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다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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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다 미노루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 정치가이다. 그는 1904년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항공주병론을 주장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제1항공함대 참모로서 작전을 입안했고, 태평양 전쟁 초기 인도양 작전,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활약했다. 1944년에는 제343해군항공대를 창설하여 지휘했다. 전후에는 항공자위대에서 항공막료장을 역임하며 F-104 스타파이터 도입을 주도했다. 1962년에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어 24년간 재임했으며,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겐다는 1989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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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다 미노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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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미노루 겐다 |
일본어 이름 | 源田 実 |
출생일 | 1904년 8월 16일 |
사망일 | 1989년 8월 15일 |
출생지 | 가케, 야마가타 군, 히로시마 현, 일본 |
사망지 | 마쓰야마, 에히메 현,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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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복무 | |
소속 | 일본 항공자위대 |
복무 기간 | 1924–1945 (일본 제국 해군) 1954–1962 (일본 항공자위대) |
최종 계급 | [[파일:Imperial Japan-Navy-OF-5-collar.svg|30px]] 해군 대좌 (일본 제국 해군) [[파일:JASDF General insignia (b).svg|30px]] 공군 대장 (일본 항공자위대) |
지휘 | 일본 제국 해군 총참모부 즈이카쿠 수석 항공 장교 제1항공함대 참모 343 항공대 사령관 항공 자위대 참모총장 |
주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공격 계획 미드웨이 해전 |
수상 내역 | |
훈장 | 미국 레지옹 오브 메리트 사령관 (1962년) 서보장 2등급 (1974년) 욱일장 2등급 (1981년) |
정치 활동 | |
직위 | 일본 참의원 의원 |
임기 시작 | 1962년 |
임기 종료 | 1986년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기타 | |
별명 | 항공 참모 아저씨 |
2. 생애
겐다 미노루는 1904년 히로시마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1921년 히로시마 제1중학을 졸업한 후, 파일럿을 꿈꾸며 해군병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졸업하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비행 훈련을 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1]
1930년 런던 군축 회의로 주력 함선 건조가 제한되자, 대함거포주의에 반대하며 항공기 중심의 전력을 주장했다. 일본 각지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여 '겐다 서커스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7]
1938년 11월 주 영국대사관 무관보좌관으로 파견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항공전을 관찰했다. 1940년 10월 귀국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인정받아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 전쟁 초기의 주요 작전에서 항공 참모로 활약했다.[12]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제343해군항공대를 편성하여 시덴카이 전투기를 집중 배치하고 정예 부대를 육성하여 제공권 확보에 힘썼다. 겐다는 부하들로부터 아버지라 불리며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210]
1945년 종전 후, 1954년 방위청에 들어가 항공자위대 창설에 기여하고, 항공막료장을 역임했다. 1962년부터는 자민당 소속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국방, 헌법 문제 등에 관여했다.
2. 1. 초기 생애
겐다 미노루는 1904년 8월 16일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가케정(현 야마가타군 아키오타정)에서 주조업과 농업을 경영하는 겐다 하루시치의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0][21] 운동은 서툴렀고 키는 작았지만, 체격은 건장했다. 가케정립 가케소학교[21], 구제 히로시마 이치중(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21]을 거쳐[21], 1921년 해군병학교에 해병 52기로 입학했다.[21] 1924년 7월 24일,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후보생이 되었다.[23] 1928년부터 1929년까지 11개월 동안 비행 훈련을 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1]1927년 2월, 해군포술학교 보통과 학생(소위) 시절에 항공 관련 강습, 신체 검사, 조종 훈련을 받았다.[24] 이후 포술학교 보통과, 해군수뢰학교 보통과를 졸업하고 장갑순양함 「이즈모」에 승선했다. 1927년 12월,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 1929년 11월 제19기 비행학생을 수료하였다.
1930년 런던 군축 회의로 주력 함선의 군축이 이루어지자, 겐다는 대함거포주의에 반대하며 항공주병론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 각지에서 열린 행사에서 비행기를 직접 몰고 묘기를 선보여 '겐다 서커스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 2. 전투기 조종사 시절
겐다 미노루는 1921년 히로시마 제1중학을 졸업하고 파일럿을 동경하여 해군병학교에 입학했다. 1928년 11월 30일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에 입대, 1929년 11월 제19기 비행학생을 수료하였다.[25] 정점 착륙을 보고 배워 시도했지만 실패한 후 1년 정도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한다.[26] 1929년 12월, 제19기 비행학생을 전투기 조종사로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은사 은시계를 받았다.[27] 같은 해 12월, 요코스카 해군항공대 전투기 분대에 배속되었다.[28]1930년 런던 군축 회의로 주력 함선의 군축이 이루어지자, 대함거포주의에 반대하며 항공주병론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 각지에서 열린 행사에서 비행기를 직접 몰고 묘기를 부려 '겐다 서커스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7]
1931년 겐다는 항공모함에 배치되었다.[29] 그는 해군에서 명성이 높았고, 1932년에는 요코스카에서 곡예 비행 시범 팀을 결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복엽기를 이용한 곡예 비행 시범을 선보였다. "겐다의 비행 서커스"로 알려진 이 팀은 겐다, 고바야시 요시타, 오카무라 모토하루로 구성되었으며, 나카지마 A2N 90식 전투기를 사용했다.[2] 이는 해군 항공대 홍보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는 중일 전쟁 당시 제2연합항공대에서 전투 경험을 쌓았고, 1937년 가을부터 1938년까지 요코스카 항공대의 고참 비행 교관을 역임했다.[3]
1934년 11월, 요코스카 항공대 분대장이 된다. 전투기의 공전 성능 심사, 연구에 임하여 해군 전투기대의 기본 패턴 형성을 실시했다.[35] 이 무렵 이미 겐다는 항공주병론을 주창하여 대함거포주의를 비판하며, 전함 1척의 건조비로 천 기의 비행기가 제조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었다.[36]
오쿠미야 마사타케에 따르면 겐다 서커스의 특수 편대 비행에는 항공자위대에서도 하지 않는 연출도 있어서, 열기가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는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38]
겐다는 전임자의 급강하폭격 연구를 이어받아 전투기를 이용한 급강하폭격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겐다는 전투기대는 주로 방어적인 작전에 사용되고 있지만,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적의 항공모함을 선제 제압하기 위해 급강하폭격기를 잘 활용해야 함은 물론, 항속거리 연장, 조종성의 경쾌함, 전투기로서의 활용 등을 고려하여, 1933년부터 1935년에 걸쳐 "단좌 급강하폭격기"의 시제작, 채용을 계속 주장했지만, 찬성을 얻지 못했다. 이 비행기는 제공권 획득을 위해 적 항공모함의 선제 공습을 주 임무로 하지만, 이 폭격이 끝나면 단좌 전투기로서 활용할 수 있는 구상이었다.[39]
같은 해 6월, 미쓰비시중공의 단엽기 9시 단좌 전투기의 시제 2호기 테스트를 실시한 겐다는 상승력·속도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도, 사격 성능·착륙 성능은 특히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조타 효과도 문제시하여 격투 성능에도 의문을 느꼈다. 그 후 채용 회의에서 겐다는 단엽기의 선회 성능의 나쁨을 지적하여 복엽기의 95식 함상전투기 쪽이 우수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어, 공전의 검증을 하지 않고 95식 함전을 폐지하고 1종류로 압축하는 것에 반대했다. 요코스카 항공대 교두 오니시 다키지로도 그것을 지지하여 "중앙 당국은 단순히 책상 위 공론에 의지하지 않고, 더욱 실제로 몸으로 날아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하여 방침을 정해주기를 바란다"고 의견을 냈다. 다음 날 모의 공전이 실시되어, 판정을 맡은 겐다 등은 9시 단전이 격투 성능에도 우수하다고 판단했다. 겐다는 오니시와 기술자에게 자신의 불명을 사과하고, 그 후에는 열렬한 9시 단전의 지지자가 되었다.[44]
오니시와는 1934년 말부터 1년 정도 동료였지만, 겐다에게는 수년에 필적하는 의의를 지니고 전술 사상, 인생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45] 겐다는 "옳은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무엇이 나라를 위해 되는가를 생각해서 무절제하다고 욕을 먹더라도 개의치 말라"는 오니시로부터 받은 말은 인생에서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말은 없었다고 한다.[46]
겐다는 전투기 조종사의 길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과 학생의 시험을 피하고 있었지만, 오니시로부터 "평소 주장하는 항공 정책을 실현하려면 그에 걸맞은 기반이 필요하다. 또한 겐다에게는 고효율의 군비를 만들어주었으면 한다"고 해군대학교 시험을 설득받아 시험을 치르고, 1935년 10월 31일에 해군대학교 35기 甲種 학생이 되었다.[49] 여기서 항공 참모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은 해 4월, "해군 군비의 중핵을 기지 항공대와 기동부대로 하여, 잠수함 전력으로 지원하고, 순양함·구축함은 최소한 보유하고, 전함은 고철 또는 계류시켜 부두의 대용으로 한다"는 작전 과제 논문을 제출한다.[50] 당시에는 대함거포주의가 주류였기 때문에, 겐다는 미쳤다고 소문이 났다. 겐다에 따르면, 연습에서도 항공 전력은 전함에 공격 등의 면에서 우수했던 점, 항공주병 부대에 대해 전함은 목표로 하는 것을 잃는 점, 비행기가 날씨에 약하다는 지적도 그 정도의 날씨 하에서는 전함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근거였다고 한다.[51] 1936년 7월 제3차 해군군비보충계획에서 야마토급 전함 2척(야마토, 무사시)의 건조를 엄하게 비판하고[52], 겐다 등 14명의 비행 장교로 항공모함 계획으로 변경을 계몽하는 항공연구회를 설립했지만, 해군 당국으로부터 사적인 조직으로 해산당했다.[53]
1937년 7월, 겐다는 해군대학교를 은사 성적으로 졸업했다(차석).[21][56] 중일전쟁 (제2차 상하이사변)에 제2연합항공대 사령부 참모로 참가했다. 겐다는 구축함을 타고 칭다오로 향하여 아리마 마사후미(有馬正文) 대좌와 함께 현지 조사를 실시했다. 겐다의 첫 전투였으며 적의 포화 아래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57]

같은 해 9월, 난징 공습 작전에서 겐다는 전투기를 이용한 광역 제공을 담당하는 "제공대"를 고안했다. 전투기를 중심으로 운용하는 전술 사상으로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전투기를 행동 기준으로 삼아 제공대가 적 전투기를 탐색・격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공습은 기습을 하지 않고 적의 대공 방어 포화 사거리 밖에서 일격으로 적 전투기를 유인하여 매복해 둔 전투기대로 격멸하는 것이다. 종래의 전투기 임무인 호위기에는 수상정찰기를 배치했다.[58] 9월 19일 전투에서는 두 차례의 공습・공중전에서 일본군 손실 4기, 중국군 격추 40기를 기록하여 중국 공군 전투기대를 괴멸시켰다.[59] 19일부터 25일까지 11회 공습을 실시하여 이 지역의 적 전투기 대부분을 격멸했다. 최대 전과는 제공권 확보였다.[60]
중국 전선에서 귀환한 겐다는 1938년 1월 17일, 12시 함전 계획 요구의 관민 합동 연구회에서 비행기대의 집단 사용, 원거리 진출 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경험으로부터 실전에서의 96식 함전과 95식 함전의 활약을 설명하여 격투 성능과 항속 거리의 필요성을 호소했다.[65]
1938년 11월 말, 주 영국대사관 무관보좌관으로 파견되어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항공전을 직접 목격했다. 1940년 8월에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의 영국 본토 항공전(영독 항공전)을 영국 측에서 경험했다. 영국 공군의 훈련 관찰, 유럽 대륙에서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공군의 전투 기록 분석을 실시했다.[69]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전투기,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의 성능, 탑승원의 능력을 고려하여 전투기대의 실력에 관하여 독일은 영국보다 열등하고 영국도 일본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하고 있다.[71]
같은 해 9월 초 겐다는 영국을 떠나 미국 경유로 10월 귀국했다.[72] 1940년 11월, 중좌로 승진하여 제1항공전대 참모(항공모함「가가」 승조)가 되었다.
