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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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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량은 397년 선비족 독발오고가 건국한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독발부는 380년대 후량 건국 이후 장대예의 난을 지원했으나 실패하며 세력이 약화되었고, 독발오고는 후량에 복속되었다. 397년 서평왕을 자칭하며 금성을 점령하고 남량을 건국했으며, 이후 무위왕, 양왕을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남량은 북량, 후진, 서진 등 주변 국가들과의 대립 속에서 쇠퇴하여 414년 서진에 멸망했다. 남량은 청해성 지역 개발에 기여했으며, 멸망 후 독발씨 일족은 북위에 귀순하거나 토번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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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량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남량
지위속국
제국후진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기간397–404
408–414
사건 1독발녹단의 후진에 대한 항복
사건 1 날짜404년
사건 2독발녹단의 고장 진입
사건 2 날짜406년
사건 3독발녹단이 양무에서 혁련발발에게 패배
사건 3 날짜407년
사건 4독발녹단의 독립 재주장
사건 4 날짜408년
이후 사건독발녹단의 사망
이후 날짜415년
이전 국가 1후량
계승 국가 1서진
계승 국가 2북량
16국 시대 400년경
16국 시대 410년경
수도련천 (397–399)
낙도 (399, 402–406, 410–414)
서평 (399–402)
고장 (406–410)
지도자 1독발오고
지도자 2독발리록고
지도자 3독발녹단
지도자 1 재임 시작397–399
지도자 2 재임 시작399–402
지도자 3 재임 시작402–414
직책
현재 국가중국
기타 정보
중국어 간체南凉
병음Nán Liáng
참고 문헌http://zh.wikisource.org/wiki/十六國春秋/卷12
다른 뜻남량 (AV 여배우)
과거의 국가는 양 (남조)

2. 역사

397년 독발오고가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점령하면서 남량이 건국되었다. 남량을 건국한 독발오고는 후량의 내전에 개입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398년에는 무위왕(武威王)을 자칭하였고, 399년에는 수도를 낙도(樂都 :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옮겼다. 독발오고가 죽자 동생 독발리록고가 뒤를 이어 무위왕에 즉위하였다.

독발리록고는 후량과 대립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401년에는 황제를 자칭하려다 그만두고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같은 해 후진이 후량을 공격하였는데, 후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독발리록고는 영토인 광무(廣武)를 포기하고 철수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하였다. 후량이 후진에 복속하자 독발리록고도 후진의 작위를 받아 광무공(廣武公)에 책봉되었다. 후진군이 물러가자 독발리록고는 북량, 후량 등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402년에 독발리록고가 죽자 동생 독발녹단이 뒤를 이었다.

402년 3월, 독발녹단은 량왕(涼王)을 칭하고 즉위했다. 남량의 국명은 이 량왕 즉위에서 유래한다. 독발녹단은 서평에서 낙도로 도읍을 옮겨 이곳을 크게 증축하여 왕도로서 위용을 갖추었다.[1] 독발녹단은 후량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후량이 후진에 나라를 넘기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복속하였다. 이후 독발녹단은 북량과 대립하였는데, 406년에 북량을 공격하여 노략질한 공물을 후진에 바치고 그 대가로 고장의 영유권을 얻었다. 독발녹단은 고장을 강제로 점령하고 양주의 중심지를 장악하였으며 수도를 고장으로 옮기고 408년에는 다시 양왕을 자칭하였다.

407년부터 남량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독발녹단은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량으로 쳐들어갔으나 저거몽손에게 대패하였다. 같은 해, 혁련발발이 이끄는 (夏)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408년 후진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국가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409년410년, 북량 원정을 감행했지만, 계속 패배하였다. 독발녹단의 양주 경영은 북량, 하(夏), 후진 등의 침입 및 내부 반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결국 410년에 본거지인 영남(嶺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고장을 포기하고 다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낙도 천도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북량과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매번 북량에게 패배하여 아들을 인질로 바쳐야만 했다. 411년 북량, 토욕혼, 서진의 공격을 받아 영토가 축소되었다. 413년에도 북량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414년에 서쪽의 속령 을불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출정하여 이를 진압하였으나, 독발녹단이 수도를 비운 사이 서진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량은 멸망하였다.

2. 1. 부족 시대

선비족 독발부는 대대로 양주(凉州) 남부(칭하이성 북동부)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 386년, 후량이 건국되었는데, 전량의 장씨(張氏) 왕가 출신이었던 장대예(張大豫)가 후량에 맞서 난을 일으켰다. 독발부의 수장 독발사복건은 장대예를 지원하여 후량과 싸웠으나 387년에 장대예의 난이 진압되자 독발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394년에 독발사복건이 죽자 장자 독발오고가 뒤를 이었는데, 독발오고는 후량에 복속하여 관군대장군·하서선비대도통(冠軍大將軍·河西鮮卑大都統)에 임명되었다. 395년에는 칭하이 성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를 무너뜨리고 염천보(廉川堡)를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 396년에 후량의 여광이 대량천왕(大凉天王)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해 후량의 관직을 받지 않고 독립하였다.

