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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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백종은 남북조 시대 진나라의 황족으로, 진 문제 진천과 문황후 심묘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558년 임천왕 세자로 책봉되었고, 559년 황태자가 되었으나, 아버지 진 문제가 사망한 후 13세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진백종은 나약한 성격으로 인해 숙부인 안성왕 진욱에게 섭정을 받았으며, 조정 내 권력 다툼 속에서 실권을 잃었다. 결국 진욱에 의해 폐위되어 임해왕으로 강등되었으며, 570년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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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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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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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진 요왕 (陳藥王) |
휘 | 진백종 (陳伯宗) |
자 | 봉업 (奉業) |
소자 | 약왕 (藥王) |
출생 | 554년? |
사망 | 570년 (향년 15-16세?) |
아버지 | 문제 |
어머니 | 안덕황후 심씨 |
배우자 | 낭야 왕소희 |
자녀 | 진지택 |
통치 | |
왕조 | 진나라 |
즉위 | 566년 5월 31일 |
퇴위 | 568년 12월 27일 |
연호 | 천강 (天康): 566년 광대 (光大): 567년 - 568년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능묘 | 없음 |
재위 기간 | 566년 5월 31일 ~ 568년 12월 27일 |
전임 | 문제 |
후임 | 선제 |
기타 정보 | |
임해군왕 | 568년 12월 27일 ~ 570년 4월 22일 |
황태자 책봉 | 영정 3년 9월 7일 (559년 10월 23일) |
이전 황태자 | 효회태자 진극 |
다음 황태자 | 임해왕 진지택 |
2. 생애
wikitext
554년 5월에 문제 진천(文帝 陳蒨)과 문황후 심묘용(文皇后 沈妙容)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약왕(藥王)이다. 영정 2년(558년) 2월에 임천왕 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정 3년(559년) 6월에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8월(일설에는 9월)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후경의 난 때 건강의 동궁이 불탔기 때문에 영복성에 거주했다.
하지만 진백종은 몸이 약하고 나약하며 기품이 없어서 아버지 진천도 걱정을 했다. 이에 진천이 병이 들었을 때 이를 걱정하고 동생 진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진욱과 신하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고 진천은 아우였던 안성왕, 양주자사 진욱을 필두로 중서사인 유사지(劉師知), 성서복야 도중거(到仲舉) 세 사람에게 보좌하라는 조서를 남겼다.
천강 원년(566년) 4월에 문제가 붕어하자, 태극전에서 황위에 올랐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문제의 유언에 따라 숙부인 안성왕 진욱(陳頊) (후의 선제)이 후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진백종 자신에게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진욱의 괴뢰나 다름없었다. 진백종이 황제가 되었을 때는 진천 시절 관료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조정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도중거와 유사지 파였고 다른 하나는 진욱의 파였다. 도중거와 유사지, 진욱은 궁 안에 머물면서, 여러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었다. 567년 유사지는 은부영(殷不佞) 등과 함께 진욱은 양주자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임지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진욱은 처음에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진욱의 부하들인 모희(毛喜)와 오명철(吳明徹) 등은 진욱을 설득해 궁에 남으라고 했다. 진욱은 유사지를 집으로 불러 체포하고 자살을 명했고 조정은 진욱의 손에 들어왔다. 도중거와 한자고(韓子高)는 다음이 자기들 차례일 것이라 생각하고 진욱을 제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탄로났고 진욱은 진백종의 명령을 받아 이 둘을 체포하고 자살을 명했다. 또 진백종의 친동생 시흥왕 진백무(始興王 陳伯茂)는 도중거와 한자고의 음모에 가담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진욱에 의해 지위를 빼앗겼다.
도중거와 한자고의 죽음은 진천 아래에 있던 신하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특히 상주(湘州)자사 화교(華皎)가 심했는데 567년 화교는 결국 북주에 투항했다. 진욱은 오명철과 순우량(淳于量)을 보내 북주, 화교, 후량의 연합군을 맞서게 했고 두 부대는 돈구(沌口)에서 마주쳤다. 오명철의 부대는 연합군의 함대를 격파했으며 교와 북주의 장군 우문직(宇文直)은 후량의 수도인 강릉(江陵)으로 도망갔다. 이 때 북주의 장군 원정은 사로잡혔고 568년, 오명철은 강릉을 포위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철수했다.
