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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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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세 소리야는 19세기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펠리페 7세의 신임을 받은 치안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고 문학에 입문하여, 12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월터 스콧과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영향을 받았다. 마리아노 호세 데 라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문단에 데뷔한 후, 시집과 희곡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돈 후안 테노리오》가 있으며, 만년에 작품성을 인정받아 스페인 아카데미에서 연금과 훈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소리야는 스페인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삶은 문학적 열정과 시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초기 생애, 교육, 문단 데뷔, 초기 작품 활동, 작품 경향 및 주요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한다.

1845년 파리로 이주했으며, 이 무렵 어머니가 사망하여 잠시 마드리드로 귀환했다. 1848년 레알 아카데미아 에스파뇰라의 회원이 되었다.[5] 다시 스페인을 떠나 잠시 보르도에 거주한 후 1851년에 파리에 정착했고, 1852년에 『Obras de D. Jose Zorrilla』를 출판했다.[6] 알프레드 드 뮈세, 테오필 고티에, 조르주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와 친분을 맺었다.[7]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멕시코를 중심으로 쿠바에도 잠시 머물렀다. 멕시코 거주 기간 동안 대부분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이 11년 동안 거의 집필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이 즉위한 후, 황제의 명으로 멕시코 국립 극장의 장으로 임명되었다.[8] 아내를 잃은 후 1866년 스페인으로 귀국했지만, 사람들에게 반쯤 잊힌 상태였다.[3] 귀국 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1871년부터 12년 동안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1880년 자서전 『Recuerdos del tiempo viejo』를 출판했지만, 빈곤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소리야의 연극은 여전히 상연되었지만, 저작권료를 받지 못했다.

말년과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한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바야돌리드에서 치안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난도 7세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보수파이자 절대 왕정파였다.[2]

예수회에서 마드리드의 레알 세미나리오 데 노블레에서 교육을 받았고, 12살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월터 스콧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열렬한 팬이었고, 펠릭스 로페 데 베가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학교 연극 공연에 참여했다.[1]

1833년, 스페인 톨레도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보내졌지만, 1년 동안 게으름을 보낸 후 마드리드로 도망갔다.[1] 1835년 바야돌리드 대학교에 다녔다. 이때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 호세 데 에스프로세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월터 스콧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탐독했다.[4]

2. 2. 문단 데뷔 및 초기 작품 활동

바야돌리드에서 치안 판사의 아들로 태어난 소리야는, 예수회에서 마드리드의 레알 세미나리오 데 노블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열두 살 때 시를 썼으며, 월터 스콧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열렬한 팬이었고, 펠릭스 로페 데 베가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연극 학교 공연에 참여했다.[1]

1833년, 스페인 톨레도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보내졌지만, 1년 동안 게으름을 보낸 후 마드리드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그는 폭력적인 연설을 하고 정부에 의해 즉시 폐지된 신문을 창간하여 그의 절대주의적인 아버지의 친구들을 경악시켰다. 그는 필리핀으로 이송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했고, 그 후 몇 년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1]

풍자 작가인 마리아노 호세 데 라라의 죽음은 소리야를 주목하게 했다. 1837년 2월 라라의 장례식에서 읽은 그의 비가 시는 그를 문학의 주요 인물들에게 소개했다. 1837년 그는 주로 알퐁스 드 라마르틴빅토르 위고를 모방한 시집을 출판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3년 안에 6권의 책을 더 인쇄했다.[1]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와 함께 연극 ''후안 돈돌로''(1839)를 공동 작업한 후, 소리야는 ''카다 콰르 콘 수 라손''(1840)으로 극작가로서의 개인적인 경력을 시작했고, 그 후 5년 동안 22편의 연극을 썼으며, 그중 많은 작품이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의 ''칸토스 델 트로바도르''(1841)는 운문으로 쓰인 국가 전설 모음집으로, 소리야는 호세 데 에스프론세다 다음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1]

2. 3. 작품 경향 및 주요 작품

소리야는 스페인의 낭만주의 작가로, 스페인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의 희곡은 스페인 연극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알퐁스 드 라마르틴빅토르 위고의 영향을 받은 서정시를 주로 썼다. 1837년에 출판한 첫 시집은 큰 호평을 받았고, 이후 3년 동안 6권의 시집을 더 출판했다.[1] 1841년에 출간한 ''칸토스 델 트로바도르''는 운문으로 쓰인 국가 전설 모음집으로, 호세 데 에스프론세다 다음 가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1]