3세기 초, 선비 탁발부의 한 추장이었던 필고는 부민을 이끌고 탁발부에서 이탈하여, 음산 일대에서 멀리 서쪽의 감숙성하서 방면으로 옮겨 과 강족과 섞여 살았다. 이 때문에 독발부(수전 때 독발씨로 성을 개칭)는 일반적으로 하서 선비라고 칭한다. 256년부터 263년에 걸쳐 의 진서장군·도독 농우 제군사였던 등애는, 에 대항하기 위해 비한족을 대량으로 위의 영내로 끌어들였고, 하서 선비도 이때 옹주·량주 경계(후의 진주의 땅)에 거주했다.

267년, 서진이 토지법의 개혁(점전·과전제)을 실시하자 서북 지역의 비한족은 반발했고, 270년, 독발부의 족장이었던 수기능은 진주 일대의 비한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독발수기능의 난. 270년- 279년), 량주 자사인 소유(소칙의 아들)를 전사시켰다. 당시의 진주 자사는 호열이었고, 과거 종회를 따라 촉을 멸망시킨 맹장이었지만, 270년 6월, 독발수기능은 만곡퇴의 싸움에서 그를 패사시켰다. 수기능은 같은 해 안서장군 석감을, 271년에는 량주 자사인 견홍을 격파했고, 사마량, 두예, 가충 등의 토벌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수기능의 반란은 옹·진·량 삼주로 확대되었고, 황제 사마염으로 하여금 이를 ·의 해보다 심하다고 탄식하게 했다.

275년277년, 사마염은 사마준문앙(위의 문흠의 아들)을 파견하여 수기능을 격파하고, 마침내 그를 항복시켰다. 그런데 278년, 독발수기능의 당숙뻘 약라발능이 량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곧 수기능은 이에 호응하여 다시 량주 일대를 점거했다. 279년, 서진은 오를 멸망시키기 위해 주력을 기울이는 한편, 마륭을 파견하여 수기능을 토벌하게 했다. 수기능의 병사는 전군 철갑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마륭은 좁은 땅에 자석(자철광)을 쌓아 움직임을 둔하게 하여 이를 대파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수기능은 부하의 몰골능에게 살해되었고, 10년에 걸친 서북의 대란은 진정되었다.

수기능이 멸망하자 독발부의 세력은 현저하게 쇠퇴하여 량주의 광무군(현재의 감숙성영등현) 부근에서 유목하며 서진·전량·전진에 복속했다.

2. 2. 남량 건국

397년 1월, 선비 독발부의 수장 독발오고는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서평왕을 자칭하고 염천보(廉川堡)를 도읍으로 삼아 연호를 태초 원년이라 했다. 역사학계는 이를 남량(南涼)의 건국으로 본다. 같은 해 6월, 후량 내부의 건강군에서 단업저거몽손에게 옹립되어 북량을 건국했고, 8월에는 후량의 도읍 고장(姑臧)에서 곽언이 반란을 일으켜(곽언의 난, 397년-398년) 후량은 내란 상태가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남량은 북량, 서진, 곽언과 결탁하여 후량 포위망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398년, 곽언은 저족(氐族)의 양궤를 옹립하여 후량에 저항했지만, 반격을 받아 고장에서 철수하여 오고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오고는 이에 응하여 후량 군을 격파하고, 나아가 황수(湟水) 유역의 강족 추장 양기를 멸망시켜 기반을 다진 후, 저족의 양궤를 복속시키고 12월에는 무위왕으로 개칭했다. 399년, 오고는 도읍을 낙도로 옮겼고, 후량에 맞서 대등하게 군사 작전을 펼쳤지만, 같은 해 6월 낙마하여 중태에 빠졌고, 동생 독발리록고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곧 사망했다.

399년 8월, 독발리록고는 무위왕을 칭하고 서평으로 도읍을 옮겨 북량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같은 해, 후량에서는 여광이 죽고 여찬이 대량천왕의 자리를 빼앗아 빈번하게 정벌을 되풀이했다. 400년, 이록고는 저족의 양궤를 처단하여 국내를 통일하고, 후량의 군대를 두 차례 격파하여 하서(河西) 여러 정권 중 최대 세력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관중의 후진이 서진을 멸망시키고 하서로 진출하자, 이록고는 후진에 사자를 보내 신하를 자처하며, 뛰어난 외교로 세력 발전에 힘썼다. 401년, 이록고는 하서왕으로 개칭하고, 새롭게 대량천왕으로 즉위한 후량의 여륭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후진의 요석덕은 장기간에 걸쳐 후량의 도읍 고장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이로 인해 후량은 현저히 쇠락하게 되었고, 남량과 북량은 하서의 패권을 두고 적대 관계에 들어갔다. 402년 3월, 이록고는 중병에 걸려 동생 독발녹단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했다.

