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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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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한민은 객가 출신의 중국 국민당 초기 지도자로, 신해혁명 이후 광둥 성 총독과 중화민국 임시 정부 비서장을 역임했다. 쑨원 사후 국민당 내에서 왕징웨이, 랴오중카이와 함께 유력한 인물이었으며, 장제스와의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는 케말주의에 영감을 받아 장제스가 정치에 제한적인 군사적 개입을 하는 공화국을 모델로 삼기를 희망했다. 1936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장제스의 남중국 지배 시도와 이에 반발하는 세력 간의 갈등을 촉발했다. 그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후한민의 정치 철학은 개인의 권리가 국가의 구성원 자격의 기능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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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후한민
원어 이름胡漢民
로마자 표기Hu Hanmin
출생 이름후한민
출생일1879년 12월 9일
출생지번위, 광둥, 중국
사망일1936년 5월 12일
사망지광둥, 중화민국
사망 원인뇌출혈
국적중화민국
소속 정당중국 국민당 (서산 회의파)
직책
직업철학자, 정치인
정치 경력
소속 정당중국 국민당
주석1935년 12월 7일 ~ 1936년 5월 12일
이전우즈후이, 리시젠
이후장제스
입법원 원장1928년 10월 8일 ~ 1931년 3월 2일
이전사무실 설립됨
이후린썬
개인 정보
학력
출신 학교호세이 대학

2. 생애

후한민은 객가 출신으로 장시성 지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을 맡기 위해 광둥성 판위로 이주했다. 21세에 거인 자격을 얻었으며, 1902년부터 일본에서 유학했다. 1905년 신문 《민보》의 편집인으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 무장 혁명에 참여했다.

1911년 신해혁명 직후, 광둥성 총독과 임시 정부 비서장을 역임했다. 1913년 제2차 혁명 실패 후 쑨원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쑨원을 위해 일하며 교통부 장관, 수석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24년 중국 국민당 제1차 회의에서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한 1925년에는 국민당 내 유력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기도 했으나, 1927년 녕한 분열 이후 장제스를 지지하며 입법원 원장을 맡았다.

장제스와 협력했으나, 그의 정치 권력 장악에 반대하며 당에 의한 권력 행사를 주장했다. 1931년 장제스에 의해 가택 연금되기도 했지만, 당 내부 압력으로 석방된 후 남중국의 지도자가 되어 일본 침략 저항, 군벌 저항, 장제스에 대한 저항을 옹호했다. 광저우에 경쟁 정부를 세우기도 했으나, 만주 사변으로 내전은 피할 수 있었다.

1935년 유럽 방문 후 장제스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중단했고, 같은 해 12월 국민당 중앙 위원회 상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1월 중국으로 돌아왔으나, 5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호한민의 모습(''Who's Who in China'' 4th ed. (1931))


후한민의 사망 이후, 장제스는 남중국의 자치를 종식시키려 했고, 이는 양광 사건으로 이어졌다.

후한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1912년 신규식이 결성한 신아동제사에 참여하였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신규식이 임시정부 승인 문제로 쑨원을 만날 때 배석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11] 1926년에는 한인 청년들을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게 했으며, 1931년에는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을 만나 한중 연대를 통한 대일 항전을 계획했다.[11]

2. 1. 청말의 활동

후한민은 객가 출신으로 장시성 지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을 맡기 위해 광둥성 판위로 이주했다. 그는 21세에 거인 자격을 얻었다. 1902년(광서제 28년)에 우징헝(오치휘)·뉴융젠 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하여 홍문학원 사범과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우징헝이 일본 정부와 청국 공사에 의해 일본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하자, 후한민은 분노하여 퇴학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저널리스트, 교사로 활동했다. 1904년(광서제 30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 1906년(광서제 32년, 메이지 39년) 6월에 호세이 대학 법정 속성학과 제2반을 졸업했다.[8][9] 동기로는 왕징웨이(왕정위)와 리원판, 구잉펀, 장이펑, 쑨룬위 등이 있다.

