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사와 히데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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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처음에 강한 슈코"라는 별명으로 불린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로, 1962년 명인전 우승을 시작으로 기성전 6연패를 달성하여 명예 기성 칭호를 얻었다. 그는 67세에 왕좌전을 획득하며 최고령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우는 등 총 23개의 타이틀을 획득하여 일본 기사 중 11위에 올랐다. 호방하고 쾌활한 기풍으로 '화려·수행'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알코올 의존증, 도박, 빚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후진 양성에 힘써 중국과 한국 기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998년 은퇴 후 2009년 흡인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2020년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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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바둑 기사 - 요다 노리모토
요다 노리모토는 1980년 프로 입단 후 1100승을 달성하고 명인전 4연패, 삼성화재배 우승 등 국내외에서 활약하며 일본 바둑계에 큰 족적을 남긴 최정상급 프로 바둑 기사이다. - 일본의 바둑 기사 - 오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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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와 히데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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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지사와 히데유키 |
한자 표기 | 藤沢秀行 |
출생일 | 1925년 6월 14일 |
사망일 | 2009년 5월 8일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사망지 | 도쿄도 |
별명 | 괴물 |
기사 정보 | |
단 | 9단 |
프로 입단 | 1940년 |
은퇴 | 1998년 |
소속 | 일본기원 도쿄 본원 |
스승 | 후쿠다 마사요시 |
제자 | 후지사와 가즈나리 다카오 신지 모리타 미치히로 미무라 도모야스 구라하시 마사유키 조훈현 |
타이틀 정보 | |
명예 칭호 | 명예 기성 |
타이틀 합계 | 23회 |
기성 | 6기 (1977-82) |
명인 | 2기 (1962, 70) |
왕좌 | 5기 (1967-69, 91-92) |
천원 | 1기 (1975) |
통산 성적 | |
통산 성적 | 852승 649패 8무승부 |
2. 경력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1940년 프로에 입단하여 1963년 9단에 올랐다. 1962년 제1기 명인전(요미우리 주최 구 명인전)에서 우승하며 처음으로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1] 이후 1965년과 1968년에 아사히 프로 최고 십걸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 연속 왕좌를 차지하며 두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0년에는 다시 명인 타이틀을 차지했다.[1]
1976년 천원전에서 우승한 후, 1977년부터 1982년까지 기성전에서 6연패를 달성하며 '명예 기성(名譽 棋聖)' 칭호를 획득했다.[1] 특히 이 기간 동안 후지사와는 9개월 동안 술을 마시다가 연말 타이틀 방어를 위해 금주를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알려져 있다.[1] 5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을 유지하여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2년에는 67세의 나이로 왕좌전을 획득하며 최고령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웠다.
1952년경부터 일본기원 이사를 역임하고, 1960년에는 대외 담당 이사가 되었다. 일본기원의 재정 기반 개선책으로 명인전 창설을 도모했다. 요미우리 신문과의 계약을 체결하고, 1961년부터 제1기 구 명인전이 시작되었으며, 최고위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후지사와 히데유키도 13명의 리그전에 참가했다. 이듬해 8월 최종국까지 9승 2패로 선두를 달렸지만, 최종국에서 하시모토 쇼지에게 패하여 9승 3패가 되었고, 우칭위안 - 사카타 에이오전의 승자와 플레이오프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우칭위안-사카타 에이오전은 우칭위안의 백번 지기 승리(덤 5목)가 되었고, 당시 규정에서 지기 승리는 정규 승리보다 하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후지사와 히데유키의 제1기 명인위가 결정되었다.
1998년 노령을 이유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99년에는 일본기원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단위 면장을 발행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으나, 2003년 일본기원에 복귀했다.
2. 1. 주요 타이틀 획득
- 1948년: 제1기 청년 선수권 우승. 야마베 토시로, 가지와라 타케오와 함께 "전후 삼우", "아프레게르 삼우"라고 불렸으며, "이상 감각"이라는 형용사도 붙었다.
- 1957년: 제1기 수상배 쟁탈전 우승.
- 1959년: 제1기 일본기원 1위 결정전 우승.