2. 3. 중일 전쟁
1937년 가을부터 1938년까지 요코스카 항공대의 고참 비행 교관을 역임한 겐다는 중일 전쟁 당시 제2연합항공대에서 전투 경험을 쌓았다.[3]2. 4.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11월 말, 겐다는 주 영국대사관 무관보좌관으로 파견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항공전을 직접 목격하고 1940년 10월 귀국 후 11월에 중좌로 진급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도 인정받은 겐다는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인도양 작전,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항공참모로서 활약했다.[12]1940년 여름, 36세의 겐다는 일본 해군성에 의해 해외로 파견되어 영국 공방전 중 독일의 공중 공세와 영국의 방어 조치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보고서를 얻는 군사 참관원이었다. 그가 평가한 영국 공군(RAF)의 호커 허리케인 Mk I 및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 I 전투기는 독일 메서슈미트 Bf 109E "에밀"에 맞서 싸웠으며, 이후 일본 미쓰비시 A6M 제로 21형이 이러한 서유럽 항공기를 쉽게 능가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18척의 미국 군함이 침몰하거나 손상되었고 180척이 넘는 미국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주요 일본 함대는 함선 손실이 없었고 29대의 항공기가 손실되었으며(1차 공격에서 9대, 2차 공격에서 20대), 일본은 이 손실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기습 공격은 결국 일본에게 재앙을 초래했다.[11]
1942년 4월, 인도양 작전에서의 실론 해전에서, 제1항공함대는 5일 콜롬보 공습 중에 나타난 순양함 2척을 격침시켰고,[95] 9일 트린코말리 공습에서는 주변에 항공모함이 있고 새로운 적의 출현은 확실하다고 판단하여 제1항공함대는, 비행대의 약 절반을 보류하도록 계획을 변경하여, 나타난 항공모함 "허미스"를 격침시켰다.[96]
1942년 5월, 연합함대 사령부가 기획한 미드웨이 해전 작전이 제1항공함대(제1항함)에 명령되었다. 게다 미노루는 해상 작전에 관심을 가지고 항모함대를 유인하여 소탕하는 안에 찬성했다. 하와이 공략 계획의 한 걸음으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102]
1944년 말, 겐다 미노루는 제공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 즉 전투기대가 패배하고 있는 것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원인이라고 깊이 생각했다. 그는 제공권을 획득하여 미국의 공세를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343해군항공대(이하 343공)를 제안하여 승인을 받았다. 1944년 12월 25일에 343공이 편성되자, 1945년 1월 15일, 겐다는 스스로 343공 사령관에 취임하여 1월 19일에 아이치현 마쓰야마 기지에 부임하였다.[194]
343공은 전투기 시덴카이를 집중 배치하여, 편대 공전, 정보, 통신을 중시한 겐다의 구상 아래 훈련된 정예 부대였다.
겐다는 지휘소, 숙소, 정비 보급 기지를 분산하고, 분산 정비 체제를 확립하고, 지휘소 통신망·정보 수집 기능을 충실히 했다.[202] 레이다, 감시소, 상급 사령부를 연결한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203]
겐다는 전통이나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부하들과 접하는 사령관이었다. 부하들로부터 아버지라고 불리며 존경받았고, 겐다의 사후에도 그것은 계속되었다.[210]
2월 초순, 겐다는 대원들에게 전사했을 때 조금이라도 유품을 남길 수 있도록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유골함에 남겨두도록 명령하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219] 2월 중순, 겐다는 준사관 이상에게 맹세하여 제공권을 획득하고 전황을 만회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를 보이고 사상 통일을 실시했다.[220]
새로운 기준을 위해, 반년은 실전에 참가하지 않고 훈련할 예정이었지만, 3월 19일에 미 기동 부대가 습격하여 격퇴에 참가한다. 겐다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 정도로 충분히 준비된 상태로 전투를 치른 예는 없다. 목표는 적 전투기이다. 폭격기는 신경 쓰지 마라"고 훈시했다.[221]
4월, 겐다는 특공을 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제5항공함대의 명령에 따라, 343공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특공의 제공권 확보에 참가했다.[225]
5월, 헌병과 다툼을 일으킨 코다카 토리카네 등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기 위해 사세보 진수부의 참모로부터 343공에 대원의 인도를 요구받았지만, 겐다는 "지금 큐슈의 제공권은 어느 항공대가 장악하고 있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제343공이다. 그 항공대의 탑승원을 군법회의에 데려가면 나중에 누가 큐슈의 제공권을 지킬 것인가. 꼭 필요하다면 뼈가 되어서 돌려주겠다. 돌아가라"라고 쫓아냈고, 대원들에게는 "사기 고양을 위해, 크게 활약해라. 책임은 전적으로 사령관이 지겠다"라고 격려했다.[228]
8월, 해군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원폭 투하를 저지하기 위해 전투기대에, B-29가 단기로 침입한 경우에는 체공(體當)으로 즉시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32] 343공 사령관인 겐다는 제3의 원폭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고, "우리 검 부대도 이미 조직적인 공격에 대한 기능이 부족해졌다. 만약 이번에 신형 폭탄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내가 체공(특공)을 해서라도 저지해 보이겠다"라고 말했다.[233]
8월 15일, 오무라 기지에서 종전을 맞이한다. 겐다는 항복에 놀랐고,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2. 4. 1. 진주만 공격
1941년 2월, 겐다 미노루는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로부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편지를 보여주며 진주만에서의 어뢰 공격 가능성을 질문받았다. 겐다는 "어뢰는 전문이 아니므로 잘 모르겠지만 연구하면 어렵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항공모함에 집중한다면 급강하 폭격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접근 행동에 있다"고 답했다.[76]오니시로부터 작전 계획안을 긴급히 만들어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아 2주 정도 만에 완성하여 제출했다.[77] 겐다는 초안 정도였다고 한다.[79] 거기에 오니시가 수정을 하여 계획을 만들고, 3월 초 야마모토에게 제출되었다.[80]
4월 10일, 나구모 주이치를 사령장관, 쿠사카 류노스케를 참모장으로 하는 제1항공함대가 편성되었고, 겐다는 함대 항공 참모에 임명되었다. 겐다의 희망에 따라 뛰어난 지휘력과 전술적 안목을 가지고 겐다와 통하는 동기생으로 정찰석에 앉아 작전 지휘에 집중할 수 있는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공중 지휘관으로 발탁되었고, 어뢰 전문가로서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도 영입했다.[81]
나구모는 항공에 관해서는 아마추어였고, 쿠사카도 겐다가 계획을 세우고 후치다가 실행하는 좋은 협력 체제라고 두 사람을 평가하여, 그들의 제안을 가능한 한 채택하여 지켜보았기 때문에[82], 겐다의 의견은 그대로 통하기 쉬웠고, 제1항공함대를 겐다 함대라고 부르는 소리도 있었다.[83]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진형에 대해 겐다는 뉴스 영화에서 미국의 항공모함의 단종진을 보고 착안하여, 해상에서의 항공대 공중 집합과 은밀 행동을 양립시키기 위해 집중 배치를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채택되었다.[85] 상공 직접 지원의 전투기와 대공 포화의 집중에 의한 방어에도 겐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86] 또한, 종래에는 소속 함선에서 항공 부대의 훈련과 지휘를 했지만, 겐다는 그것을 모두 실전에서의 기종별, 공중 지휘 체계로 변경했다.[87]
겐다와 선임 참모인 오이시 타모쓰 대좌에게 진주만 기습 작전 실행 계획의 완성이 명령되었다.[88] 최초의 공격 계획은 공격대를 발진시키면서 항공모함은 후퇴하여 이탈하는 것이었지만, 겐다는 "공격대가 결사의 공격을 하는데 모함이 도망치는 자세라면 사기에도 관계된다"고 반대하여, 접근하면서 공격대를 발진시키고, 귀환기를 가능한 한 회수하는 계획으로 변경했다.[89] 11월 하순, 나구모 기동부대 각 함선은 에토로후섬 단칸만에 집결한다.[90] 겐다는 임무 달성에만 머리가 가득 차서 이번에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각오했다고 한다.[91]
12월 8일, 진주만 공격에 성공하여 전함 4척 격침, 전함 2척 대파 등 미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공격 전날까지 겐다는 반복 공격을 주장했지만, 나구모에게 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공격 후 적극적인 진언은 하지 않았다.[92] 공격 후, 겐다는 며칠 동안 그 근처에 머물면서 남은 적 항공모함을 격멸하는 계획을 나구모에게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3] 종전 후 겐다는 "진주만 공격은 나의 해군 장교 생활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94]
2. 4. 2. 태평양 전쟁 초기