1905년(광서제 31년) 가을, 쑨원이 중국 혁명 동맹회(곧 중국 동맹회로 개명)를 설립하자, 후한민은 랴오중카이와 함께 이에 가입했다. 11월에 창간된 동맹회 기관지 『민보』에서 후한민은 논객으로 보황파와의 논쟁에 활약했다. 1907년(광서제 33년) 봄, 쑨원이 일본에서 국외 추방되자, 후한민도 이에 동행하여 량광 봉기에 가담했다. 봉기 실패 후, 후한민은 남양에서 자금 모집 활동을 했으며, 1909년(선통제 원년) 10월, 홍콩에서 성립된 동맹회 남방 지부에서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2. 중화민국 초기 활동

1905년 신문 《민보》의 편집인으로 중국 혁명 동맹에 가입했다.[1]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 차례의 무장 혁명에 참여했다. 1911년 신해혁명 직후, 광둥 성의 총독이자 임시 정부의 비서장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제2차 혁명에 참여했고, 실패 후 쑨원을 따라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중국 국민당을 창당했다. 1917년부터 1921년까지 광둥에 거주하며 쑨원을 위해 일했으며, 처음에는 교통부 장관으로, 나중에는 수석 고문으로 일했다.

1911년 (선통 3년) 10월, 우창 봉기(신해 혁명)가 발발하자 호한민은 광둥의 혁명파 봉기를 지도하여, 11월 9일 광둥의 독립을 선포하고, 도독으로 추대되었다.[4] 이듬해 1912년 (민국 원년) 1월, 난징 임시 정부가 성립되자, 임시 대총통 쑨원을 보좌하는 대총통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쑨원으로부터 양도받아 임시 대총통이 된 후 4월, 호한민은 광둥으로 돌아가 도독을 전임했다. 8월, 쑹자오런이 동맹회를 기반으로 국민당을 결성하자, 호한민은 광둥 지부장이 되었다.

1913년 (민국 2년) 3월, 쑹자오런이 위안스카이의 자객에게 암살되자, 호한민은 반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6월에는 광둥 도독에서 파면되었다(후임은 천중밍). 그 때문에 호한민은 제2차 혁명에 큰 관여를 하지 못하고, 이에 실패한 쑨원이나 랴오중카이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듬해 1914년 (민국 3년) 7월,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이 성립되자, 호한민은 동당 정치부장에 임명되었다. 1916년 (민국 5년) 4월, 몰래 귀국하여, 천치메이 등의 반 위안 활동에 참여했다.

1917년 (민국 6년) 9월, 쑨원이 호법 운동을 시작하고, 광저우에서 호법 군정부(대원수부)가 성립되자, 호한민은 교통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에 호법 군정부가 7총재의 집단 지도 체제로 개편되고, 전춘쉬안이 주석 총재로서 쑨원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았다. 쑨원과 호한민은 분노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1919년 (민국 8년) 8월, 호한민은 쑨원의 지시로 잡지 '건설'을 창간하고, 5.4 운동과 신문화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1921년 (민국 10년) 5월, 쑨원이 비상 대총통이 되자, 호한민은 총참의에 임명되었다.

2. 3. 중국 국민당 성립 이후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 제1차 당대회에서 후한민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9월, 쑨원이 북벌을 시작하자, 후한민은 광둥의 유수를 맡아 대원수의 직무를 대행하고 광둥성장을 겸했다. 다음 달, 광둥 상단의 반혁명 봉기가 일어났지만, 후한민은 이를 진압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후한민은 대원수 대리로서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이후, 후한민은 반공 우파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시작하여, 국민당 우파의 서산회의파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중국 공산당 숙청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8월 20일에, 용공 좌파의 지도자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했다. 후한민은 주모자로 의심받아 실각하고, 9월부터 소비에트 연방으로 가게 되었다.[4] 1926년 4월 말에 후한민은 귀국했지만, 한동안은 겉으로 드러나는 활동을 자제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장제스가 상하이 쿠데타 (4.12 사건)를 일으키고, 왕징웨이 등의 우한 국민 정부에 대항하여 난징 국민 정부를 수립하자, 후한민은 이에 협력하는 형태로 복귀하여, 구잉펀, 우차오수, 장징장과 함께 난징 국민 정부 상무위원의 지위에 올랐다. 국민당에서도 중앙정치회의 주석,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등 요직을 얻었다. 또한 '훈정강령'과 '국민 정부 조직법'의 제정을 주도하여, 1928년 10월에 이를 공포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국민 정부 주석에, 후한민은 입법원장에 각각 취임했다.