희곡 분야에서 소리야는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와 함께 ''후안 돈돌로''(1839)를 공동 작업한 후, ''카다 콰르 콘 수 라손''(1840)을 시작으로 5년 동안 22편의 희곡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1] 그는 국가적 전설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으며, 오래된 연극을 각색하기도 했다.[1] 예를 들어, ''엘 사파테로 이 엘 레이''는 후안 데 라 호스 이 모타의 ''엘 몬타네스 후안 파스쿠알''을, ''라 메호르 탈론 라 에스파다''는 아구스틴 모레토 이 카바나의 ''트라베수라스 델 에스투디안테 파-아토하''를 각색한 것이다.[1]

소리야의 대표작인 ''돈 후안 테노리오''는 티르소 데 몰리나의 ''부르라 도르 데 세비야''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돈 후안 데 마라나''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이다.[1] 반면 ''산초 가르시아'', ''엘 레이 로코'', ''엘 알칼데 론킬로'' 등은 소리야의 독창적인 작품이다.[1] 소리야는 ''트라이도르, 인콘페소 이 마르티르''(1845)를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았다.[1]

소리야의 작품은 스페인 애국심을 고취하고, 효과적인 무대 연출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엘 카바요 델 레이 돈 산초''는 3주, ''엘 푸냐르 델 고도''는 이틀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러한 속도는 작품의 중복과 장황함 등 기술적인 결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구두장이와 왕》(El zapatero y el Rey, 1839년/1842년)
  • 《산초 가르시아》(Sancho Garcia, 1842년)
  • 《고트족의 단검》(El punal del godo, 1843년)
  • 《돈 후안 테노리오》(Don Juan Tenorio, 1844년)
  • 《열》(La Calentura, 1847년)
  • 《배신자, 불신자, 순교자》(Traidor, inconfeso y martir, 1849년)
  • 《미치광이의 이야기》(Cuentos de un loco, 1853년)

2. 4. 해외 생활과 귀국

184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소리야는 스페인을 떠났다. 그는 잠시 보르도에 거주하다가 파리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의 미완성 시 ''그라나다''가 1852년에 출판되었다.[1] 우울증에 빠진 그는 3년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는 황열병이나 천연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멕시코에서 11년 동안 그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1] 그는 1866년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자신이 잊혀지고 구식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친구들은 소리야가 작은 자리를 얻도록 도왔지만, 공화주의 장관은 나중에 그것을 폐지했다. 그는 특히 1871년 이후 12년 동안 항상 가난했다. 1880년 그의 자서전인 ''레쿠에르도스 델 티엠포 비에호''의 출판은 그의 가난을 완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연극은 여전히 공연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

마침내, 노년에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새로운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는 30,000 레알의 연금, 스페인 아카데미의 명예 금메달, 그리고 1889년에는 국가 계관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2. 5. 말년과 죽음

말년에 이르러 비평가들이 소리야의 작품을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명성을 얻었다. 스페인 아카데미로부터 30000reales의 연금, 명예 금훈장, 그리고 1889년 국민 영예 칭호를 받았다.[1] 그는 1893년 1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1]

초기에 소리야는 매우 빠른 작가로 알려졌다. 그는 3주 만에 ''엘 카바요 델 레이 돈 산초''를 썼고, 이틀 만에 ''엘 푸냐르 델 고도''를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몇 가지 기술적인 결함, 즉 중복성과 장황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의 연극은 종종 스페인 애국심에 호소하며, 배우와 관객은 그의 효과적인 연출을 즐겼다. ''돈 후안 테노리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1]

3. 작품 목록

호세 소리야의 작품은 크게 희곡과 시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 희곡과 시 섹션에서 자세한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3. 1. 희곡