- 1962년: 제1기 구 명인전 우승.
- 1965년: 제2기 프로 십걸전 우승.
- 1966년: 제10기 바둑 선수권전 우승.
- 1967년: 제15기 왕좌위 획득.
- 1968년: 프로 십걸전 우승 및 왕좌 방어.
- 1969년: 제16기 NHK배 우승, 제1기 속기 선수권전 우승, 왕좌 방어.
- 1970년: 명인위 획득.
- 1976년: 제1기 천원위 획득.
- 1977년: 제1기 기성전 우승. 이후 6연패(~1982년)로 명예 기성 칭호 획득.
- 1981년: 제28기 NHK배 우승.
- 1991년: 왕좌 타이틀 탈환.
- 1992년: 왕좌 방어 (최고령 타이틀 획득 및 방어 기록).
국내 | ||
---|---|---|
타이틀 | 우승 | 준우승 |
기성 | 6 (1977–1982) | 1 (1983) |
명인 | 2 (1962, 1970) | 4 (1963, 1964, 1971, 1972) |
본인방 | 2 (1960, 1966) | |
천원 | 1 (1976) | 1 (1978) |
왕좌 | 5 (1967–1969, 1991, 1992) | 2 (1970, 1993) |
십단 | 1 (1968) | |
NHK배 | 2 (1969, 1981) | 3 (1963, 1964, 1966) |
일본 기원 선수권 | 1 (1961) | |
하야고 선수권 | 1 (1968) | 1 (1978) |
아사히 최고위 | 1 (1960) | 1 (1961) |
아사히 프로 최강전 | 2 (1965, 1968) | |
제1회 | 2 (1970, 1974) | |
아사히 8강 토너먼트 | 1 (1976) | |
합계 | 20 | 20 |
2. 2. 기타 경력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프로 십걸전, NHK배 등 다수의 기전에서 우승했다. 총 타이틀 획득 수는 23개로, 역대 일본 기사 중 11위에 해당한다. 198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을 받았고, 1997년에는 훈3등욱일중수장을 받았다. 요다 노리모토, 다카오 신지 9단 등 젊은 프로 기사들을 지도하고 육성하기 위해 '슈코 연구회'를 주도했다.연도 | 내용 |
---|---|
1965년 | 제2기 프로 십걸전 우승. |
1968년 | 프로 십걸전 우승. |
1969년 | 제16기 NHK배 우승. |
1969년 | 제1기 속기 선수권전 우승 |
1981년 | 제28기 NHK배 우승. |
1987년 | 자수포장 수훈 |
1997년 | 훈3등욱일중수장 수훈 |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초반 50수까지는 최강으로 평가받았으며, 독창적이고 화려한 기풍으로 '화려·수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두터움을 중시하는 호방하고 쾌활한 바둑을 두었으며, 날카로운 착상으로 '이상 감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반 50수라면 일본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초중반 검토에서 결론이 나지 않을 경우 "슈코(秀行) 선생님께 여쭤보자"라는 말이 일본기원에서 통용될 정도였다.[1]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바둑 실력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술, 도박, 빚, 여성 문제 등 다양한 일화들이 전해진다.
3. 기풍 및 평가
4. 일화
4. 1. 알코올 의존증과의 투쟁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지만, 일본 최대 기전인 기성전 도전기(결승)를 앞두고는 매번 술을 끊고 정신을 집중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1] 1970년대와 1980년대 기성전 연승 기간 동안, 후지사와는 9개월 동안 술을 마시고 연말에 타이틀 방어를 위해 술을 끊었다고 전해진다.[1]
1983년 기성전 도전기 후 위암이 발견되어 절제 수술을 받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성 림프종, 전립선암 등 3번의 암을 극복하였다.