2. 4. 장제스와의 권력 투쟁

1930년(민국 19년), 장제스는 훈정 시기 약법 제정을 위해 국민대회 개최를 표명했지만, 호한민은 "총리(쑨원)의 저서에서는 훈정 시기에 약법 제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라며 반대했다. 이는 쑨원의 유지를 따라야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권력 강화에 대한 저항이었다.[5]

호한민은 입법원장 지위를 이용하여 약법 초안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장제스는 1931년(민국 20년) 2월 28일 호한민을 입법원장에서 해임하고 난징의 탕산에 연금했다.[5] 같은 해 5월 5일 국민대회에서 훈정 시기 약법이 성립되어 6월 1일에 공포되었으나, 이는 호한민 지지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같은 해 5월 27일, 왕징웨이, 쑨커 등은 광저우에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반 장제스 성향의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만주 사변 이후 항일을 위한 단결 여론이 높아지면서, 장제스는 10월 14일 호한민을 석방했고, 난징과 광저우 양측은 재결합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에서 물러나고, 린썬이 후임 주석으로 임명되었다.[5]

이후에도 호한민은 광저우에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상무위원을 맡아 "서남파"의 중심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1935년(민국 24년) 12월,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 5. 대한민국 독립운동 지원


  • 1912년 신규식이 한중 양국의 우의 및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에 참여하였다.
  • 1921년 10~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신규식이 임시정부 승인 문제로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을 만날 때 호법정부 비서장으로 배석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 1926년 11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데려온 한인 청년 10여 명을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게 하였다.
  • 1931년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을 면담하고 한중 연대를 통한 대일 항전을 계획하였다.[11]

2. 6. 최후

후한민은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후, 왕징웨이, 랴오중카이와 함께 국민당 내 가장 강력한 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해 8월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후한민은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4] 1927년 녕한 분열 이후, 후한민은 장제스를 지지했고, 난징의 입법원 원장을 맡았다.

장제스 정부와 협력하기로 했으나, 장제스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반대하고 당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군벌 장쉐량에게 충성을 대가로 주요 정부 직책을 제안한 것에 대해 "더러운 거래"라고 비난하며 장제스와 충돌했다. 1930년 10월, 장제스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왕징웨이가 초안 헌법을 도입하자, 후한민과 장제스의 협력은 무너졌다. 장제스는 자신의 임시 헌법 공포를 보류하겠다는 이전의 합의를 후한민과 깨뜨렸다. 후한민은 헌법이 쑨원의 가르침을 국가의 법으로 시행하는 데 있어 쑨원의 제자들의 역할을 뒷전으로 밀어낼 것이고, 장제스가 헌법을 사용하여 권력 독점을 합법화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그 계획을 강력하게 비판했다.[5]

1931년 2월 28일, 후한민은 새로운 임시 헌법에 대한 분쟁으로 장제스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다. 당 내부의 압력으로 장제스는 그를 석방했다. 이후 후한민은 남중국의 강력한 지도자가 되어 일본의 침략 저항, 군벌 저항, 그리고 자칭 지도자 장제스에 대한 저항이라는 세 가지 정치 원칙을 옹호했다. 국민당 내 반 장제스 파벌은 광저우에 모여 경쟁 정부를 세웠고, 장제스의 총통과 원장의 이중 직책 사임을 요구했다. 만주 사변으로 내전은 피할 수 있었다. 후한민은 천지탕과 신광시 파벌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의 중심지인 남중국을 계속 통치했다. 그곳에서 그는 장제스의 난징 정권을 불신하기 위해 부패와 연고주의가 없는 모범적인 정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후한민은 명목상 광둥 및 광시 군벌 연합에 의해 설립된 "서남 정치 위원회"를 이끌었지만, 광둥 군벌 천지탕은 그의 영향력을 의심했고 그가 광저우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후한민은 대신 군벌의 실질적인 통제 하에 홍콩에 거주하며 천지탕으로부터 급여를 받았다.[6]