  • Vivir loco y morir máses (미친 듯이 살고 더 빨리 죽어라), 1837
  • Juan Dándoloes (후안 단돌로), 1839
  • Más vale llegar a tiempo que rondar un añoes (제때 도착하는 것이 1년을 배회하는 것보다 낫다), 1839
  • Ganar perdiendoes (잃으면서 얻기), 1839
  • Cada cual con su razónes (각자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1839
  • Lealtad de una mujer y aventuras de una nochees (여자의 충성심과 하룻밤의 모험), 1839
  • 《구두 수선공과 왕》, 제1부, 4막 드라마, 1840; 제2부, 1841
  • El eco del torrentees (급류의 메아리), 1842
  • Los dos virreyeses (두 부왕), 1842
  • Un año y un díaes (1년과 하루), 1842
  • Sancho García, Composición trágica en tres actoses (산초 가르시아, 3막 비극 작곡), 1842
  • Caín pirata. Cuadro de introducción al drama en tres actos titulado Un año y un díaes (카인 해적. 3막 드라마 '1년과 하루'의 서론 그림), 1842
  • El puñal del godoes (고트족의 단검), 1843
  • Sofronia, tragedia en un acto a la manera clásicaes (소프로니아, 고전 방식의 1막 비극), 1843
  • La mejor razón, la espadaes (가장 좋은 이유는 칼이다), 1843
  • El molino de Guadalajaraes (과달라하라의 방앗간), 1843
  • La oliva y el laurel. Alegoría escrita para las fiestas de la proclamación de Su Majestad la Reina doña Isabel II de Españaes (올리브와 월계수.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 폐하의 즉위 축제를 위해 쓰여진 알레고리), 1843
  • Don Juan Tenorio. Drama religioso-fantásticoes (돈 후안 테노리오. 종교적 환상 드라마), 1844
  • La copa de marfiles (상아 잔), 1844
  • El alcalde Ronquilloes (알칼데 론킬로), 1845
  • El rey loco. Drama en tres actoses (미친 왕. 3막 드라마), 1846
  • La reina y los favoritoses (여왕과 총신들), 1846
  • La calenturaes (열병), 1847 (''고트족의 단검''의 제2부)
  • El excomulgado, drama en tres actoses (파문된 자, 3막 드라마), 1848
  • La Creación y El Diluvio Universal. Espectáculo teatral en cuatro actos, divididos en seis parteses (창조와 대홍수. 4막, 6부로 나뉜 연극 쇼), 1848
  • Traidor, inconfeso y mártires (반역자, 자백하지 않은 자, 순교자), 1849
  • El caballo del rey Don Sancho. Comedia en cuatro jornadas y en versoes (돈 산초 왕의 말. 4일간의 희극, 운문), 1850
  • 《구두장이와 왕》 (El zapatero y el Reyes), 1839년/1842년
  • 《산초 가르시아》 (Sancho Garciaes), 1842년
  • 《고트족의 단검》 (El punal del godoes), 1843년
  • 《돈 후안 테노리오》 (Don Juan Tenorioes), 1844년
  • 《열》 (La Calenturaes), 1847년
  • 《배신자, 불신자, 순교자》 (Traidor, inconfeso y martires), 1849년
  • 《미치광이의 이야기》 (Cuentos de un locoes), 1853년

3. 2. 시

제목출판사출판 연도
시집, 1권J. 산차1837년
시집, 2권호세 마리아 레풀레스1838년
시집, 3권호세 마리아 레풀레스1838년
시집, 4권호세 마리아 레풀레스1839년
시집, 5권호세 마리아 레풀레스1839년
시집, 6권호세 마리아 레풀레스1839년
시집, 7권호세 마리아 레풀레스1840년
여름의 밤샘보익스1842년
추억과 환상J. 레풀레스1844년
미치광이의 이야기1853년
추억의 꽃. 히스파노 아메리카 국민에게 바치는 헌사1855년
두 송이 장미와 두 그루 장미 덤불1859년


참조

[1] 서적 Zorrilla y Moral, José
[2] 웹사이트 Life & works of Jose Zorrill https://www.classics[...]
[3] 서적 Zorrilla y Moral, José
[4] 뉴스 200 años del nacimiento de José Zorrilla, el autor de Don Juan Tenorio https://www.europapr[...]
[5] 웹사이트 José Zorrilla (1817/02/21 - 1893/01/23) https://www.buscabio[...]
[6] 서적 Obras de D. Jose Zorrilla. con su biografia por Ildefonso de Ovejas. https://catalog.hath[...]
[7] 웹사이트 José Zorrilla https://www.biografi[...]
[8] 웹사이트 Biografía de José Zorrilla http://www.cerva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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