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양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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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의양황후는 남명의 융무제의 황후이다. 길안부 출신으로, 숭정 5년 당왕 주율건의 왕비가 되었으며, 융무제가 즉위한 후 황후가 되었다. 정치에 참여했으나 융무제와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 청나라 군대가 복건성을 함락하자 자결했으며, 영력제에 의해 효의정렬자숙현명승천창성양황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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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의양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휘 | 사문황후 (思文皇后) |
| 시호 | 효의정렬자숙현명승천창성양황후 (孝毅貞烈慈肅賢明承天昌聖襄皇后) |
| 씨족 | 증 (曾) |
| 생애 | |
| 출생 | 1605년 (만력 33년) |
| 사망 | 1646년 9월 17일 (융무 2년 8월 9일) |
| 가족 | |
| 아버지 | 증문언 (曾文彥), 길수백 (吉水伯) |
| 어머니 | 하씨 (何氏) |
| 배우자 | 융무제 |
| 자녀 | 장경태자 주임원 |
| 경력 | |
| 책봉 | 당왕비 (唐王妃), 양왕비 (唐王妃), 황후 |
| 재위 | 1645년 - 1646년 |
| 능묘 | |
| 능묘 위치 | 알 수 없음 |
2. 생애
숭정 5년(1632년), 당왕세자 주율건(朱聿鍵)이 당왕으로 즉위하자, 세자빈 증씨는 당왕비가 되었다. 숭정 9년 12월(1637년), 주율건이 폐서인이 되자 증씨도 폐서인이 되었다.
숭정 17년(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후 남명 홍광제가 즉위하면서 주율건은 복권되어 양왕(陽王)으로 봉해졌다. 순치 2년/홍광 원년(1645년) 7월 당왕으로 복봉되었고, 8월에 홍광제가 청나라 군대에 잡혀 죽자, 주율건이 융무제로 즉위하여 증씨는 황후가 되었다.
순치 3년/융무 2년(1646년) 8월, 청나라 군대가 복건성을 함락하고 융무제가 사로잡히자, 황후 증씨는 복건의 바다에 투신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수감 생활
증씨는 길안부길수현 출신으로, 서생 증문언과 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숭정 5년(1632년), 당왕세자 주율건(훗날 융무제)의 세자빈이 되었고, 주율건이 당왕으로 즉위하자 당왕비가 되었다.[1] 숭정 9년 12월(1637년), 당왕 주율건이 폐서인이 되자, 증씨도 폐서인이 되어 봉양 고장(황족 감옥)에 함께 수감되었다. 활발하고 강인하며 용감한 기질을 지녔던 증씨는 옥중에서도 숭정제에게 항의 상소를 올리는 등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2. 2. 남명 황후 시절
숭정 17년(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후 남명의 홍광제가 즉위하면서, 폐서인이었던 주율건은 복권되어 양왕(陽王)으로 봉해졌다. 순치 2년/홍광 원년(1645년) 7월, 주율건은 다시 당왕으로 봉해졌고, 8월에 홍광제가 청나라에 사로잡히자 융무제로 즉위하여 증씨는 황후가 되었다.[1] 황후 증씨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융무제와 자주 의견 충돌을 빚었다.2. 3. 최후
순치 3년/융무 2년(1646년) 8월, 청나라 군대가 복건성을 함락하고 융무제가 사로잡히자, 황후 증씨는 복건의 바다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1] 증씨가 투신할 때 10명 정도의 환관도 함께 순사했다.[1]3. 존호, 시호 및 평가
영력제는 융무제와 황후 증씨를 각각 사문황제(思文皇帝)와 사문황후(思文皇后)로 존봉하고, 나중에 효의정렬자숙현명승천창성양황후(孝毅貞烈慈肅賢明承天昌聖襄皇后)라는 시호를 추존했다. 증씨는 강인하고 용감하며 정치에 적극 참여한 여걸로 평가받지만, 융무제와의 잦은 갈등은 한계로 지적된다.[1]
3. 1. 존호 및 시호
1647년 영력제가 즉위한 후 융무제에게 사문황제(思文皇帝), 황후 증씨에게는 '''사문황후(思文皇后)'''로 존봉하였으며, 후에 시호를 주어 '''효의정렬자숙현명승천창성양황후(孝毅貞烈慈肅賢明承天昌聖襄皇后)'''로 추존하였다.3. 2. 평가
증씨는 강인하고 용감하며,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걸로 평가받는다. 특히, 융무제와 함께 투옥되었을 때 보여준 강인함과 남편에 대한 지극한 정성은 후대에 귀감이 되었다.[1] 하지만, 정치 참여 과정에서 융무제와 잦은 갈등을 빚은 점은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1]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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