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성황후
1. 개요
효정성황후는 청나라 도광제의 후궁으로, 함풍제, 동치제 시대에 걸쳐 황후로 추존된 인물이다. 몽골 코르친 부족 출신으로, 도광제 즉위 초 귀인으로 입궁하여 귀비, 황귀비에 봉해졌으며, 도광제의 사후 함풍제에 의해 강자황태후로 존봉되었다. 사후 효정강자필천보성황후로 추존되었으며, 동치제 때 시호가 증시되어 최종적으로 효정강자의소단혜장인화신필천무성성황후로 불렸다. 도광제의 아들인 공친왕 혁흔을 낳았으며, 함풍제 사후 신유정변에서 서태후와 함께 섭정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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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소청(少晴) |
|---|---|
| 존칭 | 강자황태후(康慈皇太后) |
| 시호 | 효정강자의소단혜장인화신필천무성성황후(孝靜康慈懿昭端惠莊仁和愼弼天撫聖成皇后) |
| 묘호 | 없음 |
| 출생일 | 1812년 6월 19일 (가경 17년 5월 11일) |
| 사망일 | 1855년 8월 21일 (함풍 5년 7월 9일) |
| 사망 장소 | 원명원의 수강궁 |
| 매장지 | 서청 동릉의 모릉 |
| 가문 | 보르지기트 씨 (博爾濟吉特) |
| 황후 | 사후 추존 |
|---|---|
| 황태후 | 1855년 8월 13일 – 1855년 8월 21일 |
| 칭호 | 강자황태후 |
| 배우자 | 도광제 |
|---|---|
| 자녀 | 순화군왕 혁강 혜질군왕 혁계 수은고륜공주 공충친왕 혁흔 |
| 아버지 | 화량아 |
|---|---|
| 어머니 | 아이신 교로 씨 |
| 사후 시호 | 효정강자 의소단혜 장인화신 필천무성 성황후 (孝靜康慈懿昭端惠莊仁和愼弼天撫聖成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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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제의 황후 -
효목성황후
효목성황후는 청나라 도광제의 비이자 가경제의 며느리이며, 도광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고, 니오후루씨 가문 출신으로 가경제 즉위 전에 사망하여 서청릉의 목릉에 안장되었다. -
도광제의 황후 -
효신성황후
효신성황후는 도광제의 황후이며, 수명아의 딸로 1822년 황후로 책봉되어 1833년에 사망하여 효신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청나라 흥망사 등 드라마에 등장한다. -
청나라의 추존황후 -
서태후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를 낳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청나라 말기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양무 운동 추진 및 의화단 지원 등 다양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청나라의 추존황후 -
효강장황후
효강장황후는 청나라 순치제의 후궁이자 강희제의 어머니이며, 강희제를 낳은 후 황태후가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효릉에 부장되었다. -
청나라의 섭정 -
장쉰
장쉰은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청나라 복벽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은퇴하여 사업가로 활동했다. -
청나라의 섭정 -
이홍장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기여하고 직례총독으로서 외교를 주도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나, 청일 전쟁 패배와 부패 논란 등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청나라 격변기와 근대화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효정성황후는 도광제 즉위 초년에 입궁하여 귀인(貴人)으로 책봉되었다. 도광 6년(1826년)에 황2남 혁강(奕綱, 순화군왕으로 추증)을 낳고 빈(嬪)으로 승봉되었으나, 다음 해에 혁강이 사망하여 비(妃)로 승봉되었다. 도광 9년에 혁계(奕繼, 혜질군왕으로 추증)를 출산하고, 도광 10년에는 황6녀(훗날 수은고륜공주), 도광 12년에는 황6남 혁흔(훗날의 공친왕)을 출산했다. 도광 14년에 황귀비 뉴호록 씨(효전성황후)가 황후로 책립되면서 귀비(貴妃)로 특진되었다.
도광 20년, 효전성황후가 급서하자 황귀비(皇貴妃)로 진봉되어 육궁을 통솔했다. 청나라에서 황귀비는 황후가 사망했을 때 다음 황후 내정자가 황후 대리직을 수행하는 작위였다. 그러나 도광제는 효전성황후를 추모하며 황후를 다시 책립하지 않아 6년간 황후 자리가 공석이었다.
함풍제는 즉위 후 황귀비 보르지긴 씨를 황태후에 준하는 예우로 효자황귀비(孝慈皇貴妃)로 존호를 올렸다. 함풍 5년(1855년) 7월, 병환으로 위독해지자 함풍제는 그녀를 강자황태후로 존봉했고, 9일 뒤 사망하자 황후로 추존했다. 시호는 효정강자필천보성황후(孝靜康慈弼天輔聖皇后)로, 도광제의 다른 황후들과 달리 시호 마지막에 도광제의 시호 '성(成)' 자가 추가되지 않았다.