진욱의 지위는 계속해서 높아져만 갔고 시흥왕 진백무(始興王 陳伯茂)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광대 2년(568년) 11월, 진욱은 태황태후 장씨(章氏)의 명의로 칙령을 내려 진백종이 유사지나 화교의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했다. 이 칙령은 진천이 원래 진백종은 황제의 자리에 합당하지 않으니 진욱이 맡아야 한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진백종은 폐위되어 임해왕(臨海王)에 봉해졌고 진백무(陳伯茂)는 온마후로 강등됐다가 암살당했다.
태건 2년(570년) 진백종은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일단 사망이지만 워낙 이른 나이이고 거기에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진욱에 의해 제거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566년 태어난 진백종의 외동아들 진지택(陳至澤)은 황후 왕소희(王少姬) 소생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해왕(臨海王)을 세습했다. 그는 진나라 멸망 때까지 살아 있었는데 멸망 후 후주 진숙보와 함께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갔다.
2. 1. 초기 생애와 태자 책봉
554년 5월에 문제 진천(文帝 陳蒨)과 문황후 심묘용(文皇后 沈妙容)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약왕(藥王)이다. 전통적으로 사료는 진백종이 554년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552년이나 다른 해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진백종이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 진천은 그의 백부인 진패선 휘하의 장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진패선은 당시 양나라의 가장 저명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진천의 부인 심묘용 황후였다. 그는 그들의 첫 아들이었다. (심 부인은 그 후 아들인 진백모(陳伯茂)를 더 낳았다.)555년, 진패선은 그의 지휘관 왕승변을 몰아내고 황제 소원명을 경제로 교체한 후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몇 년 동안 진패선은 권력을 공고히 했고, 557년에는 경제가 그에게 양위하게 하여 진나라를 건국하고 무제가 되었다.
영정 2년(558년) 2월, 진천은 황제의 조카이자 진나라 영토 내의 유일한 가까운 남자 친척이었기에 임천왕에 봉해졌고, 진백종은 임천태자의 지위를 받았다.
영정 3년(559년) 6월, 무제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했다. 진천은 진나라 영토 내에서 그의 유일한 가까운 남자 친척이었기에, 조정 관리들은 그가 뒤를 잇도록 지지했고, 진천은 그렇게 했다 (진문제로서). 그는 8월(일설에는 9월)에 진백종을 황태자로, 진백종의 어머니 심비를 황후로 책봉했다. 후경의 난 때 건강의 동궁이 불탔기 때문에 영복성에 거주했다.
562년, 문제(진나라)는 관리 왕고(王固)의 딸을 진백종의 부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그녀는 태자비의 지위를 받았다. 그들은 566년에 아들 진지택(陳至澤)을 낳았다.
어린 시절, 태자 백종은 성격이 유약하다고 여겨졌다. 진백종은 몸이 약하고 나약하며 기품이 없어서 이버지 진천도 걱정을 했다. 천강 원년(566년) 4월, 문제(진나라)가 병이 들자 그는 태자 백종이 황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그의 동생이자 태자 백종의 숙부인 안성왕 진욱에게 양위를 제안했다. 진욱은 거절했고, 관리 공환(孔奐)도 반대했다. 따라서 문제는 진욱을 태자로 만들지 않고 중요한 업무를 진욱, 공환, 도중거(到仲舉), 원추(袁樞), 유사지(劉師知)에게 위탁했다. 그는 곧 사망했고, 태자 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태극전에서 황위에 올랐다 (폐제로서).
2. 2. 즉위와 권력 투쟁
554년 5월, 문제 진천과 문황후 심묘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진백종은 559년 9월, 태자로 책봉되었다. 후경의 난으로 건강의 동궁이 불타 영복성에 거주했다.진백종은 몸이 약하고 기품이 없어서 아버지 진천이 걱정했다. 진천은 병이 들자 동생 진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 했으나, 진욱과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진천은 안성왕 진욱, 중서사인 유사지, 성서복야 도중거에게 보좌를 명하는 조서를 남겼다.
천강 원년(566년) 4월, 진천의 사망으로 진백종은 태극전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문제의 유언에 따라 숙부인 안성왕 진욱(후의 선제)이 후견하게 되었고, 진백종 자신에게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진백종의 치세 초기에는 진천 시절의 관료들이 조정을 장악했는데, 조정은 도중거와 유사지 파, 그리고 진욱 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였다.
567년 봄, 유사지는 진욱을 배제하려다 실패하고 자살을 명받았다. 이 시점부터 행정은 진욱에 의해 통제되었다. 도중거와 한자고는 진욱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자살을 명받았다. 진백종의 친동생 시흥왕 진백무는 도중거와 한자고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진욱에게 지위를 빼앗겼다.