1938년 11월 말, 겐다는 주 영국대사관 무관보좌관으로 파견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항공전을 직접 목격하고 1940년 10월 귀국 후 11월에 중좌로 진급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도 인정받은 겐다는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인도양 작전,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항공참모로서 활약했다.[12]1940년 여름, 36세의 겐다는 일본 해군성에 의해 해외로 파견되어 영국 공방전 중 독일의 공중 공세와 영국의 방어 조치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보고서를 얻는 군사 참관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평가한 영국 공군(RAF), 호커 허리케인 Mk I 및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 I 전투기는 독일 메서슈미트 Bf 109E "에밀"에 맞서 싸웠으며, 이후 일본 미쓰비시 A6M 제로 21형이 이러한 서유럽 항공기를 쉽게 능가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신중하게 기록된 세부 사항은 런던에서의 짧은 순회 기간 동안 비밀리에 문서화되었으며, 겐다는 해군성 연구를 위해 귀국 여행 중에 직접 가지고 갔다. 그의 공식 여행은 군사 작전을 관찰하고 기록하기 위해 전선을 방문하는 공식 무관 방문을 승인하는 영국-일본 해군 협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겐다의 서유럽 여행은 일본 전략 해군 연구와 훈련을 위한 추가적인 자극을 제공하여 약점을 발견하고 나중에 미국에 대항하여 사용된 전술을 공식화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제1항공전대에 배치되어 1941년 2월 초 야마모토와 만났고, 그때 야마모토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기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겐다는 그의 아이디어에 호감을 가졌다.[6] 겐다는 이전에 1934년에 진주만 공격을 고려했었고 그때 오니시 타키지로와 그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었다. 겐다는 야마모토에게 "비밀이 핵심이고 기습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7] 겐다는 그 임무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느꼈고[8] 계획의 세부 사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겐다는 성공적인 공습을 위해 6척의 항공모함을 사용하는 3차례의 공격을 선호했다.[9] 겐다는 새로운 전술인 천수심(淺水) 어뢰 사용, 전술 항공기의 수평 폭격의 효과적인 사용, 그리고 여러 항공모함을 동시에 조정하는 훈련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그는 일본 해군 지휘관들이 일본 해군 사관학교 동기인 후치다 미쓰오를 공습 지휘관으로 지명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18척의 미국 군함이 침몰하거나 손상되었고 180척이 넘는 미국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주요 일본 함대는 함선 손실이 없었고 29대의 항공기가 손실되었으며(1차 공격에서 9대, 2차 공격에서 20대), 일본은 이 손실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기습 공격은 결국 일본에게 재앙을 초래했다.[11] 공격 후 4개월 동안 일본 제국 항공모함 부대는 태평양과 인도양 전역에 걸쳐 활동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군과 기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겐다와 야마모토는 3척의 미국 항공모함이 진주만에 없었던 것(1941년 일요일 처음으로 그랬다)에 매우 실망했다. 나중에 불도저 작전이 태평양 전쟁의 이 단계를 끝냈고 일본은 처음으로 폭격을 받았다.
1941년 2월, 겐다 미노루는 오니시 다키지로로부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편지를 보여주며 진주만에서의 어뢰 공격 가능성을 질문받았다. 겐다는 "어뢰는 전문이 아니므로 잘 모르겠지만 연구하면 어렵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항공모함에 집중한다면 급강하 폭격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접근 행동에 있다"고 답했다.[76]
1942년 4월, 인도양 작전에서의 실론 해전에서, 제1항공함대는 5일 콜롬보 공습 중에 나타난 순양함 2척을 격침시켰고,[95] 9일 트린코말리 공습에서는 주변에 항공모함이 있고 새로운 적의 출현은 확실하다고 판단한 제1항공함대는, 비행대의 약 절반을 보류하도록 계획을 변경하여, 나타난 항공모함 "허미스"를 격침시켰다.[96]
1942년 5월, 연합함대 사령부가 기획한 미드웨이 해전 작전이 제1항공함대(제1항함)에 명령되었다. 게다 미노루는 해상 작전에 관심을 가지고 항모함대를 유인하여 소탕하는 안에 찬성했다. 하와이 공략 계획의 한 걸음으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102]

2. 4. 3. 제343 해군 항공대
1944년 말, 겐다 미노루는 제공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 즉 전투기대가 패배하고 있는 것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원인이라고 깊이 생각했다. 그는 제공권을 획득하여 미국의 공세를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343해군항공대(이하 343공)를 제안하여 승인을 받았다. 1944년 12월 25일에 343공이 편성되자, 1945년 1월 15일, 겐다는 스스로 343공 사령관에 취임하여 1월 19일에 아이치현 마쓰야마 기지에 부임하였다.[194]343공은 전투기 시덴카이를 집중 배치하여, 편대 공전, 정보, 통신을 중시한 겐다의 구상 아래 훈련된 정예 부대였다. 장비, 인재에 대한 독점적인 분위기가 있어 일부로부터 비난도 있었지만, 겐다의 열정과 실행력의 결과였다.[197] 지금까지 참모를 지내 온 겐다는 "작지만 처음으로 결정권을 가진 것에 큰 의미를 느꼈다",[198] "자신도 전투기 조종사였기 때문에 저승길의 기념으로 항공대에서 활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말했다.[199]
겐다는 편대 전투를 중시하여, 4기 1구대, 2기 1조는 난전에서도 흩어지지 않도록 지도했다. B-29에 대해서도, 1개 편대에 3개 비행대를 집중시켜 분산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부상하여 편대에서 뒤처진 적은 2~3기에 맡기고, 다른 기체는 계속해서 무손상의 적을 공격하도록 지도했다.[200] 또한, 대편대끼리의 공전에서는 육안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어렵고, 소대처럼 가볍고 민첩한 움직임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공중 지휘관이 전투 계획을 머릿속에 두고, 초기 단계에서 우위를 점하여 요격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직전의 적정을 통보하는 정찰 제4비행대를 추가했다.[201]
겐다는 지휘소, 숙소, 정비 보급 기지를 분산 설영하고, 분산 정비 체제를 확립하고, 지휘소 통신망·정보 수집 기능을 충실히 하고, 특히 항공대 수준을 넘어선 지휘 통신망을 정비했다.[202] 레이다, 감시소, 상급 사령부를 연결한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203]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전투할 수 있도록 미 기동 부대의 정보를 보내는 연락 장교를 육해군에 파견했다.[204] 겐다는 불량 상태였던 무선 전화의 실용화에 주력하여, 343공 통신과의 노력과 횡공의 기술 지원으로 10배의 개선에 성공했다.[205] 야마다 요이치는 "이때만큼 일본 해군에서 지대공, 공대공 무선 전화가 활용되어 실적을 거둔 예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206]
겐다는 스스로 공중 지휘를 할 생각이었지만, 지상에서 더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만두었고,[207] 신뢰할 수 있는 공중 지휘관에게 세부적인 전투 지휘를 일임했다.[208] 폭격의 수와 성질로부터 방해가 불가능한, 맞서 싸워야 할 적 편대에 대해서도 적을 발견하면 반드시 싸운다는 원칙을 적용했지만, 정면으로 맞서 싸워도 희생만 나올 뿐이라는 점에서 무턱대고 싸우게 하지 않고, 공습에서 돌아오는 길에 연료를 소비하고 방심하고 있는 적의 후미를 잡아 공격했다. 격추당한다는 심리적 효과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격추로 인한 일본군의 사기 향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출격시켰다.[209]
겐다는 전통이나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부하들과 접하는 사령관이었다. 부하들로부터 아버지라고 불리며 존경받았고, 겐다의 사후에도 그것은 계속되었다.[210] 반골적인 스가노 나오시도 겐다에게는 굴복했고, 고지마 코우조(스가노의 중학교·해병 시절 동기)는 "규칙에 엄격한 상관이었다면, 스가노는 질서를 어지르는 불손한 자로 여겨졌을 것이고, 그 자신도 낙담했을 것이다. 겐다 씨는 그런 부분을 간파하고, 어쨌든 전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사소한 일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스가노도 그런 겐다 씨의 총애에 보답하여, 전투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했다"고 말했다.[211] 겐다는 스가노가 무귀환되었을 때, "자신의 동생을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행방불명으로 종전을 맞이한 스가노에 대해, 겐다는 종전 후 9월 20일에 해군대신에게 2계급 특진을 건의하여 승인받았다.[212] 시가 요시오 비행장에 따르면, 겐다 사령관은 부채의 중심축처럼 부대를 다잡았고, 웃는 모습은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다고 한다.[213] 야마다 요이치 대위는 "적을 발견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 겐다 씨의 주장이었던 것 같다. 전력을 낭비하는 듯한 작전 지도는 한 번도 없었다. 무선 전화를 이용한 지상에서의 작전 지도는 신기에 가까웠고, 공중 지휘관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사령관은 부하에 대해서는, 지도는 해도 꾸중하는 일은 없었다. 사령관의 통솔은 전 대원에게 미쳤고, 겐다 씨에 대한 존경은 오늘(사후)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 말기, 전황이 어려운 때, 343공이 그만큼의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시덴카이가 뛰어났다는 것뿐만 아니라, 겐다 사령관의 비할 데 없는 작전 능력과 통솔력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고 말했다.[206] 혼다 미노루 소위는 겐다에 대해 "때때로 정신주의도 도입되었지만, 사고방식은 항상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다"고 말했다.[214]