동치제는 즉위 후 효정황후에게 '의소단혜(懿昭端惠)'와 도광제의 시호 '성(成)'을 추가하고, 그녀의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셔 정식 황후로 추존했다.
2.1. 가계와 초기 생애
효정성황후의 본명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평람기 출신의 코르친 몽골족이었다. 훗날 효정성황후는 가경제 17년(1812년) 5월 11일(음력)에 태어났으며, 이는 그레고리력으로 1812년 6월 19일에 해당한다.
그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2.2. 도광제 시대
도광제 즉위 초년에 입궁하여 귀인(貴人)으로 책봉되었다. 도광 6년(1826년), 15세의 나이로 회임하여 황2남인 혁강(奕綱: 순화군왕으로 추증)을 낳고 빈(嬪)으로 승봉되었다. 다음 해인 도광 7년에 혁강이 사망하여 이를 위로하는 차원으로 비(妃)로 승봉되었다. 도광 9년에 혁계(奕繼: 혜질군왕으로 추증)를 출산, 도광 10년에 도광제의 황6녀(훗날 수은고륜공주로 책봉)를, 도광 12년에 황6남 혁흔(奕訢: 공친친왕으로 책봉, 훗날의 공친왕)을 출산했다. 도광 14년에 황귀비 뉴호록 씨(효전성황후)가 황후로 책립되면서 이를 기념해 정비(靜妃)로 있던 박이제길특 씨도 특진하여 귀비(貴妃)로 승봉되었다.
도광 20년, 효전성황후가 급서하자 차기 황후로서 황귀비(皇貴妃)로 진봉되어 육궁을 통솔했는데, 청나라의 황귀비는 황후가 사망했을 시 상례(喪禮)를 마치기까지 차기 황후 내정자를 봉작해 황후 대리직을 수행토록 하는 작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각별히 사랑했던 효전성황후의 죽음에 깊이 애도한 도광제는 효전성황후의 상례를 마친 뒤에도 황후를 책립치 않아 결국 도광제가 서거하기까지 6년 간 황후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2.3. 함풍제 시대
함풍제는 황위에 오른 뒤 황귀비 보르지긴 씨를 사실상 황태후의 예우로 받들어 효자황귀비(孝慈皇貴妃)로 존호를 올렸는데, 호(號)에 효(孝)를 쓸 수 있는 건 황후(后)에게만 한정되었다. 함풍제는 보르지기트 씨를 황태후로 책봉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대신 "강자황귀태비(康慈皇貴太妃)"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황실 관례에 따르면 강자황귀태비는 함풍제의 생모도 아니었고, 도광제가 생존해 있을 당시 황후의 지위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태후의 지위를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비록 함풍제가 그녀의 황태후 책봉 요구를 무시했지만, 그는 그녀를 의붓어머니처럼 존경하며 대했다.
1852년, 강자황귀태비는 선황제의 살아있는 후궁 중 최고위였기에 함풍제의 후궁이 될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고, 이때 간택된 사람이 훗날 동태후와 서태후로 유명한 효정현황후와 효흠현황후이다.
함풍 5년(1855년) 7월, 그녀가 병환으로 위독해지자 함풍제는 그녀를 황태후로 존봉하여 강자황태후로 올렸으며, 9일 뒤 그녀가 44세(만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황후로 추존했다. 그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아들 이신과 함께 사망 전에 황태후의 칭호를 얻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이신은 함풍제의 완전한 동의 없이 어머니를 존경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황제는 불쾌했지만, 공공연한 망신을 피하기 위해 나중에 마지못해 그 칭호를 인정했다.
그녀에게 추시된 시호는 효정강자필천보성황후(孝靜康慈弼天輔聖皇后)로, 도광제의 다른 황후들과는 달리 시호의 마지막에 도광제의 마지막 시호인 성(成)이 더해지지 않았다. 이는 명나라에서 서후(庶后)를 추존하던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가까이는 청의 3대 황제인 세조 순치제의 서후(庶后) 효헌황후 동악 씨가 그녀의 정통성을 부정한 강희제로 인해 순치제의 시호 마지막 글자를 받지 못한 바 있다. 함풍제는 강자황태후가 결코 황후의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태묘(太廟)에 자리를 주지 않았고, 이는 그녀가 조상 숭배 의식에 포함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1857년, 강자황태후는 청 서릉(清西陵)의 목릉(慕陵)에 안장되었다.
