옥 같은 패배의 솥에 끌어들인 군부 지도부와 눈먼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2]
1944년 12월 7일, 도카이 지방에서 발생한 강력한 1944년 도난카이 지진으로 인해 미쓰비시는 나고야시 오히마치 공장의 항공기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일주일 후, 나고야 다이코초에 있는 미쓰비시 엔진 공장에 대한 B-29의 공습으로 공장에 큰 피해가 발생하고 생산이 심각하게 지연되었다. 새로운 '렛푸(烈風)' 전투기를 논의하기 위해 해군 장교들과 함께 도쿄에서 회의에 참석했던 호리코시는 17일에 나고야로 돌아왔고, 다음 날 미쓰비시 공장에 대한 또 다른 공습을 경험했다. 이 공습으로 회사는 기계와 기술자들을 나고야 동부 교외로 대피시켰다. 호리코시와 기술부는 징발된 학교 건물에 재배치되었다.
지쳐 있던 호리코시는 12월 25일에 흉막염에 걸려 4월 초까지 병상에 누워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도쿄 대공습과 나고야에 대한 미국의 공습이 심해짐에 따라 발생한 참상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 날 밤, B-29 폭격기가 "수만 개의 소이탄"을 투하하여 대부분이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나고야가 대부분 파괴되는 대규모 나고야 공습이 있었다. 3월 12일, 호리코시는 폭격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그의 노모, 아이들, 매형을 포함한 가족 대부분을 다카사키 근처 그의 고향으로 보냈지만, 그의 아내 스마코는 나고야에 남았다.[2]
장기간의 질병으로 매우 쇠약해졌지만, 호리코시는 5월에 미쓰비시로 복귀했다. 그는 나가노현마쓰모토시에 위치한 회사 제1 공장에 배치되었다. 마쓰모토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는 나고야에 대한 전쟁의 영향을 실제로 목격했다.
"처음으로 나고야에 대한 방화 공습의 영향을 실제로 보았다. 도시는 황폐해졌고, 불에 타고 끔찍하게 황량했다. 제 공장은 폭탄에 의해 파괴되고 분산반에 의해 찢겨진 유령 같은 강철 골격 잔해였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기 어렵다. 나는 곧 건강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었다. 황폐해진 도시와 파괴된 공장의 인상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2]
여전히 매우 약했던 호리코시는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합류하여 7월 한 달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의 일기에는 연합군이 인근 다카사키와 마에바시를 폭격할 때 여전히 먼 곳에서 폭발음을 들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 마지막 몇 달 동안 호리코시는 일본의 혼란과 쇠퇴를 기록했다. 마쓰모토가 공습을 피했기 때문에 7월 22일에 마쓰모토 공장으로 복귀했지만, 비상 대피로 직원과 작업장이 전국으로 흩어진 결과, 노동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운영이 혼란에 빠진 것을 발견했다. 미쓰비시의 남은 직원 대부분은 8월 초에 모든 작업을 포기하고 일본의 패배와 항복을 준비했는데, 이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6일 후인 8월 15일에 이루어졌다.
3. 종전 이후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쓰비시 중공업의 분할로 설립된 회사에서 근무하며 전후 일본 최초의 국산 여객기인 YS-11 설계에 참여했다.[10] 이후 대학에서 강사 및 교수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 활동을 이어갔으며,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또한, 주요 항공기 사고 조사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고 원인 규명에도 기여했다.
3. 1. 민간 항공기 개발 및 교육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쓰비시 중공업이 분할됨에 따라 설립된 중일본중공업(이후 신미쓰비시 중공업)에서 근무했다.[10] 이 시기 기무라 히데마사 등과 함께 전후 일본 최초의 국산 여객기인 YS-11의 설계에 참여했다.[10] 신미쓰비시 중공업에서는 고문(참여)을 역임했다.[10]
신미쓰비시 중공업을 퇴사한 후에는 교육 및 연구 기관에서 활동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도쿄대학 항공우주연구소에서 강사로 일했으며, 1965년에는 '사람이 조종하는 비행기의 비행성 개선에 관한 연구: 승강타 조종계통의 강성저하방식'이라는 논문으로 도쿄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65년부터 1969년까지는 방위대학교 교수를, 1972년부터 1973년까지는 일본대학 생산공학부 교수를 지냈다.
또한, 항공기 사고 조사에도 참여하여 1966년에 발생한 영국항공 911편 추락 사고와 1971년에 발생한 반다이호 추락사고 당시 사고 조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고 원인 규명에 기여했다.
3. 2. 사망
호리코시 지로(Horikoshi Jirō)는 1982년 1월 11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의 부고는 전 세계 여러 주요 신문에 보도되었다.[5] 그는 사후 종4위에 추서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자녀를 남겼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항공기 설계나 공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지는 않았다.[3]
4. 가족 관계
아내 사사키 스마코와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인 사사키 켄이치로(佐々木謙一郎일본어)는 전매국 장관, 남만주철도 부총재를 역임했다.
오쿠미야 마사타케 공저, 『영전』(零戦일본어) 신장개정판, 아사히 소노라마, 1975년, 이후 PHP 문고, 각켄 M문고에서도 출간.
6. 2. 관련 작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13년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이 분다는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일본어 더빙판에서는 안노 히데아키가, 영어 더빙판에서는 조셉 고든 레빗이 목소리를 연기했다.[6] 이 영화는 호리코시의 항공기 디자인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허구이다. 예를 들어 영화와 달리 실제 호리코시에게는 여동생이 아닌 형이 있었다.[7] 이러한 추가적인 줄거리 요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호리 다쓰오의 1937년 소설 바람이 분다에서 각색한 것이다.[8]
[1]
서적
Technology and Industrial Development in Japan
Clarendon Press
[2]
서적
Zero! The Story of Japan's Air War in the Pacific
EP Dutton & Co
[3]
뉴스
Plane Designer Recalls Days of Zero's Success
1972-12-14
[4]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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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01-12
[5]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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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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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hoo! Vo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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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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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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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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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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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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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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