스가노 등 대원이 소장이나 사관 참모와 문제를 일으켜 돌아온 다음 날, 겐다가 그 소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작아진 대원들에게 "어제는 기운이 좋았다고 하더라"고 말한 것만으로 그 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215] 또한, 미야자키 이사무는 스가노에게 데려가 무단 외출을 해서 온천에 갔을 때, 온천에서 겐다와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무단 외출은 명백한 위반 행위였지만, 작아진 두 사람에게 겐다는 "온천은 좋지, 조심해서 돌아가라"라고 말하고 꾸중하지 않았고, 스가노는 "역시 아버지다"라고 감탄한 모습이었다고 한다.[216] 오랜 공백이 있었던 겐다가 시덴카이에 처음 탑승했을 때, 깃발의 바람을 계산한 착륙을 하고 "상당한 여유가 없으면 할 수 없다"고 대원들은 감탄했다.[217] 스기타키 타쿠미 상위조에 따르면, 겐다로부터 군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하사관의 직접 보고를 허락받고,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 준 데다, 위로의 말까지 해주었다고 한다.[218]
2월 초순, 겐다는 대원들에게 전사했을 때 조금이라도 유품을 남길 수 있도록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유골함에 남겨두도록 명령하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219] 2월 중순, 겐다는 준사관 이상에게 맹세하여 제공권을 획득하고 전황을 만회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를 보이고 사상 통일을 실시했다.[220]
새로운 기준을 위해, 반년은 실전에 참가하지 않고 훈련할 예정이었지만, 3월 19일에 미 기동 부대가 습격하여 격퇴에 참가한다. 겐다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 정도로 충분히 준비된 상태로 전투를 치른 예는 없다. 목표는 적 전투기이다. 폭격기는 신경 쓰지 마라"고 훈시했다.[221] 300기가 넘는 미 함상기를 격퇴하고, 그중 57기의 격추를 보고했고, 이에 대해 아군의 무귀환은 13기라는 전과를 거두어 첫 출전을 장식했다.[222] 연합 함대 사령장관 토요다 소무로부터 3월 24일자로 "기략에 풍부한 전투 지도와 예리한 전투 실시로 즉시 적기 60기 이상을 격추하여 전군의 사기를 고양시킨 것은 그 공적이 크다"는 감사장이 수여되었다.[224]
4월, 겐다는 특공을 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제5항공함대의 명령에 따라, 343공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특공의 제공권 확보에 참가했다.[225] 지원기가 아니라, 제공권을 잡기 위해 돌격 개척하여 경로를 확보하는 전법을 취했다.[226]
제5항공함대로부터 343공에 특공을 내도록 제안이 왔을 때, 시가 요시오는 "제가 선두에서 가겠습니다. 병학교 출신은 모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예비 사관은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겐다 사령관은 마지막에 가십시오. 단 조건으로, 명령해 온 상급 사령부 참모가 먼저 저와 함께 온다면 343공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상신했고, 겐다도 "전적으로 그렇다"라고 동의하여, 그 의사를 상부에 전했지만, 그 이후 343공에는 특공에 대한 이야기가 오지 않았다.[227]
5월, 헌병과 다툼을 일으킨 코다카 토리카네 등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기 위해 사세보 진수부의 참모로부터 343공에 대원의 인도를 요구받았지만, 겐다는 "지금 큐슈의 제공권이 어느 항공대가 장악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제343공이다. 그 항공대의 탑승원을 군법회의에 데려가면 나중에 누가 큐슈의 제공권을 지킬 것인가. 꼭 필요하다면 뼈가 되어서 돌려주겠다. 돌아가라"라고 쫓아냈고, 대원들에게는 "사기 고양을 위해, 크게 활약해라. 책임은 전적으로 사령관이 지겠다"라고 격려했다.[228]
전쟁 말기에는 343공도 쇠약해졌지만, 사기가 쇠퇴하는 일은 없었다.[229] 8월에 들어서자 343공은 비행기, 탑승원 등의 보충 요청을 일절 중단했다. 후쿠치야마로 이동하여 야간 공격만을 감행할 예정이었고, 남은 대원과 겐다, 시가도 출격할 예정이었다.[230] 겐다는 자신의 최후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시가가 쓰러진 후에는 자신이 공중 지휘를 맡아 싸울 생각으로, 비행사다운 최후를 바랐다고 한다.[231]
8월, 해군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원폭 투하를 저지하기 위해 전투기대에, B-29가 단기로 침입한 경우에는 체공(體當)으로 즉시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32] 343공 사령관인 겐다는 제3의 원폭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고, "우리 검 부대도 이미 조직적인 공격에 대한 기능이 부족해졌다. 만약 이번에 신형 폭탄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내가 체공(특공)을 해서라도 저지해 보이겠다. 그때는 혼다 분대장, 2번기를 맡아다오"라고 말했고, 혼다 미노루도 결심했다. 2번기는 겐다의 지원이 아니라, 겐다의 특공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경우 마무리를 짓는 역할이었다.[233] 혼다는 겐다의 기량에 대해, 매우 솜씨가 좋고, 조종도 매우 능숙했지만, 거칠어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234]
8월 15일, 오무라 기지에서 종전을 맞이한다. 겐다는 항복에 놀랐고,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 날 오이타의 제5항공함대 사령부로 날아가, 해군 총대 참모 부장 키쿠치 아사조로부터 성지를 전달받지만, 겐다, 701공 사령관 에노키오 요시오, 722공 사령관 오카무라 모토하루는 납득하지 못하고, 8월 17일에 요코스카, 군령부로 가서 군령부 부장 토미오카 사다토시 소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다. 겐다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동기)도 만나 납득한다.[235] 343공 정비 주임 고가 요이치 대위에 따르면, 15일 이후 겐다의 지휘 통솔은 전시에도 못지않게 훌륭했고, 의연한 겐다의 태도에 대원들도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236]
겐다는 "대원들은 혹독한 시기에 승리감을 맛보고 귀환했고, 그들은 혹독한 전황의 청량제 같은 역할을 했다", "같은 부대가 4개 더 있었다면 적의 진격을 상당히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하에서는 꽤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자위관으로서 애리조나주 윌리엄스 기지에 초대되었을 때, 대원들의 보고 이상의 싸움 실력을 들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자신의 불심을 경계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적을 발견하면 반드시 싸운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새겼지만, 출격할 때는 무사히 돌아와 주기를 바랐고 모순된 심정이었다", "부하들에게 혹독한 전투를 시켰다, 원망하는 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종전 후, 343공의 부하와 그 유족들이 모였을 때, 자신의 지휘하에 죽게 된 부하에 대해 사과했다.[242]
8월 19일, 연성 부대가 있었던 마쓰야마에서 겐다는 "폐하의 한마디 어떻게 할 수 없다. 중신들이 부추긴 것이라면 철저 항전할 생각이었지만, 자유도 좋고, 민주주의도 좋고, 오늘부터 겐다는 개인이다. 더 이상 이렇게 여러분과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국가 재건은 쉽지 않겠지만 힘내 주기를 바란다"고 훈시했다.[243] 본 부대가 있었던 오무라 기지에서는 "충성의 정성이 부족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 군령부에 들어가 이번 방송은 폐하 자신의 성심임을 충분히 납득하고 돌아왔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 불충의 신이 된다. 여러분은 즉시 귀향하여 조국 재건에 일어서 주기를 바란다. 아마 이 세상에서 여러분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건강하게 자신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 주기를 바란다"고 훈시했다.[244] 다카마쓰노미야의 말 "폐하를 슬프게 하는 행동은 안 된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일본의 번영을 부흥하기 위해 자중하라"고 전했다.[245] 겐다는 전쟁 중에 3번 실망한 순간이 있었는데, 미드웨이에서 4척의 항공모함을 잃었을 때, 마리아나 해전 패배, 종전이라고 회상하고 있다.[246]
10월, 사세보 진수부 부속. 11월, 예비역 편입.