4. 2. 조훈현과의 인연
조훈현 9단에게 '세 판만 배우겠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1] 1983년 기성전에서 조치훈이 도전권을 획득하고 대회 전야제에서 후지사와 히데유키가 '네 판만 가르치겠다'고 말하자, 조치훈은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치훈은 1~3국을 패배한 후 4~7국을 이겨 3연패 후 4연승으로 기성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후지사와는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조훈현을 만나러 무작정 한국으로 건너간 적이 있다. 이때 조훈현은 호텔방에서 열심히 안마를 하는 등 후지사와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4. 3. 도박과 빚
후지사와는 경륜에 빠져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성전 6연패를 통해 빚을 모두 갚았다. 제2회 기성전에서 가토 마사오에게 1승 3패로 몰리자, 제5국을 앞두고 졌을 때 목을 맬 나무를 찾은 후 대국에 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대국에서 후지사와는 2시간 57분의 장고 끝에 둔 수로 상대의 대마를 잡으며 이겨 역전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1]
5. 후진 양성
다카오 신지, 미무라 토모야스 등 일본의 주요 프로 기사들을 가르쳤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국 바둑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녜웨이핑, 천쭈더, 창하오, 마샤오춘 등 많은 중국 최고 기사들이 후지사와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얻은 기술을 왜 다른 나라에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중한 양국의 젊은 기사들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했다.[8]
쇼와 30년대에는 아사가야의 자택에서 아야노 나오히코, 하야시 히데키, 오타케 히데오, 쿠도 노리오, 타카기 쇼이치, 코지마 타카오 등 십여 명에 의한 월 2회의 연구회를 진행했다. 이후, 아베 요시키, 후쿠이 마사아키, 사카이 타케시, 이시다 아키라, 나카무라 히데토 등 젊은 세대들이 합류했다. 1969년에는 요요기에 사무소를 열었지만, 이곳에서도 젊은 기사들이 모여 연구회가 열렸고, 하야시 히데키, 조훈현, 요츠야에 있던 키타니 도장의 이시다 요시오, 가토 마사오,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코이치, 조치훈 등이 모여 1978년 사무소를 닫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0년부터는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요다 노리모토, 야스다 야스토시, 원생인 후지사와 가즈나리, 코마츠 히데키 등으로 제3차 연구회를 시작했고, 장소도 요미우리 랜드의 자택으로 옮겼다. 이 연구회는 그 후에도 제자인 모리타 미치히로, 미무라 토모야스, 다카오 신지 외에도 인원이 늘어, 1984년부터는 연 2회의 합숙을 했다. 이 멤버는 '''슈코 군단''' 등으로 불린다.
1981년부터는 연구회 멤버와 함께 방중하여 중국 기사들과 대국과 지도를 했다. 여기에는 녜웨이핑, 류샤오광, 장주주, 차오다위안, 마샤오춘, 장원둥 등이 참가했다. 1987년까지 매년, 그리고 그 이후 단속적인 방중은 중국의 실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연구회 '슈코 주쿠'는 유명하다. 문하에 아마노 마사후미, 다카오 신지, 모리타 미치히로, 미무라 토모야스, 쿠라하시 마사유키, 카나자와 마코토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합숙 등을 통해 요다 노리모토, 유키 사토시, 사카이 히데시 등 다수의 젊은 기사를 길렀으며, 중국, 한국 기사를 포함하여 후지사와를 스승으로 받드는 사람이 많다.
6. 은퇴와 죽음
1998년 10월 13일 은퇴했다. 은퇴 직전 창하오, 조훈현, 다카오 신지와 은퇴 3번기를 두었는데, 은퇴 대국은 1938년 혼인보 슈사이와 기타니 미노루의 대국 이후 처음이었다. 2009년 5월 8일 오전 7시 16분, 도쿄 세인트 루크 국제병원에서 흡인성 폐렴으로 사망했다.[2]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후지사와 주고로 | 시세 전문가, 바둑 삼단[12] |
아내 | 후지사와 모토 | 저서: 『도박사의 아내-바둑 기사 후지사와 히데유키와의 50년』, 『괜찮아, 죽을 때까지 산다 바둑 기사 후지사와 히데유키 - 무뢰한의 최후』 |
셋째 아들 | 후지사와 요시히로 | 아마추어 바둑 강호 |
넷째 아들 | 후지사와 히데토시 | 쇼기 장려회 입회, 나이 제한으로 퇴회[13] |
다섯째 아들 | 후지사와 카즈나리 | 바둑 8단, 15명의 프로 기사 배출[14] |
손녀 | 후지사와 리나 | 바둑 7단, 당시 최연소(11세 6개월) 프로 기사[15], 다수의 여류 타이틀 획득[3] |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서 총 19명의 아이를 낳았다.[12] |
8. 저서
- 藤沢秀行囲碁学校|후지사와 히데유키 바둑학교일본어 (전 6권) 헤이본샤, 1971년
- 秀行創作死活名作集|히데유키 창작 사활 명작집일본어 일본기원, 1980년
- '''藤沢秀行全集|후지사와 히데유키 전집일본어''' (전 12권) 일본기원, 1994년
- 碁打ち秀行 私の履歴書|바둑꾼 히데유키 ~ 나의 이력서일본어 일본경제신문사, 1993년 (이후 카도카와 문고, 1999년)
- 道に倒れて死す|길에 쓰러져 죽다일본어 신초 신서, 2005년
그 외 다수의 바둑 서적 및 에세이를 저술했다.