2. 3. 남량의 발전과 쇠퇴

397년 독발오고는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점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남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남량을 건국한 독발오고는 후량의 내전에 개입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398년에는 무위왕(武威王)을 자칭하였고, 399년에는 수도를 낙도(樂都 :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옮겼다. 독발오고가 죽자 동생 독발리록고가 뒤를 이어 무위왕에 즉위하였다.

독발리록고는 후량과 대립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401년에는 황제를 자칭하려다 그만두고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같은 해 후진이 후량을 공격하였는데, 후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독발리록고는 영토인 광무(廣武)를 포기하고 철수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하였다. 후량이 후진에 복속하자 독발리록고도 후진의 작위를 받아 광무공(廣武公)에 책봉되었다. 후진군이 물러가자 독발리록고는 북량, 후량 등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402년에 독발리록고가 죽자 동생 독발녹단이 뒤를 이었다.

독발녹단은 양왕(凉王)에 즉위하고 후량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후량이 후진에 나라를 넘기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복속하였다. 이후 독발녹단은 북량과 대립하였는데, 406년에 북량을 공격하여 노략질한 공물을 후진에 바치고 그 대가로 고장의 영유권을 얻었다. 독발녹단은 고장을 강제로 점령하고 양주의 중심지를 장악하였으며 수도를 고장으로 옮기고 408년에는 다시 양왕을 자칭하였다. 독발녹단의 양주 경영은 북량, 하(夏), 후진 등의 침입 및 내부 반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결국 410년에 본거지인 영남(嶺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고장을 포기하고 다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낙도 천도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북량과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매번 북량에게 패배하여 아들을 인질로 바쳐야만 했다. 또한 서진의 침략도 받았다. 414년에 서쪽의 속령 을불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출정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독발녹단이 수도를 비운 사이 서진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량은 멸망하였다.

402년 3월, 독발녹단(禿髪傉檀)은 량왕(涼王)을 칭하고 즉위했다. '''남량'''의 국명은 이 량왕 즉위에서 유래한다. 녹단은 서평에서 낙도(樂都)로 도읍을 옮겨 이곳을 크게 증축하여 왕도로서 위용을 갖추었다. 같은 해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구 서진의 태자 걸복치반이 도망가자, 녹단은 그의 처자식도 풀어주고 은혜를 베풀었다. 403년 8월, 후량은 여러 해 동안 도읍인 고장(姑臧)을 남량과 북량에게 공격받아 더 이상 정권으로서 존속이 불가능하게 되자, 결국 고장성을 후진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하서(河西)의 세력권은 크게 변동되었고, 이듬해 404년에 녹단은 자신의 연호를 버리고 후진의 연호를 받들며 후진에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녹단은 맹렬하게 북량을 공격하여 하서 중서부로도 세력을 뻗쳐 후진의 고장에도 강한 압박을 가했다. 후진은 고장을 유지할 수 없어 406년 6월, 녹단은 마침내 사지절(使持節)·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차기대장군(車騎大將軍)·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將)·량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되어 고장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11월, 녹단은 낙도에서 고장으로 천도하여 일병도 손실 없이 하서 동부를 세력 아래 두었다. 또한 녹단은 북량에 대항하기 위해 서량과 동맹을 맺어, 이에 남량은 극성기를 맞이했다.[1]

407년, 남량은 이미 쇠퇴의 조짐이 나타났다. 8월, 독발여단은 황수 지역, 하서 지역 등 전 영역에서 병사를 총동원하여 5만 명을 모아, 스스로 전군을 이끌고 북량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여단은 수적으로 열세인 북량의 저거몽손에게 대패하여(균석 전투), 오히려 일륵군, 서군을 잃었다. 같은 해 11월, 이번에는 올도스를 휩쓴 혁련발발이 장거하여 2만 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광무군으로 쳐들어가, 크게 약탈하고 철수했다. 여단은 하군을 추격하여 양무에서 싸웠지만(양무하협 전투), 혁련발발의 반격에 전군이 궤멸되었고, 여단은 가까스로 고장으로 패주했다. 이때, 고장성 안에서는 북성에서 흉노계의 도각이 반란을 일으켰고(성칠아의 난), 진압 직후에는 이번에는 남량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양포·변헌의 난), 내우외환이 잇따랐다. 408년 5월, 후진은 남량에게 고장을 준 것을 후회하며, 이곳을 되찾으려고 원정군을 보냈다. 여단은 고장에 웅거하며 두 차례에 걸쳐 후진군을 물리쳤지만, 이때 성내에서 후진에 호응하는 자들이 잇따르는 등, 현저하게 구심력 저하와 국력의 피폐를 초래했다.[1]

