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1. 개요
황태성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조선공산당, 조선건국동맹에서 활동했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1961년 남북통일 협상을 위해 밀사로 남한에 왔다가 체포되어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 사형 과정,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 시도가 현재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이름 | 황태성 |
|---|---|
| 원래 이름 | 黃太成 |
| 출생일 | 1906년 4월 27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상주 |
| 사망일 | 1963년 12월 14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교도소에서 전격 사형(총살형) 집행됨. |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직책 | 북조선국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 |
|---|---|
| 임기 시작 | 1960년 2월 29일 |
| 임기 종료 | 1961년 3월 31일 |
| 주석 | 최용건 북조선국 국가원수 |
| 총리 | 김일성 북조선국 총리 |
| 정당 | 무소속 |
| 주요 경력 | 북조선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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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중퇴 경성 연희전문학교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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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인척 | 임미정(생질녀) 권상릉(생질서) 박명란(외사촌 누이동생) 김민하(친척 조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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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
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 -
현진건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다. -
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
대한민국 제3공화국 -
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 제3공화국 -
이명박
2. 주요 경력과 활동
*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태어났다.
* 1921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 1924년 일본인 교장 배척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했다.
* 1925년 경성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 1927년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 결성에 참여했고, 김천 지역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다.
* 1929년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했다. 출옥 후 경상북도 김천에서 다시 활동했다.
* 1935년 일본 경찰에 다시 검거되어 3년 6개월 복역했다.
* 1944년 일제 총독부의 요청으로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 전라남북도 책임자로 활동했다.
* 1945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다.
* 1946년 10월 월북했다.
* 1948년 황해도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업성 지방관리국장, 외무성 부상, 상업성 부상을 거쳐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를 역임했다.
* 1961년 8월 30일 대한민국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남북통일 협상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 1961년 12월 20일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을 체포하여 간첩죄를 적용했다.
* 1963년 12월 14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의 어느 산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3. 황태성 사건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인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에 갈 때 황태성에게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으며, 남로당에 입당할 때도 황태성이 보증을 섰다. 황태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외무성 부상, 상업성 부상,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를 지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황태성은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북통일 협상을 하겠다며 대남 밀사로 내려왔다. 그는 외종매(外從妹)의 아들인 김민하의 협조를 받으며 연락을 취하던 중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되어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박정희는 황태성이 사형 집행되었을 때 그의 사진을 보면서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으셨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6년 황태성의 생질녀 임미정과 그녀의 남편 권상릉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황태성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내용을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