2.4. 동치제 시대와 사후
함풍제는 효전성황후의 아들로, 도광제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그는 황귀비 보르지긴 씨를 사실상 황태후처럼 예우하며 효자황귀비(孝慈皇貴妃)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러나 황후(后)에게만 허락된 '효(孝)' 자를 사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함풍 5년(1855년) 7월, 보르지긴 씨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함풍제는 그녀를 강자황태후(康慈皇太后)로 높였고, 9일 후 그녀가 44세(만 43세)로 사망하자 황후로 추존했다. 이때 추시된 시호는 효정강자필천보성황후(孝靜康慈弼天輔聖皇后)였다. 도광제의 다른 황후들과는 달리 시호 마지막에 도광제의 시호 '성(成)' 자가 추가되지 않았는데, 이는 명나라에서 서후(庶后)를 추존하던 형식을 따른 것이었다.
함풍제 사후, 동치제가 즉위하여 효정황후에게 '의소단혜(懿昭端惠)'와 도광제의 시호 '성(成)'을 추가하고, 그녀의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셔 정식 황후로 추존했다. 훗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때 시호가 다시 추가되어 최종 시호는 효정강자의소단혜장인화신필천무성성황후(孝靜康慈懿昭端惠庄仁和慎弼天撫聖成皇后)가 되었다.
3. 논란과 평가
효정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크게 시호와 관련된 논란, 묘소 문제로 나눌 수 있다.
함풍제(咸豐帝)는 도광제(道光帝)의 후궁이었던 보르지기트 씨에게 황태후 칭호를 주는 것을 꺼렸다. 이는 황실 관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르지기트 씨와 그녀의 아들 이신(奕訢)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보르지기트 씨는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과 함께 황태후 칭호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함풍제는 마지못해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함풍제는 그녀가 황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시호에 "성(cheng)" 자를 추가하지 않았고, 태묘(太廟)에도 자리를 주지 않았다. 결국 "성" 자는 동치제(同治帝) 때에 이르러서야 추가되었다.
3.1. 시호 논란
함풍제(咸豐帝)는 도광제(道光帝) 사후 황제로 즉위하면서, 도광제의 후궁이었던 보르지기트 씨에게 황태후(皇太后) 칭호를 주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강자황귀태비(康慈皇貴太妃)"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이는 황실 관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르지기트 씨와 그녀의 아들 이신(奕訢)은 만족하지 않았다.
1852년, 강자황귀태비는 함풍제의 후궁을 선택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이때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와 서태후(西太后)를 간택하였다.
1855년, 강자황귀태비는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 이신과 함께 황태후 칭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신은 함풍제의 동의 없이 어머니를 존경하는 조서를 발표했고, 함풍제는 마지못해 이를 인정했다. 그녀는 1855년 8월 13일에 강자황태후가 되었지만, 8일 후에 사망했다.
1857년, 강자황태후는 청 서릉(清西陵)의 목릉(慕陵)에 안장되었고, "효경황후(孝靜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함풍제는 그녀가 황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도광제의 황후임을 나타내는 "성(cheng)" 자를 시호에 추가하지 않았고, 태묘(太廟)에도 자리를 주지 않았다.
도광제의 많은 자녀를 낳은 정비 보르지기트 씨는 황후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들 공친왕의 노력으로 함풍제에게서 "효정황후"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성(cheng)" 자는 동치제(同治帝) 때에 이르러서야 추가되었다.
도광제의 유지에 따라 보르지기트 씨는 무릉비원침에 매장되었지만, 공친왕은 생모의 보정을 벽으로 둘러싸 "황후"의 우위를 나타내려 했다. 이후 동치제 초기에 공친왕이 정변으로 실권을 잡자, 두 황태후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효정성황후"라는 시호를 추존하고 태묘에 위패를 봉안했다.
3.2. 묘소
효정성황후의 묘소는 서릉의 모동릉이다.
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박이제길특 화량아(博尔吉济特 花良阿) | 육부 형부에서 5품 문관(員外郎)으로 재직, 1등 공작(一等公) 작위 |
| 어머니 | 아이신 교로씨 | |
| 외조부 | 영석(永錫) | 1778년 ~ 1821년 숙친왕 작위, 호격의 증손자 |
| 외조모 | 남두루씨(那木都鲁氏) | 영석의 정실 부인 |
| 오빠 | (불명) | 1명 |
| 여동생 | (불명) | 1명 |
| 남편 | 선종 도광제 애신각라 민녕(愛新覺羅 旻寧) | 청나라 8대 황제 |
| 장남 | 순화군왕 혁강(奕綱) | 조졸 |
| 차남 | 혜질군왕 혁계(奕繼) | 조졸 |
| 삼남 | 공친친왕 혁흔(奕訢) | |
| 장녀 | 수은고륜공주 | 도광 25년 부찰 경수(富察 景壽)에게 하가 |
5.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 1988년 드라마 청의흥망에서 배우 온설기가 연기했다.
* 1990년 드라마 청의흥망에서 배우 펑소보가 연기했다.
* 2011년 드라마 궁쇄심옥에서 배우 호정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