409년, 독발여단은 국내의 동요를 아랑곳하지 않고 북량 원정을 감행하여, 북량 저거씨의 출신지인 임송군까지 쳐들어가 이곳을 약탈했지만, 귀로에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이듬해 410년 정월, 여단은 다시 북량을 공격했으나 패했고, 같은 해 3월에는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북량군과 싸웠지만(궁천 전투) 또 대패하여, 오히려 북량군에게 쳐들어가 도읍인 고장이 포위되었다. 고장성 안은 크게 혼란에 빠졌고, 첩굴부, 맥전부, 차개부 등의 하서 선비의 원종이 잇따라 북량군에 항복했다. 여단은 항전을 포기하고, 일족인 독발경귀와 아들 독발타를 인질로 내어 북량군과 강화했다. 같은 해, 남량의 황수 지역에서 절굴기진이 반란을 일으켰고, 남량의 토벌군은 이에 대패했다. 여단은 북량의 압박과, 황하 유역의 실점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고장에서 낙도로 도읍을 옮겼다. 여단이 고장을 떠난 직후, 초랑이 고장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를 자칭했다. 이렇게 남량의 하서 지역의 거점이었던 고장은 판도에서 떨어져 나가, 남량의 하서 진출도 좌절되었다.[1]

2. 4. 남량의 멸망

397년 독발오고가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점령하면서 남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399년에는 수도를 낙도(樂都 :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옮겼다. 401년 독발리록고는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1] 402년 독발리록고가 죽자 동생 독발녹단이 뒤를 이었다.

독발녹단은 양왕(凉王)에 즉위하고 후량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후량이 후진에 나라를 넘기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복속하였다. 408년에는 다시 양왕을 자칭하였다. 독발녹단의 양주 경영은 북량, 하(夏), 후진 등의 침입 및 내부 반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410년에 본거지인 영남(嶺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고장을 포기하고 다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낙도 천도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북량과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매번 북량에게 패배하여 아들을 인질로 바쳐야만 했다. 414년에 서쪽의 속령 을불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출정하여 이를 진압하였으나, 독발녹단이 수도를 비운 사이 서진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량은 멸망하였다.

407년, 남량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갈발여단은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량으로 쳐들어갔으나 저거몽손에게 대패하였다. 같은 해, 혁련발발이 이끄는 하(夏)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408년 후진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국가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409년410년, 북량 원정을 감행했지만, 계속 패배하였다. 결국 410년,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수도를 고장에서 낙도로 옮겼다. 411년 북량, 토욕혼, 서진의 공격을 받아 영토가 축소되었다. 413년에도 북량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414년, 율발유단이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서진의 공격으로 수도 낙도가 함락되면서 남량은 멸망하였다.

3. 역대 군주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시조무(武)저거오고397년–399년태초(太初) 397년–399년
강(康)저거이록고399년–402년건화(建和) 399년–402년
경(景)저거노단402년–414년홍창(弘昌) 402년–404년
가평(嘉平) 409년–414년


4. 국가 체제

남량은 지배층인 선비족이 농업 생산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자주 대립 세력의 영내로 쳐들어가 포로로 잡은 농민을 강제로 영내로 끌고 와 농업 생산의 증가를 꾀했다. 관제는 한나라와 위 이래의 형태를 답습했으며 대선우의 칭호는 톱발리록고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정권의 중추는 톱발씨 일족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한족이나 흉노 등 다른 민족으로부터의 임용은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농노적인 지위에 놓여 있었다. 특히 톱발욕단은 한족을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족의 지지를 잃었고, 그것이 남량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

5. 문화

현존하는 남량의 문물로는 낙도 고성, 호대(독발호대의 점장대), 전 독발리록고 묘가 있다. 또한 현존하지는 않지만, 남량 태초도(399년, 후에 돌궐이 소유했다는)가 알려져 있다.

6. 남량 이후

남량은 3대 18년 만에 멸망한 단명한 지방 정권이었지만,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근거지를 청해성 지역에 두어 이 지역의 개발을 진척시키고, 이후 칭하이 실크로드 개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량 정권 하에서 법현이 이 길을 중간까지 이용했다.

선비족 독발씨(禿髮氏)는 독발녹단의 아들 독발파강(禿髮破羌, 훗날의 원가)이 북위에 항복했을 때, 원래 독발씨와 같은 씨족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원(源)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일족은 매우 중용되었다.[1] 이 이야기는 후에 일본에도 전해져 황별인 원씨의 씨족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1] 한편, 독발오고의 아들 탁발번니는 남량 멸망 후 남쪽으로 내려가 티베트로 도망쳐 토번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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