2. 5. 전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대일본제국 해군 해산 이후, 겐다 미노루는 민간 사업에 종사했다. 1946년 12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진주만 공격 기획 및 실행에 대해 증언했다.[254] 같은 해부터 가와미나미공업에서 일했으며, 공직추방 해제 후 1953년 동양장비주식회사 이사회장에 취임했지만, 이 분야에 재능이 없다고 느꼈다.[256]1954년 일본 자위대 설립 후, 겐다는 중장으로 일본 항공자위대에 임관하여,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항공자위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15][16] F-104 스타파이터 도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록히드 뇌물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다.[17]
1962년 군에서 은퇴한 후, 자유민주당 사토 파의 일원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자유민주당 정책조사회 방위분과에서 20년 이상 활동하며 일본국 헌법 제9조 폐지 또는 축소와 무장 세력의 공개적인 재무장을 주장하는 등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보였다.[19] 핵확산금지조약 비준에 강력히 반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69년 미국에서의 연설에서 "일본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용했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켜 자유민주당 방위정책위원장직에서 사임했지만, 의원직은 유지했다.[19]
1989년 8월 15일, 겐다는 마쓰야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19]
2. 5. 1. 항공자위대
1954년, 방위청에 들어가 항공막료간부장비부장, 초대 항공총사령, 제3대 항공막료장에 취임한다.[15][16] 항공자위대 사령관으로서 겐다는 F-104 스타파이터 도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으며, 일본은 230대를 구매했다.[17]
1953년(쇼와 28년), 겐다는 방위청에 입청하여 항공막료감부 장비부장으로서 항공자위대에 입대한다. 자위대 인사를 담당했던 초대 항공막료장인 상무라 켄타로가 사나기 타케시에게 부장을 부탁할 때, 사나기가 "겐다를 데려온다면"이라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겐다가 요청받았다. 전쟁 전 겐다가 대미 강경파 함대파였던 것을 이유로 구 해군의 권력자들이 반대하여 인사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자 상무라는 "사나기도 겐다도 필요하다. 안 된다면 나도 사퇴하겠다"라고 말하며 인사를 관철시켰다.[257]
공군에서 부관을 지낸 카네코 마사오 공장은 "겐다는 오만불손한 사람이어서 좋아하는 유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전시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기는 듯 사람들 앞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사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어서 끝까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존재였다"라고 말했다.[258] 자마 타카아키에 따르면 "겐다는 공군에서도 지상에 있는 듯한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 들어오는 실행파였다"라고 한다.[258]
겐다는 장비부장으로서 국산 제트기 T-1의 개발을 후원했다.[259] 1955년(쇼와 30년), 항공자위대 항공단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56년(쇼와 31년)에는 임시 항공훈련부장을 맡았다. 겐다는 대원들에게 "하루빨리 미군 제트기 조종을 익혀라"라고 명령하고, 솔선수범하여 제트기 조종 자격을 취득했다.[260] 항공자위대 파일럿 육성에 힘을 쏟았으며, 공자의 발상지인 하마마쓰 제1항공단을 "겐다 항공단"이라고 부르는 소리도 있었다.[261] 1957년(쇼와 32년) 8월 1일, 겐다는 항공집단 초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항공기가 높은 사고 손실률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안전 검열을 위해 각 기지를 순회했다. 1958년(쇼와 33년), 항공총대 사령관을 거쳐 1959년(쇼와 34년) 6월 1일, 비행교육집단(후의 항공교육집단)을 편성했다.[262]
1959년(쇼와 34년) 7월 18일, 겐다는 항공막료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 12월, 미 공군 썬더버즈의 일본 공연을 본 겐다는 항공자위대에 의한 블루 임펄스 구상을 내놓는다. 겐다는 블루 임펄스의 육성자인 이나다 아쓰미를 지원하여, 당시 의문시되었던 편대 비행 훈련을 공적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하고 사고도 명예로운 대우를 하도록 조치하여 선발된 자만이 수행하도록 규제했다.[263] 도쿄 올림픽에서 육해자위대에는 협력 분야가 있었지만 공자에는 없었기 때문에, 겐다는 하늘에 올림픽 마크를 그리는 것을 발안한다. 당시 기술적인 사정으로 어렵고 파일럿들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64] 겐다는 실현을 위해 블루 임펄스의 연기에 정치가, JOC, 재계 인사 등 관계자들을 초대했다. 당시 사정을 몰랐던 대원들은 냉담했지만, 후에 겐다 덕분에 올림픽 비행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265] 겐다는 자위관 퇴직 시 인계 사항에 올림픽 마크를 그리는 것을 포함시켰다.[266] 후의 국회의원 시절 겐다는 도쿄 올림픽 개최 준비 위원장인 쓰시마 히사카즈에게 올림픽 비행을 제안하여 실현시켰다.[267]
제2대 항공막료장인 사나기 타케시 시절에 발생한 FX 기종 선정 문제는 1958년(쇼와 33년) 4월 5일의 국방회의에서 그루만 제 G-98J-11로 내정되었지만, 당시 자료 연구만으로 다른 나라처럼 시험이 없어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발전하여 6월 15일에 그루만의 내정이 취소되었다.[268] 제3대 항공막료장에 취임한 겐다는 "개인적으로는 록히드를 선택한다"라고 발언했지만, "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라며, 1959년(쇼와 34년) 8월, FX 기종 선정을 위해 관민 합동 조사단의 단장으로서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 에드워즈 공군기지에서 2개월 반에 걸친 조사를 실시했고, 겐다 자신도 시험 비행을 실시했다.[270] 55세에 마하 2의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어서 칭찬의 대상이었다.[271]
귀국 후 제출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정부가 재선정한 결과, F-104C[272], F-104G를 일본용으로 개조한 형식을 채택하는 것이 결정되어 11월 6일 국방회의에 의해 록히드 F-104J(180기)·복좌형 DJ(20기)가 선정되었다.[273] 겐다는 세계적으로 미사일 만능주의가 대두하여 미국에서도 기총은 필요 없다고 설명받았지만, 전투기의 근접 거리에서의 공격과 기동성의 높이에 의한 회피 운동 등을 고려하여 F-104에는 기총 장비를 갖추게 했다. 후에 베트남 전쟁의 전훈을 얻어 세계도 기총의 필요성을 깨달았다.[274]
차기 전투기 조사단 단장으로서 미국에 건너간 겐다는 계급장의 관습 차이로 인해, 막료장장을 왼쪽 가슴에만 달고, 별 3개인 겐다는 별 4개지만 동등한 미 공군 참모총장(대장)보다 하급인 "중장"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항의했지만 인정되지 않아 현지에서 겐다는 별을 하나 더 늘려 별 4개의 계급장을 달았다. 이 행동은 규정 위반으로 보도되어 문제가 되어 대응을 요구받은 항공막료감부 담당자가 여러 가지를 조사한 결과, 해상보안청장관의 계급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내어 변경에 이르게 되었고,[275] 1962년(쇼와 37년) 12월 1일, 「자위대법 시행규칙의 일부를 정정하는 총리부령」(쇼와 37년 총리부령 제67호)[276]에 의해 통합막료회의 의장과 육해공 각 막료장은 별 4개(또는 금띠에 선 3개)의 대장 상당의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겐다는 항공자위대의 창설, 일미 안보에 대한 공헌으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온 오브 메릿 훈장(훈공장)을 수여받았다.[277] 또한 일본비행연맹 명예회장을 역임한 겐다는 적십자비행대의 창설에 참여하여 이듬해 11월 3일에 초대 대장에 취임한다. 1986년(쇼와 61년) 3월 말까지 역임한다. 적십자비행대는 일본적십자사 본사 직할의 특수봉사단으로서 여러 가지 재해에서 활약하고 있다.[278]
2. 5. 2. 정계 진출
源田 実|겐다 미노루일본어는 1954년 방위청에 들어가 항공막료간부장비부장, 초대 항공총사령, 제3 항공막료장에 취임한다.[15][16] 1962년에는 자민당에 입당하여 참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 5위로 당선되었다.[17]일본의 항복 후, 겐다는 민간 사업에 종사하다가 1954년 일본 자위대 설립과 함께 항공자위대에 중장으로 임관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항공자위대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F-104 스타파이터 도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17] 이 과정에서 록히드 뇌물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겐다는 록히드 본사를 방문하여 직접 스타파이터를 조종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18]
1962년 군에서 은퇴한 후, 겐다는 자유민주당 사토 파의 일원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자민당 정책조사회 방위분과에서 20년 이상 활동하며 일본국 헌법 제9조 폐지 또는 축소와 무장 세력의 공개적인 재무장을 주장하는 등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보였다.[19] 1969년에는 일본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용했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켜 자민당 방위정책위원장직에서 사임했지만, 의원직은 유지했다.[19] 핵확산금지조약 비준에 강력히 반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6년 12월, 겐다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진주만 공격 기획과 실행에 대해 증언했다.[254] 그 후 가와미나미공업에서 일했으며, 공직추방 해제 후 1953년 동양장비주식회사 이사회장에 취임했다.[256]
1953년, 겐다는 방위청에 입청하여 항공자위대에 입대했다. 그는 T-1 개발을 후원하고, 제1항공단 사령관, 임시 항공훈련부장, 공장을 거쳐 1957년 항공집단 초대 사령관에 취임했다.[260] 1958년에는 항공총대 사령관, 1959년에는 비행교육집단(후의 항공교육집단)을 편성했다.[262]
1959년, 겐다는 항공막료장에 취임하여 블루 임펄스 구상을 내놓고 육성했다.[263] 도쿄 올림픽에서 하늘에 올림픽 마크를 그리는 것을 발안하여 실현시키기도 했다.[264]
FX 기종 선정 문제에서 겐다는 록히드 F-104J/DJ를 선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73] 그는 미사일 만능론에도 불구하고 F-104에 기총 장비를 갖추게 했다.[274]
겐다는 계급장 문제로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중장" 대우를 받는 것에 항의하여 별 4개의 계급장을 달았고, 이는 결국 자위대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이어졌다.[275]
1962년, 겐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온 오브 메릿 훈장을 받았다.[277] 일본적십자사 적십자비행대 창설에도 참여하여 초대 대장을 역임했다.[278]
1962년 참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겐다는 4선 24년 동안 재임하며 국방, 헌법, 천황 문제 등에 관여했다.[280] 문민 통제 문제로 입각하지는 않았지만, 탄핵 재판소 재판장, 국방부 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289]
1965년, 겐다는 교토산업대학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291]
1960년대 후반, 겐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핵 보유에 위기감을 느껴 핵전력 옵션에 대한 논의를 촉구했다.[292] 1969년에는 원폭 관련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293]
1970년, 겐다는 나가누마 미사일 소송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어 항공자위대의 실정을 증언했다.[298]
1974년, 겐다는 황실 모독 문제에 대해 참의원 의장에게 질문 요지서를 제출했다.[299] 일세일원의 제, 건국기념일 정부 행사 실시[301]에 대한 질문 요지서도 제출했다.