도중거와 한자고의 죽음은 진천 아래에 있던 신하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특히 상주자사 화교는 567년 북주에 투항했고, 진욱은 오명철과 순우량을 보내 북주, 화교, 후량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오명철은 강릉을 포위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진욱의 지위는 계속 높아졌고, 진백무는 이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 광대 2년(568년) 11월, 진욱은 태황태후 장씨의 명의로 칙령을 내려 진백종을 폐위하고 임해왕으로 봉했다. 진백무는 온마후로 강등됐다가 암살당했다.
2. 3. 폐위와 죽음
566년 문제 진천이 병이 들었을 때, 진백종은 몸이 약하고 나약하여 황제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동생 진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진욱과 신하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고, 진천은 안성왕 진욱, 중서사인 유사지(劉師知), 성서복야 도중거(到仲舉)에게 진백종을 보좌하라는 조서를 남겼다.진백종이 황제가 되었을 때 조정은 도중거와 유사지 파, 진욱 파로 나뉘었다. 567년 유사지는 진욱이 양주자사를 맡고 있으므로 임지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욱은 처음에 그렇게 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설득으로 궁에 남기로 했다. 진욱은 유사지를 체포하여 자살을 명했고, 조정은 진욱의 손에 들어왔다. 도중거와 한자고(韓子高)는 진욱을 제거하려 했으나, 계획이 탄로 나 진백종의 명령을 받은 진욱에 의해 체포되어 자살을 명받았다. 진백종의 친동생 시흥왕 진백무(始興王 陳伯茂)는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진욱에 의해 지위를 빼앗겼다.
567년 상주(湘州)자사 화교(華皎)가 북주에 투항했다. 진욱은 오명철과 순우량(淳于量)을 보내 북주, 화교, 후량의 연합군을 맞서게 했고, 오명철의 부대는 연합군의 함대를 격파했다. 화교와 북주의 장군 우문직(宇文直)은 강릉(江陵)으로 도망갔고, 북주의 장군 원정은 사로잡혔다. 568년 오명철은 강릉을 포위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철수했다.
진욱의 지위가 계속 높아지자, 진백무는 황제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태황태후 장씨(章氏)의 명의로 칙령을 내려 진백종이 유사지나 화교의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했다. 이 칙령은 진천이 원래 진백종은 황제의 자리에 합당하지 않으니 진욱이 맡아야 한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568년 진백종은 폐위되어 임해왕(臨海王)으로 강등되었고, 진백무는 온마후로 강등됐다가 암살당했다.
570년 진백종은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진욱에 의해 제거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백종의 작위는 아들 진지택(陳至澤)이 상속했다.
진백종의 조부는 시흥소열왕(始興昭烈王) 진도담이고, 조모는 효비이다. 부친은 세조(世祖) 문황제(文皇帝) 진천(陳蒨)이고, 모친은 황후(皇后) 심묘용(沈妙容)이다.
3. 가족 관계
폐황후 왕소희는 막구정후 왕고의 딸로, 566년 진백종과 혼인하였으나 568년 폐위되었다.[4] 왕소희는 낭야 왕씨이며, 이름은 소희이다. 진백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임해왕 진지택을 566년에 낳았다.
진백종에게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장남은 임해왕 진지택(陳至澤)(566년 ~ ?)으로, 왕황후 소생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해왕을 세습했다.[5][6]
3. 1. 부모
진백종의 조부는 시흥소열왕(始興昭烈王) 진도담(陳道譚)이고, 조모는 효비이다. 부친은 세조(世祖) 문황제(文皇帝) 진천(陳蒨)이고, 모친은 황후(皇后) 심묘용(沈妙容)이다.
3. 2. 황후
폐황후 왕소희는 막구정후 왕고의 딸로, 566년 진백종과 혼인하였으나 568년 폐위되었다.[4] 왕소희는 낭야 왕씨이며, 이름은 소희이다. 진백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임해왕 진지택을 566년에 낳았다.
3. 3. 자녀
진백종에게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장남은 임해왕 진지택(陳至澤, 566년 ~ ?)으로, 왕황후 소생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해왕을 세습했다.[5][6]
4. 평가
5. 기타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Book of Chen
[3]
서적
Book of Chen
[4]
문서
황태자비/임해왕비
[5]
문서
황태자/임해왕세자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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