9. 평가 및 영향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단순한 바둑 기사를 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초반 50수까지라면 일본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독창적인 기풍을 가졌으며, "이상 감각"이라 불리는 날카로운 착상으로 "화려·수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그는 두터운 운용을 중시하는 바둑 스타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바둑 실력뿐만 아니라 파란만장한 삶으로도 유명했다. 술, 도박, 빚, 여성 관계 등 다양한 문제들을 겪었지만, "마지막 무뢰파"라고 불릴 만큼 그의 인품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알코올 의존증의 금단 증상과 싸우면서도 대국을 거듭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8]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바둑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녜웨이핑, 천쭈더, 창하오, 마샤오춘 등 많은 중국 최고 기사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도움은 중일 슈퍼매치에서 중국이 13번 중 9번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
그는 서예에도 능하여 여러 차례 작품 전시회를 열었고, 이쓰쿠시마 신사 창건 1400주년 기념 휘호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8]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바둑계에 기억될 것이다.
참조
[1]
웹사이트
Lee Hong Yeol article 1
http://gobase.org/st[...]
[2]
웹사이트
Go Features: Cameo 5
http://www.msoworld.[...]
2007-04-18
[3]
웹사이트
藤沢 秀行(フジサワ ヒデユキ / Fujisawa Hideyuki)
http://www.nihonkiin[...]
2017-05-19
[4]
웹사이트
Death of Fujisawa Shuko
https://www.nihonkii[...]
2017-05-19
[5]
문서
「秀行」という名前は、少年時代から心酔していた[[本因坊秀甫]]に由来するという。『野垂れ死に』 (新潮新書)より
[6]
서적
『棋聖秀行の碁(3)』
四星社
[7]
서적
『棋聖秀行の碁(3)』
四星社
[8]
뉴스
怪物伝説 藤沢秀行名誉棋聖
東京中日スポーツ
2015-08-18
[9]
서적
藤沢モト『勝負師の妻――囲碁棋士・藤沢秀行との五十年』
角川書店
2003
[10]
웹사이트
名誉棋聖 藤沢秀行さんご逝去‐ニコニコインフォ
https://blog.nicovid[...]
2019-01-11
[11]
간행물
『碁ワールド』
2010-07
[12]
서적
『本因坊自伝 Kindle版』
[13]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14]
웹사이트
新宿こども囲碁教室 教室案内
http://park22.wakwak[...]
2019-01-11
[15]
웹사이트
囲碁の日本棋院
https://www.nihonkii[...]
2019-01-11
[16]
서적
碁界うらおもて
ルック社
[17]
뉴스
97年秋の叙勲受章者勲三等以上の一覧
読売新聞
1997-11-03
[18]
웹사이트
藤沢秀行が囲碁殿堂入り(第17回囲碁殿堂表彰)
https://www.nihonkii[...]
日本棋院
2020-12-11
[19]
문서
『野垂れ死に』
[20]
간행물
『競馬最強の法則』
KKベストセラーズ
2010-06
[21]
뉴스
編集手帳
読売新聞
2009-05-09
[22]
문서
人生、くそ度胸
[23]
웹사이트
http://www.nihonki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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