1976년, 겐다는 일본청년협의회 주최 대회에서 "일본 민족은 원폭을 3개나 4개 떨어뜨려도 항복할 만한 민족이 아니었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303]
겐다는 세키 유키오 특공 위령비 건립에 힘썼다.[304]
1977년, 겐다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343비행대대 합동 위령식을 거행하고 눈물을 흘리며 추모했다.[305]
1978년, 겐다는 일중 평화 우호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306] 같은 해, 343비행대대의 시덴카이 인양에 노력하여 조사를 낭독했다.[307]
1986년, 겐다는 "해군에 대한 의리가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원직에서 은퇴했다.[308] 은퇴 연설에서 "만족을 알면 부끄럽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했다.[308]
2. 5. 3. 말년
源田|겐다일본어 미노루는 1989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한 지 정확히 44년째 되는 날이자 85세 생일 하루 전에 마쓰야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19]1954년 방위청에 들어가 항공막료간부장비부장, 초대 항공총사령, 제3 항공막료장을 역임했다. 1962년 자민당에 입당해 참의원 선거에 출마, 5위로 당선되었다. 머리가 비상하고 카리스마 있는 군인으로 정평이 난 그는 타인의 비평에도 굴하지 않았다. 또한 이나가와 계열의 우익단체 대행사를 공공연히 지원해 우익 폭력단과 유착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의 항복과 이후 대일본제국 해군의 해산으로 源田|겐다일본어는 민간 사업에 종사했다. 1954년 일본 자위대 설립 후, 源田|겐다일본어는 중장으로 일본 항공자위대에 임관했다. 그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항공자위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15][16] 항공자위대 사령관으로서 源田|겐다일본어는 F-104 스타파이터 도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으며, 일본은 230대를 구매했다. 록히드가 源田|겐다일본어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증거가 드러나면서 이는 록히드 뇌물 스캔들의 일부가 되었다.[17] 源田|겐다일본어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록히드 본사를 방문하여 자신의 요청으로 스타파이터를 직접 조종했다. 몇 달 후 그는 미국 공군으로부터 공훈훈장을 받았다.[18]
1962년 군에서 은퇴한 후, 일본 의회 상원인 참의원에 자유민주당 내 사토 파의 일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사토 파의 후원 아래 정계에 입문한 여러 전직 자위대 장교 중 첫 번째였으며, 대부분 일본 정계의 극우에 속했다. 그는 자유민주당 정책조사회 방위분과의 주요 멤버로 20년 이상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전후 일본 헌법 제9조의 폐지 또는 축소와 무장 세력의 공개적인 재무장을 주장하는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자주 대변했다. 1969년 미국에서의 연설에서 청중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는 일본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큰 논란이 일어나 자유민주당 방위정책위원장직에서 사임해야 했지만 의원직은 유지했다.[19] 그는 특히 1974년부터 1976년까지의 국회 회기 동안 다른 12명의 극우 자민당 의원들과 함께 일본이 언젠가는 자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핵확산금지조약 비준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3. 항공 전략
겐다는 1931년 항공모함 아카기에 배치되었다. 해군에서 명성이 높았던 그는 1932년 요코스카에서 곡예 비행 시범 팀을 결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복엽기를 이용한 곡예 비행 시범을 선보였다. "겐다의 비행 서커스"로 알려진 이 팀은 겐다, 고바야시 요시타, 오카무라 모토하루로 구성되었으며, 나카지마 A2N 90식 전투기를 사용했다.[2] 이는 해군 항공대 홍보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는 중일 전쟁 당시 제2연합항공대에서 전투 경험을 쌓았고, 1937년 가을부터 1938년까지 요코스카 항공대의 고참 비행 교관을 역임했다.[3]
당시 대부분의 해군 전략가와 전술가들은 적 목표물에 대한 단독 항공모함 공습이나 적 폭격기로부터 함대를 호위하기 위한 함대와의 동반 항해를 생각했다. 겐다는 여러 항공모함이 함께 항해하며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는 잠재력을 이해했다. 일본 해군사관학교 재학 시절부터 공군력 신봉자였던 겐다는 전쟁 전 일본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함 건조를 중단하고 (그는 전함이 "부두"나 고철로 더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믿었다) 항공모함, 잠수함, 그리고 지원하는 고속 순양함 및 구축함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 무엇보다도 겐다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들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생존을 위해서는 현대적이고 대규모의 해군 항공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겐다의 계급은 – 대위 – 전략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낮았다.
겐다는 새로운 전술인 천수심(淺水) 어뢰 사용, 전술 항공기의 수평 폭격의 효과적인 사용, 그리고 여러 항공모함을 동시에 조정하는 훈련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1961년, 일본 항공자위대 참모총장으로 런던을 5일간 방문했을 때, 그는 진주만 공격에 대해 "단 한 번만 공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시 또 공격했어야 했습니다."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4]
源田實(겐다 미노루)는 일찍부터 항공전력의 가치에 주목하여 항공주병론을 주장하고 전함무용론을 제창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당시 겐다 등의 전함무용론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여겨졌지만, 태평양 전쟁의 경과가 그의 예측이 거의 정확했음을 증명했다.[332] 전후 겐다는 해군이 대함거포주의에서 항공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은 조직 개혁에서의 희생을 꺼리는 강한 직업 의식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며, “대포가 없다면 우리는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병술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무기의 구성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대함거포주의에 입각하여 구축되어 온 조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정에 약하고 파란을 싫어하는 일본인의 성격으로는 꽤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333]
겐다는 “항공전의 유리함이란 제공권의 획득이며, 전투기끼리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것이고, 아군을 자유롭게 하고 적의 집단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폭격기에 대한 공격은 이차적인 것”[274] “전투기에서의 승패는 격추 수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전장의 지배권을 누가 장악했는가, 상공에 누가 남아 있는가 하는 제공권의 획득에 있다”고 말했다.[335]
겐다는 중일전쟁에서 “제공대”의 고안을 비롯한 전투기의 집단 사용, 원거리 진격 등으로, 그때까지 주로 방어용으로 여겨졌던 전투기를 적극적으로 원거리에 진격시켜, 경시되었던 전투기의 가치를 인식시켰다.[337] 겐다는 이 공중전의 주도권을 “제공권”이라고 명명했다.[338]
겐다의 항공모함 함대의 용병 사상은, 항공모함을 집중 운용함으로써, 기습을 위해 접적 행동 중 무선 봉쇄를 실시하고,[339] 대병력을 집중하여 일거에 적을 격멸하고 상공 경계로 적을 저지하는 것이다.[64] 집중 운용의 장점은 항공대의 통일 지휘가 용이하고 공중 집결도 용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일전쟁의 전훈으로부터 공격은 집중하지 않으면 효과가 희박하고 비행대의 공중 집결이 필요하지만, 해상에서의 집결은 어렵고, 또 전파 유도 등을 하면 적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은밀 행동이 어려워 기습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해결되고, 또 각 함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계획 변경·수정의 연락을 취하면서 은밀 행동도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발각되었을 경우, 적기의 습격을 받고 항공모함이 일망타진될 위험도 있지만, 항공모함을 지키는 직엄 전투기와 대공 포화도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보완한다.[340]
4. 정치 사상
겐다는 전후 일본 헌법 제9조의 폐지 또는 축소를 주장하고 무장 세력의 공개적인 재무장을 옹호하는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자주 보였다.[19] 1969년 미국에서 열린 연설에서 일본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용했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일본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자유민주당 방위정책위원장직에서는 사임했지만, 의원직은 유지했다.[19]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국회 회기 동안에는 다른 12명의 극우 자민당 의원들과 함께 핵확산금지조약 비준에 강력히 반대했는데, 이는 일본이 언젠가 자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겐다는 핵무기 등에 의한 균형 전략은 신무기, 신전술의 도입으로 쉽게 무너지는 불안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평화를 위해서는 자유 국가가 과학기술 수준에서 계속 앞서 나가야 하며, 현대 전략에서는 병력의 질적 향상과 각국의 결속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344] 그는 방위 개념을 바꾸고 방위비와 방위 예산의 차액을 과학기술 개발 예산에 배분하며, 인재 육성 개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 수준 향상이 획기적인 방위 강화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며, 국민 생활 수준 향상과 문화·복지 증진을 통해 일본이 세계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면 공격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 근절의 첫걸음은 과학에 의한 후수필승, 즉 수비 전략의 확립에 있다고 보았다.[345]
겐다는 핵무기 근절에 대해 모든 국가와 개인이 핵무기 전면 폐기를 확실하게 지키기는 어렵고, 국가 차원에서 가능하다 해도 핵 지식까지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부가 핵무력으로 지배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권을 제외한 핵폐기 운동은 위험하며, 그 운동 자체가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국민의 발언 자유가 제한된 공산권에도 간접적으로라도 핵폐기를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46]
5. 평가 및 비판
겐다 미노루는 진주만 공격을 입안하고 실행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공격 계획의 세부사항을 연구하고,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고, 공격 부대를 지휘할 지휘관을 추천하는 등 다방면에서 기여했다. 그러나 이 기습 공격은 일본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11]
겐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여러 해전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일본 공군 부대를 조직하여 가미카제 부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려 했지만, 궁극적으로 일본의 패배는 공중전에서의 패배 때문이라고 믿었다.[13]
1961년, 겐다는 진주만 공격에 대해 "단 한 번만 공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시 또 공격했어야 했습니다."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4]
6. 수상 내역
- 銀杯|긴파이일본어 1조(국화 문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勲二等|훈이등일본어 서보장
- 従三位|종삼위일본어 勲二等|훈이등일본어 욱일중광장
7. 연표
연도 | 사건 |
---|---|
1904년 |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카케정(현 아키오타정)에서 주조업과 농업을 하는 집안의 차남으로 출생.[20][21] |
1921년 | 히로시마 제일 중학교 (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병학교 52기로 입학.[21] |
1924년 | 해군병학교 졸업 (236명 중 17등, 소위 후보생).[23] |
1927년 | 해군포술학교, 해군수뢰학교 졸업. 장갑순양함 「이즈모」 승선. 해군 중위 진급.[24] |
1937년 | 해군대학교 졸업(35기 차석).[21][56] 중일전쟁 발발, 제2연합항공대 사령부 참모로 참전.[57] 난징 공습 작전에서 "제공대" 고안.[58] 해군 소좌 진급. |
1938년 | 요코스카 해군항공대 비행대장 취임. 12시 함상전투기(훗날의 영식 함상전투기) 계획 설명 심의회 참가.[66] |
1939년 | 주영국 대사관 부무관 보좌관으로 영국 전근.[69] |
1940년 | 영국 본토 항공전 참관 후 미국 경유하여 귀국.[72] 제1항공전대 참모(「가가」 승조).[73] 해군 중좌 진급. |
1941년 | 제1항공함대 참모. 진주만 공격 계획.[76] |
1942년 | 진주만 공격 성공 후 남태평양, 인도양 전역 참전. 실론 해전 승리.[95] 군령부 제1부 작전과 항공부원 취임.[131] |
1943년 | 가달카날 철수 작전 결정에 관여.[133] 고속전투기 신덴, 대형공격기 렌잔 개발 계획 추진.[134] |
1944년 | 웅 작전 기획.[145] 마리아나 해전 참전. T 공격부대 제안.[186] 제343해군항공대(검 부대) 편성 제안.[194] |
1945년 | 제343해군항공대 사령관 취임.[194] 오무라 기지에서 종전 맞이함.[235] 황통호지작전 참여.[247] |
1946년 | 극동국제군사재판 증언.[253][254] |
1953년 | 방위청 입청, 항공자위대 입대. 항공막료감부 장비부장.[257] |
1955년 | 항공자위대 제1항공단 사령관. |
1956년 | 임시 항공훈련부장, 공장(空将). |
1957년 | 항공집단 초대 사령관. |
1958년 | 항공총대 사령관. |
1959년 | 항공막료장 취임. 블루 임펄스 구상.[263] FX 기종 선정 문제 해결.[268] |
1962년 | 레지옹 오브 메릿 훈장(미국) 수여.[277] 일본비행연맹 명예회장. 자위관 퇴관 후 참의원 의원 선거 당선(자유민주당, 전국구).[279] |
1965년 | 교토산업대학 설립 발기인.[291] |
1969년 | "일본 핵무장 가능" 발언으로 논란, 자민당 국방부 회장 사임.[293] |
1970년 | 나가누마 미사일 소송 증인 출석.[298] |
1986년 | 의원 은퇴.[308] |
1989년 |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뇌혈전으로 사망.[309]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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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ir Warfare: An International Encyclopedia
ABC-CLI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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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t from the Sky: Japan's Dive-Bomber Ace of World War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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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Open Roa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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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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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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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뉴스
New York Times
1961-09-04
[15]
웹사이트
Genda Minoru Japanese naval offi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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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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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n Polmar's Corner: Pointing to General Genda Naval Historical Foundation
https://www.navyhist[...]