후한민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행동을 옹호하며 장제스에게 "우리의 조국을 찢고 유린한 외국 세력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채택하지 못한 무기력한 실패"라고 비판했다.[7]

후한민은 유럽을 방문했고 1935년 6월 장제스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중단했다. 1935년 12월 국민당 제5차 회의 제1차 회의에서 그는 불참 상태에서 중앙 위원회 상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후한민은 1936년 1월 중국으로 돌아와 1936년 5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광저우에 거주했다.

그의 죽음은 위기를 촉발시켰다. 장제스는 후한민을 남중국에서 충성파로 교체하고 후한민이 누리던 남부의 자치를 종식시키려 했다. 이에 대응하여, 천지탕과 신광시 파벌은 장제스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소위 "양광 사건"에서 천지탕은 장제스가 천지탕의 많은 장교들에게 이탈을 매수하고 음모가 실패하면서 광둥 성지사에서 강제로 사임했다.

3. 정치 철학

후한민은 케말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혁명적 민족주의 이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2][3] 그는 장제스아타튀르크처럼 정치에 제한적으로 군사 개입을 하는 공화국을 모델로 삼기를 바랐다.[2][3]

후한민은 장제스의 정치 권력 장악에 반대하며, 당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제스가 군벌 장쉐량에게 충성을 대가로 주요 정부 직책을 제안한 것을 "더러운 거래"라고 비난하며 장제스와 갈등을 빚었다. 1930년 10월, 왕징웨이가 초안 헌법을 도입하면서 후한민과 장제스의 협력 관계는 무너졌다. 후한민은 이 헌법이 쑨원의 가르침을 국가의 법으로 시행하는 데 있어 쑨원의 제자들의 역할을 축소하고, 장제스가 헌법을 이용해 권력 독점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강하게 비판했다.[5]

1931년 2월 28일, 후한민은 새로운 임시 헌법에 대한 분쟁으로 장제스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으나, 당 내부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남중국의 강력한 지도자가 되어 일본의 침략 저항, 군벌 저항, 그리고 자칭 지도자 장제스에 대한 저항이라는 세 가지 정치 원칙을 내세웠다.

후한민은 광둥 및 광시 군벌 연합에 의해 설립된 "서남 정치 위원회"를 이끌었지만, 광둥 군벌 천지탕은 그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그가 광저우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후한민은 군벌의 실질적인 통제 하에 홍콩에 거주하며 천지탕으로부터 급여를 받았다.[6]

후한민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장제스에게 "우리의 조국을 찢고 유린한 외국 세력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채택하지 못한 무기력한 실패"라고 비판했다.[7]

후한민의 정치 철학은 개인의 권리가 국가 구성원 자격의 기능이라는 것이었다.

참조

[1] 간행물 Thuyết Trần https://www.scribd.c[...] Hải Phòng Publishing House
[2] 웹사이트 Interactions Between Two Republics: The Republic of Turkey and the Republic of China (1923-1949) | BRIQ https://briqjournal.[...]
[3] 웹사이트 與胡漢民的約法之爭,蔣介石第二次下野的直接原因 https://twgreatdaily[...] 2021-03-21
[4] 뉴스 CHINA: Swath to Success https://web.archive.[...] 1934-07-23
[5] 서적 Power by Design: Constitution-Making in Nationalist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
[6] 서적 Power by Design: Constitution-Making in Nationalist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
[7] 뉴스 CHINA: Swath to Success https://web.archive.[...] 1934-07-23
[8] 문서 法政大学大学史資料委員会編(1988)、145頁。
[9] 문서 法政大学大学史資料委員会編(1988)、145頁における表記は旧名の「胡衍鴻」となっている。
[10] 웹인용 호한민 https://terms.naver.[...]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21-02-18
[11] 웹인용 호한민 https://e-gonghun.mp[...] 202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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