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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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201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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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ockheed F-104 Starfighter: A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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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 and Sword Aviation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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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inoru Genda dies at 84
https://www.washingt[...]
198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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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太平洋戦争研究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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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短期集中新連載 【東京の中の郷土】(1) 広島県の巻 この30人の咲く花鳴く鳥そよぐ風 源田実
読売新聞社
[22]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23]
문서
生出・源田
[24]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25]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26]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発進編
文藝春秋新社
[27]
문서
アジ暦「霞空教第1号の21卒業式施行の件」
[28]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29]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0]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1]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2]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光人社
[33]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4]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5]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36]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37]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38]
서적
零戦の誕生
光人社
[39]
서적
零戦の誕生
光人社
[40]
서적
海軍航空隊、発進
文春文庫
[41]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42]
서적
航空作戦参謀 源田実
徳間書店
[43]
서적
海軍航空隊、発進
文春文庫
[44]
서적
零戦
学研M文庫
[45]
서적
(제목 없음)
[46]
서적
(제목 없음)
[47]
서적
一海軍特務士官の証言―戦争と人間の記録
徳間
[48]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49]
서적
(제목 없음)
[50]
서적
(제목 없음)
[51]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1998
[52]
서적
(제목 없음)
[53]
서적
真珠湾攻撃総隊長の回想 淵田美津雄自叙伝
講談社
[54]
문서
第1御召艦及供奉艦 審判官 青軍 赤軍(2)
アジ暦
[55]
문서
昭和11年11月海軍少佐第二総合航空隊参謀
国立公文書館
[56]
서적
(제목 없음)
[57]
서적
(제목 없음)
[58]
서적
零戦の誕生
光人社
[59]
서적
(제목 없음)
[60]
서적
中国方面海軍作戦(1)昭和十三年四月まで
戦史叢書
[61]
서적
零戦
学研M文庫
[62]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発進篇
文藝春秋新社
[63]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発進篇
文藝春秋新社
[64]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65]
서적
零戦
学研M文庫
[66]
서적
零戦
学研M文庫
[67]
서적
零戦の遺産
光人社NF文庫
[6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発進編
文藝春秋新社
[69]
서적
(제목 없음)
[70]
서적
(제목 없음)
[71]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72]
서적
生出・源田
[73]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74]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75]
서적
海軍の回想
[76]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77]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78]
서적
ハワイ作戦
戦史叢書
[79]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80]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81]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82]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83]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84]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85]
서적
海軍功罪
[86]
서적
連合艦隊作戦室から見た太平洋戦争
光人社NF文庫
[87]
서적
完本・太平洋戦争〈上〉
文藝春秋
[88]
서적
ハワイ作戦
戦史叢書
[89]
서적
ハワイ作戦
戦史叢書
[90]
서적
風鳴り止まず
[91]
서적
ハワイ作戦
戦史叢書
[92]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93]
서적
トラトラトラ 太平洋戦争はこうして始まった
並木書房
[94]
서적
トラトラトラ 太平洋戦争はこうして始まった
並木書房
[95]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96]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9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98]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99]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00]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101]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102]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103]
서적
海軍功罪
[104]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105]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106]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07]
서적
海軍反省会六
[108]
서적
海軍反省会9
PHP研究所
[109]
서적
真珠湾攻撃総隊長の回想 淵田美津雄自叙伝
講談社
[110]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111]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112]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113]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下
原書房
[114]
서적
海軍功罪, 海軍航空隊始末記
[115]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116]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11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1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19]
서적
続 炎の海
[120]
서적
続・海軍くろしお物語
光人社
1982
[121]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戦闘篇
文藝春秋新社
[122]
서적
海軍功罪, 海軍航空隊始末記
[123]
서적
海軍功罪
[124]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25]
서적
海軍功罪
[126]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127]
기록
海軍辞令公報
1942-07-14
[12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29]
서적
機動部隊
[130]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31]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32]
서적
福岡連隊史
[133]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3)昭和十八年二月まで
戦史叢書
[134]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35]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136]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3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38]
서적
二つの時代 夫は艦爆の神様と言われて
光人社
[139]
방송
ドキュメント太平洋戦争エレクトロニクスが戦を制す
NHK
[140]
서적
ライオン艦長 黛治夫 ある型破り指揮官の生涯
光人社
1988
[141]
서적
戦史叢書39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4)第三段作戦前期
[142]
서적
機動部隊
[143]
서적
戦史叢書71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5)第三段作戦中期
[144]
서적
戦史叢書71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5)第三段作戦中期
[145]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146]
서적
戦史叢書71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5)第三段作戦中期、海軍航空隊始末記
[147]
서적
戦史叢書71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5)第三段作戦中期
[14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49]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50]
서적
戦史叢書12マリアナ沖海戦
[151]
서적
生出・源田
[152]
서적
戦史叢書12マリアナ沖海戦
[153]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54]
서적
太平洋戦争と十人の提督下
学研M文庫
[155]
서적
大本営海軍部 回想の大東亜戦争
朝日ソノラマ
[156]
서적
戦史叢書12マリアナ沖海戦
[15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15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159]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60]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161]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62]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特攻
講談社
[163]
서적
神雷部隊始末記
学習研究社
[164]
서적
一筆啓上瀬島中佐殿
徳間文庫
[165]
서적
桜花特攻隊、昭和史の謎を追う上
光人社NF文庫、文春文庫
[166]
서적
昭和の戦争 保阪正康対論集
朝日新聞社
[167]
서적
神雷部隊始末記、海軍神雷部隊、特攻
学習研究社、戦友会、講談社
[168]
간행물
丸
[169]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170]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上
文春文庫
[171]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下、神雷部隊始末記
文春文庫、学習研究社
[172]
서적
戦史叢書88海軍軍戦備(2)開戦以後
[173]
서적
戦史叢書56 海軍捷号作戦(2)フィリピン沖海戦、敷島隊の五人―海軍大尉関行男の生涯 (下)
文春文庫
[174]
서적
海軍特別攻撃隊
朝日ソノラマ
[175]
서적
特攻、戦史叢書56 海軍捷号作戦(2)フィリピン沖海戦、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講談社
[176]
서적
海軍捷号作戦(2)フィリピン沖海戦
(Unspecified)
[176]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Unspecified)
[177]
서적
特攻
講談社
[177]
서적
特攻の真意──大西瀧治郎 和平へのメッセージ
文藝春秋
[178]
서적
特攻
講談社
[179]
서적
大本営発表の真相史
自由国民社
[180]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Unspecified)
[181]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1998
[181]
서적
零戦燃ゆ 渾身編
(Unspecified)
[182]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182]
서적
白い太陽
文芸社
[183]
문서
生出・源田
[184]
서적
沖縄方面海軍作戦
(Unspecified)
[184]
서적
神雷部隊始末記
(Unspecified)
[185]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186]
서적
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Unspecified)
[187]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Unspecified)
[187]
서적
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Unspecified)
[188]
서적
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Unspecified)
[189]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Unspecified)
[190]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Unspecified)
[191]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192]
서적
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Unspecified)
[193]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Unspecified)
[194]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194]
문서
海軍功罪
[194]
서적
沖縄方面海軍作戦
(Unspecified)
[195]
기록보관소
第343海軍航空隊戦時日誌 自昭和20年1月1日至昭和20年1月31日(戦闘第301飛行隊・戦闘第407飛行隊・戦闘第701飛行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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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史上最強の戦闘機隊「343空」を生んだ、源田実の“合理的発想”
https://rekishikaido[...]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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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Unspecified)
[197]
서적
最後の戦闘機 紫電改―起死回生に賭けた男たちの戦い
光人社NF文庫
[19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戦闘篇
文藝春秋新社
[199]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200]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01]
서적
沖縄方面海軍作戦
(Unspecified)
[202]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02]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Unspecified)
[203]
서적
最後の戦闘機 紫電改―起死回生に賭けた男たちの戦い
光人社NF文庫
[204]
서적
日本海軍の功罪 五人の佐官が語る歴史の教訓
プレジデント社
[205]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05]
서적
最後の戦闘機 紫電改―起死回生に賭けた男たちの戦い
光人社NF文庫
[206]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Unspecified)
[20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戦闘篇
文藝春秋新社
[20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209]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209]
문서
海軍功罪
[210]
서적
還って来た紫電改―紫電改戦闘機隊物語
光人社NF文庫
[210]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Unspecified)
[211]
서적
最強戦闘機紫電改
光人社
[212]
서적
最強戦闘機紫電改
光人社
[213]
서적
最後の撃墜王―紫電改戦闘機隊長菅野直の生涯
光人社NF文庫
[214]
서적
本田稔空戦記
光人NF文庫
[215]
서적
還って来た紫電改―紫電改戦闘機隊物語
光人社NF文庫
[216]
서적
還って来た紫電改―紫電改戦闘機隊物語
光人社NF文庫
[217]
서적
最後の撃墜王―紫電改戦闘機隊長菅野直の生涯
光人社NF文庫
[218]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19]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戦闘篇
文藝春秋新社
[220]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null
[221]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null
[222]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null
[223]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24]
서적
還ってきた紫電改
null
[225]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26]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27]
방송
NHK特集 紫電改最後の戦闘機
NHK-TV
[228]
서적
あゝ青春零戦隊
光人社
[229]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30]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31]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戦闘篇
文藝春秋新社
[232]
서적
日本本土防空戦
徳間書店
[233]
서적
本田稔空戦記
光人NF文庫
[234]
서적
最後のゼロファイター
双葉社
[235]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36]
서적
海軍航空隊
潮書房出版
[23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238]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239]
서적
日本海軍の功罪 五人の佐官が語る歴史の教訓
プレジデント社
[240]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241]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null
[242]
서적
海軍功罪
null
[243]
서적
島川正明空戦記録
光人NF文庫
[244]
간행물
なにわ会ニュース
null
[245]
서적
源田の剣
ネコパブリッシング
[246]
書籍
海軍航空隊始末記、海軍功罪
[247]
書籍
零戦最後の証言―海軍戦闘機と共に生きた男たちの肖像
光人社NF文庫
[248]
書籍
零戦最後の証言―海軍戦闘機と共に生きた男たちの肖像
光人社NF文庫
[249]
書籍
撃墜王は生きている、最後の紫電改パイロット
小学館, 潮書房光人社
[250]
書籍
裕仁天皇五つの決断、零戦最後の証言―海軍戦闘機と共に生きた男たちの肖像
講談社, 光人社NF文庫
[251]
간행물
なにわ会ニュース
なにわ会
2001-03-00 # 날짜 형식을 YYYY-MM-DD 로 변환할 수 없어서 임시로 표기합니다. 정확한 일자 정보가 필요합니다.
[252]
書籍
裕仁天皇五つの決断
講談社
[253]
公文書
爆撃に関する根本方針
国立公文書館
[254]
公文書
真珠湾攻撃の立案と実施
国立公文書館
[255]
書籍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256]
書籍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257]
書籍
自衛隊の誕生、戦闘機屋人生―元空将が語る零戦からFSXまで90年
中公新書, 講談社
[258]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59]
書籍
戦闘機屋人生―元空将が語る零戦からFSXまで90年
講談社
[260]
書籍
戦闘機屋人生―元空将が語る零戦からFSXまで90年
講談社
[261]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62]
書籍
航空自衛隊の翼wings
イカロス
[263]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64]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65]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66]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67]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68]
書籍
飛行機の本 世界記録に挑んだ半生
新潮社
[269]
書籍
ブルーインパルス
[270]
書籍
激闘 海軍航空隊 「零戦」の柴田武雄と「紫電改」の源田実、わがヒコーキ人生
光人社NF文庫, 日経新聞社
[271]
書籍
飛行機の本 世界記録に挑んだ半生
新潮社
[272]
회의록
第033回国会 内閣委員会 第10号
[273]
書籍, 公文書
航空自衛隊の戦力
学研M文庫
[274]
書籍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275]
웹사이트
古志山人閑話 戦士の戦史・おまけで自衛隊ネタ話
https://webcache.goo[...]
[276]
간행물
官報
1962-12-01
[277]
公文書
国立公文書館
[278]
웹사이트
日本飛行連盟 赤十字飛行隊
http://jfa1953.org/p[...]
[279]
書籍
激闘 海軍航空隊 「零戦」の柴田武雄と「紫電改」の源田実
光人社NF文庫
[280]
書籍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281]
서적
裕仁天皇五つの決断
講談社
2001-03-00 # 년도만 확인 가능
[282]
서적
激闘 海軍航空隊 「零戦」の柴田武雄と「紫電改」の源田実
光人社
[283]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284]
서적
三島由紀夫全集 35
新潮社
[285]
잡지
週刊朝日
1976-04-02
[286]
서적
沈黙のファイル : 「瀬島龍三」とは何だったのか
新潮社
[287]
서적
昭和の戦争 保阪正康対論集
朝日新聞社
[288]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289]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290]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291]
서적
謀略の昭和裏面史特務機関&右翼人脈と戦後の未解決事件!
宝島社
[292]
방송
核燃料サイクル“迷走”の軌跡
NHK ETV特集
2012-06-17
[293]
신문
中国新聞
[294]
회의록
第96回参議院 予算委員会 6号
1982-03-12 # 昭和57年 -> 1982년으로 변환
[295]
서적
栄典事務手続き 第4次改定版
総理府賞勲局
[296]
서적
勲章
毎日新聞社
[297]
회의록
第47回衆議院 外務委員会 1号
1964-12-15 # 昭和39年 -> 1964년으로 변환
[298]
신문
源田氏を証人に 弁護団側の要求通る
朝日新聞
1970-03-13 # 昭和45年 -> 1970년으로 변환
[299]
의회자료
皇室の尊厳維持に関する質問主意書
1974-12-16 # 昭和四十九年 -> 1974년으로 변환
[300]
기록보관소자료
[301]
의회자료
内閣参質七七第三号
[302]
보고서
憲法記念行事反対集会
日本青年協議会
[303]
서적
社会労働委員会議録
国会資料頒布会
[304]
서적
日本海軍400時間の証言―軍令部・参謀たちが語った敗戦
NHKスペシャル取材班
[305]
서적
最後の紫電改パイロット
潮書房光人社
[306]
서적
石原慎太郎くんへキミは「NO」と言えない
ぶんか社
[307]
서적
紫電改の六機
光人NF文庫
[308]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309]
신문
愛媛新聞
[310]
서적
トラトラトラ 太平洋戦争はこうして始まった
並木書房
[311]
서적
完本・太平洋戦争〈上〉
文藝春秋
[312]
서적
トラトラトラ 太平洋戦争はこうして始まった
並木書房
[313]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314]
보고서
第141回海軍兵学校第七十六期有志勉強会記録
1991-07-13 # 平成三年 -> 1991년으로 변환
[315]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316]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317]
서적
戦闘機屋人生―元空将が語る零戦からFSXまで90年
講談社
[318]
서적
ミッドウェー戦記
光人社
[319]
문서
源田実論
[320]
문서
源田実論
[321]
서적
激闘 海軍航空隊 「零戦」の柴田武雄と「紫電改」の源田実
光人社NF文庫
[322]
서적
わが人生の時の会話
幻冬舎文庫
[323]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324]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1990
[325]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326]
서적
零戦、かく戦えり!
零戦搭乗員会
[327]
서적
零戦
学研M文庫
[328]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29]
서적
最後の撃墜王―紫電改戦闘機隊長菅野直の生涯
光人社NF文庫
[330]
서적
わがヒコーキ人生
日経新聞社
[331]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1990
[332]
서적
大艦巨砲主義の盛衰
朝日ソノラマ
[333]
문서
海軍功罪
[334]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335]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36]
문서
海軍航空隊発進
[337]
서적
零戦
学研M文庫
[338]
서적
鷹が征く 大空の死闘 源田実VS柴田武雄
光人社
[339]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340]
서적
海軍功罪
[341]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1998
[342]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343]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戦闘篇
文藝春秋新社
[344]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1990
[345]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1990
[346]
서적
平和の探究 兵器に託す未来はない
善本社
1990
[347]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348]
기타
横空機密第164号の28.4.20 90式艦上戦闘機90式機上作業練…
アジ暦
[349]
기타
職課1 兵科士官1 自1月至9月(5)
アジ暦
[350]
기타
官房第1947号 10.5.8 昭和9年恩賜研学資金受賞者の件 海軍大尉源田 實 外9名
アジ暦
[351]
문서
アジ暦「官房機密第1700号 昭和10.7.13 甲種学生候補者最終試験に関す・・・」
[352]
목록
海軍大学校卒業生一覧
[353]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号外 第11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37-07-28
[354]
군사기록
極東国際軍事裁判供述書
国立公文書館
[355]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号外 第114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37-12-30
[356]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号外 第117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38-01-07
[357]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号外 第16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38-04-15
[358]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号外 第273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38-12-15
[359]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521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0-09-02
[360]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550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0-11-01
[361]
군사기록
極東国際軍事裁判供述書
国立公文書館
1940-11-01, 1945-11-15
[362]
군사기록
極東国際軍事裁判供述書
国立公文書館
[363]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554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0-11-15
[364]
군사기록
極東国際軍事裁判供述書
国立公文書館
1941-04-01
[365]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961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2-10-10
[366]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97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2-11-05
[367]
서적
陸海軍将官人事総覧(海軍編)
芙蓉書房
[368]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009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2-12-11
[369]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6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4-07-13
[370]
군사기록
軍事機密 陸軍異動通報 第170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4-08-22
[371]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58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4-09-08
[372]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620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4-10-15
[373]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69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01-20
[374]
군사기록
軍事機密 陸軍異動通報 第21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01-27
[375]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724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02-17
[376]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702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01-24
[377]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850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07-08
[378]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85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07-16
[379]
군사기록
海軍辞令公報 第1971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11-02
[380]
군사기록
第二復員省辞令公報 第3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45-12-04
[381]
서적
新訂 現代政治家人名事典
日外アソシエーツ
[382]
서적
新訂 政治家人名事典 明治~昭和
日外アソシエーツ
[383]
간행물
官報
198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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